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15
w. 채셔
나는 울음을 참으며 민윤기의 머리를 거듭 쓸었다. 우리 왜 이렇게 엉망이에요, 선생님…. 민윤기는 의자에 올곧이 고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형광등에 눈이 부셨는지 눈을 감는 민윤기의 표정은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지쳐보였다. 다시금 감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민윤기는 그렇게, 수술실에서 피로 칠갑을 한 선생님이 나올 때까지 내 무릎에 베고 누워있었다.
"선생님, 우리 세경이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민윤기는 허리를 튕겨 급하게 일어났다. 수술복에 이리 저리 튄 피가 세경이에게서 난…. 나는 우물쭈물, 민윤기의 뒤에 섰다. 민윤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선생님은 무게를 잡고 말했다. 수술은 급한대로 잘 끝났습니다. 내부 장기 출혈과 간이 찢어진 부분은 곧바로 지혈시켜 살려냈구요. 비장을 적출했지만,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의사 선생님은 떨고 있는 민윤기의 손을 꽉 잡으며, '수술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은 하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선생님의 말이 웅웅거리며 귓속에 들어왔다. 세경아, 살아줘서 고마워…. 점점 지친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나는 꾸역꾸역 울음을 삼켰다. 의사 선생님이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고 자리를 떠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민윤기는 제 자리에, 나는 내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했다.
곧 세경이가 이동용 침대에 실려 나왔다. 세경이는 편안해보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세경이에게 다가갔다가 다시 물러났다. 민윤기가 세경이의 볼을 쓸었고, 나는 그것을 멍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가도 돼.' 한 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민윤기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간호사를 따라, 세경이의 손을 꼭 잡고 복도로 나섰다.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왠지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없는, 간호사도 떠나고 의사도 떠난 수술실 앞 대기석에 털썩 앉았다. 참아왔던 눈물이 그제야 터져나왔다. 다 엉망진창이야, 진짜.
민윤기가 고백을 했다. 이제야 들어맞는 퍼즐들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민윤기가 편지를 보낸 이유. 편지에서 저를 버려달라고 한 이유. 나를 죽일 듯이 무너뜨리면서도 나를 지켜낸 이유. 정국이와의 연애에 밸런스가 무너지고 있던 민윤기의 모습. 그것은 결국 '사랑해서.' 라는 간단하고도 아픈 이유였다. 민윤기가 나를 사랑했다. 사랑…했다.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굴어요…. 사랑한다는 그 고백마저 나를 무너뜨렸다.
당신을 왜 놓지 못하게 만들어요, 항상….
나는 민윤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주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야누스
나는 병원에서 3일을 있었다. 세경이 깨어나고, 민윤기에게 말을 하고, 크게는 아니지만 슬쩍 미소 짓고, 그 때와 같이 책을 읽고, 내가 오기 전까지 회복 중이던 세경의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나는 숨어서 지켜보기만 했다. VIP라는 명목으로 어느 빈 병실에 들어있기도 하고, 하루는 대기실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어제는 할아버지의 친구라던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의사 휴게실에 들어가있었다. 휴대폰은 방전된지 오래였다. 그리고 오늘, '오빠 일하러 가. 세경이 너, 또 병원 나가면 안 돼.' 하고 다정히 말하는 민윤기을 따라 학교로 나섰다.
다시 돌아온 학교는 매우 조용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일제히 영어 책을 펴놓고 열심히 암기를 하고 있었다. 아…. 나는 어렴풋이 체육대회가 끝나고 시험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자습하자, 하고 말했을 때 아이들이 잘 들어주었던 것을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은 제 자리에 앉아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들어가 내 자리에 가방을 턱 올리고 필기구를 꺼냈다. 챙겨온 것은 없었다. 아이들의 눈길이 내 행동을 따라 움직였다. 곧 아이들은 술렁였고, 나는 그 술렁임에 아무런 반응 없이 자리에 앉았다. 정국이 잠시 나를 지켜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국에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정국은 곧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삐쳤구나, 정국이….
곧 담임 선생님인 국어 선생님이 들어왔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잠시 보고,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을 조금 듣다가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저 학교에서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저번에도 생각했듯이 정국이 없었다면 나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 선생님마저 나를 탐탁치 않은 눈길로 보는 것을 보니 소문이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이 할아버지 귀에도 들어갈까. 할아버지가 민윤기의 소중한 세경이를 뺏어갔으니, 이제는 민윤기가 할아버지의 소중한 손녀 딸을 뺏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새삼스레 팔에 소름이 끼쳤다. 민윤기는 언제부터 이 많은 일들을 계획해온 걸까….
"자, 시험에 나오는 내용들이니까 꼼꼼히 외워둬라."
선생님은 '문법 정리'라는 종이 뭉치를 아이들에게 나눠주었고, 곧 종이 쳤다. 아이들은 우리 얘기를 하는 것에 지쳤는지, 아니면 얼핏 봐도 삼십 장은 넘어보이는 문법 정리장에 기가 눌린 것인지, 우리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담임 미친 거 아니야?', '시험에 이걸 다 어떻게 내?' 하고 혀를 내둘렀을 뿐. 정국아, 하고 불렀음에도 정국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정국에게 조금 더 가까이 의자를 옮겼다. 정국은 그래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정국아, 보고 싶었어….' 하고 말했지만, 정국은 나를 슬쩍 보고 말았을 뿐이었다. 문득 두려움이 엄습했다.
"정국아, 왜 그래…. 응?"
책상에 올려진 정국의 손을 황급히 잡았다. 곧 정국은 나를 응시했다.
"우리 그만하자."
나는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정국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정국아…. 나는 정국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설마 정국이가 나를…. 정국아, 버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나는 눈을 깜빡였다.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거야, 여긴 꿈이야…. 불안함에 입술을 연신 뜯었더니 기어이 입술에 피가 맺혔다. 나를 보는 정국의 눈에는 어떠한 의미도 담고 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문법 정리장으로 시끌벅적한 동안에 나는 정국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정국은 순순히 따라와주었다. 도착한 곳은 결국 실험실이었다.
"보고 싶었어, 정국아…. 응?"
"나 이제 네 말 안 믿어."
정말인데. 정말 정국이 보고 싶었는데. 미동 없는 정국에게 안겼지만 정국은 제 팔으로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무서워, 제발….' 하고 정국의 품에다 대고 웅얼거렸지만 정국은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정국의 품에서 떨어졌다. 웃지 않는 정국의 얼굴이 무섭다.
"기억 못 하나본데, 네가 나 먼저 버렸어."
"그런 게 아니…."
"네 방식, 질려. 사람 작작 갖고 놀아."
"정국아…."
"너는 나빠…."
정국아…. 나는 급기야 울먹였다. 사람 작작 갖고 놀아, 라는 말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내 나는 떨기 시작했다. 정국은 웃어주지 않았다. 내 손도 잡아주지 않았다. 네 보조개가 보고 싶었는데, 네 웃음이 보고 싶었는데. 민윤기에게서 받은 상처를 모두 꺼내놓고 치료받고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보다. 혼자가, 됐다. 아무도 내 옆을 지켜주지 않아. 나는 주저앉았고, 정국은 나를 일으켜주지 않은 채 문을 거칠게 열고 복도로 나가버렸다. 버려졌다. 이렇게. 정국아, 네가 나를 버리면 어떡해…. 곧 떠올랐다. 정국이와 한 대화가.
'네가 나 떠날 것 같아서 무서워.'
'나 어디 안 가….'
'그럼 나도 어디 안 가.'
나는 흐트러진 눈길을 가누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넋나간 꼴로 정국이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 노력했다. 나를 받아줄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비참한 스토리의 시발점, 할아버지. 내가 망쳐놓은, 나를 원망하는, 자살 시도까지 한 세경이. 나를 버리고 떠나버린 정국이. 그것도 아니라면, 나를 미워하는, 그리고 미워해야 하는 민윤기. 그러나 뼛속까지 사랑하는 민윤기. ……나를 받아줄 사람은 이제 없다.
'네가 무너져버렸으면 좋겠어.'
'…나 벌써 이렇게 무너졌잖아요….'
'아니, 넌 안 무너졌어.'
나 이제 진짜 무너졌어요….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어.
처음 엄마에게서 떨어진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야누스
도저히 정국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교실에 책가방을 모두 놔두고 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집에 와 수면제를 챙겼다. 집에 틀어 박혀 있기는 싫었다. 저택은 너무나도 커서, 나를 항상 주눅들게 만들었으니. 차라리 병실에 있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나는 편한 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누워서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지. 무엇을 하면 할수록 혼자가 되었다는 비참함이 몰려올 게 뻔했다. 나는 환자니까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 하고 나 혼자 위로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다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의사 선생님에게로 다가갔다.
"저, 일주일만 병원에 있어도 될까요."
"특별한 사유가 없으시면…."
"머리가 너무 아파요. 밥도 못 먹구요."
나는 막무가내로 우겼다. 의사는 결국 내가 쓰던 방을 내주었다. 결국 이렇게 내줄 거면서, 힘만 뺐다. 간호사의 안내로 병실로 따라와서는 병실복으로 갈아입었다. 간호사들의 눈빛이 차가운 게, 내가 언짢은 듯 싶었다. 원래 여기에 오면 안 되는 불청객인 것처럼. 나는 익숙하게 그 눈빛을 받아내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렸다. 다른 간호사가 포도당 주사라며 손목에 주사를 찔러 넣었다.
간호사가 나가고,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천장만 바라보았다.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아주 행복한 꿈을 꾸고 싶다…. 민윤기가 나와도 좋고, 정국이 나와도 좋고, 세경이 나와도 좋으니 누구든 나를 보고 예쁘게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한 번이라도 행복하게, 아무런 걱정 없이, 아무런 아픔 없이 웃고 싶다. 이내 가지고 온 가방에서 수면제를 꺼내어 알약 몇 개를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그렇게 잠에 빠졌다. 꿈은 저번에 꾸었던 꿈과 같았다. 나와 민윤기가 바다에 빠지고, 정국인 방파제에 서서 그것을 아프게 쳐다보는. 나와 민윤기는 무너지고 있고, 정국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아니, 구해줄 수 없었다. 행복한 꿈을 꾸고 싶었는데…. 문득 햇빛이 쨍쨍했던 하늘이 남색으로 바뀌어있음을 알아챘다. 지금 쯤이면 민윤기가 퇴근했을까…. 나는 침대 옆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고 그것을 핸드폰에 연결시켰다. 곧 알림음이 울리면서 핸드폰이 켜졌다. 나는 진동이 미친듯이 울리며 알림을 뱉어내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국이, 부재중 전화 63통'
「너 왜 안 와」「또 민윤기랑 같이 있냐」「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병원이야?」「병원으로 갈까?」「민윤기랑 같이 있지마」「민윤기 정리하라고 했잖아, 내가」「나 너 미워지려고 해」「제발 전화 좀 받아」「걱정시키려고 작정했어?」「어디 있는 건데」「왜 병원에도 없어」「나 좀 화나게 하지 마」「헤어지자는 거야?」「김여주」「너 지금 민윤기 때문에 이래?」「나 안 떠난다며」「왜 폰 꺼져있는데」「너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게 취미야?」「제발」「내일은 꼭 학교 와」「문자는 봤어? 너 어디 있는 거야」「학교 안 올 거냐 진짜」「제발 좀」「내가 널 좀 믿게 만들어봐」「너 진짜 나 갖고 놀아?」「애들이 사진 들이밀어도 나 너 믿었어」「근데 니가 어떻게 이래」「전화 좀 받으라고 제발」「민윤기랑 도망이라도 갔어?」「너 나랑 숨바꼭질 해?」「집에도 없고 병원에도 없고 어디로 간 건데」「보고싶어」「보고싶어 여주야」「제발 좀 와」「나 아프게 하지 말고」「민윤기랑 놀아나는 거 봐줄게 그러니까 내일까지는 돌아와」
나는 슬프게 웃었다. 내가 정국일 버렸다. 나는 정국이를 버렸고, 정국이도 나를 버렸다.
정국을 다시 잡을 수가 없어서, 나는 이불 속에 숨어 끅끅대며 한사코 울어야만 했다.
야누스 16
w. 채셔
나는 필사적으로 울었고, 또 필사적으로 눈물을 그쳤다. 위태롭게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꾹꾹 눌렀다. 민윤기 선생님. 주체하지 못할 눈물 한 방울이 뚝, 하고 흘러내렸다. 귀에 핸드폰을 대고, 끊임없이 울리는 신호음을 들으면서 나는 세상이 끝난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게 당신이 말하는… 무너짐의 정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서 더 떨어진다면 나는 버텨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곧 신호음이 끊기고 한껏 잠긴 목소리가 '여보세요.' 하고 들려왔다. 나는 핸드폰이 구원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핸드폰을 꽉 부여잡았다.
"선생님, 나 병원에 있어요…."
"…그래서."
"무서워요, 무서워서 죽겠어…. 조금만 같이 있어주세요…."
민윤기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기다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불 속에서 떤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뜨고 이불을 목까지 내렸다. 역시나 민윤기었다. 민윤기. 민윤기…. 민윤기는 무표정으로 다가와 간이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거리는 너무 멀어. 나는 몸을 창가 쪽으로 조금 더 당겼다. '이리 와주세요, 선생님.' 지쳐버린 목소리. 너무 지친다. 혼자 모든 것을 견뎌내기에는 너무 밤이 길었다.
민윤기는 아무 말 없이 침대에 제 몸을 누였다. 나는 민윤기의 품에 파고들었다. 민윤기만의 냄새가 난다. 정국도 정국만의 냄새가 있었는데. 민윤기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나는 그것에 무한한 안도감을 느끼며 더욱,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정국만 나에게 허용된 줄 알았다. 민윤기는 도무지 쥐어지지가 않아서 정국만이 내게 남은 존재일 줄만 알았다. 그러나 정국은 떠나고, 민윤기는 남았다. 결국 나에게 남은 존재는 민윤기 밖에는 없는 셈이었다. 내 사랑 중에 몇 조각들이 정국의 앞으로 건너갔고, 정국을 상실한 지금 그 조각들은 방향과 의지를 잃은 채 혼자 우두커니 섰다. 비어버린 공간이 아팠다. 아파하는 조각들이 가여웠다. 결국은, 내가 가여웠고 내가 아팠다.
"선생님, 정국이가 날 버렸어요…"
"…그래."
"이게 선생님이 원하던 건가…. 이렇게 힘들고 아픈 게."
울먹이다 결국은 울어버렸다. 민윤기는 제 손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무너진 파편들이 이리저리 다 박혀버렸다. 끅끅, 하며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자 민윤기는 제 손을 내 목 밑으로 집어 넣어 꽉 안아주었다. 민윤기의 체온이 너무 따스했다. 너무, 너무 따스해서 그만큼 안타까웠다. 민윤기가 간간이 내뱉는 '괜찮아.' 라는 말은 정말로 썩은 밧줄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줄 밧줄로 여겨질 만큼 따사로운 온도였다. 이제 그만 울고 싶은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나는 민윤기에게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안아주세요, 선생님…."
민윤기는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제 엄지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괜찮아…. 그리고 익숙하게 병원복을 벗겼다. 밖에서 누군가가 사진을 찍고 있어도 상관 없었다. 이제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민윤기의 키스가 결국 눈물에 몽땅 젖어버렸다. 되돌려지지 않는 현실은 추악스럽기 그지 없었다. 할아버지가 '윽….' 하고 신음을 내며 세경이에게 파고드는 모습.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난 저택,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창고에 쳐박혀 울음을 삼키며 커터칼로 손목에 상처를 내던 모습. 결국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커터칼로 인한 아픔으로 죽지 못해 안달하던 모습. 민윤기를 만나 애태우던 모습. 정국을 만나 애정을 받던 모습. 세경의 지금 모습. 정국이 웃던 모습. 정국이 나를 버리던 모습. 여러 모습들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민윤기는 천천히, 아프지 않게 나를 안았다. 오직 민윤기와 나만이 존재하는 시공간을 향해 달려가는 이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에게 남은 유일한 민윤기. 민윤기. 당신. 내가 사랑했던, 내가 사랑하는….
야누스
창가로 달빛이 가득 들어와 민윤기의 얼굴을 비췄다. 나는 쉽게 잠에 들지 못하고 잠든 민윤기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팔베개를 베고 누운 나는 몸을 일으켜 민윤기의 볼을 쓸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갰다가 뗐다. 모든 시름을 놓고, 모든 아픔을 놓고 잠에 빠져든 민윤기의 모습은 믿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고, 순수했다. 갖지 못해 안달했던 나날들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가 곧 사라졌다. 허탈하게 웃으며 자꾸만 아래로 꽂히려는 몸을 곧게 세웠다. 나는 한 번 더 곧게 뻗은 콧날을 손가락으로 쓸고, 옆에 놓여져있던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한 번도 내 손으로는 연락해보지 않은 전화번호였다. 번호도 외우지 않았고, 전화번호부에도 없는 이름이라 나는 한참 동안이나 문자함을 뒤져야 했다. 드디어 찾아낸 문자에 박힌 번호를 눌렀다. 번호가 뜨고, 나는 전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린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손을 꽉 쥐었다.
'여주야….'
"할아버지."
'…여주 네가.'
할아버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고, 몇 초의 침묵 뒤에 할아버지는 물어왔다. 당신을 용서했냐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거냐고. 나 또한 조금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네.' 하고. 할아버지는 놀란 듯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흐윽,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심장이 저릿했다. 할아버지, 이제까지 세경이 병원비 대준 거 알아요. 수술비도. 정말 그랬다. 그토록 가난했던 민윤기와 세경이 세경의 병원비를 감당해낼 능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게다가 1인실 룸은 일반인이 감당해내기에는 너무나도 큰 금액이었다. 학교에다 민윤기 꽂아준 것도 알아. 정국이랑 나, 재적 막아준 것도 알고. 이제껏 모든 스토리가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은 우습게도 할아버지였다. 스토리를 망쳐놓은 것도, 흘러가는 것도 모두 할아버지에게 달려 있었다.
'잘못했다, 내가….'
나는 녹음 버튼을 꾹 눌렀다. 할아버지의 고해를 모두 녹음해둘 작정이었다. 잘못했다, 내가…. 세경이를 그렇게 가진 건 결코 내 의지는 아니었어. 글쎄 연 의원이 나한테 부탁을 하지 뭐냐. …어린 아이와 하는 동영상을 가져오라고. 이왕이면 손녀 딸이랑 하는 영상을…. 그런데 도저히, 나는… 나는 너를 범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남은 내 소중한 손녀 딸을 어떻게…. 그래서 친구를 데려오라고 했던 것 뿐이었어…. 연 의원한테 그 동영상 보내주고 병원 지분 받아서 세경이 돌봐주고 윤기도 뒤에서 밀어줬는데…. 이제 와서 말하면 뭣하겠냐만, 미안하다, 아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어, 이 할애비가…. 할아버지는 울면서 말했지만 오히려 말투는 담담했다. 잇따라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할아버지의 사과를 나는 한동안 듣고 있기만 했다.
"할아버지…."
"그래, 여주야.'
"세경이, 양녀 딸로 들여주세요. 민윤기도…."
할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평생을 돈 걱정 없이 살게, 회복하면 우리 집보다도 넓은 저택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살게, 그렇게 할아버지가 입양해줘. 할아버지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내가 하는 마지막 부탁이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곧 결연하게 긍정의 의미로 내 말을 받아들였다. 연 의원이라면 로리콤에 미친 놈으로 구속된 그… 국회 의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도했다. 그렇게 미워하던 할아버지는 사실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다독일 수라도 있으니까. 아주 질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속죄할 줄 아는 인간이라고 두둔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할아버지와의 통화를 끊고 저장된 파일을 민윤기에게 전송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민윤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용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심장 소리가 쿵쿵 울리는 게 귀로 전해져왔다. 나는 다시 문자를 누르고, 정국의 이름을 입력했다. 무슨 말을 칠까 고민하다가,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눌렀다. 문자가 완성되고 나는 전송을 꾹 눌렀다. 정국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지금은 새벽이니까. 나는 대신 눈을 감고 정국의 얼굴을 그려냈다. 그리고 희미하게 빛에 싸여있던 정국이 그 윤곽을 드러냈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정국은 붙잡으면 다시 돌아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붙잡지 않기로 한다. 잡아 내 옆에 두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것이 세상에 나갈 준비를 마친 정국에게 더 아픈 길임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곧 뒤돌아 수면제 통을 집어들고 뒤돌아 민윤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의 끝은 당신이에요. 결국은 당신이에요. 나는 또다시 민윤기의 입술에다 내 입술을 머금었다. 민윤기에게 피떡이 된 내 마음을 새기는 것처럼. 수면제를 입 속으로 털어놓았다. 턱하고 숨이 막혀 탁자 위에 올려져있던 물을 급하게 잡아들어 꾸역꾸역 넘겼다. 민윤기의 팔에 그대로 누웠다. 아래에서 민윤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떠올렸다. 예전 날들을. 그리고 지금을. 민윤기의 카타르시스를, 나만이 볼 수 있는 모습을. 그 모습은 꽤 오래 내 머릿속에 머물렀다. 나는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쥐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맥빠지게 웃었다. 곧 몸속 가득 약 기운이 퍼졌다. 소름 끼치는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나를 감쌌다. 눈을 떴는데도 천장은 희미했다. 고개를 힘겹게, 아주 힘겹게 돌려 민윤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도 민윤기는 흐릿하게만 보였다. 이내 숨이 턱 막혀 쉴 수가 없었다. 목을 그러쥐고 나는 숨을 쉬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몇 번을 끅끅된 뒤에 나는 포기하고 손을 내렸다.
민윤기과 나만이 존재하는 공간….
나는 눈을 편안하게 감고 희미하게 웃었다.
야누스
꿈을 꾸었다. 민윤기와 내가 손을 잡고 아무런 걱정도 아픔도 없이 웃고 있는 꿈을. 민윤기는 내 손에 깍지를 껴 고쳐 잡았고, 나는 민윤기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민윤기는 나에게 고개를 돌려 '사랑해.' 하고 말했다. 곧 온화한 입술이 내 입술을 찾아들었다. 눈부시게 예쁜 봄이었다. 여기저기 널린 복숭아나무가 몸을 흔들려 잎을 이리저리 날렸다. 입술을 떼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민윤기의 머리에도 꽃잎이 붙어있었다. 나는 잎을 떼고 다시 목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여기저기 반짝이는 보석들이 길 위에 뿌려져있고 언덕 위로 올라가면 구름이 거기에 있었다. 몇 번을 해도 아쉬울 키스를 미뤄두고, 나와 민윤기는 손을 꼭 잡고 언덕 위로 올랐다. 기분 좋은 봄바람을 맞으며.
<完>
덧붙임
야누스는 번외가 진정한 끝입니다.
아픈 글, 견뎌줘서 고마워요.
함께 달려주신 60여 분, 너무 고맙습니다.
메일링은 번외가 끝난 후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정말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