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 새로 고침 :)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지훈의 선언 이후 3인으로 좁혀진 후계 경쟁은 보이지 않는 피의 싸움이었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경제 뉴스에 나왔으며 찌라시로만 돌던 비리가 서로의 입에서 터질 때마다 그다음 날 검찰 소환 명령을 받기도 했다. 투명한 경영, 공정한 사회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K건설 이 회장은 오랜 고심 끝에 외부 전문 경영인을 선출하겠다는 대대적인 발표를 감행했다. 혈연으로만 자리를 물려주던 전통의 싹을 잘라버린 과감한 행동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대기업의 센세이션이었다.
지훈의 약혼 상대였던 T그룹의 P 씨 또한 필로폰 상습 투여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 4세의 혼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K건설로부터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떠안았다. 한동안 매체는 뉴스, 라디오, 신문을 가릴 것 없이 떠들썩했다. 그럴수록 자신만의 굳건한 행보를 걷고 있는 지훈에게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국내외 건축 기업으로부터의 스카웃 제의는 물론, 뉴욕 맨하튼 9번가 게이트를 지은 한인 건축가의 러브콜을 받은 사실은 건축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일주일 동안 뉴욕 출장을 떠난 그는 한인 건축가가 소속된 건축사와의 콜라보 사업을 따낸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직에 신중한 그는 당분간 K건설에 몸담을 예정이었다. K건설 사내 분위기는 조심스러웠지만 후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의 얼굴은 전보다 여유로웠다. 기업을 물려받으면 그만일 거라는 가짜 건축가의 오명에서도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K건설 외아들의 파격적인 선언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슈란 그런 것이었다.
―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네.”
― “사무실 들어가면 울고불고 난리 날 텐데 어떻게 달래지?”
― “네가 달래준다고?”
― “그럼?”
― “달램을 받는 게 아니라?”
― “지훈아,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나 되게 성숙해. 일 년에 두 번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거든.”
― “어제 갯마을 차차차 세 번 재방 보고 세 번 울었잖아.”
― “내가? 아닌데?”
― “그러니까 일 년이라는 단어 뜻을 정확히 알아?”
이른 아침 광화문 갓길에서 운전대를 잡고 공격을 피하는 벤츠 주인의 몸놀림이 빠르다. 출근 시간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데, 그가 옆에서 연락 달라는 귀여운 제스쳐를 취했다.
― “왜? 너 오늘 퇴근해?”
― “그렇게 말하면 꼭 외박만 하고 다니는 것 같잖아.”
― “지금 화내는 거지?”
― “전혀.”
― “여기 눈썹이 쪼끔 내려갔는데?”
― “알잖아. 아침이라 얘네들도 덜 깨서 그래.”
― “퇴근하면 같이 저녁 먹을까?”
― “응, 그래서 물어본 거야.”
― “설마 우리 통했어?”
― “우린 아까부터 통하고 있었어.”
길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훈은 내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그 자리에 있었다. 운전대에 팔을 얹고서 작은 손 인사를 건네는 얼굴. 구름 발로 두 손 높이 뛰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예전과 변함이 없다.
― ‘또 봐, 예쁜아.’
물론 사랑도 그랬다.
Oh My Rainbow
; The Finale
14. 동이 트면 그림자는 사라진다
우리 이제 미스 캐나다 못 보는 거야? 영원히? 포에버?
⭐경 헬조선 탈출 축⭐ 플랜카드를 들고서 아이러니하게 통곡하는 라이프지 김 팀장의 눈가가 빨갛다. 한국인의 정이 만만해? 이렇게 가버리면 난 어떻게 살아? 앞으로 내 행복은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거지? 응? 시원한 입매로 구질구질 구여친 멘트를 날리는 그녀가 귀여우면서도 딱하다. 동그랗게 모인 라이프지 팀원들마저 그녀를 따라 코를 훌쩍였다. 이제 가면 언제 오냐는 박의 구슬픈 노랫자락이 들린다. 최가 생사람 저승길 보내는 박의 주둥이를 막았다. 병풍만 있으면 조상님이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 “여러분이 잊고 계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저희는 그린 에이지라는 한 회사에요. 국제 인트라넷 접속하셔서 제 이름 클릭하시면 화상 연결 바로 되거든요.”
― “그럼 뭐해! 우린 미스 캐나다를 만질 수가 없잖아!”
― “팀장님, 절 막 만지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 “미스 캐나다의 이 냄새! 끌로에 오드 퍼퓸 냄새!”
― “그 향수 좋아하신다길래 제가 생신날 두 병이나 사드렸잖아요.”
― “내 인생은 끝났어. 떠난 사람만 맨날 그리워하다가 혈혈단신 슬픈 할머니가 될지도 몰라.”
― “당근 마켓에 파셨죠?”
― “사랑했다. 김여주.”
― “파셨죠?”
애석하게도 팀장의 눈이 먼 산을 향했다. 저 넓은 백악산을 봐봐. 미스 캐나다를 향한 내 마음과도 같지. 옆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던 최가 코를 먹으며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당근 마켓에 끌로에 퍼퓸 쳤더니 최근 게시물 하나 나와요. 미개봉 새 상품으로 99원 내리셨네요. 울다가 웃으면 안 되는데 파렴치한 게 너무 팀장님 같아서 웃기잖아요.
엉덩이 털을 달고 모두가 울면서 박장대소하는 모순 속에서, 박은 그 와중에 가격 협상 버튼을 누르다 걸려 팀장에게 등짝을 맞았다. 아프다고 칭얼거리며 박이 팀장의 어깨에 슬며시 기댄다. 사내 연애는 죽음뿐이라는 팀장이 박과 연애를 시작한 지 오늘로써 일주일째였다.
― “눈이 오네요.”
진눈깨비가 솜솜히 내리는 12월.
지훈의 아버지로부터 온 연락은 퇴근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방마다 전통 창호 문살이 세워진 한정식집에서 지훈의 아버지를 만났다. 사람은 두 명인데 음식은 호랑이 잔칫날이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좋으세요. K건설 로비에서 본 근엄한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앞에 있으니 평소 하지도 않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녹진한 국물만 퍼먹으며 어색한 자리를 견뎌내고 있을 때, 황동 구리 그릇을 든 직원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백색의 신선로다. 내게 뭐든지 많이 주고 싶은 지훈의 성향은 친탁이었다.
아들한테 여주 씨 얘기 들었어요. 그동안 내 아내 때문에 힘들었을 거예요. 모진 말에 상처도 많이 입었을 거고. 지훈이 어렸을 때부터 집사람이 거는 기대가 컸어요. 애가 건축하겠다고 대학 원서 몰래 쓸 때부터 사이가 더 틀어지기 시작하더니…… 남편인 내가 제대로 중재를 못 했어요. 남의 집 귀한 여식한테 못 볼 꼴만 보여주고 이제 와서 이해해달라는 말은 못 하지만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이쯤 되면 내 고약한 성질이 튀어나와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하는데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한쪽 부모가 없고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당했던 수모를 지금이라도 억울하다는 듯이 쏘아붙여야 할 것만 같았음에도 정작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 “괜찮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인걸요.”
다만 용서하고 싶었다. 누군가 이렇듯 사과를 하면 용서를 하고 싶었다. 그녀를 미워하기엔 내가 너무도 커버렸고, 또한 원망하기엔 오래된 시간의 역사였기에.
과거는 지나간 시간의 뒤로 남겨야 한다. 충분히 슬퍼하되 때가 되면 원망과 집착을 버리고 떠나보내는 것이 맞다. 그렇게 비워진 마음은 고스란히 오늘을 사는 내가 된다. 지훈의 손을 잡고 다가올 미래를 꿈꾸는 현재의 내가.
첫 식사 자리였음에도 한결 편안한 분위기가 흘렀다. 주제는 자연스럽게 지훈으로 돌아갔다. 다섯 살의 꼬맹이가 제 몸보다 큰 클라리넷을 시작한 날, 여덟 살의 애국자가 광복절에 등교한 날, 열여섯 살의 영웅이 소매치기를 잡아 부산 경찰청 표창장을 받은 날, 그리고 열아홉의 소년이 건축을 하겠다고 선언한 날. 지훈의 친부는 말했다.
― “설령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집을 짓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난 그때 처음으로 그 녀석의 진심을 봤어요. 죽는 얼굴로 살던 애가 그 순간만큼은 눈이 빛나더라고.”
……
― “여주라고 했어요. 건축이라는 꿈을 만들어주고, 또 그 꿈을 바치고 싶다는 친구 이름이.”
……
― “이제서야 보네요, 여주 씨.”
건축이 꿈이자 전부가 된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무엇도 해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었던 미술을 포기하고 경영 자리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지훈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아내의 치맛바람에 지쳐갈 무렵, 기념식에서 모든 걸 선언하겠다는 제 아들의 선전포고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지훈을 껴안았다고 말했다. 아들의 자유를 찾고 아내와의 별거를 얻은 그가 말한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 “밴쿠버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해줄 건 없어요? 지난번에 보낸 지삼은 잘 맞고?”
― “제가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덕분에 건강하게 잘 챙겨 먹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난 보내기만 했지, 사실은 지훈이가 부탁한 거예요.”
― “지훈이요?”
― “육체의 안녕과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 홍삼 말고 꼬옥 지삼으로 보내 달라고 어찌나 연락을 해대던지.”
― 제가 주면 돈으로 바꿔오라고 할 것 같으니까 아버지한테 부탁 드리는 거죠.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뭐 어쩌겠어요. 비용은 제 월급에서 까세요.
― “내 살다 살다 아들한테 협박을 당했다니까요.”
― “지훈이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 “좋아서 하는 얘기에요. 자기가 아쉬워도 표현하는 애가 절대 아니거든. 근데 여주 씨 얘기만 나오면 구구절절 말이 많아져요. 얘도 참 푼수야.”
지훈에게 푼수라고 말할 사람은 역시 아버지밖에 없다. 이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 미안, 연락 못 받았다. 어디야. 나 지금 퇴근.
― 저녁 먹고 있어.
― 누구랑?
― 오늘 새롭게 사귄 남자랑.
― 헌팅했어?
― 비슷해.
― ……왜 그런 짓을 했어?
스피커 폰밖으로 흐르는 지훈의 당황스러운 목소리. 친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아니었다면 난 곧바로 생각 의자 행이 아니었을까.
― “무슨 조합인지 모르겠다.”
한 시간 거리를 사십 분만에 끊은 지훈은 현재 팔짱을 낀 채 내 옆에 앉아있었다.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시켰어. 누가 또 오는 거야 뭐야. 호랑이 잔칫상 역시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 “애 부담스러워요. 연락은 저한테 먼저 하세요.”
― “너 없이 얼굴 좀 트겠다는데 네가 있으면 안 되지.”
― “식도 안 올렸는데 이런 자리는 불편하죠.”
― “언제가 좋겠어?”
― “무슨 말씀이세요.”
― “안 올렸으니까 하고 싶다는 말 아니야?”
― “……괜히 왔어.”
제 아버지에게 완전히 말렸다. 홍삼 말고 꼬옥 지삼으로 부탁한다는 지훈의 문자를 보여주는 친부와, 아무렇지 않은 척 젓가락질을 하지만 귀는 새빨개져 있는 지훈이다.
쏙 빼닮은 부자가 마주 앉은 모습에 일찍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가 문득 떠올랐다. 두 사람과 잔을 맞대며 살아 생전 술잔 한번 기울이지 못한 아버지가 생각났다. 진눈깨비가 그치고 태양의 결을 따라 하늘이 물들 때, 그곳은 안기지 못했던 누군가의 포근한 품 같기도 했고 괜찮다고 달래주는 같은 이의 관용 같기도 했다.
지훈은 조만간 밴쿠버에서도 브런치를 같이 하자는 아버지의 등을 떠밀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지훈이 빼고. 장난기 많은 그를 태운 세단이 멀어진다. 아버지에게 지훈이 푼수데기였다면, 지훈에게 아버지는 주책바가지였다. 차라리 야근을 하고 말지. 그가 고개를 내둘렀다.
― “미안. 불편했을 텐데.”
― “아니야, 뵐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어.”
― “아버지 불편하지 않아?”
― “왜?”
― “딱히 편한 감정이 들만한 관계는 아니잖아. 엄마만 봐도 그렇고.”
나 같으면 이 자리 안 나와. 내키지도 않고. 하대의 정석이었던 자신의 친모를 떠올리며 그는 상처 받은 내 마음을 헤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리 와. 추워. 코드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날 향해 품을 벌린다. 적당한 체온과 은은한 비누 냄새. 난 그 품속에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 “부정적인 감정에 고여있기 싫어. 상처받았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그냥 시간만 가잖아.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난 너무 아깝고 소중하다는 걸 아니까.”
……
― “당분간은 미래에 기대서 나아가보려고. 뒤돌아보지 말고, 과거에 묶이지 않고. 그렇게 앞으로만.”
……
― “아버지랑 브런치는 꼭 먹을 거야.”
지훈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누군가의 병문안을 몰래 가는 일에 대해서도.
* * *
세브란스 병원은 크리스마스 단장에 한창이었다. 벽을 따라 붙인 소아과 환아들의 크레파스 그림과 족히 삼 미터 쯤 되어 보이는 대형 트리가 중앙 로비를 장식했다. 고리 달린 메모지에 소원을 적어 나무에 매다는 수많은 뒤통수 중에서 유독 매꼬롬한 뒤태를 뽐내는 남자 뒤에 몰래 숨는다. 남자 또한 소원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내년에는 수술 적게
건강한 대한민국과 ♥︎나 ♥︎ -정한-
― “깜짝이야. 여주 언제 왔어? 할래?”
― “그래도 하트는 좀.”
― “연말에 하트를 그려야 불로장생한대.”
― “지금 막 지어내신 건 아니구요?”
― “네임펜 빨간색 줄까?”
― “쓰다가 죽을 것 같은데요.”
― “여기서 죽겠다는 얘기 함부로 하면 안 돼.”
― “아, 제가 실례를…….”
― “하트 그려줄까?”
― “……네, 해주세요.”
♥︎지훈 ♥︎이랑 유럽 여행 가기 -여주-
🧡시아주버님 🧡도 같이 -정한-
― “제 소원이 아니라 쌤 소원을 또 빌면 어떡해요.”
― “지훈이랑 유럽 여행 가본 적 있어?”
― “아니요?”
― “그럼 이렇게 소원하면 되겠다. 어때? 쉽지? 어어, 안녕하세요?”
정한은 아는 체하며 다가온 환자와 보호자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이 가고 나면 또 다른 환자가 다가왔다. 연말을 앞두고 묻고 답하는 소소한 안부 시간은 정한과 내가 20층 VIP 병실에 다다르기까지 계속됐다. 정확히 총 스물세 명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정한은 누가 세브란스 마당발 아니랄까 봐 지나가는 매점 직원과 행정 직원이 준 초콜릿과 과자만 해도 두 손이 넘쳤다. 지금도 청소부 아주머니가 정한에게 사탕을 줬다. 감히 만인의 아들이라 생각해 본다.
― “크리스마스라고 선물 많이 받으시네요?”
― “착하게 살아서 그래. 울지도 않고.”
― “김영란법에 걸리진 않나요?”
― “청탁이나 금품수수가 아닌 경우는 괜찮다는 법이 있잖아.”
― “무슨 법인데요?”
― “윤정한 법.”
― “잠은 주무신 거 맞죠?”
― “한 시간. 오늘은 나 만나러 온 거지?”
― “쌤도 보고 어머님도 뵙고.”
― “비싸게 구는 양반을 아직도 보고 싶어?”
― “요즘도 건강하시죠?”
― “당연하지.”
지훈의 선언으로 앓아누운 코스메틱 회장은 정한의 보필로 나날이 건강을 잃어갔다. 회진을 일분 씩 늦게 돈다, 주삿바늘이 너무 날카롭다, 어떨 때는 주치의 정한이 버릇없이 반말한다고 애꿎은 경호을 부르며 난리를 치다가 침대에서 떨어졌다.
어떤 날에는 머리가 쥐 뜯겨 산발이 된 정한이 환자 방치 죄 명목으로 지훈에게 소환 요구를 하기도 했다. 물론 지훈은 단 한 번도 그 소환에 응한 적이 없었다.
― “오늘은 뭐 가져온 거야?”
― “시집이요.”
― “기대하진 마. 또 밖으로 약과나 던지겠지.”
정한은 옆구리에 시집을 끼고 2022호 병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문밖으로 얼굴을 내민 정한이 웃는다. 확신의 반달 눈이었다. 드디어 먹을 걸 던지지 않는다고.
― “이모는 불렀으면 인사라도 해주든지. 여주 민망하게 벌써 몇 분 째 이러고 있는 거예요.”
― “너 아직 안 갔니?”
― “무시할 거면 책 선물은 왜 받아?”
― “안 나가냐구. 또 끌려 나갈래?”
뾰족한 등살에 정한은 병실 문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뭘 던지면 피하지 말고 꼭 맞아. 진단서 뽑아서 같이 고소해 버리자. 정한을 조준한 쿠션이 벽을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문은 빠르게 닫혔다.
정한의 산만한 발소리와 복도를 오가는 간호사마저 종적을 감춘 시간. 얇은 시집을 덮고 턱을 들어 올린 그녀는 한참이나 삐뚤어진 시선이었다.
― “내가 우습니?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니까 쉬워 보여? 너랑 내가 무슨 좋은 인연이라구 여기까지 와서 얼굴을 맞대야 하니?”
― “우습지 않아요. 쉽지도 않고요. 제 얼굴 보기 껄끄러우시다는 것도 물론 알아요.”
― “알면서 이런 짓을 해? 복수라도 하러 왔니?”
― “일부러 나쁘게 말하셔도 이젠 상처 안 받아요. 전 단지 이런 곳에 매일 혼자 계시면 하루 종일 어떤 생각 하실지 알 것 같아서…… 그래서 찾아왔어요.”
― “네 주제에 동정이라도 하는…….”
― “보고 싶으시잖아요, 그 애.”
그녀가 입을 다문다. 독한 말을 뱉던 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스트레스라는 모호한 병명으로 그녀가 한 달째 병원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지훈이었다. 눈 내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입안을 깨문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끝내 눈물을 흘렸다.
― “사랑에 틀린 방법은 없어요. 하지만 강요하는 순간 부서져요.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지훈이가 어떤 사랑을 바라는지.”
― “…….”
― “이젠 욕심보단 마음을 주세요. 그 애도 그걸 바랄 거예요.”
다만 용서하고 싶었다. 누군가 이렇듯 눈물을 보이면 용서를 하고 싶었다. 당신을 미워하기엔 내가 너무도 커버렸고, 또한 원망하기엔 오래된 시간의 역사였기에.
― “저 밴쿠버로 돌아가요. 한국으로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 “…….”
― “그래도 다시 오고 싶어요. 돌아올 곳이 생겼거든요.”
― “…….”
― “그때가 되면 저 좀 반겨주세요. 또 뵙고 싶다는 말이에요.”
얇은 나뭇가지에 쓰러지는 햇볕, 차디찬 바람 냄새, 커튼에 낀 작은 먼지들…… 도저히 어느 것 하나 싫어할 수 없는 순간에 이뤄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장면이 드리운다.
별이 떨어지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내가 직접 책갈피 해둔 그 구절을, 그녀는 오래도록 말없이 읽었다.
― “멀쩡하네? 이모가 새아기 해준대?”
― “다음에요. 본사 잘 들어가라고 해주셨어요.”
― “그런 배웅을 했어? 절대 그럴 양반이 아닐 텐데?”
― “그나저나 쌤은 오프라면서 출근은 왜 하신 거예요?”
― “병원이 집보다 편해. 밥도 꼬박꼬박 잘 나오거든.”
― “근데 지금 어디 가세요?”
― “우리 새아기 데려다주러.”
하얀 가운을 휘날리며 병원 문밖을 나선 정한은 금세 추위에 떨었다. 콜택시 금방 온다더니 너무 늦는 거 아니야? 눈에 바퀴 빠졌는지 전화해봐. 꽁꽁 언 분수대 앞에서 발을 구르는 정한은 틀림없이 후회하는 중이리라.
― “우리 마지막인데 포옹 한번 할까?”
― “추워서 그러시는 건 아니구요?”
― “날 뭘로 보고?”
― “윤정한이요.”
― “으응, 개명해야겠다.”
정한의 품에서 은은한 소독 냄새가 풍겼다. 뜻하지 않은 편안함에 울컥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에 진심으로 빈다. 매번 속아 넘어가도 좋으니 윤정한은 계속 윤정한이었으면 좋겠다고.
― “멀리 떠나도 다시 돌아올 집이 있다는 건 참 축복이야.”
……
― “너한테 지훈이가 그랬으면 좋겠어.”
정한은 이별마저도 상냥했다. 그렇기에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앞의 윤정한을.
― “내일 또 보자.”
오늘이 마지막임에도 불구하고 내일 또 만나자는 엉뚱한 인사.
그렇게 해서라도 오랜 이별을 다독이려는 정한만의 특별한 굿바이였음을.
* * *
― “드레스코드 산타클로스라면서 왜 시팔 나만 수염 달고 온 건지 말해줄 비겁한 놈들?”
― “승관, 맨날 속는 너도 참 너다.”
― “나 빼고 너희들끼리 단톡방 팠냐?”
― “지훈이가 그렇게 하면 재밌을 것 같다고 우리한테 먼저 문자 했었거든.”
― “김여주. 야. 네가 말해라.”
― “생각해보니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일 년에 딱 한번 울지 않는 아이에게 선물을 하사하시는 특별한 캐릭터니까 현대 사회의 희소성을 중시해서 그래도 한 명이 맡아서 하는 게…….”
― “이 오만방자한 아첨꾼 같은 게 고새 이지훈 편을 드냐? 어?”
― “수염 되게 잘 어울린다 너. 진짜 흰 수염 고래 같아. 빨리 나이 들어서 길러보는 건 어때? 자기 PR의 시대니까 매듭을 지어서 돋보이는 방법도 괜찮을 것 같아.”
― “그러냐? 막 리본 모양으로?”
― “끌리지? 너도 이게 뭔가 싶지?”
― “엉, 주리를 존나게 틀고 싶다.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처먹고! 썩 꺼져! 네 애인 데려와! 이쥰 그 새끼 언제 오냐고오오옥!”
서로의 퇴근 시간에 맞춰 모인 루돌프 머리띠 석민과 울지 않는 아이의 나,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 박스를 들고 출근한 부타클로스가 신촌 술집에서 삼자 대면 중이었다.
산타 할부지 모자 쓸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너희 따위가 아냐? 네 명이서 꼬깔꼰 모자 쓰고 인생샷 찍으려고 폴라로이드까지 가져온 내 마음을 아냐고! 뒤통수가 너무 아파. 내가 진짜 복수…… 예? 사진이요? 아유, 당연하죠. 예예. 그럼요.
승관을 알아본 건지 산타클로스의 등장을 환영하는 건지 멀리서 술을 먹던 새내기들이 달려들었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녀석이 가운데서 폼을 잡고 있는데 새내기 중 한 명이 자신의 휴대폰을 녀석에게 건네며 말했다. 석민의 옆에 있을 테니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하, 저를 또 어떻게 알아보시구. 감사합니다. 갤럭시 노트로 사인까지 받아 간 그들이 멀어진다. 부타클로스는 깡소주를 마셨다. 앞으로 내 인생에 크리스마스는 없다. 나 불교여. 옘뱅.
술집에서 한바탕 기울인 승관과 석민은 한 시간 째 지각 중인 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 새까만 사람들만 보면 석민은 죄다 지훈이라 불렀다. 참을성 없는 승관은 이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 “이지훈은 아직도 몸이 한 개냐?”
― “지훈이 정도면 그래도 세 개 정돈 될 줄 알았는데.”
― “그 새끼는 저녁에 무슨 미팅을 하고 앉아있냐!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 “뭐야! 방금 지훈이 차 지나간 것 같어!”
― “남바 뭔데!”
― “2902.”
― “엉, 맞다. 주차하고 올란갑다. 야하, 이 귀여운 자식. 더 걸린다더니 또 형아 보고 싶어서 쌔빠지게 달려왔구만.”
― “승관, 네가 아니라 여주 아닐까?”
― “석민아 괜찮아. 부승관 착각박사가 착각질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 “척척박사는 들어봤어도 착각박사는 또 처음 들어보네. 언어의 생생 정보통이신가 봐요?”
― “지훈아 여기…….”
― “나 지금 씹혔 미친 쟤 뭐세요?”
― “오늘 진짜 춥다.”
점잖게 앉아 뜨거운 물을 호호 불어먹는 지상 최대의 훈타클로스. 놀리는 건 좋지만 어쨌든 승관이 삐낄까봐 고심한 끝에 차에서 옷을 바꿔 입고 왔단다. 역시 부승관 챙기는 건 이지훈밖에 없지. 저것 봐, 둘이 또 안고 있잖아.
― “꺼져.”
― “지훈아, 형이 사랑한다.”
― “좀 꺼지라고.”
― “네 맘속으로?”
― “제발 그냥 좀 사라져.”
물론 한쪽은 고소 준비 중이었지만.
― “건배다 이놈들아!”
― “우리의 새 출발을 위하여!”
사회 생할 만렙 승관의 소맥으로 시작된 크리스마스 전야제가 깊어간다. 여주, 한국 또 올 거지? 다음엔 더 빨리 올거지? 석민은 빈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고 인터뷰하듯 내게 물었다. 승관이 오징어를 뜯으며 말했다.
― “서쿠야, 쟨 안 와.”
― “왜?”
― “아주 바쁘신 분이거든.”
― “부승관 또 이상한 소리 하기만 해.”
― “맞잖냐. 봄에는 스탠리 파크에서 자전거 타야 되지, 여름에는 스티브 스톤 랍스타 피자 먹어야 하지, 가을에는 캐필라노 가서 흔들다리 타야 되지, 겨울에는 휘슬러 7박 8일 찍고 개 썰매 타고 사진 찍어야 하는데 저 놀뱅이가 그걸 버리고 퍽이나 일찍 오겠다.”
― “승관, 밴쿠버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뭘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어? 누가 보면 꼭 가고 싶어서 어젯밤에 검색해 본 것 같어.”
― “부승관 어제 3박 4일 밴쿠버 여행 알아보고 다니더라. 거의 예약한 것 같긴 해.”
― “닥쳐! 지는 옆에서 밴쿠버 자동차 렌트 검색해본 주제에!”
― “그래도 누구처럼 캐나다 스타벅스 머그컵 사려다가 덤탱이는 안 썼잖아.”
― “야! 당근 마켓 그 새끼가 사기 쳐먹은 걸 왜 나한테 지랄인데!”
― “승관, 사기 당했어? 온도 몇 도였는데?”
― “18도. 소름 돋아.”
― “십팔놈들! 나한테 말 걸지 마라!”
― “또 삐졌어.”
― “승관, 화내지 말어.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라는 말도 있잖어.”
― “경험만 만렙인 내 인생 구제 가능? 제발.”
― “저렇게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정말 쉽지 않은데.”
분명 석민의 질문은 나였는데 꽉 찬 오디오에 낄 자리가 없다. 얘들아, 밴쿠버 놀러 오는 거 아니야? 침공하는 거야? 적진 폭탄 투하 전략을 짜듯 지훈은 사각형 재생지 냅킨에 〈밴쿠버 3박 4일 침투 작전>을 적었다. 이윽고 머리를 맞댄 세 명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기 시작하는데.
― “난 반드시 거기서 널 빼내 올 거야.”
― “여주 집은 방 몇 개야? 해외 주택도 허가만 받으면 에어비엔비가 된다던데!”
― “서쿠야, 걱정 마라. 이쥰이 김여주 낚아채서 한국 가면 그 집 바로 네 거다.”
두 명의 산타클로스와 한 명의 루돌프가 말한다.
우리가 널 가만히 내버려 두겠냐고.
― “올해는 여주가 있어서 한 해가 더욱더 꽉 찬 느낌이었어.”
― “김여주 가면 난 또 뭐 하고 노냐. 이석민이랑 먹방하다가 즙. 짤. 듯.”
― “이것들이 분위기를 잡고 있네.”
― “냅둬. 저렇게라도 안 하면 너 가고 나서 엄청 후회할 것 같다고 어제 톡 왔어.”
― “당신은 입이 가벼워서 널뛰는 스타일이세요?”
― “지훈,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서운하다.”
― “애초에 표현 좀 하고 살아. 묵혀두면 얘가 어떻게 알겠어.”
― “이지훈 저 새끼 방금 뭐랬냐?”
―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애초에 표현을 해야 안다고…….”
승관과 석민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루돌프와 산타클로스 사이에 갇힌 지훈은 그렇게 몇 번이고 생애 다시는 없을 입맞춤을 당했다지.
― “이 새끼! 형한테 사랑한다고 해봐! 표현 못 해서 안달 난 네 성격에 그동안 얼마나 참았겠냐! 안 하면 저승 가서도 모르는 게 그런 사랑이다 인마!”
― “야, 안 떨어져?”
― “여주! 너도 이리 와!”
얼떨결에 서로의 목을 감싸 안고 사랑한다 외쳐야 하는 병에 걸려버린 4인방. 흡사 지구의 종말을 앞둔 마지막 인류가 부둥켜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은 특별하고 언제나 나사가 빠져있는 승관과 석민 덕분에 이번에도 감히 경험할 수 없는 생애의 우정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 “진짜 김여주 빼고 웬만하면 떨어져서 지내자.”
― “그럴 순 없어 지훈. 우린 언제나 함께니까.”
―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어 내가.”
― “그래서 우리가 되찾아주고 널 현생으로 데려왔잖냐.”
― “기막힌 우정이야.”
― “제발 영원히 사라져.”
어쨌든 사랑이다.
지훈의 눈썹이 한껏 올라간 걸 보면.
― “내일 공항 같이 못 가서 미안해.”
― “괜찮아. 일하러 가는 건데 뭘.”
술자리가 파한 후 지훈과 따로 고요한 산책길을 걸었다. 좁다란 골목길의 가로등도, GS편의점 앞 유자차를 누르면 율무차가 나오는 고장 난 자판기도, 열쇠 수리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우체통도, 이렇듯 그림자가 두 개인 것도 오늘이 지나면 오랫동안 보지 못한다는 생각을 누누이 삼키면서.
― “내 번호 뭐야.”
― “공일공 이일팔사 칠사칠일.”
― “잊거나 휴대폰 잃어버리면 어디서 찾아.”
― “내 다이어리.”
― “다이어리도 잃어버리면.”
― “캐리어에 넣어둔 쪽지.”
― “도착했는데 내가 전화 안 받으면.”
― “음성 메시지 꼭 남기기.”
― “무슨 일 있으면.”
― “바로 전화하기.”
― “없으면 더 좋고.”
그가 한 품에 날 안고 어깨에 턱을 괸다. 매일 전화 안 해도 돼. 너 바쁜 거 아니까. 나도 잘 못 받을 수도 있어. 겨울 바람과 옅은 비누 냄새가 코끝에 섞인다. 당신이 없는 힘든 밤이 찾아오면 어쩐지 이 순간을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아.
― “그래도 매일 하자. 내가 매일 할게.”
눈이다. 이제 떠나야만 하는데 자꾸만 눈이 온다.
더는 사라지지 않는 환상의 당신과 흘러내리는 눈물을 모조리 끌어안고서 나는 말한다.
우리 조금만 더 같이 있자. 눈이 오고 있으니까 이렇게 잠시만 더 함께 있자.
서두르려 해도 길이 막힐 테고, 바퀴가 빠질 테고, 도로가 미끄러울 테고, 거센 눈발에 갈피 잡지 못한 배는 표류 할 테고, 또 비행장 활주로마저 꽁꽁 얼어버릴 테니까.
혼자서 그 먼 길을 돌아가기엔 너무 깜깜하니까 우리 동이 틀 때까지만 여기에 있자.
조금만.
조금만 더.
― “사랑해.”
……
― “내일 또 만나.”
‘사랑해.’
……
‘내일 또 만나.’
정한의 특별한 굿바이를 닮은 그날의 인사.
오랜 이별을 직감한 당신이 내게 줄 수 있었던 마지막 사랑의 인사였음을 이제야 깨닫는 바보 같은 나.
― “사랑해.”
……
― “……내일 또 만나.”
우린 커튼을 칠 거야. 한 침대에서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연약한 입술에 입을 맞출 거야.
네가 내 뺨을 만지면 난 네 목을 감쌀게. 간지러운 눈썹과 작은 콧볼에도 사랑을 줄게.
소행성의 어릿한 별이 네 눈에서 흐를 때면 겨울 햇볕에 말린 프리지아로 그 눈물을 닦아 줄게. 아파서 멈추지 않거든 젖은 머리카락이 마를 때까지 널 안아 줄게.
그렇게 깊은 밤이 지나고 찬란한 새벽이 찾아오고 또다시 눈부신 아침이 오면 우린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괜찮아질 거야.
닮은 눈을 보고, 닮은 미소를 짓고, 닮은 사랑을 하면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할 거야.
울지 않고, 아프지 않고.
우린 늘 그런 사랑을 할 거야.
또 만나, 우리.
Epilogue.
― 여주 잘 갔어.
― 어, 고맙다.
― 일 많이 바쁘냐?
― 그렇지 뭐.
비행장 철조망 밖으로 세워진 차 한 대. 지훈은 그곳에서 전화를 끊었다. 차게 식어버린 엔진과 보닛에 덮인 눈은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일 공항 같이 못 가서 미안해.
거짓말.
거짓말이다.
자신을 두고 떠나는 뒷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지훈은 붙잡을 것만 같은 자신의 미련조차도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게 맞는 거라고, 오늘이 끝은 아닐 거라고 되뇌이는 지훈이 입술이 조금씩 떨려온다. 세브란스 병원 로고가 그려진 메모지를 꽉 움켜쥐면서.
♥︎지훈 ♥︎이랑 유럽 여행 가기 -여주-
🧡시아주버님 🧡도 같이 -정한-
.
.
.
+ 내가 널 많이 사랑해
비행운이 가로지른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군가의 흔적을 말없이 좇는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바쁘게 흘러갈 지훈의 하루에 딱 하나가 없다.
― 훈, 오늘 뭐해?
―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 주말에 데이트하자. 나 진짜 가고 싶은 데 있단 말이야.
― 당연하지. 우리 귀여운 남친이랑 가야 내 기분이 방울방울 하거든.
― 사랑한다는 뜻이야.
고개를 숙인 그가 하염없이 운다.
경적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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