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TO M - 사랑하는 여인에게
₁
“ …안녕, 경수야. ”
“ 그래, 안녕. ”
강의실로 들어가려 자판기 앞에서 살짝 비켜났는데 내 옆으로 익숙한 향이 스쳐지나갔다. 빠른 반사신경으로 옆을 바라보니 거짓말처럼 네가 서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느낀건지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던 네가 힐끔 옆을 돌아봐 나를 쳐다봤다. 마주친 눈에 어쩔줄 몰라하는데 텀을 두고 나를 향해 인사를 하는
너를 보다가 똑같이 인사를 해줬다. 슬쩍 웃는 너의 눈에는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이슬이 맺혀있는 것 같았다.
“ ㅇㅇ야, 박교수님이 부르셔! ”
“ …어?, 어! 금방갈게! ”
자판기 앞에 선 네가 동전을 꺼내들려는데 같은 강의실 동기가 너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했다. 다급한듯 책을 들고있던 손을 꽉 쥐어보이던 네가 다시 지갑속에 동전
을 집어넣고 아직까지 멍하니 뒤에 서있는 나를 흘끗 보다가 스쳐지나갔다. 다시 드는 너의 향기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내 손에 들려있던 커피가 이미 다 식어버린 것
같았다. 아직 남아있는 커피를 다 마신 뒤 종이컵을 구겨 휴지통에 넣었다.
₂
아직까지 하늘은 푸르렀다. 푸른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메고 있던 가방을 열어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하늘을 향해 초점을 맞추고 셔터버튼을 사정없이 눌렀다.
찰칵거리는 작은소음과 함께 카메라를 내렸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하늘을 찍은 사진을 찬찬히 보고있는데 다음 컷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이 컷을 넘기면 너의 얼굴
이 보일 것 같아서. 괜히 네 얼굴보면 옛추억이 되살아날 것 같아서 카메라를 꺼버렸다.
“ 도경수! ”
“ ……. ”
“ 왜 먼저가고 지랄이야. ”
벤치에서 일어나 집에 갈 준비를 하고있는데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학교에서 금방 나오던 백현이 급하게 뛰어오며 내 옆자리에 섰다.
내가 먼저 학교를 빠져나간게 마음에 들지않는 듯 툴툴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던 백현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새로사귄 여자친구와 카톡을 하는지 징징거리는 휴대폰
에 실없이 웃던 백현이 패드를 치느라 바빠보였다.
“ 가자, 빨리. ”
그런 백현을 보다 기다려줄까 싶었지만, 그 뒤로 학교를 빠져나오는 네 모습에 백현을 재촉하며 먼저 발걸음을 뗐다. “ 아, 잠깐만. ” 이라며 기다려보라는 듯한 제스
쳐를 취하던 백현도 뒤를 보고있는 내 시선에 살짝 고개를 틀어 뒤를 바라보더니 아무말없이 높이 들고있던 휴대폰을 내려 나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피해가
는 것도 이제는 지친다.
“ 어? 백현아 안녕, 경수도 있었네. ”
“ …어, 안녕. ”
네 친구의 목소리에 모르는 척 지나가려던 백현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다 펴며 뒤를 쳐다봤다. 가볍게 손목을 흔들어주고 미련없다는 듯 바로 앞을 보던 백현이 저와
조금 멀찍히 떨어져있는 내 옆에 찰떡같이 붙었다. 너의 눈치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럴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를 부르든 말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알림소리를
내며 징징울리는 휴대폰을 들어서 보기라도 할텐데 끄덕없이 바지주머니에 휴대폰을 꽂아넣던 백현이 너와 네 친구모습이 더이상 보이질않자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 아직이냐? ”
“ …뭐가. ”
“ 성장통. ”
“ 지랄. ”
헤어짐의 슬픔을 단순한 성장통이라며 제멋대로 해석하던 백현이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를 쳐다보지도않고 휴대폰만 죽어라 노려보는 백현을 보다 혀를
끌끌 찼다. 너는 대체 언제 겪어보냐? 뒷말을 하지않고 그냥 대충 흘러가듯이 물으니 휴대폰을 보던 백현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아니꼽게 쳐다
보고있던 시선을 돌려 앞만 바라보자 곰곰히 생각하는 듯 해보이던 백현이 다시 휴대폰을 바라봤다.
“ 나는 죽어서까지도 안 겪을것 같은데. ”
“ 왜? ”
“ 나를 원하는 여인네들이 너무 많아서. ”
“ 아, 꺼져. ”
실없이 내뱉는 백현의 말에 조금 수긍을 하다가 표정을 굳혔다. 그 말의 뜻은 네가 잘났다는 말이네. 하찮다, 하찮아. 흥미없는 표정으로 익숙한 길을 이리저리 둘러보
다가 보이는 빌라에 깊게 한숨을 쉬었다. 빨리가서 씻고 자고싶다. 들은 강의가 영 마음에 차지않았다. 아침부터 너와 마주해서 그런가….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며
목을 돌리다가 계단을 올라섰다.
“ 아! ”
“ 미친새끼, 앞 좀 보고다녀. 그놈의 스마트폰만 죽어라 보더니 잘한다. ”
“ 닥쳐…, 아, 존나 아파. ”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나와는 달리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서 앞도 제대로 안 보던 백현이 결국 계단에 정강이를 박았다. 그런 백현이 한심하게 보며 먼저 계단을 다
올라서자 그제서야 휴대폰을 내리던 백현이 잔뜩 짜증이 묻어난 얼굴로 계단을 올라왔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침부터 늦게 일어났다는 걸 증
명이라도 하는듯이 집안이 난장판이였다.
“ 아침에 나올때 이거 치우고 나오라 했잖아. ”
“ 늦었는데 그게 눈에 차겠냐? ”
“ 하여튼 한심한 새끼. ”
혀를 끌끌차던 나를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보던 백현이 쌍엿을 날리며 쇼파에 드러누웠다. 야, 치우고 누워. 내 말에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던 백현이 눈을 감았다.
이 새끼랑 룸메이트를 하는 게 아니였어. 마땅히 지낼곳이 없다며 재워달라는 백현의 말에 몇일만 재워줄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게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
며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성격이 맞다가도 안 맞아서 크게 싸우고 가출한 일도 일상다반사였는데 이제는 싸우다가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 연락해볼까? ”
“ 누구한테. ”
“ ㅇㅇㅇ. ”
“ 미쳤냐, 하지마. ”
“ 왜? ”
잔뜩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고 있는데 짓궃은 표정으로 약올리듯이 묻는 백현에게 쓰레기통을 던질 뻔 했다. 하면 죽어. 주먹을 들어보이며 말을 하자 하나도 안 무섭다
는 듯 혀를 쑥 내밀며 메롱을 하던 백현이 쇼파등받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철 좀 들어라, 변백현. 거실바닥에 놓여져있는 컵라면을 들어 쓰레기통에 넣으며 말을 하자
“ 즐. ” 이라며 유치하게 대답하는 백현을 보다가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제법 쌀쌀해지는 날씨에 열어뒀던 창문을 닫고 커텐을 쳤다. 일찍 나간다고 정리를 못 해뒀던
침대를 정리하고나서야 편한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베개맡에 던져놓았던 휴대폰을 들어 홀더를 켰다. 몇주전만 해도 너와 내 얼굴이 화면 가득 차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 배경화면이 내 얼굴을 비췄다.
“ 야, 라면 먹을래? ”
“ 아니. ”
“ 하나만 끓인다. ”
“ 어. ”
다짜고짜 방문을 열고 문에 기대어 물어보던 백현이 안 먹겠다는 내 말에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내가 먹겠다고 그러면 라면 끓여달라고 떼를 썼을텐데
내가 안 먹겠다니 저가 끓여야된다는 생각에 귀찮은듯 해보였다. 내가 아닌 상대방의 사진을 찍는 걸 워낙 좋아해서 내 휴대폰 갤러리는 항상 가득 차있다. 나도 아닌,
남이. 변백현이, 강의실 동기들이, 활짝 웃고있는 친구들이, 그리고 …네가. 갤러리를 열어 사진을 뒤적이는데 보이는 네 모습에 심장이 덜컥 했다. 한참을 멀거니 쳐다
보고 있는데 맛있는 냄새에 결국 변백현이 끓였구나 생각하다 방을 나왔다.
“ 안줄거다, ”
“ 누가 뭐래냐?, 마음껏 쳐먹어라. ”
한입 달라고 할까봐 저가 끓인 라면을 뒤로 숨기는 모션을 취해보이던 백현을 보다가 못미더운 표정으로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들었다. 나를 경계하는 듯 쳐다보는
백현에게 엿을 날려주니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백현의 반응이 재밌었다. 놀리는 맛은 쏠쏠한데, 사람 귀찮게 하는 건 싫단 말이지. 거실에 나와 TV를 켰다. TV를 키
자마자 보이는 만화에 흠칫했다.
“ 네가 미취학아동이냐? ”
“ 왜. ”
“ 투니버스 좀 그만 봐,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유치하지. ”
“ 씨발, TV취향으로 또 시비거네 저게. ”
“ 됐다, 너랑 뭔 말을 하냐. 라면이나 먹어라. ”
식탁에 앉아 라면을 거의 들이키듯 먹고있던 백현이 금세라도 거실로 뛰쳐나올 듯 해보였다. 그런 백현에게 간단한 비웃음을 흘려주다가 채널을 돌렸다. 재미도 없다.
왜 변백현이 미취학아동처럼 투니버스만 보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변백현과 똑같은 놈이 되기는 싫어 교양프로그램이 나오는 채널을 틀었다가 뭔소리
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다시 영화채널로 돌렸다.
“ 야, 전화온다. ”
“ 내꺼냐? ”
“ 어. ”
저의 휴대폰을 꽉 쥐고 내게 흔들어보이던 백현이 내 방을 가르켰다. 쇼파에 널부러져있던 몸을 일으켜세워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위에서 징징울리는 벨소리가 들렸다.
…어? 휴대폰을 들자 액정에 보이는 너의 이름에 멈칫했다. 전화를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하고있는데 뚝 끊기는 전화에 멍하니 있다가 휴대폰을 들고 백현이 있
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 왜? 누군데? ”
“ ㅇㅇ이. ”
“ …헐. ”
라면을 그릇에 담아 김치를 찢어 집어들던 백현이 멍한 표정으로 김치를 식탁에 떨궈뜨렸다. 새끼야, 먹고 닦아라. “ 그래, 등신아. ” 뭘 그런거가지고 그러냐는듯한 눈
길을 보내던 백현이 삐뚤어있던 자세를 바로잡고 물었다.
“ 뭐래? ”
“ 못 받았어. ”
“ 와, 호구새끼가 여기있네. ”
“ 전화받아서 뭐라그러냐. 할말도 없는데. ”
“ 네가 걸었냐? 걔가 걸었지. ”
그러네…. 내가 건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해가지고는…. 다시 전화를 걸까 싶어서 휴대폰 홀더를 켜들었다가 다시 잠궜다. 그런 내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백현
이 헛웃음을 날리며 라면 국물을 떠다마셨다. “ 할거면 해. ” ……. “ 너도 미련남잖아. ” ……. “ 혹시 몰라, 걔도 미련이 있어서 전화 걸었을지. ” 전화를 걸어보라는 백
현의 말에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 전화해서 등신같은 말 하지마라. ” …내가 너냐? 병신아.
₃
ㅡ “ 여보세요? ”
“ …어, 나야. ”
ㅡ “ 아, 응. ”
“ 부재중으로 떠있길래 전화했어. 무슨 일이야? ”
ㅡ “ 아, 박교수님이 저번에 네가 들고온 증명사진 잃어버렸다고 하셔서. ”
“ …아. ”
ㅡ “ 기록해야되는데, 내일 학교올때 하나만 더 들고와달래. ”
“ 응, 알았어. ”
오랜만에 길게듣는 네 목소리를 듣다가 최대한 천천히 대답을 했다. 이제 대충 용건이 끝난 것 같아 전화를 끊어야할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들리는 네 목소리에 아
쉬움이 남았다. 3분도 안되는 이 짧은 통화내용이 몇주전까지만 해도 10분, 20분은 기본으로 훌쩍 넘겼었는데…. 멍하니 있다가 전화를 끊으려하는 네 목소리에 끊을세
라 급히 말을 했다.
“ …잘 지내? ”
ㅡ “ 아…, 응. 너는? ”
“ …나도 그냥 그럭저럭 지내. ”
ㅡ “ …그렇구나. ”
“ ……. ”
ㅡ “ ……. ”
“ 남자친구는…, 생겼어? ”
ㅡ “ …아니. ”
“ 아, 그래…. 그럼 쉬어. 전화해줘서 고맙고, 내일 보자. ”
ㅡ “ …아, 경수야. ”
“ 응? ”
ㅡ “ 시간되면 다음에 점심이라도 같이먹자. ”
숨이 멎을 뻔 했다. 너에게는 단순한 인사치레와 같은 말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게 얼마만큼이나 내 심장을 쥐락펴락하는지 모를정도였다. …그러자. 떨리
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어느새 라면을 다 먹었는지 거실 쇼파에 앉아서 TV를 보고있던 백현이
내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궁금한 듯 물었다.
“ 왜 전화한거래? ”
“ 교수님이 증명사진 잃어버렸다고 다시 갖다달래서. ”
“ 헐, 그게 다냐? ”
“ …다음에 점심 같이 먹기로 했어. ”
머뭇거리며 말을 하다가 백현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백현의 손에 들린 리모콘을 뺏어들었다. “ …대박, 언제? ” 몰라 나도. 시간나면 연락달라 그러더라. 그나저나 왜 이
거보고있어, 재미 하나도 없는데. 이리저리 채널을 들쑤시다가 투니버스를 틀었다. 멍하니 나를 보던 백현이 귀여운 더빙소리가 나는 TV를 힐끔 쳐다보다가 어이가 없다
는 듯 웃었다,
“ 아, 이 병신새끼가 나한테 뭐라 그러더니 저가 쳐보고 있네. ”
“ 닥쳐, 소리가 안 들리잖아. ”
“ …또라이새끼. ”
무어라 욕을 하는 백현의 목소리와 모습은 더이상 들리지않았다. 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너의 전화 한 통에. 어쩌면 나는 네가 다시 내게 돌아와줬으면하고 바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네가 진절머리가 날까봐 그 한통화를 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이제는 전날 내가했던 잘못들을 뉘우치고 너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갈 것 이다.
두려움에 싸여 보지못했던 너의 마음을 봤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