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관) 와 그래도 학교 입학하자마자 발현되고, 다행이네!
여주) ....그런가?
승관) 그럼! 남들 사이에서 뒤쳐지는 기분 느끼는게 얼마나 비참한 줄 아냐-
광장에서 학교로 돌아오자 정한은 학교 일 때문에 사라지고, 순영과 지훈은 운동하겠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한솔과 찬은 도서관에 갔고 남은 원우와 승관, 그리고 여주는 하루의 끝에서 잠시 여유를 부려보겠다며 정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원우는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휙휙 들춰보고, 여주는 승관의 말을 곱씹었다.
승관) 애들이 아주 학교 입학하니까 신이나서 능력을 막 수업시간에 막 뽐내는데! ..난 거기서 아무것도 못하고 보고만 있었어~ 페이트도 늦게 나타나고..
여주) ..........
승관) 겉으로는 얼마나 괜찮은 척 했는데~! 근데 기숙사 와서는 맨날 울었잖아~
과거는,
승관) 야 그 때 내가 얼마나 슬펐는데! 그러니까 넌 천만다행이야~ 내가 겪은 어? 그 고통을 넌 안겪을 수 있어서- 그거 아무나 이겨내는거 아니다? 나처럼 상남자만 이겨낼 수 있는거야!
회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날의 감정이 남아있기에 과거다.
몇년이 지난 후에 기억을 더듬는 것이었음에도 승관은 그 고통을 여전히 기억했다. 잠긴 목소리를 그 누구도 모르지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그를 위해 원우는 책을 들여다 봤으며, 여주는 아까 자신이 떨군 장미잎 하나를 만지작 거렸다.
여주) ...볼 수 있는게 많지.
승관) 엉?
여주) 느리게 걸으면, 남들보다 볼 수 있는게 많아.
승관) ..........
원우) ..........
여주) 뒤쳐진게 아니라, 그냥 느리게 걸은거야.
승관) ..........
여주) 날아가는 새,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 천천히 다가오는 바람.
승관) ..........
여주) 그걸 다 느낀 건 너 뿐이잖아.
승관) ..........
여주) ...아, 그니까 어....
여주는 무심코 뱉은 말들에 급히 정신이 들은 듯 말을 얼머부리기 시작했고, 승관의 발걸음은 그런 여주에게 멈춰섰다. 원우와 여주도 걸음을 멈추고, 승관의 표정은 이뤄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언가로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그런 벙찐 표정이었다. 여주는 혹 자신이 뭣도 모르고 떠든 걸까 싶어 고개를 숙인 채 제 손에 쥐고있던 빨간 장미잎을 바라봤고, 승관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고 나서야, 그제서야 시선을 맞췄다.
승관) 그렇네.
여주) ...........
승관) 나한테 빨리 오라고 손짓하던 애들, 형들을 본 것도,
다 내가 느리게 걸어서였네.
여주) ..........
원우) ..........
승관) 야 고맙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정신이 팍 드네!
여주) ...ㅇ,
승관) 야 영감님 오신다!! 영감님이 오셔!! 나 도서관 갈테니까 둘이 정원 가든 말든!
원우) ...너가 가자고 했-,
승관이 뒤돌아 왔던 복도를 다시 뛰어가다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있는 원우와 여주에게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여주에게 소리쳤다.
승관) 너도 늦게 입학했지만 우리랑 똑같은 거 잊지마라!!!!
여주) ...........
승관) 우린 뒤쳐진게 아니라~!
그냥 느리게 걷는거니까~!
알게 모르게 과거 속 느린 자신을 놓아주지 못하고 있던 승관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때의 자신을 놓아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처럼 느린 걸음을 가진 아이에게, 똑같은 당부를 씩씩하게 건넸다.
원우) 그거 다 읽으면 이것도 읽어봐. 재밌을거야.
여주) ..........
하루는 똑같이 흘러갔다. 사교모임을 하고, 밥을 먹고, 혹은 광장에 가거나 개인 활동을 하거나. 덕분에 여주를 비롯한 입학생들은 학교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주와 원우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중이었다. 둘은 책을 들고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책 장이 얼마 넘어가지도 않았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둘을 향했다.
순영) 야아- 재밌냐-
원우) ....천문학 안갔어?
순영) 갔다 오는 길이야.
순영이 자연스레 여주의 옆에 앉고 원우를 마주봤다. 원우는 의아함에 되물었다.
원우) 벌써? 아직 여덟신데?
순영) 엉. 근데 갔다가 오는 길이야.
원우) ....?
순영) 갔다가만 왔어 활동은 안하고.
원우) 왜?
순영) 하기 싫어!
여주) !!!!!!
순영) 어우 놀랐니? 미안
여주) ....아니ㅇ,
슈우우우우우우우우욱-! 퍽!
순영) 악!
저 멀리서 손바닥 만한 투명한 볼이 날라오더니 저번처럼 또 순영의 머리를 가격하고, 곧 순영의 눈 앞에 팡! 하고 정한의 잔상이 펼쳐졌다.
정한- 누가 출튀하래? 미쳤어? 빨리 안와?!!!?? 너 때문에 통스사는데 펄이 아까워 죽겠다!!!!!! 니 새끼 찾으려고 내가 통스를 몇개나 샀는 줄 알아?!!!? 그리고 15월 초밖에 안됐는데 내가 쓴 통스가 무려 열개다 미친새끼야!!!!!!!!!!!!!!!!!
여주) ...........
원우) ...........
정한- 너 개인 점수 깎이는 거? 나랑 상관 없어. 근데 니 출석률 때문에 우리 메리골드 점수 깎이는 거? 그건 못참지. 빨리 튀어와라. 승관이한테 너 허공에서 던지라고 하기전에.
팡-!
원우) ....가봐야할 것 같은데.
여주) ...........
순영) ...역사학 재밌냐? 나 천문학은 진짜 못해먹겠어. 우리 맨날 뭐하는 줄 알아? 별 관측하고 메모하고 거리재고 시발.... 작년에 한솔이가 자기 산술학 들건데 옮길거면 산술학으로 옮기라고 할 때 수학 싫다고 거절했는데 별 거리를 재고 자빠졌다.. 너 AU라고 들어봤냐? 그거 단위다..? 거리 단위.. 야 나 진짜 못해, 나 더이상 못해...
원우) ...너 역사학도 못하겠다그랬잖아. 책만 읽으면 잠온다고.
순영) ....그랬지. 그럼 난 어디가..? 날 위한 곳은 어딨어?
원우) ...그럼 글짓기 가지 그랬어.
순영) 나 글 못써..
원우) 아님 찬이랑 변신술-,
순영) 야 나 변신술 실습 F야..
원우) ...........
여주) ...........
원우) ....이럴 시간에 가.. 정한이 빡쳐서 통스 백개 날라올 것 같아.
순영) ....갈게.
한참 연설을 하던 순영은 터덜 터덜 도서관을 나갔고, 원우와 여주는 눈을 맞추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다 여주는 궁금한게 생긴 듯 원우를 향해 물었다.
여주) 사교모임이 총 몇개예요?
원우) ..변신술 역사학 천문학 산술학 글짓기,
여주) ..........
원우) ...아. 하나 더 있어.
여주) ..........
원우) 악술학
여주) ..그건 뭐예요?
원우) 저번에 재훈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거 있잖아. 악의무리 란드. 란드의 마법이나 능력을 막기위해 학습을 하는 모임이야. 그래서 정말 마법학에 관심 많은 애들만 들어가. 정의구현 좋아하는 애들.
여주) ....아.
원우) 악술학 듣는 애들은 보통 마법학으로 진로를 결정한 애들이야.
여주) ...란드가 아직도 있어요?
원우) 응. 우리가 존재하는 이상, 란드는 계속 존재할거야. 란드의 최종 목적은 이 능력인 세계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게 목표니까.
여주) ...왜-,
원우) 그건 그 책 다 읽으면 알게 돼.
'디피티스의 역사'
원우) 우리 행성인 디피티스의 역사를 알면, 자연스레 알게 될거야.
여주) ...........
원우가 작게 웃자 여주도 따라 웃으며 각자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찬) 형 머리가 왜그래?
순영) ..........
정한) 냅 둬. 지 업보야.
지훈) 별 관측 하기 싫다고 2층에서 지랄하다가 떨어졌어.
사교모임이 끝나고 식당으로 모인 아이들은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순영을 보곤 놀라 물었다. 같은 천문학 모임인 지훈과 정한은 덤덤히 토라진 순영을 대신해 답했다. 뒤이어 들어오던 원우와 여주도 분위기를 살피며 순영을 바라봤다. 몇시간 전 순영을 봤던 둘이기에 그나마 순영의 기분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찬) 헐 근데 멀쩡해?
지훈) 멀쩡하지. 대신 그 밑에 있던 책상이 반으로 갈라졌어.
정한) 그럴 거면 오지 말지 그랬냐. 기물파손으로 소속 점수 또 까지겠네.
순영) 야 넌 친구가 대가리 깨졌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
정한) 그 깨진 대가리 붕대 감아준 사람 나거든?
순영) ...........
정한) 그리고 소속 점수 까지면 다른 학생들한테 니 관리 못해서 깨지는 건 나고!
순영) 누가! 어떤 새끼가 그러는데!
정한) 닥쳐!
순영) ...........
여주) ....괜찮으세요?
순영) ...응. 괜찮아...
원우) ..기분은 영 아닌데.
순영) 기분은 별로지..
여주) ..........
지훈) 적응 할 때도 되지 않았냐.
순영) 넌 우주가 적응이 돼? 난 안돼.
지훈) 그럼 교환 알아봐줘?
순영) ...됐어.
정한) 저거 봐. 또 저 지랄이지. 교환학생 할 애 있는지 알아봐준대도 싫다. 다른 곳 들어가지 그랬냐니까 나머지도 싫었대. 그럼 곱게 다니든가.
순영) ..........
정한과 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포크질을 했고, 곧 대화주제는 다른 걸로 바뀌었다. 순영도 그제서야 숟가락을 들었다. 맞은 편에 앉은 여주가 그런 순영을 바라 볼 때 순영의 옆에 앉아있던 정한이 여주를 향해 물었다.
정한) 여주는 역사학 갔으면 라벤더 갈 확률이 높겠네? 평소에도 원우랑 도서관에만 있을 때도 많잖아.
여주) ...그러려,
승관) 헐, 아 내가 그걸 깜박했네. 그럼 너 오늘 부터 나랑 다니자! 사교모임만 빼고 나랑 다녀! 엉? 그래야 네가 데이지로 오지!
찬) 그러기엔 여주가 니 텐션을 따라가긴 좀 힘들 것 같은데? 안그래?
여주) ...그건 맞-,
승관) 맞긴 뭘 맞아! 얘랑 나랑 얼마나 소울 메이튼데!
한솔) 소울 메이트인거랑 텐션 따라가는 거랑 같냐
승관) 다를 건 또 뭐람. 야 넌 여주가 우리 데이지로 오는게 싫은거야?
한솔) 나야 상관 없지. 근데 아마 텐션이 꼭 라벤더 갈 것 같은데.. 침착한게 꼭 지훈이형이랑 원우형 섞은 것 같잖아.
찬) 나도 라벤던데...
한솔) 아직 니 모습은 안보여.
찬) ...........
한솔의 단호함에 찬이 씁쓸하게 입을 다물더니 젓가락을 들었고, 원우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정한이 입을 열었다.
정한) 광장 갈래? 나 오늘 살 거 있는데.
지훈) 뭐사게?
정한) 노트 다 썼어.
지훈) 우편으로 시켜.
정한) 그럼 내일이나 내일 모레 오잖아. 질도 확인 못하고.
지훈) 종이 질이 다 거기서 거기지.
정한) 갈 사람?
지훈) 아, 그러면 난 공터에 있을게.
순영) 나도 공터갈래!
원우) 나도 공터 가서 책 읽을래. 넌?
여주) ...저도 그럼 공터 가서 마저 읽을래요.
승관) 나도 새로운 만년필이나 보러가야겠다!
한솔) 나도 노트 사야겠다. 한권밖에 안남았어.
찬) 난 깃털 펜 사야돼. 저번에 변신술 하다가 태워먹었어.
결국 다같이 광장으로 가기로 한 아이들은 마저 밥을 먹더니 일어서 식당을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물건을 사러 간 아이들을 제외하고 순영과 지훈, 그리고 원우와 여주가 공터에 왔고, 순영은 지훈을 향해 자신을 나뭇가지 위로 올려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지훈의 손짓 하나로 순영의 몸이 순식간에 떠오르며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여주는 위로 올라간 순영을 멍하니 바라보고, 지훈은 그런 여주에게 말했다.
지훈) 올라가고싶어?
여주)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지훈) ..........
여주) 그리고 전 이그노얼이라 올라가지도 못하잖아요. 어차피..염력이 안통할테니까.
지훈) 글쎄, 네가 아직 통제가 미숙하다면 통할지도 모르지.
여주) ..........
지훈) 해볼래?
여주) ...........
여주가 지훈을 바라보고 고개를 주억거리자 지훈의 손짓이 한 번 더 반복되고, 여주의 몸이 안떠오르나 싶더니 금새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곧 나뭇가지에 다다를 때 여주의 몸이 쑥 내려가려는 걸 순영이 낚아챘다.
순영) 어우! 큰일 날 뻔 했네!
여주) ...고, 고맙습니다..
순영) 의식해서 그래. 의식하니까 능력이 발현되는거야. 무방비에 있어야 남의 능력이 너한테 통하거든.
여주) .....아.
지훈) 괜찮아?
여주) 네
지훈은 여주가 앉은 것까지 보더니 벤치로 돌아가 누웠다. 원우는 그 옆 벤치에서 책을 넘기고 있었고, 순영은 여주에게 말했다.
순영) 어때. 높은 곳 좋지? 공기가 다르다니까.
여주) ...좋네요.
순영) 아주 숨통이 트여!
여주) ...........
바람 한 점 없는 공기였지만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숨통을 트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순영이 눈을 감곤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여주도 따라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을 뜨고 여전히 눈을 감고있는 순영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여주) ....근데요. 궁금한게 있는데..
순영) 뭐?
여주) ...천문학이 그렇게 싫은데 왜 여태 천문학에 있어요? 그 전에 나올 수 있었잖아요.
순영) ....으음-
여주의 짧은 물음 치곤 긴 공백이었다. 고요함은 원우의 책 넘기는 소리를 극대화 시켰고, 순영은 발을 붕붕 흔들거리던 걸 천천히 늦추더니 입을 열었다.
순영) 약속이야.
여주) ....뭐가요?
순영) 천문학도가 되는게.
여주) ...누구랑요?
순영) 우리 형이랑.
여주) ..........
순영) 나중에 형이랑 셋이 한 번 만날래? 우리형 되게 멋진데.
여주) ...........
순영의 말에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순영도 따라 웃더니 다시금 발을 붕붕 흔들었다. 또 다시 정적이 자리하고, 여주도 나뭇가지 위에 앉은게 적응이 될 때 순영을 따라 발을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곧 순영을 향해 말했다.
여주) 근데요. 형도 과연 선배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천문학을 배우는 걸 원할까요?
순영) ...........
여주) ...정말 사랑하면요, 선배가 천문학도 되는 걸 바라기보단.. 원하는 걸 하게 하지 않을까요?
순영) ...........
여주) ...........
여주의 말에 순영의 발이 멈추고 여주의 발만 허공에서 움직여댔다. 그리고 순영의 씁쓸한 음성이 허공에 뱉어지고 금새 흩어졌다.
...그러게, 나 안사랑하나.
정한) ....뭐야? 무슨 일이야?
지훈) ...너 왜 먼저 와있어?
천문학실에 들어오던 아이들은 먼저 와서 하늘을 보며 누워있는 순영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고, 순영은 몸을 일으키며 덤덤히 말했다.
순영) 왔냐?
지훈) ...몇시에 온거야?
순영) 몰라.
정한) ...너 설마 와서 잤냐?
순영) ..........
정한) 왜? 왜 여기서 잤어?
순영) 아 뭘 캐물어~! 그냥 여기서 잤다 왜!
정한) 관측 침대가 취침하라고 있는게 아니거든! 왜 여기서 잤는데!
순영) 몰라 새끼야 왔음 됐잖아!
순영이 벌떡 일어서더니 큰 보폭으로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그 모습을 아래에서 바라보던 지훈과 정한은 경악을 하며 중얼거렸다.
지훈) ...오늘 뭔 날이냐?
정한) 15월 20일.. 아무 날도 아닌데.
지훈) 근데 왜저래?
정한) 몰라.. 아 몰라! 야 어제 관측한 거 가져와봐. 그거나 다시 재보자.
정한이 뒷머리를 헝크러뜨리더니 지훈에게 말했고, 지훈 또한 정한을 따라 순영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제 책상으로 가 종이 뭉텅이를 집어 회의 테이블에 정한과 마주 앉았다.
순영) ...........
'근데요. 형도 과연 선배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천문학을 배우는 걸 원할까요?'
순영) ..........
'...정말 사랑하면요, 선배가 천문학도 되는 걸 바라기보단.. 원하는 걸 하게 하지 않을까요?'
어제 자신에게 말했던 여주의 말을 되새기던 순영은 책상에 완전히 몸을 기대 천장을 바라보고, 천문학실의 꽃인 천장의 하늘. 오늘 따라 그 하늘의 뿌려져있는 별이 더욱 빛나는 듯 했다. 지훈과 정한의 대화소리가 적막감을 깰 때, 순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니가 해. 니가 하라고.'
'......형.'
'나 같이 덜떨어진 새끼는 못하니까 니가 하라고!!!!'
'형 왜그-,'
'너 죽어도 천문학도 해라? 어? 내 거 다 뺏어간 니가!!!!!!'
나 대신 다 하라고!!!!!!
순영) ...........
순영이 살며시 눈을 뜨고 옅은 한숨을 뱉어냈다. 마른세수를 하던 순영은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정한) 필렌까지의 거리가 몇이랬지?
지훈) 마즈부터? 마즈부터는 안쟀어.
정한) 아 그럼 마즈 위치부터 찾아야겠, 야. 너 어디가?
순영) 야 나 오늘은 좀 빼줘라.
정한) 미친 뭘 새삼스레 안되는 걸 말하고 있어? 일로 와.
정한의 말에 순영은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곤 뒤돌아 둘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터벅터벅 향했다. 순영은 곧 지훈이 보고있는 책을 빼앗아 손을 얹더니 눈을 감았고, 정한과 지훈은 알 수 없는 순영의 행동에 벙쪄있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진 못했다. 순영은 금새 지훈 앞에 다시금 책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순영) 2.786 AU
정한) ...뭐?
순영) 마즈부터 필렌까지 거리. 2.786AU라고.
지훈) ..........
순영) 됐지? 나 오늘은 좀 빠질게. 피곤하다.
철컥- 탁!
지훈) ...쟤 오늘 좀 이상한데. 왜저러는거야?
정한) ...나야 모르지. 야 근데 거리 맞아?
지훈) 몰라 아직 마즈 위치도 못찾았어.
정한) 봐봐.
지훈이 다시금 책을 펼쳐 마즈의 위치를 확인 하곤, 필렌의 위치까지 파악하더니 깃펜을 들어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정한에게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2.786AU 맞아.
학교 구석에 자리한 작은 정원이었다. 구석에 있는 만큼 눈에 띄지 않아 아이들이 잘 찾지 않기도 했고, 낡은 정원에 올 바엔 학교 뒷 숲에도 신 정원이 있으니 차라리 거길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끼익-,
순영) ...........
순영이 철 문을 밀자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곧 익숙하게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곧 한쪽 팔을 들어 제 눈가를 가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순영) ...........
잠이나 자면 찝찝한 기분이 잊혀질까 싶어 순영은 어젯밤에도 들지못한 잠을 들기위해 애썼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리던 순영이 겨우 잠에 들었을 땐 한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울 때 하나의 발걸음이 정원에 들어섰다. 더이상 원우의 손을 잡도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 곳에 적응이 된 여주였다.
여주) ...........
순영) ...........
순영이 누워있는 소파 쪽으로 향하던 여주가 걸음을 멈추더니 손을 뻗어 순영의 눈가에 있는 햇빛을 가리고, 여주는 그렇게 한참을 서있었다. 꽤 팔이 아파올 때 즈음 여주는 손을 내렸고, 곧 반대 손에서 들고있던 책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그 손을 뻗어 햇볕을 가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영의 눈꺼풀이 살며시 올라갔다.
여주) ..........
순영) ..........
여주가 손을 내리고, 순영은 몸을 일으켜 앉아 서있는 여주를 올려다 봤다. 은은하게 퍼지는 햇볕과 마주친 눈빛, 분위기가 오묘했다. 먼저 입을 떼려던 여주를 막은 건 순영의 잠긴 목소리였다. 여주야.
순영) ..........
여주) ..........
순영) ...네 말이 맞아.
여주) ....네?
순영) 형은 날 싫어해.
여주) ..........
순영) 날 싫어해서, 날 천문학에 가둔거야.
형이 좋아했지만 못했던, 그 속에 날 가둔거야.
순영은 몇 년을 외면하던 현실을 어제 여주의 물음으로 인해 마주했고, 그 고통에 순영은 숨을 쉬기가 힘든 듯 호흡을 가삐했다. 고개를 숙이자 회색빛 시멘트 바닥은 순영으로 인해 짙게 물들었다. 그러자 여주가 엉거주춤 팔을 벌려 순영을 끌어 안았다. 여주의 품에 안긴 순영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주) ...........
여주의 손은 느릿하게 순영의 등을 토닥이고,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정한) ...눈 왜그래?
찬) 형 울었어?
승관) 얼굴은 또 왜 저런거야? 퉁퉁 부었네.
여주) ...........
순영) 밥이나 먹어..
지훈) 그렇게 학실 나가더니, 어디가서 울었냐?
순영) 밥 먹으라고... 관심 개많네 진짜.
승관) 우린 늘 관심이 많지.
순영이 숟가락을 허공에서 휘휘 저으며 관심 꺼져. 하고 무심히 말하자 아이들은 곧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지훈은 문득 생각난 듯 밥을 먹으며 순영에게 말했다.
지훈) 계산 맞았더라.
순영) 뭐.
지훈) 마즈부터 필렌까지.
순영) ..........
지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선 능력까지 썼냐?
정한) 그러게. 내가 차라리 능력이라도 써서 해보라고 할 땐 귓등으로 듣지도 않더니.
순영) 쓰면 뭐해. 어차피 휘발성이라 한시간이면 잊어버리는 거.
정한) 오늘은 왜썼는데?
순영) ...이제 안할거야.
정한) 뭘.
순영) 몰라.
정한) ? 이건 무슨 대화야
지훈) 아까 둘이 같이 오더니 뭐 들은 거 없어?
여주) ...별로..
순영) 뭘 물어~! 그냥 같이 있다 온 거 가지고!
지훈) 그냥 나왔냐? 둘이 손을 맞잡고-,
승관) 진짜? 왜? 원우형 별로야? 순영이 형이 더 좋은거야?
여주) 아니-,
순영) 내가 쟤보단 낫지~
원우) 좋을대로 생각해
순영) 췌 야 봐라 내가 훨 재밌지
승관) 재미는 형이 더 있긴 하지..
순영) 는? 는?! 야 다른 것도 꿀리진 않거든?
승관) 형 과목 점수부터 밀리지 않아?
순영) ...........
지훈) 이상한거 가지고 내기하지말고, 밥 먹고 가서 회의 테이블에 놓인 거 다 계산 해 놔.
순영) 왜!
지훈) 너 오늘 하나 밖에 안했잖아. 나머지 애들이 다했어. 가서 해 놔. 어차피 죄다 거리 계산 밖에 안남았어.
순영) 아 언제 다 해!
지훈) 아침에 한 것 처럼 하면 되잖아!
정한) 그래 아침에 하던 대로 해
순영) ...으씨.
순영이 입을 쭉 내밀곤 투덜 거렸고, 지훈과 정한은 들리지 않는 듯 다른 이야기거리를 꺼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곧 순영이 남은 음식을 다 먹더니 먼저 일어났고, 기다렸다 같이 가자는 정한의 말에 빨리 가서 계산 다 해버릴거거든! 하곤 사라졌다. 순영이 완전히 식당에서 보이지 않을 때, 정한과 지훈의 시선은 당연스레 여주를 향했다.
지훈) 진짜 무슨 일 없었어?
정한) 왜 울었는데?
여주) .....저도 잘 모르겠는데..
정한) 정원 갔더니 뭐하고 있었는데?
여주) 자고 있었어요.
정한) 그냥 깨우고 나온거야?
여주) ...아뇨. 안깨웠는데 그냥 일어났어요.
... 그리고 그냥 나왔는데.
여주의 말에 정한과 지훈은 고개를 갸웃 거렸고, 어쨌든 능력을 써서라도 도움을 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주는 그런 둘을 보다 다시금 숟가락을 움직였다.
'...너한테 뭐 말한 것도 없지만,'
'............'
'이것조차 애들은 모르니까... 아무말도 하지마.'
'............'
'...언젠가 말하게 되는 날이 올거야, 너한테도 애들한테도.'
...내가 그 일을 덤덤하게 입에서 뱉을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오겠지.
여주) ............
정원을 나올 때 자신에게 나지막이 말하던 순영의 목소리를 회상하던 여주는 옅게 자리잡는 목메임에 컵을 들어 물을 삼켰다. 부디 순영의 아픔도 물처럼 쓸려내려가기를.
16월 2일|
승관) 나 아직도 못믿겠음
여주) .........
승관) 15월부터 17월은 누가 시간을 빠르게 돌리는게 아닐까?
여주) .........
승관) 학기 중은 시간이 아주 기어가는데... 벌써 16월이라는게 안믿긴다. 인정?
여주) ..........
승관) 아, 넌 학기를 안다녀봐서 모르겠구나. 곧 알게 될거야. 시험기간은 겁나 시간 안간다?
어김없이 원우와 도서관에 있던 여주였는데, 영감이 부족하다며 대뜸 여주를 끌고 광장 서점에 나온 승관이었다. 책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고르며 여주에게 사담을 건넸고, 여주는 승관의 말을 전부 경청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승관을 빤히 바라봤다. 삼십분 가량을 서점에서 보내고 있었을까, 승관의 손엔 어느덧 다섯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여주) ....그거 다 살거야?
승관) ..그니까. 나 다 살 펄도 없어.. 이 중에 딱 두 권만 사야겠다. 뭐사지?
승관은 여주의 물음에 들고 있던 책을 창가 테이블에 올려놓곤 다시금 한 권 한 권 들춰보기 시작했다. 여주는 그런 승관의 옆에서 책을 내려다 봤다. 고심하듯 책을 보던 승관이 두 권을 다시 책장에 꽂아놓고 세 권을 들곤 카운터에 섰다. 졸졸 따라가던 여주는 승관을 따라 서점을 빠져나오고, 승관은 뒤돌아 종이봉투 속에 손을 넣어 책 한권을 꺼내 여주에게 건넸다.
승관) 자 선물.
여주) ....무슨,
승관) 뭐.. 입학선물 겸, 서점 같이 와준 겸?
여주) .........
승관) 아 받어 받어~! 내 손 쑥쓰러워지니께~!
여주) ....고마워.
승관이 갖고있던 책 중 가장 크고 두툼한 책이었다. 여주가 책을 조심스레 살펴보자 승관이 말했다.
승관) 이 학교에 다닐 동안 평생 볼 책이야. 1월부터 학기 시작하면 마련하라고 할 책 리스트에 있는 책.
여주) ..........
승관) 마법학 책인데, 낡아서 찢어지면 테이프 붙여가면서 볼 책이래. 정한이 형 거 보니까 테이프 덕지덕지 붙여져있긴 하더라.
여주) ..........
승관) 입학한 거 축하해. 우리랑 그거 가지고 같이 공부하자-!
여주) ..고마ㅇ,
승관) 이제 너도 나한테 헤어나올 수 없다는 말-씀-!
승관은 여주에게 팔짱을 끼곤 폴짝폴짝 광장을 뛰어다녔고, 그 힘에 나풀나풀 따르던 여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밖이란 위험한 곳이라고, 능력인은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능력인의 세계는 야만적이라며 자신을 가뒀던 부모가 원망스러워짐과 동시에 여주는 자신을 이 곳으로 안내하고 이 곳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게 해준 이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지훈) 어떤 미친놈이 뛰어다니나 했더니 역시 너네.
승관) 형! 여기서 뭐해?
지훈) 권순영한테 넥타이 빌려줬는데 잃어버렸대서 넥타이 새로 사러.
승관) 헐~ 그럼 순영이 형 펄로?
지훈) 아니, 내 펄. 개새끼.
승관) 왜!?
지훈) 걔 펄 없어. 모임 밥 먹듯이 빠져서 감점 많잖아.
광장을 나폴나폴 다니던 아이들은 넥타이를 사러 온 지훈과 마주치고, 지훈은 어쩌다 자신이 넥타이를 사게 됐는지 간략히 설명했다. 아이들의 펄은 보통 학교에서 부여하는데, 달마다 10만 펄씩은 기본으로 주지만 순영이처럼 감점이 많은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어 최소 1만 펄 밖에 받지 못한다. 순영이는 15월부터 17월은 보통 1만 펄을 받는 아이에 속했다. 사교모임을 개떡같이 다니기 때문이었다.
승관) 그래도 순영이 형 학기 중에 대회 상 많이 받아서 상금 많이 받잖아.
지훈) 그거 금방 쓰잖아. 우리 밥사주거나 우리 밥사주거나 우리 밥사주느라.
승관) 아 그렇네.
지훈) ..뭐 그래서 딱히 불만은 없어.
여주) ..........
지훈) ...왜?
지훈이 손에 펄을 들곤 손장난을 치자 여주의 시선이 지훈의 손에, 정확히는 허공에 뜬 펄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훈은 그런 여주에게 왜냐고 물었고, 여주는 금새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여주) ....아. 신기해서..
지훈) ..........
여주) ...멋있네요. 허공에 띄우는 거.
승관) 에이 야! 난 하늘을 날아~! 그럼 내가 더 멋있지!
여주) ....너도.
지훈) ..........
여주) 전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눈에 보이는 능력을 보면 아직도 신기하고, ..부러워서.
승관) ..........
지훈) ...그런가.
승관) ..........
지훈) 난 니 능력이 더 멋있는데.
여주) ...네?
지훈) 원래 보이지 않는게 더 멋있는거야.
네 자신을 감출 수 있으면서도 네 자신을 방어할 수있는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맞지?
지훈의 말에 승관도 곧 맞지 맞지!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지훈은 하늘 높이 펄을 던졌다가 확 낚아채듯 잡으며 여주를 향해 말했다.
지훈) 보이는게 다가 아니야. 너도 알 것 같은데.
여주) ...........
지훈) 예뻐해줘. 니 능력이잖아.
여주) ...........
지훈)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보자면, 염력은 디피티스의 능력인 중 30퍼센트가 갖고있대.
승관이의 비행은 20퍼센트.
지훈) 근데 네 능력인 이그노얼은 몇퍼센트인 줄 알아?
여주) ...........
3퍼센트.
물론 소수가 갖고있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만큼 희귀하고 소중하니까 예뻐해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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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넉점반의 함박눈 같은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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