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賢)국 순화(舜華)* 5년.
* 순화(舜華) : 무궁화. 여기서는 황제의 묘호를 일컬음.
눈이 온 세상을 뒤덮던 겨울, 황실의 소년은 첫 울음을 울었다. 현(現)황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난 뒤 처음 태어난 보배 같은 사내아이였다. 황실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첫 황자의 탄생을 축하했다. 황후는 소년의 이름을 석진(碩珍)이라 붙였다. 황제는 돌도 채 되지 않은 첫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태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큰 전쟁을 겪었다. 민(旻)의 침략이었다.
광활하게 퍼진 현(賢)의 영토는 민(旻)에 의해 먹혀들어갔고, 현의 군사들은 민에 의해 무수히 죽어갔다. 황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는 어린 황자를 보며 손을 쓸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다. 전쟁 중 궐에 침입한 민의 수장은 황제의 목에 칼을 대며 사대를 요구했다. 황제는 여태껏 나라를 지킨 조상들과 황실의 사람들을 위해 지조를 지켰다간 황실의 피가 흐르는 어린 황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을 알았다. 민의 수장은 현의 황제에게 날을 세우며 말했다. 첫 황녀가 태어나는 즉시 민에게 바치라.
현의 황제는 도리 없이 민의 요구를 수용했다. 민이 뺏은 영토 중 절반을 현에게 반환하며, 더 이상 서로 간의 전쟁을 치르지 않겠다는 조건 하에서였다. 태어나지도 않은 황녀는 민의 황후 내지 후궁의 자리를 차지할 운명을 탔다. 민이 돌아간 가운데, 약해진 현의 황제는 울음을 터트린 태자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몇 년 후, 황후는 태기를 띄었다.
민에게 공물을 전하고 오던 사신들은 민의 민심이 흉흉하기 이를 데 없으며, 백성들 사이에선 민의 황제가 폭군이 되어 무고한 이들을 죽인다는 소문마저 나돈다 보고했다. 현의 황제는 얼마 뒤 황후에게서 태어날 아이가 여자 아이가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이듬해 봄, 몸이 한 없이 약해진 황후는 아이를 낳은 뒤 숨이 끊겼다. 희고 고운 여자 아이였다. 어린 황태자는 차갑게 식은 제 어미를 보며 갓난아이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태자의 품에 안긴 갓 태어난 아이가 이내 민으로 보내질 운명임에 견고하게 감춘 슬픈 감정을 드러내 보였다. 황제는 곧 황후의 부고를 알리며 태어난 아이 또한 황후와 함께 세상을 떴다고 백성들에게 공포했다. 죽었다고 알려진 황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민이 알게 된다면 황실의 안위가 위험해진대도 아이를 지키려는 황제에게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궐의 모든 이들은 이 사실을 묵인해 비밀을 유지했으며, 어린 황태자는 민의 사람이 올 때마다 아기를 안고 자신의 거처인 ‘매화궁(梅畵宮)’으로 피신했다. 소년은 그곳에 숨으며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에게 읊조렸다.
‘……지켜줄게.’
내가 너를, 반드시.
봄눈이 흩날리는 차가운 봄날이었다.
* * * *
“그거 들었수? 앞집 최 씨 얘기!”
“최 씨?”
저잣거리는 찬바람이 붊에도 사람들로 붐비었다. 두꺼운 옷을 껴입은 두 중년의 여자는 소문을 발설하기 좋아했다. 이야기를 먼저 꺼낸 여인은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그 출처를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여인은 정신없이 소문을 퍼 나르며 옷감을 고르는 데에 열중이었다.
“저-기, 화양골 송 씨네 딸래미가 나인으로 입궐했잖수. 근데, 최 씨가 밤에 뒷산에 갔다가 그 송 씨네 딸래미를 봤다지 뭐요!”
“송 씨네 딸래미를?”
“그렇다니까! 그것도 죽은 채로 누군가에게 버려졌다고 하더이다!”
전해들은 건 여인이 맞았지만 그 진위는 본인도 잘 몰랐다. 하도 듣기에 망측해서 다른 여인에게 이야기를 꺼내는데,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그는 그저 행동에만 불과했다. 다른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그들은 그리 큰 신경을 기하지 않았다.
“근데, 그게 송 씨네 딸래미인 건 어찌 알았대?”
“몰래 최 씨가 가까이 가서 봤는데 딱 송 씨네 딸래미였다고 하지 뭐요? 것도 입이 귀까지 찢어져서 얼마나 끔찍했다고 하는지…!”
“어머어머, 망측하기도 하지!”
그들은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옷감을 만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색감이 어떠하고, 염색이 어떠한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한 여인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최 씨가 그러는데, 이번에 민(旻)으로 바쳐지는 공물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럽디다.
“정확한 건 나도 잘 모르지. 아무튼 그래서 글쎄, 최 씨가 화양골에…,”
“그 나인 시체는 아직 뒷산에 있다고 하오?”
“…어머, 깜짝이야!!”
막 최 씨의 이야기를 꺼내려던 한 여인이 어깨 너머에서 나직히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몸을 발작하며 소리를 꽥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란 남자가 길쭉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 이 사람도 참. 나도 놀랐잖소! 목소리는 장난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두 여인은 자신을 질책하는 남자를 잠시 멀뚱거리며 쳐다보다 옷감을 미처 고르지 못한 채 자리를 떴다. 남자는 여인이 사라진 길을 보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사법부 대사 댁 김 씨의 영식, 태형이었다.
“더 알려주고 가지, 왜 말을 하다 말고.”
“…도련님, 도련님!!”
민(旻)으로의 공물. 태형은 오래 전 전쟁 이후 현(賢)에서 꾸준히 민으로 공물을 보내고 있음을 떠올렸다. 그게 입이 찢어져서 버려진 나인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태형은 호기심이 많았다.
“왜 불러도 대답을 않으십니까! 한참 찾았습니다!”
“…걸음이 너무 늦구나.”
태형을 보필하는 식이었다. 식은 태형의 대답에 얼굴을 구겼다. 걸음이 늦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홀연히 사라지신 건 도련님이 아닙니까!”
“…….”
“헌데, 여긴 옷감 파는 곳이 아닙니까?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참이었다.”
“…에? 누구한테 말입니까?”
태형은 말없이 제 고른 치열을 드러내고 히-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식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도 없는데. 도련님은 가끔씩 이상하시단 말이야.
“그건 됐구, 얼른 가시지요. 늦겠습니다!”
“하여튼, 식이 넌 성질이 너무 급해서 탈이구나.”
태형이 식을 지나쳤다. 식은 한숨을 내쉬며 태형보다 조금 큰 체격으로 태형을 떠밀었다. 태형은 별 수 없이 저잣거리에 더 머물지 못하고 식의 떠밀림에 못 이겨 목적지 방향으로 질질 끌려갔다. 아, 재밌었는데…. 태형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사람을 좋아하는 태형은 가끔 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오늘처럼 식의 눈을 피해 몰래 다른 방향으로 길을 트는 것이 그 일례였다. 식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제 도련님을 감당하기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태형이 식에게 질질 끌려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태형은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걸음이 느리었다. 그들은 대궐로 향하는 중이었다. 태형은 집에서 궐 방향으로 나오기 전 사랑방에서 제 아버지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너도 이제 나이가 찼질 않느냐.’
‘…….’
‘물론 성급하게 결정할 마음은 없다. 시기는 네가 결정하거라.’
태형은 그 말을 들으며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결국 시기는 저가 결정할 권한을 주겠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뜻이었다. 어째서 나이가 찬 아들의 앞길을 다른 이가 결정해야 하는지 태형은 이유를 몰랐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태형의 발걸음을 따라 식이 발을 옮겼다. 태형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방금 전 두 여인이 말했던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나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걱정 말거라.”
황제와 태자가 누각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넜다. 오래 전 민(旻)과의 전쟁 당시 갓난아기에서 몰라보게 훌쩍 큰 석진이었다. 석진은 황제보다 세 걸음 정도 뒤처져 걸으며 제 아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석진은 황제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사내가 날이 지날수록 수척해짐을 알았다. 황제는 석진을 돌아보며 걱정의 시선을 거두라 말했다. 곁에는 내관도, 호위무사도 두지 않은 채였다.
“외부인을 입궐토록 하셨다 들었습니다.”
“……사법부 대사 댁 아들이 벌써 스물이라는 구나.”
“역시 혼사 자립니까?”
황제는 대답 대신 태자에게 웃어보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현(賢)국은 전통에 따라 황족 간의 혼사가 있을 적이면 그것을 궐내에서 처리했다. 현의 귀족도 신분에 따라 높은 자제와 혼인을 하길 바라지만, 그들이 수가 소수인 만큼 불필요한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함이었다. 황제가 안 보이는 곳에서 혼인을 치를 시 관직을 사퇴할 것, 동시에 황실에 큰 벌금 혹은 다량의 곡식을 물 것. 모든 황족들은 해당 법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으나 손해를 볼 만한 조건은 없었기에 그것을 담담히 수용했다. 몇 달간은 사법부 대사 댁 아들의 혼사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헌데, 전 씨의 막내아들을 불렀다고?”
“예. 대대로 황실에 충성을 기한 무인 집안이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만, 무슨 일 있는 게냐.”
“…공주의 곁에 두고 싶습니다.”
긴 다리를 건너던 황제가 아들의 말에 걸음을 멈추곤 고개를 돌렸다. 석진은 제 동생과 함께 얼마 전 의원이 다녀간 일을 떠올렸다. 공주 마마께오서 외기가 부족한 듯 하옵니다. 늙은 의원이 말한 외기(外氣)는 바깥 기운을 일컬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황녀에게 외기의 결핍은 석진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석진은 밖으로 보낼 수 없는 애달픈 운명을 지닌 황녀를 위해 계책을 마련했다. 바깥 양기를 지닌 호위무사를 황녀의 곁에 두는 일이었다. 여태 또래 친구를 만나지 못한 동생에 대한 오라비의 걱정이기도 했다.
‘……지켜줄게.’
석진은 혼자 한 언약을 여태 저버리지 않았다.
“오늘 매화궁으로 오라 전갈을 했습니다.”
“…잘했구나.”
석진이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아침 하늘이 청명했다.
민과의 전쟁, 그로부터 24년이 흘렀다.
* 사진 출처
⑴ 텀블러
⑵ (합성사진) 인스티즈 익명예잡
-
안녕하세요 선바람입니다.
첫글이라 떨리네요. 아우 떨려
#REMEMBER 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