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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아이들 05
w. 태봄
아이의 옆을 지키던 남자는 허둥지둥 석진에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에게 부딪히는 사람들도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7층에 서 있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어 그 옆의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에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한시라도 빨리 석진에게 소식을 전해야 했다.
헉헉거리는 숨을 내쉬며 방 앞에 도착하니 방문을 지키던 사내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어 사내를 밀치고 방으로 들어섰다. 컴퓨터를 두드리던 석진은 예상치 못한 방문객의 모습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남자는 석진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계속 서 있었지만 석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앉아. 커피라도 한잔할래?”
“아이가 깨어났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석진은 겉옷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아이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 다급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석진을 앞장서기 시작하며 신중하게 석진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던 아이는 이제 방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옆을 지키던 남준은 아장아장 걷는 그 걸음이 귀여워 너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이는 남준에게 다가와 남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났으나 남준은 어찌할지 몰라 아이에게 쩔쩔맸다.
“형아.”
“나 누나 만나고 싶어.”
언제 왔는지 모를 석진이 나지막이 입을 떼었다. 남준은 갑자기 등장한 그의 모습을 보고 해악했다. 깔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석진이 아이에게 선명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 모습이 왜인지 어둡게만 느껴졌다. 웃음 뒤에 가려진 의미를 어린아이가 헤아릴 수 있을까?
“누나 보고 싶어?”
“형이 만나게 해줄까?”
석진의 말에 정국은 온 세상을 가진듯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 새하얀 웃음에 담긴 반짝반짝하는 눈동자가 남준의 눈에는 한없이 슬프게 느껴졌다.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준은 석진이 뭐라 말을 하기 전 등을 돌려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상처받지 않길 희망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냈다.
한편, 남준이 떠나가도 방안의 대화는 끝날 줄 몰랐다. 아이는 석진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고 석진은 아이가 기특한지 새까만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담긴 암흑 같은 의미는 아마 아이의 시간이 10년쯤 흐른 뒤에 깨닫지 않을까?
석진은 재미있는 영화라도 상상한 듯 눈을 내리깔며 비소를 머금었다. 석진은 달콤한 꿀을 머금은 벌 같은 모습으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럼 형이랑 같이 살까?”
“정국이가 어른이 되면 형이 누나 만나게 해줄게.”
“형이 시키는 거만 하면 돼.’
사탕 발린 말로 아이를 유혹하는 석진은 아이의 눈엔 그저 천사같이 보였을 테다.
정국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석진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석진의 손을 잡은 정국의 표정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형아. 이건 뭐에요?”
아이는 석진의 방에 가는 도중 만난 모든 것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석진은 웃으며 아이에게 설명해주었고 아이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정국의 표정이 기대감에 가득 차 찬란하게 빛이 났다.
남준은 자신의 방에 도착해 밀린 서류들을 제쳐놓고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어둠이 밀려올 준비를 하는지 밝은 하늘에 붉은 석양이 떠올랐다. 해는 자신의 자리를 달에게 내어주기 전 가장 아름다운 색을 빛내고 물러난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빛을 보며 남준은 착잡한 마음을 추슬렀다. 마지막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에게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알까? 그가 어디로 향하든 그 발걸음의 끝엔 그녀가 있을 거란 사실을.
‘똑- 똑-.”
괜히 머리를 한번 매만졌다.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였고 죄 없는 신발 앞코를 땅바닥에 콩콩 찍었다.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헛기침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복도가 쌀쌀하게 느껴졌지만, 곧 문이 열릴 거라 생각하고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두려워할까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내 보았다.
“나 김남준이야.”
김남준? 저번에 나 데리고 온 사람인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던데 나가야 하나. 아니 저 사람이 나를 왜 찾아왔지? 나 내일 일하러 가는 거 때문인가? 이런 저런 생각들에 잠시 몸을 맡겼다. 결론을 낼 수 없는 그 생각들에 결국 문을 열어주러 몸을 움직였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에도 내가 하는 행동이 잘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열린 문에서 그녀는 동그란 정수리가 조심스럽게 튀어나왔다. 남준은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그녀의 모습에 집중했다.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망설이는 몸짓으로 그의 앞에 섰다.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은 세상의 모든 짐을 어깨에 올린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내일부터 일 나간다며.”
“아……그게…. 네. 맞아요.”
“어디로 가는지 아냐?”
어디로 가느냐는 남준의 말에 아는 것이 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도르르 굴리며 남준의 눈치를 살폈다.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거리며 그저 이 시간이 얼른 끝나길 기다렸다.
“야.”
“내가 네 편이란 사실 잊지 말고.”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남준은 그녀에게 간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비쳤다. 그녀의 목적지를 아는 남준은 그녀에게 들이닥친 이 상황을 잔잔하게 암시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겠다고 말했고 자신은 그 말을 지킬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 남준은 내일 떠날 그녀를 조용히 위로해주었다.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의 웃음이 영원히 지속하길 바란다면 나의 욕심이 너무 과한 것일까?
나 언제 너한테 이렇게 스며든 걸까, 어쩌면 조금 두렵지만 나는 너를 좋아한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를 본 순간 남준은 자신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답은 이미 그녀를 처음 보았던 날부터 정해져 있었다. 동정심이 아니라 사소한 관심이라는 사실을 남준은 이제야 깨달았다.
사랑이란 감정의 출발선은 조그만 관심이라는 걸 그 누가 모를까. 단지 조그만 관심을 인지하지 못해서 그 감정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남준은 그녀에게 꽤 많은 부분을 내어주고 있었다.
한가지 남준이 아직 깨닫지 못한 사실은 그녀를 만나러 오기 위해 매일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뿐이었다. 남준은 항상 무의식중으로 그녀를 만나기 위한 핑계를 만들어냈다. 어쩌면 남준은 이미 그녀라는 사람에게 생각보다 많이 스며들어 있었다.
남준은 영원히 찾지 못할 대답들을 품은 질문을 되뇌었다. 복도를 떠나는 남준의 등이 오늘따라 더 넓어 보였다.
내가 남준의 말의 뜻을 이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그 말을 잠시 숨겨두기로 했다. 남준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쩌면 나는 간접적으로 남준의 마음을 거절했다. 내 주위로 잔뜩 가시 돋은 경계심이 아직 다른 누군가에게 기댈 만큼 풀리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되어버렸나……
내 모습이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석진과 약속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 시간가량 남은 시간에 몸이 긴장해버린 나머지 식은땀이 이마를 조심스럽게 비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더 이상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흘러가 버렸으면 했다. 조심스럽게 눈을 감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약속한 시각, 6시 정각이 되자마자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떨리는 마음으로 작게 싸놓은 짐을 챙겨 들었지만 무겁지 않은 가방이 왜인지 씁쓸했다. 신발을 신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옅게 정든 이 방이 그리울 것 같았다. 다시 이 방에 오게 될 일이 있을까?
석진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디게 느껴졌다. 가기 싫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두려운 감정이 나를 휘감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던 사람은 다름 아닌 까만 비니를 쓰고 있던 남자였다. 차가운 표정이 그의 성격이 매우 까다로울 것이라고 짐작 가게 해주었다. 하지만 곧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그 남자의 성격은 그다지 쌀쌀해 보이지는 않았다. 두려웠던 감정이 조금 허물어졌다.
“너야?”
“얼굴은 괜찮은데…. 잘할 수 있지?”
“아니. 잘해야 해. 알았지?”
남자는 석진과 친구 관계인지 석진에게 잘 데려간다며 손을 흔들고 나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갔다. 파란색의 포르셰가 그 자태를 뽐내며 주차되어있었다. 감탄하는 것도 잠시 나에게 조수석 자리를 내어준 남자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걸까.
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운전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길을 따라 유연하게 지나가는 자동차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더도 덜도 아닌 정직한 파란색의 그 포르셰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밖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무릎에 올려놓은 애꿎은 가방만 꽉 쥐었다.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한 이 길거리는 마치 서울의 밤을 책임지겠다는 듯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저에게 다가오는 사내에게 차 키를 건네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남자는 나에게 잠시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나를 기다려주었다.
제 앞의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겠어. 건물을 둘러보았다. 검은색의 유리로 시작되는 이 건물은 꽤 고급스러운 출입문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인내심에 슬슬 한계가 온 것인지 내 어깨를 꽉 잡으며 나를 그 건물 안으로 집어넣더라.
“이제 들어가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리를 반기는 건 다름 아닌 또 다른 문이었다. 안쪽의 문을 지키고 있던 사내들은 내 옆의 남자를 보고 금방 문을 열어 주더라. 중앙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운터에서 양옆으로 나뉜 넓은 복도가 보였지만 그 복도는 카운터의 뒤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왼쪽은 직원들의 방 같았고 오른쪽은 일과 관련된 방 같았다. 조그만 표지판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카운터의 뒤로 이어진 공간은 매우 어두워 아직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남자의 존재를 깨닫고 웃으며 인사하고 지나갔고 남자는 그 인사에 보답하듯 함께 웃으며 손 흔들어 주었다.
지나가는 도중 건물 내부를 둘러보니 금세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화류계 여성들의 직장이었다.
미래가 훤히 보이는 내 모습에 금방이라도 울고 싶었다.
남자는 나를 일단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사내들이 열어주는 문에 감사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도 방을 지키는 사내들이 있을 것 같았지만 뜻밖에 아무도 없었다. 책상에 올려진 명패가 그의 이름이 ‘민윤기’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겉옷을 벗으며 나를 보는 윤기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일단 이런 곳이라 미안해.”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보고 안될 것 같으면 얘기해.”
윤기는 내 눈치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이곳을 나가고 싶었지만, 윤기의 말에 애써 침착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 이런 일을 시킨 석진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윤기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곧 예쁘장한 여자가 살포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가 잘 좀 챙겨줘. 오늘 새로 왔어.”
윤기는 자신이 상사임에 불구하고 여자에게 부탁하듯 행동했다. 그 모습에 살짝 놀라 윤기를 쳐다보았지만 ‘이 사람은 천성이 착하구나.’ 생각하고 시선을 거두었다.
여자는 나를 보고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더니 따라오라며 문을 열고 나갔다. 어쩌면 나는 화류계 여성들에 대해 편견이란 틀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 옆의 이 여자는 처음 보는 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보통 사람들이라도 과연 나에게 그랬을까? 단정 지을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여자는 나에게 친근하게 붙어오며 자신의 정을 나누어주었다.
여자의 뒤를 따라간 곳은 옷과 화장품이 즐비한 곳이었다. 화장대 앞에 나를 앉힌 여자는 곧 흥미로운 얼굴을 내 옆으로 들이밀었다. 자신의 이름을 경리라고 소개한 그녀는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라며 나에게 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왔어?”
“대답 못 할 거 같으면 안 해도 돼.”
여자는 나에 대한 배려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이유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한 이유라서 나는 그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다면 얘기해도 괜찮을까? 내 행동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곧 여자는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힘들었지.”
“앞으로는 더 힘들 거야. 그래도 많이 도와줄게.”
따뜻한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속에 품었던 눈물을 흘려보냈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나를 더 꽉 안아주었다. 곧 우리의 주변으로 몇몇 여자들이 몰려와 상황을 살펴보더니 나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인가. 나는 잠시 나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이 따스함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나는 이때까지 나 자신이 편견에 갇힌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때까지의 내 모습이 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편견에 갇혀 지냈었다.
나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는 그녀들에게 보답하듯,
나를 지키기 위해 잔뜩 세웠던 이유 없는 경계심과 마음의 벽을 이 눈물 하나로 허물어버리기로 했다.
나의 행동이 성급한 것 같아도 어쩔 수 없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기에 후회는 없다.
나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그녀들은 내가 울음이 멈출 때까지 나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녀들은 나를 오랜만에 만난 먼 친척 같이 대해주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의 온기가 더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윤기는 시계를 보더니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석진아. 약은? 우리 조금 있다가 중요한 손님 온다 했어.”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지금 보낼게. 곧 도착할 거야.”
“그래. 늦지 않게 보내줘.”
윤기는 생김새와 달리 하는 일은 깨끗하지 않았다. 그가 주는 약에 취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적어도 수십, 많으면 수백 명일 테다. 이곳은 유흥에 대한 모든 것이 모여있는 하나의 건물이었다. 일반인들의 상상과는 조금 다른 뒷세계라면 뒷세계였다. 윤기는 석진이 뒤에 있어 주는 든든한 업소의 사장이었다.
나를 기다려준 언니들은 나의 얼굴을 보더니 오늘은 그냥 하루 쉬라고 하였다. 경리는 자신이 잘 얘기해줄 테니 같이 태형에게 가자고 하였다. 의문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니 이 건물의 돈을 맡는 사람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더 쉬운 말로는 카운터, 하지만 윤기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리.
카운터까지 가는 길은 가까운 것처럼 멀었다. 아니 어쩌면 가까운 거리지만 일부러 걸음을 늦게 걷는 경리가 이유라면 이유였다. 경리는 건물 이곳저곳을 설명해주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동생이 모르는 걸 가르쳐주는 언니같이.
또각또각 복도에 일정하게 울리는 구두 소리가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방에서 몇 걸음 나오지 않아 도착한 카운터는 아무 사람이 없어 조금 당황했지만, 경리는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옆 소파에 앉았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고 비어있는 소파를 통통 쳤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옆자리에 살짝 앉았다.
경리는 분명 태형이 농땡이를 피우러 갔다고 했다. 곧 돌아올 거니 신경 쓰지 말고 자신과 못다 한 얘기를 해보자 했다. 오랜만에 친구와 수다 떨 듯 꽤 오랜 대화를 했다.
이 행복함에 잠겨 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조금 지나, 무겁게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경리는 나의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코너를 돌아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모자를 고쳐 쓰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태형아! 얘 오늘 처음 왔는데 예쁘지 않아?
나를 훑어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경리는 내 손을 꽉 잡고 태형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괜찮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얘 하루만 쉬게 해줘.”
“그러던가. 내일부터는 안 된다?”
의외로 쉽게 허락해준 태형의 모습에 안심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대화에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떼었다. 태형과 경리가 웃음 넘치게 나누는 대화가 귓가에서 희미해졌다. 경리와 태형은 자신들의 대화에 빠져 나는 잠시 뒷전인 것 같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태형이 나왔고 우리가 지나온 코너와 가까워지던 순간이었다. 잠시 후, 코너를 돌며 마주친 또 다른 남자의 모습에 다리에 힘이 조금 풀리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 모습을 원망할 수 없어 속상했다.
홀로 남은 복도에 주저앉아 튀어나올 듯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등에 닿는 벽이 차갑게 느껴졌지만 나를 지나친 너의 모습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나와 눈이 마주친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가늠도 할 수 없는 너의 눈빛을 떠올리며 너를 곱씹었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너를 만나 기뻤는데 너는 어땠어?
호석은 상당히 질 낮은 소문들을 몰고 다녔지만, 그때 나는 근거 없는 그 소문들보다 호석을 믿기로 했다. 너에 대한 내 믿음이 깨졌다는 사실은 지금의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너의 소문 모두가 사실이라도 나는 상관없었다. 지금 너의 모습보다 어쩌면 나의 모습이 더 추악했기에.
“쟤 밤마다 일하러 다닌다잖아. 술집 같은데.”
“술 담배 다한다는데? 저번에 누가 지나가다 봤대.”
“싸가지가 그렇게 없다며.”
“학교 안 오는 이유는 뭐래? 미래가 뻔히 보인다.”
근거 없던 그 소문들이 사실이라는 걸 정확히 확인당한 기분은 묘했다. 별별 감정이 뒤섞였다. 오랜만에 보는 너의 모습이 왜 그리 반가웠는지 하마터면 너의 이름을 부르며 너에게로 달려갈 뻔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상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한 우리의 다음 만남은 이런 곳이 아니라 평범하게 학교에서 다시 만나는 거였지만 상관없었다.
악마가 나를 놀리기 위해 만들어낸 너의 형상이라 해도 괜찮았다. 나는 그저 다시 만난 너의 모습이 좋았다. 너의 모습을 본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기뻤다. 하늘이 내려준 이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라도 나는 그 줄을 잡고 올라갈 것이다. 너는 어찌 보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는 너를 다시 만나길 소망했다.
내가 들었던 그 소문들은 모두 사실인 거야?
뭐 하고 지냈어?
학교엔 왜 안 나온 거야?
너의 뒷모습에 대고 들리지 않을 말을 너에게 보내보았다.
나는 너를 향해 쓴 편지를 우표 없이 우체통에 넣어보기도 했다.
모래사장에 적어놓은 글을 파도가 휩쓸고 가고,
갈피를 못 잡은 민들레 꽃 씨앗이 손에 닿을 수 없이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간다.
멀어지는 너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 뻗었지만 잡히는 건 차가운 공기의 흐름이더라.
호석은 학교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어쩌면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짝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반응에 호기심이 갔을지도 모른다. 잊고 싶었어도 잊히지 않는 그 모습에 잠도 여러 번 뒤척였었다.
호석에게 새로운 감정이 막 시작하려 했다.
호석은 이런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학교도 안 나오고 하는 일이 고작 학생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니….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고 나오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드라마, 영화 속에서만 가능했다.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원망했다. 그 원망이 자신에 대한 원망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는 그녀의 생각대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렇지 않은척하며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빛을 잃었어도 자신의 눈에는 한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막상 보고 싶었던 그녀의 모습을 보니 좋은 마음보다는 놀랍고 꿈만 같았다. 자신의 주먹을 꽉 쥐어보니 손바닥에 닿는 손톱이 아프게 느껴져 이 일이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늦게 도착했다고 윤기의 꾸지람을 듣고 나오는 길이었지만 왜인지 마음속은 하늘을 날 것같이 붕붕 뛰어올랐다.
조금 더 근사하고 당당한 남자가 되면 너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하루하루 마음먹었다. 학생과 어울리지 않는 일만큼 돈의 수입도 학생 같지 않았다. 석진의 밑에서 일하며 숙식제공도 받고 월급도 받고 심지어 학생이라는 이유로 용돈까지 받았다. 호석은 월급과 용돈은 따로 통장을 만들어 차곡차곡 저축하기 시작했기에 큰돈이 모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며 호석은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호석은 그녀와 함께 웃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을 마주쳐도 휙 하고 지나쳤고 자신을 카운터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아도 그냥 지나갔다. 자꾸만 어린아이같이 엇나가버린 표현이 원망스러웠다.
태봄이에요:)
많이 기다리셨죠ㅠㅠㅠ 죄송합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글 읽으셨나요? 드디어 호석이랑 여주가 만났어요!ㅠㅠㅠㅠㅠ 남주는 호석인데....오랜만에 등장하는 거 같으면 기분탓이랍니다...^^
자꾸 여주 불쌍하다 하시는데 그러면 안 돼요... 아직 더 불쌍해질 예정인데ㅠㅠㅠㅠㅠㅠㅠ!
다들 설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저는 내일부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려 합니다... 일찍 자야하는데 아마 오늘도 밤을 샐 것 같아요. (우럭)
처음 써보는 글이라 많이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 부족함이 많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해요. 정말 '작가'라는 단어를 볼때마다 벅차네요ㅠㅠㅠㅠ 우리 오래오래 함께 해요!
독방에서 추천을 많이 받는다는 댓글이 많아요. 방탄소년단 팬들 익명방 맞죠? 독방 너무나도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신알신과 암호닉 너무 고마워요ㅠㅠ
암호닉이 빠졌다 싶으면 망설이지 말고 댓글 달아주세요!
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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