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의 운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우연이 겹쳐진 것뿐이다. 행운이 항상 자신을 따라왔다고 해서 이길 확률이 90%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항상 50%이다. 이전의 결과는 현재의 운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간과하곤 한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도박에 쉽게 응하기도 하고. 믿고 있던 행운의 여신에게 배신당해 얼굴에 여러 갈래의 눈물길을 만든 채 살려달라며 매달리던 태형의 모습을 보는 정국의 온몸에 강하게 휘몰아친 감정은 카타르시스 그 자체였다.
" 예쁜 여자였는데, 누구 덕분에 빨리 죽어버려서 아쉽긴 하네요. "
콧노래를 부르던 정국이 태형을 내려다보며 실실거렸다. 여자의 죽음은 처음부터 예견되어있던 사실이었지만 정국은 일부러 태형에게 책임을 미뤘다. '누구 덕분에' 그 한마디에는 지는 사람이 살아남는 게임에서 태형이 졌기 때문에 여자가 죽은 것이라는 책임 전가의 뜻이 담겨있었다. 그 게임을 설계한 것도 룰을 만든 것도 정국인데, 이상하게도 여자가 죽은 건 정국의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태형의 탓인 것만 같았다. 불합리적인 정국의 말에도 태형은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살아남은 건 저고, 그 대신에 죽은 건 여자였으니까.
정국은 태형에게 신과 다를 바 없었다. 두 손에 목숨을 달랑달랑 쥐고 흔드는, 장난기 가득한 신. 꼭 태형에게 있어서만 신은 아니었다. 이제껏 이 공간에 들어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정국은 아마 신보다 한 계단 위에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신이 운명의 실을 길게 늘어뜨려 놓았다면 정국은 그 실을 매듭지었다. 길고 긴 실을 본래의 길이보다 짧게, 어쩌면 많이 짧게 매듭짓는 역할. 그게 정국이 이 공간에서 하고 있는 일이었다.
" 옷, 더러워졌네. "
아예 피를 뒤집어쓴 듯한 제 모습은 관심 밖인 듯, 여기저기 피가 잔뜩 튀어버린 태형의 옷을 흘긋 바라본 정국이 앉아있는 태형을 일으켰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여자의 손을 발로 툭, 툭 차버린 정국이 휘청거리는 태형을 잡아끌자 흠칫 놀란 태형이 정국의 손을 붙잡아세웠다.
" 자… 잘못 했어요,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
울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태형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정국이 애처롭게 매달리는 태형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 내가 뭘 어쩔 줄 알고 살려달래, 지금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징징거리지 마요. "
웃음을 머금었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태형이 울음을 삼키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전히 태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정국이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느릿하게 쓸었다. 새빨갛게 물든 손으로 문지르자 깨끗했던 부분까지 더 붉게 변해버리긴 했지만, 정국은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정국은 태형의 손목에 걸려있는 수갑을 잡고는 닫혀있던 문을 열어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 더러워졌으니까 씻어야죠. 그 꼴을 하고 방에 들어갈 거예요? "
태형과 함께 욕실에 들어간 정국이 쥐고 있던 수갑을 수건걸이에 걸어놓은 채 샤워기 물을 틀었다. 금세 뜨거운 김을 내뿜는 샤워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태형이 고개를 돌려 정국을 바라보았다. 정국은 이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전신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피에도 동요하지 않았고, 방금 사람을 죽이고 왔으면서도 오히려 태형보다 평온했다. 몇 명일까, 몇 명을 죽이면 저렇게 담담해지는 걸까. 문득 떠오른 궁금증이 태형을 자극했지만 질문하지 않았다. 정국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국이 태형의 뒤로 손을 뻗어 거울 옆에 매달린 수납장을 짚자 가깝게 붙는 몸에 태형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저를 올려다보는 태형을 보고는 몸을 숙여 말랑한 귓볼을 잘근거리다 핏자국이 즐비한 볼을 천천히 핥아올렸다. 태형의 앙 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작은 신음에 정국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 내가 씻겨줘야 되는 건가? "
" 아, 아니요, 제가 할게요. "
" 다 씻으면 불러요. 옷은 알아서 꺼내입고. "
아, 그리고. 작게 탄성을 내뱉던 정국이 화장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던 것을 멈췄다. 수납장에 동그란 머리통을 기대 가쁜 숨을 고르던 태형이 흡, 숨을 멈추고 눈가에 주름이 질 정도로 눈을 꼭 감으며 정국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김 태형 씨 모습이 김 태형 씨에게 가장 잘 어울립니다. 느릿하게 말을 내뱉던 정국이 문고리를 돌려 욕실을 빠져나갔다.
욕실 문이 묵직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서야 감았던 눈을 떴다. 계집년들처럼 기다란 속눈썹이 먼지 사이를 가르며 팔랑였다. 정국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몸을 빙글 돌려 거울 속의 남자와 눈을 맞췄다.
" 흐으, 아아… 아니, 야. 아, 니야. "
검붉은 피를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에 뒤짚어 쓴 남자의 모습은 평소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달랐다. 더러웠다. 한 사람의 생명을 갉아먹고도 이렇게 뻔뻔한 낯짝으로 살아있는 꼴이. 태형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 벅벅 닦아냈지만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에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손을 뻗어 거울 속에 남자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 왜… 왜, 안 지워, 지는 거야, 대체… "
미끄러지듯 매끄러이 차가운 타일 위로 주저앉은 태형이 주문처럼 연신 중얼거리며 손톱을 세워 얼굴을 긁어내렸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피가 태형의 손톱 사이로 파고들었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쌓아올렸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정국은 뻐근한 목을 빙글 돌리며 욕실을 빠져나왔다. 아, 귀찮게. 정국이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명줄을 손에 쥐고 쥐락펴락하며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지, 이런 귀찮은 뒤처리가 아니었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 웅덩이와 침대 위에 차갑게 식어가는 여자를 보고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기분에 평평했던 미간을 확 찌푸리며 시체가 돼 있는 여자를 들쳐업고 또 다른 욕실로 향했다.
더럽게 무겁네. 바닥에 여자를 패대기치며 작게 한숨을 내쉰 정국이 메스를 꺼내 아킬레스건을 깊게 베어내려다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 발목이 없구나, 수영 씨가. "
흰자를 희번뜩 까며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픽 웃음을 터뜨리며 피가 흐르는 발목 부근 꾸욱 밟았다.
" 죽어서도 배려심이 많은 여자네. 나 편하게 처리하라고. "
정국은 꼭 여자가 스스로 발목을 잘라 낸 것처럼 말을 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그게 정국이 살인을 뻔뻔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변명일 지도 모르겠다. 정말 작은 이유에 불과하지만.
커다란 고깃덩어리처럼 여자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욕실을 빠져나와 바닥을 훑어내기 시작했다. 원래 깔끔하게 처리하는 편이었다만, 태형의 혁명을 위해 일을 좀 크게 벌였더니 치울 게 많아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다시 본연의 색으로 돌아온 방이 마음에 든다는 듯 빙긋 웃으며 태형이 있는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김 태형 씨. "
" …네. "
" 다 씻었어요? "
네. 힘이 없는 듯 작게 대답하는 태형에 밖에 잠겨있던 잠금장치를 풀어내고 문을 열어젖혔다.
" 비에 젖은 개새끼처럼 왜 덜덜 떨고 있어요. "
물기도 닦지 않고 옷을 입은 탓에 하얀 티셔츠가 태형의 몸을 투명히 비추고 있었다. 정국은 살구색으로 색을 물들인 하얀 티셔츠를 가만히 바라보다 수납장으로 가 하얀 수건을 꺼내 태형의 머리를 덮었다.
" 피곤할 텐데 가서 좀 쉬어요. "
" … "
" 그렇다고 오늘 일은 잊으면 안 돼요. 역사적인 날이잖아. "
안 그래요? 수건걸이에 걸려있는 수갑을 풀어내 자신의 손목에 채우던 정국이 웃음을 터뜨리며 태형의 등을 툭, 밀어 욕실 밖으로 밀어냈다. 팔랑이며 밖으로 밀쳐진 태형이 깨끗해진 방을 보고 침을 삼켰다. …꿈인가. 작게 중얼거리던 태형의 코로 농도 짙은 혈향이 풍겨왔다. 그럼, 그렇지. 허탈한 웃음을 내비치던 태형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태형이 처음에 눈을 떴던 방에 도착하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 태형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대로 뒤로 풀썩 누웠다. 젖은 머리칼들이 침대 위로 흐트러지고, 더운 숨이 차가운 공기 중으로 섞여 들어갔다. 젖은 티셔츠가 태형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아… 느릿하게 오르내리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가 천천히 내려갔다. 태형의 수갑을 풀어 창살에 채우고 있던 정국이 태형의 모습을 보고 태형의 위에 올라탔다.
" 천성이 야한 건가. 아니면, "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형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었다.
" 안 죽으려고 발악하는 건가. "
그대로 상체를 숙여 태형의 입술을 머금었다. 태형의 젖은 머리칼이 정국의 이마를 간질였다. 색기가 흘러넘치던 방금 과는 달리 바들바들 입술을 떨어대며 정국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는 태형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살짝 틀어 오물거리던 입술의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태형을 내려다봤다.
" 기회를 줄게요. "
여전히 입술을 맞댄 채 정국이 작게 속삭였다.
" 제가 올 때까지 수갑을 다 풀면, 김 태형 씨도 풀어줄게요. "
제가 예쁜 사람한텐 약하거든요. 정국이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강하게 빼내며 공중으로 수많은 열쇠를 흩뿌렸다.
" 제한시간 한 시간. "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쇠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 행운을 빌어요. "
정국이 태형의 위에서 내려와 멍한 태형을 바라보며 빙긋 웃어 보이곤 방을 나왔다. 눈에 불을 켜고 혈안이 되어서 열쇠들을 맞춰보는 태형의 모습이 눈에 선해 큭큭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왼쪽 주머니에 남아있는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애정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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