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Boy!
: 나의 희망을 받아주세요.
24
주말인 탓에 영화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엘레베이터 역시 조금의 틈도 없이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엘레베이터로 밀려 들었고, 아이는 마주 잡은 내 손을 제 엄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물었다. ‘괜찮아?’ 비좁은 공간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이의 단정한 앞머리는 벌써부터 땀에 젖어 헝크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부터 더위를 잘 느꼈기에, 겨울에도 땀을 잘 흘리고는 했다. 그래도 오늘 한파주의보였는데... 몸이라도 아픈가 싶어 그에게 더워? 하고 물으니, 그는 남은 손으로 제 이마를 닦아내며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정국이었다.
정국이는 아침부터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으면 됐을 일도, 굳이 옷을 갈아 입겠다며 제 집에 들렸다 다시금 나를 데리러 왔다. 게다다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는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뭐하냐고 물으며 좀 보려고 할 때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제 주머니에 핸드폰을 감췄다. 옷차림 역시 캐쥬얼한 평소보다 훨씬 단정했다. 불편하다며 자주 입지 않는 검은색 슬랙스에 흰 셔츠를 입은 아이였다. 날도 추운데, 갑자기 무슨 정장이래.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오늘이 무슨 기념일인가 싶어, 그의 생일과 우리의 사귀었던 날짜를 떠올렸지만 아무런 날도 아니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나는 영화관으로 오는 내내 곁눈질로 아이를 살폈다. ...이상한데. 진짜.
아이는 갑자기 내 손을 놓고는 내 옆에서, 내 뒤로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뭐해?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잠시만’ 하며, 내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양해를 구한다. ‘저 조금만 옆으로...’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봤다. 내 뒤에 서 있던 남자는 그의 행동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별 다른 말 없이 자리를 옮겼다.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 귀에 속삭였다. ‘귀’ 아. 아마도 뒤에 서 있던 남자의 입술이 내 귀 언저리에 닿는 위치였나보다. 그건 또 언제 봤대.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나는 내 허리를 감싼 아이의 큰 손을 내 손으로 덮었다. 고마워. 하며.
영화는 책의 내용대로 흘러갔다. 활자들이 전해주지 못했던 부분들이 영상으로 그려졌다.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여서인지, 중반부부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영화에 깊이 집중하지 못한 것인지, 나의 작은 움직임에도 제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고 물었다. ‘울어?’ 나는 아이의 어깨에 기다며, 슬퍼.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는 내 어깨를 제 손으로 끌어안으며, 말한다. ‘울지마. 속상해.’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더욱 울적해져 왔다.
결국 영화의 결말부에서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렸다. 남자 주인공의 편지가 그대로 나올 줄이야. 쉽게 그치지 않는 눈물에 아이는 ‘사람들 다 나가고 나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아이가 건네준 휴지로 눈가를 닦으며,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너무 슬프잖아.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엔딩 크레딧마저 끝이 나고,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제 가자. 하며. 정국이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제 손을 마주 잡는 내 손에 흠칫 - 하고 놀랐다. 그를 놀릴 심산으로 뭐야. 왜 놀라. 하고 토라진 척을 하자, 아이는 영화관을 벗어날 때까지 내 옆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오늘은 진짜 싸우면 안 되는데..."
"...이게 싸우는 거야?"
"아니, 그. 막 삐지고 그런 것도 안 돼. 오늘은."
"그런 게 어딨어! 내 마음이지 -"
"...오늘은 안 돼. 내일 해."
"오늘 진짜 이상ㅎ"
"내일 전부 다 해."
"..."
"오늘은 안 돼."
아이는 함께 갈 곳이 있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하게 오늘만큼은 절대 싸워서도, 삐져서도 안 된다며 단호하게 말을 건넨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말도 안하고 누나, 누나 - 하며 애교를 부렸을 정국이였는데. 나는 장난으로 시작한 거였는데... 아이의 행동이 제법 서운했다. 그래도 정국이가 이러는 이유가 있겠지 싶어 -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다 해도 된다니까. 내일 가만 안 둬야지. 정말.
*
정국이와 함께 간 곳은 그의 고등학교였다. 아이가 제대하고는 처음 오는 공간이라, 사뭇 기분이 들떴다. 오랜만이다. 나는 그의 손을 놓고 운동장을 향해 뛰었다. 동시에 뒤에서 아이가 '넘어져, 조심해' 하고 말을 뱉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볼을 스쳤지만,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모든 걸 녹여주는 듯 했다. 기분 좋아. 나는 몸을 돌리고, 제법 멀리 떨어진 아이에게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정국이가 제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제 긴 다리로 몇 번 뛰더니, 금새 내게 닿았다. 정국이는 주머니에 넣었던 제 손으로 내 양 볼을 감싸며 물었다. '춥지?' 나는 내 볼을 감싼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덮으며, 아니. 하고 웃어보였다. 정국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보다, 무심하게 말을 뱉었다. 정말 무심하게. '예쁘다. 진짜.' 하고. ...얘는 무슨 그런 말을 아침 인사 하듯이 해. 아이의 말에 부끄러워지는 건 오늘도 내 몫이었다. 나는 그의 허리께에 손을 두르고, 그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아이는 익숙하다는 듯, 나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얼마나 안겨 있었을까. 문득 이 곳에 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이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다. 여기 왜 왔어? 정국이는 나의 질문에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이미 불이 다 꺼진 학교를 가리켰다.
"저 교실 보여?"
"어디?"
"제일 끝에 오른 쪽에서 네 번째."
"...아. 찾았다. 보여."
"저기가 나 고등학교 3학년 때 반."
"아 -"
"신기한 건, 그 밑으로 쭉 내 2학년 때 반, 1학년 때 반 다 있어."
"진짜?"
"응. 신기하지."
"그럼 너 다 같은 반이었네?"
"어. 전부 다 4반이었어. 1학년, 2학년, 3학년 다."
아이는 제 반을 소개하고는, '좀 걸을까?' 하고 물었다.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는 마주 잡은 손을 제 주머니에 넣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나 원래 되게 내성적이야."
"...거짓말."
"진짜야. 낯도 많이 가려."
"근데 나 처음 만난 날에 막 그렇게 그러냐?"
"내가 뭘."
"집 앞에 막 찾아오고, 어?"
"그 날 자기는 고백했으면ㅅ"
"에베베. 안 들린다."
"이럴 때만."
"...그래! 내가 너 먼저 더 많이 좋아했다! 그래서 고백도 먼저하고, 그랬다. 그게 뭐!"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짜증나."
"오늘은 그 말 안 돼."
"아니, 아까부터 왜 - "
"비밀."
아이는 주머니 속의 내 손을 단단히 마주 잡으며 말했다. 자신은 원래 내성적이고 낯도 많이 가린다고.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이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 그걸 모를 리가. 나는 애써 모르는 척 하며, 도발 아닌 도발을 던졌다. 그런 아이가 첫 날부터 우리 집 앞에 왔냐며. 그러자 아이는 져 줄 생각이 없는 건지, 내가 먼저 고백한 순간을 이야기 한다. 그게 또 사실이 아닌 건 아니라, 더 이상 우겨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꽤 당당하게 그게 뭐 잘못 됐냐는 식으로 되물었다. 정국이는 그런 나를 보며 태연하게,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하며 나를 놀려왔다. ...짜증나. 무의식 중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오늘은 그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왜! 자꾸 물어보면 비밀이라고만 하고...! 오늘따라 비밀이 가득한 그였다. ...비밀. 비밀. 아.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나 처음 만났을 때."
"응."
"나 그 골목길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뭘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았지."
"에이. 말도 안 돼."
"...뭐가."
"나 따라왔었어?"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사실 처음 묻는 질문이 아니였다. 몇 번이고 그에게 물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때마다 좋은 일도 아닌데 이야기해서 뭐하냐며, 대화를 돌렸다. 이번에도 또 그러겠지. 아이는 제 큰 손을 내 머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한 번만 말할꺼니까, 잘 들어.' 하고 대답한다. 뭐야 - 오늘은 말해주는 거야? 나는 그의 말에 알았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을 먼저 했다고."
"..."
"먼저 좋아한 게 아니야."
"..."
"내가 더 먼저."
"..."
"좋아했어."
"...뭐ㅇ"
"그러니까 따라갔지."
아이는 제 말을 끝으로 내 머리를 헝클였다. 고백을 먼저 했다고, 먼저 좋아한 게 아니라는 말. 어딘가 그와 닮은 말이었다. 화려한 단어, 기교 없이도 이렇게 큰 마음을 전할 수 있구나. 나는 간질거리는 마음에 괜히 그의 손을 잡으며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럼 처음부터 나 기다렸어?"
"아니. 처음에는 그냥 갔어."
"그럼?"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는데, 그냥 갔지."
"응."
"근데 거기에 뭘 두고 온 거야."
"뭐?"
"아빠가 준 엠피쓰리."
"...엠피쓰리?"
"그걸 두고 와서 다시 간 거야."
"...아."
"결국 못 찾기는 했는데, 대신 다른 거 찾았으니까 괜찮아."
"다른 거 뭐?"
"뭘 뭐야."
"...에이. 설마."
"너지."
아버지가 준 엠피쓰리 때문에 다시 돌아왔었구나. 사실 아이의 입에서 엠피쓰리라는 단어가 흘러나왔을 때, 무언가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명확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낯설지가 않았다. 정국이는 분명 나한테 처음 해주는 이야기인데. 왜지? 그는 결국 엠피쓰리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동시에 다른 걸 찾았으니 괜찮다고 말을 이었다. 나는 설마하며, 대충 예상이 가는 그의 대답을 부정했다. 그건 하지 말자. 누나 심장 녹아서 없어질 것 같아... 하지만 아이는 담담하게, '너지.' 하고 대답한다. ...얘가 언제부터 이런 말을 잘했지? 아이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였다. 아이는 저 혼자 낮게 웃으며, '이제 다른 데 가자.' 하고 내 손을 단단하게 잡아왔다.
*
"뭐 사먹게?"
"잠깐만 앉아서 기다려."
아이와 함께 온 곳은 편의점이었다. 우리 집 근처 편의점, 내가 아이에게 고백했던 편의점. 그는 나를 편의점 앞 의자에 앉히고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오늘 진짜 이상한데 -. 잠시 뒤 편의점에서 나온 아이는 내게 맥주를 건넸다.
"나 먹으라고?"
"어."
"갑자기 뭐야. 너는?"
술 먹자는 말도 없었으면서! 나는 그에게 재차 확인하기 위해, 나 먹으라고?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캔까지 따서 내 손에 쥐어준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갑자기 뭐야. 너는? 하고 물으니, 그는 제 손에 들린 음료를 흔들어보인다. 뭔데.
"뭔ㄷ... 야!"
"왜."
아이의 손에 들린 음료는 다름 아닌 흰 우유였다. 나는 뭐냐고 다 묻지도 않은 채로, 그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는 태연하게 왜. 하고 우유 팩을 깐다.
"너가 무슨 아직도 열아홉인지 알아?"
"열아홉만 우유 먹으라는 법 있나."
"...왜 난 술이고, 넌 우유야."
"난 오늘 술 안 돼."
"됐다. 됐어 - 술이나 먹을래."
"다 먹지 마. 한 모금만 먹어."
"그럼 왜 줬어!"
정장에 우유라니. 옷차림은 교복에서 정장으로 업그레이드 됐는데, 왜... 음료는 그대로야? 정국이에게 왜 나는 술이고 너는 우유냐며 따지자, 그는 자신은 오늘 술이 안 된다고 말한다. 어이없어. 진짜. 나는 오늘 하루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그였기에 포기하고 술이나 먹을래 - 하며, 한 모금 술을 들이켰다. 그러자 아이는 한 모금 마신 내 맥주캔을 가져갔다. 한 모금만 먹으라며. ...진짜 왜 이래. 종일 답답한 그였다. 나는 그에게 제법 짜증이 났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그럼 왜 줬어!" 하고 언성을 높였다. 정국이는 제 앞에 우유만 다 마시고는, 제게 언성을 높이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고마웠어."
"갑자기 뭐래. 또! 오늘 진짜 이상ㅎ."
"그 날, 먼저 용기내서 내 손 잡아줘서."
"..."
"내 이야기 들어줘서."
"...새삼스럽ㄱ."
"나한테 고백해줘서."
"...그건 빼. 창피하니까."
"왜 빼. 제일 예뻤는데."
아이는 뜬끔없이 내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먼저 제 손을 잡아줘서 고맙고, 제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고, 마지막으로는 제게 고백해줘서 고맙고. 오늘 하루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와 내가 시작했던 때로 이야기가 돌아갔다. '고백'이라는 단어가 그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순간 부끄러워진 내가, 그 날의 일은 빼라고 이야기하자 그는 태연하게 '왜 빼. 제일 예뻤는데.' 하고 대답한다. 아니, 그런 말을 할 거면 좀 예고라도 해주던가. 찬바람이 불어오는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내게로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대며 묻는다. '부끄러워?'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내 두 손을 치우고, 제 한 손으로 내 눈을 가린다. 그리고는 가볍게 내 입술을 물었다가 멀어진다.
"부끄럽지 말라고, 눈 가려줬어."
"...그래. 고맙다."
"그럼 이제 가자."
"어딜 또 가. 시간이 몇 신데 - "
"이제 진짜 마지막."
"어디 갈 건데?"
"가면 알아."
*
정국이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곳이었다. 시간이 꽤 흘러, 지금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 장소였다. 지금 카페 문 닫을 시간인데? 나는 그에게 영업시간이 끝났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카페의 문을 열었다.
"뭐야. 열쇠 왜 있어?"
"들어가자. 춥다."
*
카페 안에 들어가자 마자 아이는 어디선가 담요를 가져와 내게 건넸다. '감기 걸려' 하며. 은은한 조명이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곳의 창문은 통유리로 한 쪽 벽면이 전부 다 창문이었다. 그 창 너머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와 내가 카페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마실 것을 만들어 오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늦은 밤에 함부로 이곳에 들어와도 되는 건지, 아이가 주방에 막 들어가도 되는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나는 그가 전해준 담요를 덮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다. 적당히 따뜻한 난로도 내 앞에 있고.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날 위해 마실 걸 만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창문 밖으로는 눈까지 내리고 -
행복이 스며들었다.
*
아이는 내 앞에 음료를 내려 놓았다.
"처음 만들어 봐."
"뭔데?"
"핫초코."
"...난 또 뭐라고."
"뭐야. 뭘 기대했는데."
"뭐, 캬라멜 마끼야또나 민트초코칩 플렛치노 같은거?"
"...배울게."
"뭐야 - 장난이야. 고마워. 잘 마실게."
처음 만든 음료라며 꽤나 자신 없게 말하는 그였다. 뭘 만들었기에. 그에게 뭔데? 하고 묻자, 그는 굳은 목소리로 '핫초코' 하고 답한다. ...아니. 핫초코를 지금 처음 만든다고 긴장한 거야...? 나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귀여움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괜히 장난스레 그가 만들지 못할 법한 음료의 이름을 댔다. 그러자 아이는 소심하게 '배울게.' 하고 답한다. 귀여워 진짜.
정국이는 음료를 마시는 내내,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 내가 묻는 말에도 한 박씩 늦게 답하고,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눈 좀 보라고 말하자 - 그제서야 눈을 본 건지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벽 한 쪽이 다 창문이고 눈이 저렇게 펑펑 내리는데 못 봤어?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을 못차려. 정국아."
"...티났어?"
"완전."
"..."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냐는 내 물음에 대답 대신, 심호흡을 하는 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올곧은 시선으로 나에게 향했다.
"나 지금부터 더 정신 없을거야."
"왜?"
"아니, 평생 이렇게 정신 없을 수도 있어."
"왜 그래 - 진짜 무슨 일 있어?"
"지금부터 그냥 대답하지 말고, 들어줘."
"...뭔데."
"그냥 들어줘, 알았지?"
"알았어."
나는 미래가 두려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까. 그래서 그 누구랑도 앞으로를 약속하지 않아. 그 약속을 무책임하게 깨버리는 사람이 되기 싫거든. ...아빠처럼.
그런데 너를 만나고부터, 자꾸만 너랑의 앞 날을 그리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이러나 싶어서 스스로를 자꾸 다그쳐도, 내 미래에는 자꾸 너가 서 있어.
너를 빼고 그린 미래에도, 결국은 너가.
그 그림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어. 신기하게도.
그래서 어제 엄마를 만나고 왔어. 엄마한테 나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고, 앞으로를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고 싶어서. 새아빠랑 새로운 가족들이랑 아빠 없이 잘 살아가는 엄마가 미운 날이 정말 많았는데, 그래도 나한테 가족은 엄마 뿐이잖아. 그래서 말하러 갔어. 그런데 내가 말하자마자 울더라. 엄마가.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엄마가 한참 울고 있을 때, 새아빠가 집에 왔어. 내가 온다고 뭘 그렇게 두 손에 가득 사서. 그런데 엄마가 우는 걸 보자마자 손에 있는 거 다 떨어트리고, 엄마를 안아주더라. 나는 엄마가 우는 걸 보고만 있었는데. 새아빠는 엄마를 안아주더라. 그리고 엄마는 못봤겠지만, 나는 봤어.
새아빠도 같이 우는 거.
엄마가 뭐 때문에 우는 지도 모르면서, 그냥. 정말 그냥 엄마가 우니까, 그 이유 하나로 같이 울더라.
그 때 생각했어.
새아빠는 아빠가 보내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엄마한테 미안해서, 더 행복하라고. 더 많이 웃으라고. 자기대신 보내준 사람.
나한테 아빠가 보내준 사람은
몇 번을 생각해도
누나, 너 같아.
아빠가 매 순간 환한 너를, 나한테 보내줬어.
그래서.
내가 감히,
너와의 미래를 꿈꾸고 있어.
나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아이의 말을 끝으로, 눈물을 흘렸다. ...뭐야. 진짜. 이러는 게 어딨어. 전정국.
정국이는 제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줬다. '울지말라니까. 나 진짜 속상해.' 하며.
아이는 언제 감춰둔 건지, 제 의자 밑에서 꽃다발을 꺼내들었다.
"당신은 내 심장에 깊이 새겨져 있어요."
"..."
"처음 걸어 들어온 그날부터 그랬어요."
"..."
"세상 그누구보다 환한 웃음과 가끔씩 예측되지 않는 당신의 사소한 행동과 말릴 수 없는 호기심들까지."
"...야."
"이 순간이당신 인생을 아무리 바꾸어놓더라도, 내 인생은 당신으로 인해 훨씬 더 많이 바뀌었다는 걸 잊지 말아요."
"..."
"내 생각은 언제나 해주세요. 당신이 나로 인해 웃는 그 순간이, 내 존재가 가장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니까."
"..."
"그리고그냥 잘 살아요. 그냥 살아요."
"...뭐야아."
"나랑."
"..."
"잘 살아봐요. 우리."
"...무슨."
"결혼해주세요. 저랑."
아이는 어제 밤 내게 속삭이던 글귀를 떨리는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가 내게 닿을 수 있도록 전해주었다. 그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내 앞에 무릎을 꿇고는 꽃다발을 건넸다. 조금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꽃다발을 안아들며, 대답했다.
좋아요.
*
"그거 무슨 꽃인지 알아?"
"아니이. 뭔데?"
아이는 내 옆에 앉아, 내 어깨로 제 머리를 기댔다. 그는 하루종일 머리에 '청혼' 생각만 떠다녔다며, 이제야 긴장이 풀린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고생했어. 정국아.
정국이는 제가 건넨 꽃을 아냐고 물었다. 익숙하지 않은 꽃에 고개를 저으며, 뭔데?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내 어깨에 기댄 제 고개를 들어, 아주 가까이서 나와 눈을 마주했다.
캘리포니아퍼피
나의 희망을 받아주세요.
내 희망은 너야.
*
안녕하세요. 겨울 소녀입니다.
암호닉은 이번 화를 마지막으로 받을게요! 암호닉은 글 먼저 올린 후, 댓글 확인하면서 추가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청혼이 생각보다 소담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으실 것 같아요. '너무 별 게 없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 되실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두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딱 그들과 닮은 시간이 아니였을까 싶어요.
변함없이 고맙습니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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