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오기 전. 마지막 찬 바람이 불었고, 민혁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반대편 앉아줘?”
“…됐어.”
시소에 앉아있는 민혁에 창균이 말을 건넸다. 힘없는 민혁의 말에 창균은 고개를 숙인 채 손장난이나 쳐대는 민혁의 앞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모래를 한움큼 쥐었다가 펴고, 탈탈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고딩 때 시소만 타면 어르신들이 애들 타라고 비켜주라고 그랬잖아. 기억 나?”
다 큰 사내놈들이 왜 거기 앉아있냐고.
“………….”
“………….”
“………….”
“…우리도 애였는데.”
“………….”
“다 커보여도,”
애는 애일 뿐인데.
창균의 씁쓸한 어투에 민혁은 곧 하나, 둘, 무거운 눈물을 떨어뜨렸다. 애는 애였다. 아무리 맑은 웃음을 달고 살고, 괜찮다는 말을 달고 살아도, 무거웠고, 힘들었고, 두려웠고, 아팠던, 민혁은 애였다.
소름 돋는게 뭔 줄 알아? 어머니가 지병에 앓아 누우셨을 때, 처음엔 진짜 세상 무너지는 것 같고 슬펐어.
근데, 더 소름돋았던 건, 갈수록 무뎌지는 나. 어머니가 심각해 질 수록, 누워계신 날들이 길어지고, 눈을 뜬 것 보다 감은 모습을 보는 날이 많아질 수록, 존나 소름돋았던 건 거기에 무뎌지는 나였어.
병원비는 병원비대로 들고, 어머니는 안일어나시고, 월급은 죄다 병원비로 빠져나가는데, 근데 안일어나시는거야. 병만 더 악화되고.
…돌아가시니까, 감정이 복잡하더라. 내 입으로 이 말하는 건 진짜 쓰레기 같아서 말 안하는데,
…가난. 가난이 죽도록 싫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민혁의 얼굴은 눈물로 뒤덮여있었고, 서러움와 후련함이 섞여있었다.
민혁은 돈에 쫓기던 텅 빈 지하 터널에서 제 전부를 내어주고나서야, 쓰러지듯 주저앉아 하염없이 가쁜 숨을 내쉬며 울 수 있었다. 세상이 그랬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다.
여주) …………..
민규) …잠 못잤어?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냐.
여주) 그래..? 잘 잔 것 같은데.
민규) 일찍 자. 딴짓하지말고.
여주) 뭐래. 선생님이세요?
민규) ㅋㅋㅋㅋㅋㅋ피곤해 보이니까 그렇지
여주)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았어
아침 식사 시간, 출근하는 아이들은 분주히 밥을 먹고 일어섰고, 집에 남는 아이들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고 있었다.
원우) 이따 이번에 닌텐도 게임 새로 나온거 구경하러 갈래?
창균) 그거 체험할 수 있대?
원우) 백화점에서 할 수 있대. 가서 해보고 재밌으면 사려고.
창균) 여주야 같이 갈래? 밖에 안나간지 꽤 됐잖아.
여주) …그럴까?
원우) 그럼 이따가 나가서 점심먹고-
민규) 에헤이. 먹고 나가 먹고.
지훈) 그래 점심은 같이 먹어.
원우) …그럼 먹고 나가자.
여주) ㅋㅋㅋㅋㅋ그래
게임팩을 사러간 아이들이 나가고, 1층 거실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던 민규가 인기척에 고개를 살짝 들어 계단 쪽을 바라보고 다시금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민규) 왜?
지훈) 콜라 마시려고.
짧은 대화 후 지훈은 금새 콜라를 손에 들고 부엌을 나왔고, 민규가 틀어놓은 티비를 잠시 바라보며 서서 콜라를 마신 지훈이 민규를 향해 물었다.
지훈) 근데, 넌 왜 자꾸 여주 간식을 뺏어먹어? 맨날 밥은 먹으라고 잔소리하는 애가
좀 모순적인거 아니냐 ㅋㅋㅋㅋㅋㅋㅋ
민규) ㅋㅋㅋㅋㅋㅋ그치 모순적이지. 근데 일부러 그러는거야.
지훈) 왜?
민규) 가끔 보면 애가 뭔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안좋더라고. 그러면 내가 간식을 뺏어먹는거지.
지훈) 그게 뭔 상관이야.
민규) 내가 뺏어먹으면 나랑 장난치니까 그 생각이 사라질 수 있잖아.
그걸 노리는거야. 그래서 일부러 먹다가 들키는거지.
…오빠.
“며칠 못잤어.”
“………..”
“며칠 못 잤는데.”
남들이 잠든 새벽 두시. 여주가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고, 민현은 일 때문에 잠들지 못한 시각이었다. 잠시 부엌으로 나오던 민현이 여주를 보더니 여주의 옆에 앉아 물었다. 그러자 여주가 민현의 눈을 천천히 맞추며 울었다. …나 어떡해?
“………….”
“…오빠 나 어떡해,”
“………….”
“삼일 동안 한 숨도 못잤어.”
너무 피곤한데 너무 졸린데 잠이 안와. 낮엔 낮이라서 안오고, 밤엔 이 생각 저 생각 쓸데 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안오고..
평생 못자는 거 아니야? 잠이 안와… 못자겠어..
여주를 바라보던 민현이 정처없는 눈빛으로 여주를 안더니 조심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여주야.
“………….”
“그래도 침대 바꾸면 혹시 모르잖아.”
민현이 제안한건 자신의 침대에서 자보라는 것이었다. 침대 사이즈도 훨씬 크니 편하게 잘 수 있을거라는 말과 함께 여주를 향해 웃어보이자 여주가 말했다.
“..오빠는?”
“난 할 거 남아서 계속 해야돼. 오늘 어차피 못잘 거였어.”
“…………”
“나 여기 조용히 있을테니까,”
그냥, 아무 생각하지말고 편하게 자려고 해보자.
민현의 말을 끝으로 침대에 걸터 앉아있던 여주가 천천히 몸을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그러자 민현은 옅게 웃으며 제 책상에 앉아 눈을 깜박이는 여주를 향해 말했다.
“이제 나랑 눈 마주치면 안되는거야. 알았지?”
“…응.”
“잘자. 우리 이따 보자.”
“……...”
여주가 눈을 감는 것 까지 확인 한 민현은 그제서야 의자를 돌려 제 서류를 내려다봤다.
민규) 형 여주 어디 갔어? 게시판에 아무것도 없던데-
민현) 여주 집에 있어.
민규) 어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여주의 방을 열어재낀 민규는 여주가 보이지 않자 게시판을 훑었지만 별 다른 이야기가 없는 걸 확인하더니 민현의 방으로 바로 향했고, 동시에 방에서 나오던 민현을 마주친 민규가 속사포로 여주의 행적을 물었다. 그러자 민현은 부엌 쪽으로 민규를 이끌며 진정시켰다.
민현) 여주 내 방에서 잠들었어.
민규) …형 방에서? 왜?
민현) 며칠 동안 여주 피곤했던거 알지?
민규) ..응. 밤샌거 아니라고 우기던데, 잘 잔거 맞는지 모르겠어.
민현) 밤 샌거 맞아.
민규) …맞아?
민현) 삼일을.
민규) 뭐?
삼일이란 말에 민규가 인상을 확 찌푸리고, 민현이 검지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듯 표하자 민규는 민현의 방문을 슬쩍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민현) 잠이 안온대. 아무 생각 안하려 해도 자꾸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낮이면 낮이라서 잠을 못잤는데,
…그렇게 삼일을 못잤대. 자기도 자고싶었는데, 못자겠다고. 잠이 안온다고.
민규) …무슨 생각을 어떻게 또-,
민현) 걱정 마. 생각은 그렇게 나쁜 생각을 한 건 아니래. 그냥 정말 티비 본 거 떠올린다던가 정말 쓸 데 없는 생각. 그런거. 우리도 다 하는 거.
민규) 근데 왜 잠을 못자. 피곤했으면 하다가 지쳐서 자야지.
민현)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거지.
민규) 뭐?
민현) 여주 딴엔 아무생각 안한거고, 다른 생각을 한 거겠지만, 사실 상 들여다보면 아니었을거야. 한 편으론 무언가의 불안이 따랐을 거야.
민규) ….그래서.
민현) 내 침대는 넓으니까, 혹시 침대라도 바꾸면 잘 잘까봐 자라고 했어.
…그리고 새벽 다섯시 반이 돼서야 겨우 잠들었어. 한참 뒤척이다가.
그니까 깨우지말고, 오늘 하루는 그냥 냅둬. 나중에 얘기하자.
민현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아침을 먹고 해가 중천에 뜰 때 까지 여주는 잠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이에 민규는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다 민현의 방 문을 바라보다를 반복했다.
석민) 어련히 잘 일어날까. 피곤하겠지.
민규) 알아. 그래도..
석민) 새벽 다섯시 반에 잠들었으면 적어도 한시에
일어나야 푹 잔거야~ 너 많이 자잖아~ 알면서 그래-
민규) ..그치? 이상한거 아니지?
석민) 그래~ 겨우 잠들었다는데 더 자야지..
우린 게임이나 한 판?
원우와 창균, 그리고 민규와 석민은 2층 거실에 앉아 얼음 깨기를 하고 있었고, 민규가 툭 치자 와르르 얼음이 깨짐과 동시에 지수가 방문을 열고 나와 원우를 향해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때?
원우) ..뭐가?
지수) 예뻐?
원우) 꽃인데 예쁘지.
지수) 그럼 이건?
원우) …뭘 봐야 되는거야?
창균) 뭔데?
지수) 꽃. 꽃 사려는데 뭐가 예쁜지 좀 봐봐.
창균) …다발로 이렇게 파는구나. 신기하네.
지수) 몇번째 다발이 예뻐?
창균) 누구 주는데? 받는 사람이 좋아해야하는 거잖아.
지수) 아, 여주. 여주가 저번에 꽃 받고싶댔거든.
민규) 여주가? 갑자기?
지수) 갑자기는 아니고, 그냥 둘이 앉아서 얘기하다가. 내가 먼저 뭐 살까 말까 하는 거 있다고 하면서 얘기 꺼냈거든.
그래서 그냥, 난 여주한테 뭐 사준 적 별로 없어서 꽃 사주려고. 뭐가 예쁘냐?
민규) 봐봐.
지수의 말에 아이들은 일제히 지수의 휴대폰을 바라보고, 신중히 여주가 좋아 할 꽃다발을 고르기 시작했다.
석민) 여주가 보라색이나 흰색 꽃을 좋아하긴하는데..
민규) 아 근데 아쉽다. 여주는 프리지아 좋아하는데.
지수) 프리지아? 근데 왜 아쉬워?
민규) 프리지아 겨울 꽃이잖아. 졸업식에 보이는 꽃 앵간하면 다 프리지아라서 알아.
지수) 어쩔 수 없지. 다른 꽃 좋아하는 건 없어?
창균) 안개꽃.
지수) …안개꽃?
창균) 안개꽃 좋아해. 아니면 데이지?
석민) 근데 보통 안개꽃은 꽃 사면 주변에 막 뭐라그래야하지? 좀 받쳐주는 역할로 그냥 안사도 끼워넣어주는거 아냐?
창균) 그래서 좋대.
석민) …? 그냥 줘서?
창균) 아니.
자기가 단독으로 안개꽃만 사면, 안개꽃을 주인공 시켜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안개꽃이 좋대.
여주가 깨어난 건 민현이 퇴근하기 한시간 전이었다. 천천히 눈꺼풀이 올라가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
봄의 저녁은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몇시에 서있는지 좀 처럼 알 수 없던 여주는 눈을 깜박거리며 민현의 방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고, 유난히 조용한 집 안에, 이불 속으로 더 파고 들었다.
“…………”
오늘 밤은 또 어떻게 잠들지.
그냥 취한 것 처럼, 계속 잠들어있고싶다.
“………….”
여주가 다시 눈을 감고 민현의 채취가 가득한 이불을 안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한시간을 더, 가만히 누워있던 여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여주) ….어
민현) 잘잤어?
여주) …응. 이제 퇴근 하는거야?
민현) 응. 소란스러워서 깬 건 아니지?
여주) 아니야. 나 아까 한시간 전에 일어나서 그냥 누워있었어. 피곤해서.
민현) 그래?
지수) 여주야-
여주) 응?
지수) 이거.
여주) …뭐야? 꽃? 왜?
지수) 저번에 받고싶다그랬잖아. 그래서 그냥.
여주) 아 뭐야- 안줘도 되는데!
지수) 야 너 그렇게 좋아하면서- 언행불일치야
여주) ㅋㅋㅋㅋㅋ그래도 기분은 좋은데 어떡해.
완전 진짜 고마워. 책상에 올려놓을게.
여주는 지수에게 받은 꽃다발을 품에 안으며 해맑게 웃었고, 곧 퇴근을 하던 승관과 순영의 손에도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금새 두 꽃다발도 여주의 품으로 옮겨졌고, 여주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여주) 뭐야?! 이건 또 뭔데!
순영) 꽃 주고싶어서~ 그냥 사왔다!
승관) 어머어머! 누가 꽃이야~? 꽃이 꽃을 선물 받는거야~? 형형 나 꽃밭에서 사진 좀 찍어줘!
순영) 어머어머 그래그래! 서봐서봐! 어머어머 누가 꽃이야!
여주) 아 왜이래ㅋㅋㅋㅋㅋㅋ 내가 든게 꽃이지!
승관) 어머 꽃이 말을 해!
여주) 아 미쳤나 진짜 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여주는 퇴근하는 아이들에게 꽃을 선물 받았고, 여주의 책상엔 꽃밭이 되었다고…
Epilogue
최승철- 개지랄 떨 거 예측한게
최승철- 저게 존나 웃김 ㅋㅋㅋㅋㅋㅋ
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찬- 형
찬- 훈련 끝나고 같이 사러가자
찬- 꽃집 안가봤어…
최승철- 나도야…
최승철- 같이 가서 사자
권순영- 회사 앞에 꽃집있는데 바로 들린다~
윤정한- 나도 가다가 사가야겠다. 뭔 꽃 좋아한대?
윤정한- 존나 치사한 새끼
윤정한- 지도 어차피 민규나 창균이한테 들었을거면서.
민규- 프리지아 구해오는 사람은 인정해줌.
승관- 오 프리지아~ 오 프리지아아아아 오 프리지아~ 내게 줘요~
창균- 다 똑같은 거 사다주면 좀 그러니까 그냥 예쁜거 골라 담아
승관- 아 또 내가 꽃 겁나 잘고르지. 여주 취향은 내가 안다고~
석민- 근자감 무엇?
원우- ㅋㅋㅋㅋ
원우- 여주 꽃 부자 되겠네
지훈- 꽃이 꽃 부자가 되네
승관- 아 형! 닭살!
**
언행불일치 죽였다.
저 그만 오라고.. 오지말라고 해주세요… 오면 다시는 안본다고… 그래주세요..(라고 해놓고 해주면 상처받을거잖아… 나자신…
어느덧 20회네요. 시즌 원이 18회인가? 투가 이십회에 부록이 있었고, 이게 20회 째니까 정말 큐앤에이 프롤로그 따지면 60회네요. 우리 같이 많이 걸어왔어요.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 오늘 다뤄졌던 여주의 불면증과 민혁이의 스토리는 아직 끝난게 아니랍니다. 어영부영 끊긴 느낌이 들어 말씀드려요:)
아니 왜 글이 왜 잘써져..? 왜 술술 풀려..? 여유있을 땐 안풀리더니.. 메모장에 쌓이는 꼴 못봐서 두고가요.
그래도 자야돼서 암호닉은 다 기억하니까 적어주시면…(상습범.. 못됐다..
💝💛잘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