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검은 아이들 9
w. 태봄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오려 요동을 쳤다. 아침과 밤은 시리도록 추웠지만 낮은 너무나도 따사로운 그런 날씨가 찾아왔다. 한 달 전만 해도 하늘에선 눈이 쏟아졌으나 이제는 축축한 빗방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땅 위로, 우산 위로 작은 빗방울이 투박하게 떨어졌다.
윗부분은 날카롭게 뾰족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아랫부분은 동그스름한 그 모양의 빗방울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자신의 모양을 허물어뜨렸다. 그 표면의 위로 닿은 빗방울은 타원형의 모양으로 변하여 잠시 땅의 윤곽을 투명한 막처럼 감싸더니, 곧 그 속으로 조심히 스며들어 갔다.
혹시 빗방울의 본 모습은 아랫부분도 윗부분처럼 뾰족했지만,
자신이 떨어질 때 닿는 날카로운 부분이 땅을 찔러,
혹여나 그 땅이 고통스러워할까, 그 모양을 무디게 바꾼 건 아닐까?
물과 습기가 다 얼어붙었던 겨울의 땅은 지독히도 메말라 있었다. 메말라 버린 흙은 자신의 영역에 자리 잡은 모든 생명체의 수분을 빼앗고 그 생명을 바스러뜨렸다. 또한, 모든 사람은 황무지가 되어버린 그 땅에 손대기가 싫어 처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그 땅은 너무나도 외로워 항상 속으로 눈물짓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건조한 그 땅은 봄이 다가오며 얼었던 물과 습기들을 녹이자,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위로 떨어지는 모든 빗방울을 흡수했다. 물이 없는 건조한 흙은 척박한 땅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흡수해 자신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그 모습.
“호석아, 밖에 비와.”
나의 말에 호석은 창밖의 풍경을 보며 잠시 동안 생각에 빠지더니, 곧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짓는 표정과 비슷한 표정이 호석의 얼굴 위로 가득히 번졌다. 호석이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뭘 원하는지 가늠도 가지 않아 조금 불안했지만 조용히 호석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 말 없는 방안에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인 빗방울들이 창문틀에 끼워진 유리에 부딪혀 똑같은 모습으로 흘러내리는 꼴이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그것도 다 그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나갈래?”
“지금? 밖에 나가자고?”
호석은 나의 마지막 말에 담긴 놀란 목소리에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의 겉옷을 챙겨 들었다. 말려 들어간 후드티 모자를 밖으로 빼내며 옷매무새를 다듬던 호석은 나를 보고 환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빛은 우울할 정도로 어두웠지만 너의 웃음은 그와는 상반되게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새하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너의 그 웃음에 내가 어찌 너의 부탁을 거절할까?
호석이 나의 겉옷을 챙겨와 조심스럽게 입혀주었다. 그의 행동에 오른팔과 왼팔을 살짝 들어 올리니 그는 작게 생긴 그 공간으로 포근한 옷을 끼워 넣어 주었다. 옷의 지퍼를 맨 위까지 올려주며 나의 볼을 살짝 꼬집는 너의 행동에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숙여진 고개 위로 얹힌 너의 손에 의해 나는 더 부끄러워졌지만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의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온몸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퍼졌다.
설레는 감정을 가득 안고 너를 올려다보았다.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너는 그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아왔다. 너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네 손을 꽉 잡았다. 너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나의 손가락을 끼워 넣고 두 손을 옅게 흔들었다. 나의 행동에 너의 얼굴 위로 행복한 웃음이 한가득 퍼졌다.
“나가자.”
나의 손을 잡고 이끄는 너에게 그대로 끌려갔다. 복도를 지나가며 마주친 회사 식구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흐뭇한 얼굴을 지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괜찮아져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모두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혹여나 내가 그 일을 떠올리고 다시 상처받을까 봐, 나에 대한 조그만 배려를 해주는 식구들이 너무나도 좋았다.
상처받은 마음이 이제는 보기 싫은 흉터만 남아있었다. 그 상처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거란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흉터를 바탕으로 예쁜 그림을 그려 ‘흉터’라는 존재보다 더 아름다운 ‘추억과 그림’의 존재를 빛낼 것이다. 그 모양새가 흉터로 보이지 않게 그 위를 예쁜 존재로 덮을 것이다. 누가 봐도 찬란하게 빛나는 모양새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용기를 냈다. 지나가는 도중 만난 식구들에게 세상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짓고 바라보았다.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손잡아 줘서 고마워요,
내 곁에 남아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로비에 도착하자 태형오빠가 카운터에 앉아 우리를 반겼다. 무엇을 그리하는지 핸드폰에 열중해 우리가 온 사실도 모르고 열심히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살금살금 나가려 했지만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희 지나가는 거 모를 줄 알았지.”
“너희 어디 나가려고? 우산 줄까?”
태형오빠가 우산에 대해 물어왔지만 정호석은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카운터가 있는 로비의 문을 열고 두 번째 로비로 향했다. 아직 영업 전이라 어떤 사람도 없는 그 로비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형광등을 켜놓지 않아 조금 어두침침했다.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마지막 문을 열어놓고 조금 뒤떨어진 장소에 너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열린 문으로 은은하게 빛이 들어와 공간을 밝혔다.
문밖으로 보이는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곳은 밤의 거리라 아직 사람들이 없는 사실은 당연했지만 오늘은 비가 와서 그 수가 더 적은 듯했다. 조용히 앉아 비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빗방울이 안으로 튀어 들어왔지만 우리는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얼마 동안 그곳에 앉아있었는지 가늠도 가지 않았다. 목 언저리가 조금 뻐근해 너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대었다. 나의 행동을 묵묵히 받아내는 너는 내 행동에 대답하듯 나의 손을 잡아왔다. 내 손을 덮은 너의 따뜻한 손이 비 오는 날의 분위기를 더 고조시켰다. 너와 손을 맞잡고 한참을 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우리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어도 오가는 감정과 분위기는 확실히 존재했다.
어찌 보면 로맨틱하고, 어찌 보면 애절한 그 분위기.
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 어깨에 기대고 있었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너의 눈빛이 거둬지지 않고 조금 길어지자 나는 얼굴을 들고 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보이는 너의 얼굴. 허공에서 닿은 시선이 오묘했다.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네 눈빛과 전적으로 너를 믿고 있는 내 눈빛이 합쳐지자 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너는 나를 바라보다가 예쁜 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대충 털고 앞으로 나아가는 네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 앞에서 멈춰 설 줄 알았던 내 생각을 비웃듯 너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우산도 없이 용감하게 빗속으로 뛰어든 모습에 너무 놀라 나도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가?”
갑자기 네가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너의 행동을 잠시 주시했다. 그러나 그리 멀리 나가지 않고 너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시선은 나에게로 향하고 너의 두 팔을 나에게 벌렸다. 눈을 감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네 모습.
“나한테 와.”
“젖어도 괜찮으니까 빨리.”
나보다 훨씬 큰 키와, 넓은 어깨, 너와 주고받은 수많은 감정들, 결정적으로 네가 내게 준 믿음.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너에게 다가갔다. 질척질척한 바닥에 나의 신발이 조금씩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나를 덮쳤다. 머리끝에 부딪힌 빗방울은 나의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내 얼굴에 잠시 머물렀고, 금세 내려와 나의 옷을 적셔왔다. 그 느낌에 걸음이 더뎌졌지만, 팔을 벌리고 있는 네 모습에 조금씩 속도를 올려 걷기 시작했다. 네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그대로 너의 품에 안겨들었다. 너는 나의 존재를 느끼고 나를 꽉 안아주었다. 빗방울이 우리를 적셨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이 공간은 너와 나만 존재한다는 듯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허리와 목 뒤를 끌어당기는 너의 손이 떨어지는 빗방울과는 다르게 따뜻했다. 너는 나와의 거리에 빈틈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듯 나를 더 꽉 안았다. 손을 뻗어 너의 등 뒤를 감쌌다. 완전히 끌어안기에는 그 크기가 모자랐지만 조금이라도 너를 감싸 안았다. 맞닿은 심장이 떨려와 그 느낌이 서로에게 다다랐다.
“호석아.”
“나는 너한테 무슨 존재야?”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도 너는 내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마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밤새워 고민한 사람처럼 너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많이 생각해봤는데.”
“나는 흙이고, 너는 물, 나한테 너는 없으면 안 되는 존재.”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네가 좋다.”
너는 두 손으로 나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네 손에 잡힌 얼굴은 곧장 너와 마주쳤고 나는 피할 수 없었다. 너는 나를 향해 얼굴을 숙였고 나는 너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나의 눈을 덮는 너의 행동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 닿을 듯 말 듯한 서로의 입술.
“네가 기억할 너의 첫 키스.”
빗방울로 축축히 젖은 입술이 맞붙었다. 입술 사이로 달큰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굳게 닫힌 앞니를 부드럽게 건드리며 나의 턱을 살짝 잡아 내렸다. 열린 입 사이를 뜨겁고 뭉툭한 혀로 가득 채워졌다. 안쪽 여린 살을 톡톡 건드리자 간지러운 느낌에 고개를 살짝 뒤로 빼려 하였으나, 뒷목을 잡는 너의 행동에 그러지 못했다. 입천장을 혀끝으로 쓸어 올리며 좁은 입안을 헤집고 다녔다. 그 행동으로 부족한지, 너는 고개를 살짝 비틀며 다가왔다. 서로의 코가 장난스럽게 부딪혔고 입술이 떼어진 틈새로 서로의 침이 늘어났지만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것마저 쓸고 내려갔다. 서로의 얼굴이 빗방울에 젖어 들어갔다.
“남준아, 막내 요즘 뭐 하고 지내?”
“윤기형 가게에서 일하잖아.”
“그래? 나는 아닌 거 같은데. 뭐하나 보고 와.”
남준은 석진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보았다. 호석이 요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괜히 남준에게 저런 쓸데없는 일을 시켰다. 제 앞에 앉아있는 저 인간은 도대체 무슨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저런 행동을 할지 참으로 궁금했다. 내가 쉬는 모습이 보기 싫나? 남준은 오늘도 욕을 집어삼키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씨발 진짜. 비가 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남준은 옅게 욕을 흩뿌렸다. 차 안 가득한 눅눅한 공기에 인상을 쓰며 시동을 걸었다. 차 안에 놔두었던 담뱃갑의 담배는 이미 눅눅해진 상태로 남준과 마주했다. 남준은 인상을 쓰며 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꺼내어 뜯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시트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 목 안으로 싸하게 들어오는 담배 연기가 탁했다.
「호석아. 나 지금 너네 가게로 간다.」
호석에게 문자를 하나 남겨놓고 액셀을 밟았다. 매끈하게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빗방울이 차창에 달라붙었다. 라디오 소리와 빗소리가 합쳐지자 듣기 싫은 소리를 내었다. 비 오는 날과 안 어울리는 시끄러운 외국 노래가 들려오는 라디오를 신경질적으로 껐다. 라디오를 끄자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불규칙적인 빗소리에 남준은 한숨을 쉬며 속도를 올렸다.
잠시만, 호석이가 일하는 곳은 윤기형 가게잖아. 그녀가 일하는 가게도 윤기형 가게.
운이 좋다면 그녀를 만날 수도 있겠구나.
마음속 가득했던 역정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오랜만에 볼 그녀의 모습에 어쩌면 설레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그녀의 생각만으로 자신이 이렇게 바뀐다는 사실이 남준에게는 낯설게 다가왔다. 언제 이렇게 그녀의 존재가 커져 버렸나. 남준도 놀라웠다.
여자란 없던 삶에 어쩌면 그녀는 남준의 첫사랑 정도. 남자밖에 없던 삭막했던 삶에 한 송이 꽃 같은 그녀의 존재. 다음에 갈 때는 꽃을 사 가야겠다며 생각하고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남준의 소망은 이루어졌다.
애석하게도 석진의 심부름과 함께 이루어졌다.
남준은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있다. 그것도 서로를 껴안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빗속에 서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 바라본 그들의 모습은 자신이 보아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지금 저 둘의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아 다시 핸들을 돌렸다. 그들의 존재가 조금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남준은 애써 못 본척하고 길을 빠져나왔다. 갓길에 차를 세워 놓고 핸들에 잠시 머리를 기대었다. 그의 품에 안겨 편안한 표정을 짓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복잡한 마음과 머릿속은 도대체 누가 해결해주나.
공통되는 부분이 많은 저 아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자신이 못 해주는 걸 호석은 해줄 수 있었다.
자신은 그녀가 가진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없어 그녀를 잘 못 보듬어 줄 수도 있으니 어쩌면 호석이 그녀에게 더 잘 어울렸다. 같은 나이의 친구이니 호석이 그녀를 더 잘 이해해줄 수도 있었다.
같은 상처를 앓는 아이들이 서로를 보듬어 주는 꼴이 얼마나 눈물 나는지.
자신이 먼저 좋아했어도, 어쩔 수 없다.
싫다고 발버둥 쳐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남준은 자신을 탓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때,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표현했다면 지금 남준과 그녀의 사이는 어떨까? 이미 지나간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지만 바뀔 수 없는 결과에 상심했다.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 자신의 눈에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 눈에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왜 그녀가 항상 자신의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참으로 멍청했다. 그녀의 존재에 대해 너무 편안하게 생각했다.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길 거란 상상은 해보지도 않았으니까. 현실을 부정해보았지만 바뀔 수 없으니 그저 자신을 탓했다.
어리다고 생각했던 막내는 이제 자신의 생각만큼 어리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의 어린 호석이 아니었다. 그녀를 안고 서 있는 모습이 이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커 있었다. 그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호석은 컸다.
그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남준은 온갖 감정을 다 느꼈다. 크게 느낀 두 가지의 감정은, 상실감과 허무함.
그의 손 아래에 항상 있을 것 같던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없다. 어쩌면 이제는 그녀를 생각해서도 안 된다. 남준은 호석과 그녀와 아침드라마를 찍기는 싫었으니. 자신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 줄 거라 했지만 이제는 호석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있다.
더는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 그가 해줄 거라 다짐했던 모든 일들을 호석이 대신해주고 있으니. 영원히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갔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상상 속에서라도 나의 것이었던 그녀를 영원히 잃었다는 상실감.
그가 그녀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녀는 모를 수도 있었다. 혼자만의 감정 놀이로 남게 될 자신의 사랑이 안타까웠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시작하고 혼자 끝나는 사랑. 그녀가 모르게 뒤에서 열심히 표현했던 자신의 마음과 사랑. 그 행동의 결실은 자신이 쏟아부었던 감정과 시간에 대한 허무함.
그럼에도 그는 그녀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짓밟힐 것이다.
비참해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짝사랑의 미학인 것을.
짝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사람이 몰라줘도 나는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에게 최대한의 이익이 가도록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며 노력하며 혼자 뿌듯해하니까. 그 사람이 몰라줘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내 마음을 몰라주어도 행복해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면 비통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니까. 그 사람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남준은 다음에 올 때는 빨간 장미꽃 대신, 구슬픈 아네모네를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네모네
기대, 기다림, 사랑의 괴로움, 허무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사랑의 쓴맛.
제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저의 모든 것을 드릴게요.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비록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가장 많은 꽃말을 가진 꽃인 만큼 전해오는 이야기도, 애달픈 사연도 많은 꽃.
어쩌면 남준의 이야기도 포함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이별을 표현해보아라.
그 어떤 말로 표현해도 이별은 슬프고 애처로울 것이다.
나만 알고 나 혼자 하는 사랑, 이름조차 처량하다.
“정호석 잘 지내. 일 열심히 하고 있던데?”
“그래? 근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다른 얘기는 안 했나 봐?”
“어. 호석이 바빠 보이길래 얼굴만 보고 왔어.”
남준은 석진의 예리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물을 한잔 마시던 남준은 석진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바로 등을 돌렸다. 자신을 집요하게 훑는 눈빛에 컵에 담긴 물이 잔잔하게 떨렸다. 그와 마주치면 모든 것을 들켜버릴 것 같았다. 그가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면 비참함의 마지막 밑바닥을 기어 다닐 것 같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방 안의 거북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나 정국이 좀 보고 올게. 걔도 하루 종일 심심하겠다.”
“그러던지.”
남준은 복도로 나오자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딱히 상쾌한 공기는 아니었으나 크게 숨을 내쉬었다. 석진과 남준은 함께한 시간이 시간인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때로는 독이 되어 돌아왔고, 때로는 약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자신과 그녀가 나눈 시간은 독이 되지 않게 잘 다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이 되지 않고 예쁜 추억으로, 약으로 남게 잘 다룰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남준은 정국의 방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녀의 동생을 보고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감정으로 정국에게 나쁘게 대할까 봐, 정국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자신의 감정에 의해 상처를 받을까 봐 한참을 망설였다. 혹시라도 정국을 감정적으로 대할까 봐……
“형아!”
“나 너무 심심했는데 어디 갔었어!”
문을 열자 쪼르르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국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정국은 남준의 두 다리를 껴안고 자신의 머리통을 비벼왔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 반응 없는 남준에게 정국은 고개를 올려 남준의 표정을 살폈다. 남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것 같아 얼른 남준에게서 떨어졌다.
“아……그러니까. 형아!"
“정국이가 그렇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나는 형이 와서 너무 좋아서 그랬는데……”
언젠가 누나는 자신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네 행동으로 다른 누군가 기분 나빠하면 ‘미안하다.’ ‘죄송하다’라는 말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그럼 그 사람은 너의 말로 인해 다시 행복해질 것이라고 가르쳐준 누나가 지금 이 순간 제일 고마웠다.
남준은 정국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 어린아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미안하다 하는가.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를 두고 해석하는 아이, 자신의 행동에 힘없이 휘둘리는 아이의 감정, 자신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눈치를 보며 상황을 살피며, 자신의 모습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순진무구한 정국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남준은 무릎을 꿇어 정국을 끌어안았다. 자신의 품에 안긴 정국은 한없이 작고 여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르- 웃으며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대할 생각을 하다니,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악함의 감정 없이 선함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한없이 못난 자신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너의 누나에게 나의 마음을 내어주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정국아, 너는 어쩌자고 그녀의 동생인 거야. 나와 평생 마주 보고 살 너는, 어쩌자고 그녀의 동생인 거야. 잊으려고 발버둥 쳐봐야 다 헛수고로 돌아올 게 뻔하잖아. 너를 보면 선명하게 떠오를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여. 그녀의 모습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을 더 꼭꼭 숨겨야 할 이유가 된 장면도 눈에 선히 보여.
남준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지독하게 자신을 따라다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상처받고 끙끙 앓아도 그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 아니, 할 수 없다.
단지 그의 감정을 숨기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의 연속.
가슴속에 묻어둘, 첫사랑이자 짝사랑.
계속 지속될 그 사랑.
태봄이에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저 정지 먹었었어요.....하....... 진짜 할말없습니다ㅠㅠㅠㅠㅠ
너무 늦었다고 타박하지 말아주세요... 저 진짜 울고 싶습니다ㅠㅠㅠ으앙
게다가 오늘꺼 너무 재미없어...8ㅅ8 진짜 저 때리세요....때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이번화는 정말 죄송하다는 말 밖에 못드려요...기다려주신 모든 분들 진짜 사랑하고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
저도 매우 올리고 싶었지만...올리고 싶었는데....(울먹) 다들 저 까먹은거 아니죠ㅠㅠㅠㅠㅠㅠ....울고 싶어요....
남준이의 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났습니다!
그 반면에 여주와 호석이는 한단계 더 가까워졌죠...? 가까워진거 맞죠?
(약간의 스포, 다음화에 타음워프 있습니다;ㅅ;)
저는 저의 욕심으로 처음 써본 글이 이렇게나 많은 사랑을 받을지 몰랐기에 요즘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하늘 위를 걷는 기분 :)
그리고 필력 좋다고 칭찬해주시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정말.... 너무 좋아서 어떤 반응을 보여드려야 할지...ㅎㅎ 사랑합니다
사실 검은 아이들 쓴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호석이 빙의글을 읽고 싶어서.... 잘 보이지 않는 호석이 빙의글을 너무나도 보고 싶어 그냥 질렀답니다....ㅎ...
그냥 독자님덜 사랑한다구요....그냥 제가 사랑해요!!!!!!!!!!!!!!!!!!!!!!!!!!!
잠시 암호닉을 받지 않습니다. 신청 못하신 독자님들..ㅠㅠ 다음에 신청해주세요..!
147명의 봄들:)
지우개/꽃님/두부/으아이/봄봄/윤기부인/메로르/걱정은 노노해/우파루파/새벽/낭낭/민군주/김데일리/민윤기 코딱지/꾸기/골드빈/석진달래/씽씽/코코팜/슈가맨/크레파스/정전국/꿀떡맛탕/방탄스타/travi/룰루랄라/리블리/애플릭/윤기나서민윤기/0613/헤온/달짜/0103/유자스무디퐁/쭈꾸미/미키미키/구구콘/피자나라치킨공주는나/빨간모자/꾸까/눈침침이/살구누나/173/알바하는 망개/드라이기/하울/컨버스하이/슙슙이/태태침침/뫙뫙이/즌증국/레몬/예화/사랑해서남주나/굥기맑은날/1234/페브리즈/푸롱리/솔트말고슈가/메로나/두비두밥/주네러버/태형아/뚱이/난석진이꾸야/당근/파랑토끼/물망초/모히또/범블비/작가님워더♥/증원/꿀비/마카롱/쁄/숩숩이/호시기호식이해/0207/청보리청/태남매/국산비누/하늘연달/전.정국/퍼플/기단/초딩입맛/쀼뀨쀼뀨/혱짱/허니귤/ㅈㅈㄱ/찐빵/예꾹/석진빠/침침보고눈이침침/원늘보/좋아요/코코무아/꾸꾸기/햄스터/바른도로/에뤽/핑몬핑몬핑몬업/포로리/음오아예/다영/인디핑크/손가락/정국쓰스물인디/맞슈/방형네셋째아들정호석/마르살라/하늘/구리구리/안돼/첼리/해장라면/태태루/민빠답없/쿠야쿠야/태형됴♡ㅏ/밍/찌몬/스틴/보컬몬스터/꿈틀/호두마루/올때 메로나/환타/호식이이/정쿠키/뜌뜌야/다노/뿅뿅이/은노른자/쿠키마망/우왕/전정국오빠/순생이/♡율♡/윤기야밥먹자/융융/링링/침침이./아뱅정/다미/민슈가윤기형/동갑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