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조금씩 떨어져 어깨를 적셨다. 무심결에 올려다 본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날이 좋았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환하게 빛이 났는데. 지금은 네가 울고 있는 걸까. 나때문에, 다시 울고 있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걸까, 승관아. 한숨이 짧게 흘러나왔다. 넥타이를 다시금 고쳐 메고 품안에 든 꽃다발을 내려다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구두굽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조금, 더, 여길 지나면 네가 있겠지. 익숙해진 길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자 환하게 웃고 있는 너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예쁘게도. 걸음을 멈추고 널 빤히 바라보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승관아.
이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매일 같이 듣던 승관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지루하게 손을 잡아주지 않아도 됐고 또,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다. 그게 묘한 해방감을 불러 일으켰다. 가끔씩 생각나던 빈자리도 그렇게 깊지가 않아서 천천히 한솔에게서 승관은 지워졌다. 각자의 길로 들어서 걷는 일이란 건 어쩌면 미리 이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피워냈다. 갈림길에서 헤어진 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다면 미약하게라도 남아있는 마음이 흔들릴 거 같아서. 그래서 더 더욱 돌아보지 않았다. 한솔은 취업을 성공했고 회사에서 잘 나가는 팀장 자리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갔다. 승관을 생각할 시간 조차도 없게 바쁜 하루들이였다.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오는 수 많은 여자들도.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도 너무나도 좋았고 또 좋았다. 어린마음이였을지라도 그땐, 그랬었다. 승관은 책을 냈다고 했다. 출판한지 3일 만에 베스트 셀러로 올랐고 가볍고 따뜻한 글은 묘한 뭉클함까지 불러 일으켰다고 한 사람은 말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의 일상에 파묻혀 서로를 잊었다고 생각했다.
헤어진지 한달이 넘어가는 시간이였다. 책을 출판하고 꼬박 일주일을 앓던 승관이 눈을 떴을땐 정말로 너무나 많은것이 변해있었다. 헤어짐이 그제서야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글에 집중하고 글에 한솔이를 대입해가며 제 감정을 토해내던 시간이 벌써 한달이나 넘었다는 사실이 피부에 닿아왔다. 하얀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선 승관이 커텐을 쳤다. 밝은 햇빛이 그제야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둠속에 가려져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다시 승관의 방 안에 피어 올랐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서있던 승관이 걸음을 옮겨 방을 빠져 나왔다. 한솔의 짐이 모두 빠져나간 집 안은 텅 빈 것처럼 공허했고 서늘했다. 두사람의 온기가 아닌 한사람의 온기가 집 안에 미약하게 빛난다는 건 그런 느낌이였다.
"누구라도 만나야 하려나"
집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니 외로움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탓에 기분은 자꾸만 지하를 뚫고 들어갔다. 승관이 가만히 텅 빈 티비 화면만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들었다. 네, 형, 저 지금 시간 되는데. 승관이 통화를 하며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 한 후에 신발장 앞에 서 거울을 바라봤다. 웃자, 부승관. 입꼬리를 애써 올려 웃어보이던 승관이 집을 돌아보다 현관문을 열었다. 급격하게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승관의 뒤로 문이 닫혔다. 그리고 거실에 위태롭게 달려있던 액자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솔씨. 제 어깨의 손을 올리며 이름을 불러오는 여자의 행동에 한솔이 몸을 돌렸다. 아, 지아씨. 점심은 먹었어요? 아뇨, 지금 먹으러 갈까 했어요. 같이 할래요? 지아의 말에 한솔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켓을 챙겨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먹을까요? 익숙하게 사무실을 빠져 나와 거리를 걷는 둘 사이엔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아 한솔씨 그 책 읽어 봤어요? 뭔 책이요? 그, 백일홍 피던 날인가. 지아의 말에 한솔이 살짝 표정을 굳혔다. 승관의 책을 이야기 하는 걸까. 가만히 생각하던 한솔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 아뇨, 아직. 한 번 읽어봐요, 진짜 좋던데. 고개를 끄덕인 한솔이 지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신호는 붉게 빛나고 한솔은 그저 지아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며 앞을 보고 있었다.
"어? 저 차..."
"....?"
지아가 한솔을 따라 시선을 앞으로 돌리다 이리저리 선을 넘나드는 차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지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차가 중앙선을 침범했고 그와 동시에 마주오던 택시를 들이 받았다. 자동차의 경적소리 타이어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거리를 울렸다. 여자들의 비명소리도 간간히 들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질 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한솔이 멍한 지아의 눈을 가리며 걸음을 옮겼을 때. 차 문이 열리고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한 사람의 얼굴은 한솔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부, 승관...? 한솔의 작은 중얼거림에 지아가 한솔의 손을 꽉 잡았다. 왜그래요? 네? 무슨일인데. 지아의 말이 귓가에 웅웅 거리며 울리는 것 같았다. 네가, 왜, 왜 그 차에. 한솔의 목을 누가 꽉 막듯 숨이 막혀왔다. 구조대원들이 달려와 승관의 상태를 확인하고 고개를 저으며 하얀천으로 승관을 덮는 거 까지 모두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한솔씨, 괜찮아요? 손을 잡아 내린 지아가 걱정스런 눈으로 한솔을 올려다 봤다. 119가 빠져나가고 사람들도 흩어진 그 자리에 한솔은 멈춰 서서 멍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곧. 한솔씨 전화... 제 핸드폰으로 쏟아지는 전화들이 한솔의 무의식을 깨웠다. 방금 본 게 승관이 맞다는 부정하려는 그 사실을.
급하게 응급실로 달려온 한솔에겐 그저 고개를 젓는 의사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없다고. 한솔이 힘없이 병원 바닥에 주저앉았다. 냉기가 제 몸을 타고 올라와도 그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떨어뜨렸다.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이럴순 없잖아. 원망스러울 만큼 냉담한 현실은 한솔의 눈물을 계속해서 받아냈다.
장례식장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하나같이 믿지 못하는 얼굴들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실신해버리신 승관의 부모님도. 모두 떠나간 자리에 한솔 혼자 앉아있었다. 검은 띠를 두른 액자 안에 웃고있는 승관의 얼굴이 한솔의 코 끝을 다시금 시큰하게 눌러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손을 내려다 본 한솔은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정말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네가 이렇게 떠나버리니까. 내가 정말로 돌아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파, 승관아. 한솔의 웅얼거림이 식장을 조용히 울렸다. 힘없이 져 버린 꽃은, 꺼져버린 촛불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그걸, 너무도 늦게 깨달아 버렸고.
"나, 왔어"
"...."
"보고 싶었지. 미안해, 늦어서"
승관의 사진을 보고 웅얼거리던 한솔이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꾸만 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승관의 사진을 제대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작은 꽃다발을 승관의 사진 옆에 놓아둔 한솔이 입술을 깨물었다 풀며 말했다. 네 책 벌써 베스트 셀러 된 거 알아? 그렇게 해보고 싶어하더니 이뤘네, 우리 승관이. 집에 다시 들어갔는데 네가 없으니까 되게 이상하더라. 혼자 있으니까 쓸쓸하고 또 외롭고. 너도 그런 기분이였을까 싶었어. 말끝이 떨려와 제대로 된 끝맺음을 맺지 못하고 흩어졌다. 천천히 한솔이 자리에 주저 앉았다. 여전히 웃고 있는 사진 속에 너는 아름다워서, 그걸 너무 늦게 깨닫고 다시 돌아온 내가 너무 미안해서 너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 미안해, 미안해, 승관아. 미안하다는 말이 계속 바닥으로 떨어지고 자리에 주저앉아 웅얼대던 한솔이 사진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다 말을 이었다. 그때, 너랑 헤어지던 날 봤던 그 꽃. 아카시아래. 아카시아래 승관아. 결국 눈물이 터져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가슴에 소용돌이치는 탓에 말을 더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겨우 진정을 하고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애써 웃어보인 한솔이 승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너한테 갈게. 사랑해 승관아.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승관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고. 승관의 사진 옆 놓여진 반지와 한솔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이며 빛을 냈다.
'
지혜야, 양구 놀러 갔을 때
밤에 같이 공원 산책했잖아.
그때 너가 꽃냄새 난다고
무슨 꽃이냐며 물었지?
그때는 몰라서
모른다고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그거 아카시아래.
아카시아래 지혜야.
말해주고 싶었다. 아카시아였다고
/한 트위터리안, 첫사랑에 관하여
너무 늦게 들고와서 죄송할 따름이에요 8ㅅ8 글이 잘 안써지는게 함정... 그래도 봐주시는 내님들 덕에 항상 힘을 냅니다. 사랑해요 하트X TALK X
[출처] 한 트위터리안의 첫사랑에 관하여=|작성자 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