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살 땐가 여섯 살 땐가. 아무튼 유치원 때라는 건 분명하다. 10년도 훌쩍 넘은 그때, 김여주가 목 놓아 울어 유치원이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다. 이유는 나랑 짝꿍이 되지 못해서. 아마 김여주 인생 최고 흑역사일 거다. 내가 그때의 상황을 읊으며 놀릴 때마다 김여주는 기억이 안난다고 부정하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선샌님…”
“어머 여주 왜 그래? 왜 울어!”
“재혀니랑 앉고시푼데ㅠㅠㅠㅠㅠ가바보 져써요ㅠㅠㅠ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김여주에 선생님이 한껏 당황하셨고, 가위바위보에서 이겨버린 이미소 역시 김여주 뒤에 서 안절부절 못했던 것 까지 기억이 난다고. 그 모습이 보기 싫었던 나는 그때 나름 큰 소리를 냈었다. 잇 사이로 숭숭 빠지는 발음으로 야 김여쥬! 하고 불렀더니 김여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큰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었지. 그에 대고 마저 소리쳤다. 너가 진거니까 그만 울어!
“….”
“..”
“…씽…”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고, 김여주의 눈이 세모로 변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를 찍 노려보는 건 아마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기도 하네. 나는 그 눈빛에 당황해 입만 벙긋거렸다. 선생님이 뒤늦게 김여주와 내 사이로 들어와 상황을 정리하려 하셨지만 녀석은 끝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깜빡이지도 않아 고인 눈물이 넘쳐 흘러도 요지부동이였다.
근데 그거 알아?
“너 내꺼자나ㅠㅠㅠㅠㅠㅠㅠ!!!”
“…머…머…?”
“ㅠㅠㅠㅠ여쥬껀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가 끝끝내 한 말은 아직까지도 종종 온몸을 저리게 만들어.
2008년 여름. 정재현, 초등학교 6학년.
“오늘 남주혁이 좋아하는 애 꼭 알아내는 거다, 어?”
“어차피 가는 앤데 그걸 알아서 뭐하게.”
“가는 애니까 알아야지~ 궁금하잖아. 학교에서 인기 제일 많았던 남주혁이 누굴 좋아했는지!”
아 완전 재밌겠다. 앞에서 간사한 웃음을 짓는 지수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곧 해외로 이민을 가는 남주혁이 좋아하는 애가 있는게 분명하다며 나를 들볶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빠져나가기엔 이미 늦은 타이밍인 것 같다. 학교가 끝난 후 바로 주혁이네 집에 친한 애들끼리 모여 마지막 파티를 하기로 했다. 일명 페어웰 파티라나 뭐라나. 말이 이별 파티지, 지수 때문에 진실게임만 판치는 밤이 될 것 같다.
“넌 좋아하는 애 없어?”
“도대체 그런게 왜 궁금하냐 너는?”
“아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이따가 진실게임 때 들으면 되지 뭐~~!”
실내화를 신발로 갈아 신으며 혀를 쯧 차보였다. 신났네 아주. 초등학교 육학년이 무슨 사랑타령을 한다고. 굽혔던 허리를 도로 세우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데, 누군가 내 등을 쳤다. 툭, 그런게 아니라 퍽. 앞에서 계속 말을 이어가던 지수의 목소리가 일순 멈췄다. 익숙한 손길이 다녀간 곳을 신경질 적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가자 빨리.”
예상대로, 김여주였다.
“어딜 가.”
“어딜 가긴, 집에 가지. 너 오늘 방과후 없잖아.”
“말 했잖아 아침에. 나 오늘 남주혁네 놀러간다고.”
야무지게 집에 갈 준비를 마친 채 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김여주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아침에 말을 하고 하고 또 했는데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지. 내 표정에 덩달아 표정을 찡그린 김여주가 아 맞다, 하며 입술을 씰룩인다. 순간 사납게 변한 눈으로 날 째려보는 건 포인트.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다 저거. 김여주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저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괜히 속이 울렁거리는게 기분만 이상해진다. 아마 저 날 선 눈빛에 기가 빨리는게 분명하다.
“아 나 집에 같이 갈 사람 없는데..”
“난 분명 말했다 아침에?”
“그럼 너도 같이 남주혁네 집 놀러 갈래 김여주?”
입이 대빨 나온 김여주, 그런 김여주를 타이르려 자세를 고쳐 잡은 내 뒤로 지수가 튀어나와 또 한번 들뜬 목소리를 뱉는다.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막기도 전에 김여주의 시선은 이미 지수에게로 가 있다. 김여주는 잠시 고민하는듯 양 볼에 바람을 넣어 빵빵하게 만든 후 눈동자를 데굴 굴리더니 이내 가득 차있던 공기를 후, 하고 내쉬며 또 한번 미간을 좁혔다. 됐어, 내가 거길 왜 가. 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지수가 아쉽다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김여주가 생각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그래, 너가 거길 왜 가. 가도 남자애들밖에 없어.”
“아이씨. 갈거야 집. 혼자 갈거야!”
왠지 모르게 표정이 풀린 내가 흘러내린 가방끈을 고쳐메며 무심한 어투로 말하자, 김여주의 하이톤 목소리가 귓가를 찔러들어왔다. 녀석은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등을 보였다. 야 김여주, 하고 불렀는데도 돌아보지 않는다. 또 신경쓰이게 만들어. 짜증 비슷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 뒷머리를 헤집었다. 그런 내 기분도 모르고 옆에서 지수가 빨리 가자 재촉한다. 고개를 돌리니 남주혁네 집에 놀러 가기로 한 애들 몇 명이 지수 옆에 서 손장난을 하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아..”
“아, 빨리이!”
오늘 나 방과후 안 하는 날이라고 여자애들도 다 먼저 보냈을텐데. 그럼 김여주 진짜 혼자 가야되는 건데. 나를 끌고 반대편으로 가려는 지수의 손길에 이끌려 무겁게 걸음을 옮기다 다시 김여주를 바라봤다.
“김여주!!”
“..”
“집에 도착하면 남주혁네로 전화해!”
이미 저만치 걸어간 김여주의 등 뒤로 꽤 크게 소리치자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던 김여주의 발걸음이 일순 멈추더니 곧 고개를 돌린다. 내가 남주혁네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 멍청아!!!! 복도에 쩌렁쩌렁 앙칼진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냅다 외친 김여주는 도로 고개를 돌리곤 다시 복도를 걸어간다. 나름 걱정되서 한 말인데 저렇게 화를 낼건 뭐야. 진짜 김여주. 성질만 더러워서 저거 진짜 나중에 누가 데려가?
“오늘 몇 시까지 놀지?”
“그냥 너네 집에서 자고 가면 안되냐?”
“그건 안돼. 엄마가 자는 건 안된다고 하셨어.”
피자 한 조각을 든 남주혁이 문득 꺼낸 말에 주혁이네 거실이 시끌벅적 했다. 아니, 사실 아까부터 이 곳은 요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 가지 주제가 끝나면 또 한 가지 주제가 나오고, 나오고 나오고 또 나오더니 이제 몇 시까지 노는가가 주제인 것 같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여섯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앞에선 여덟시, 아홉시 등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굳이 끼어들어 그 대화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늘 안에 집에 갈 건 분명하니 앞으로 오랫동안 못 볼 남주혁 얼굴이나 보고 있어야지. 콜라가 반쯤 남은 종이 컵을 내려놓은 후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남주혁은 이렇게 근접한 거리에서 빤히 바라봐도 오점을 찾을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여자애들이 남주혁하면 껌뻑 죽는 첫번째 이유였다. 저번엔 우리 학년 얼짱투표에서 1등을 했다더라. 소식이 빠른 지수가 깔깔 웃으며 말해줬었다.
“왜 그렇게 봐. 잘생겼냐?”
“그럼~ 얼짱투표 1등한 얼굴인데.”
“야, 그 얘기는 진짜 그만 좀 해라. 쪽팔려 죽겠어.”
진득히 저를 바라보는 눈빛을 느낀 건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주혁이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에 얄밉게 답한 내 말에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른다. 쪽팔려 죽겠다면서 입꼬리는 실실 올라간다. 그 모습이 웃겨 어깨를 들썩이자 남주혁이 웃지 말라며 테이블 아래에 놓인 제 발로 내 종아리를 툭 한번 찬다. 그때 말소리만 가득이였던 거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려퍼졌다. 열심히 귀가 시간을 논의 중이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조용해지더니 곧 모두가 소리의 근원지로 추정되는 안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도 남주혁에게 반격을 시도하려했던 다리를 멈춘 채 시선을 옮겼다.
“야, 빨리 가서 받아.”
“엄만가?”
집 주인인 남주혁이 기름 진 손을 휴지로 대충 닦으며 일어났다. 녀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쿵쿵 소리와 함께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에 무섭게 거실은 또 다시 시끄러워졌고, 남주혁은 쌩하니 안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고개를 도로 돌린 후 테이블에 놓았던 콜라를 한모금 마셨다. 그러던 중 맞은편에 앉아있던 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아까 학교에서 지어보인 그 간사한 웃음을 다시 머금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야, 남주혁 오면 진실게임 시작하자.”
콜콜. 이거 콜라병 돌려. 잘 돌려야 돼. 남주혁 걸리게. 지수의 총괄 하에 이곳은 또 한번 불타올랐다. 어떻게 콜라병을 돌려야 남주혁을 찍는지 시뮬레이션까지 할 기세다. 나는 바람 빠진 웃음을 잇사이로 내보냈다. 그래, 이런 거 또 언제 해보겠냐. 진실게임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이왕 하는 거 재밌게 하자는 생각으로 지수의 열띤 설명을 주의깊게 들었다. 조용히 시작한 지수의 목소리가 점차 커질 때 쯤, 불쌍한 타겟 남주혁이 천진난만하게 거실로 걸어 나오며 나를 불렀다.
“정재현, 여주 전환데?”
“뭐?”
“여주가 너 바꿔달래.”
그 소리에 나는 웃던 걸 멈춘 후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남주혁이 가서 전화를 받으라며 손짓한다. 그러고보니 김여주가 있었지 참. 한참을 떠들고 노느라 혼자 집에 간 김여주를 잊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남주혁이 나온 안방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등 뒤로 김여주의 이름이 몇 번 오가는게 들렸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번호 모른다고 그렇게 큰소리 치더니 어떻게 알고 전화 한거야. 머릿속엔 토라진 채 복도를 걸어가던 김여주만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여보세요?”
안방에 들어가니 바로 전화기가 보였다. 테이블에 가지런히 좋여진 수화기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너머로 김여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집에 도착했어. 아니 사실 아까 도착했는데 지금 전화해봤어.
“번호 모른다며.”
-이현지한테 물어보니까 바로 알려주던데?
아, 하고 작은 탄성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이현지는 그래, 남주혁에 대해선 모든 걸 알고 있지 참.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답했다. 그 후 김여주와 내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아주 잠시 적막이 흘렀다는 소리다.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공허였다. 아무래도 아까 복도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지른게 큰 작용을 하는게 아닌가 싶다. 몇마디 귓가를 찌른 김여주의 목소리는 기분을 맞추기가 영 어려웠다. 아직까지 내게 화가 난 건가 입술을 몇 번 깨물었다. 웃기게도 그런 걱정이 물씬 드는게 성질이 더럽다며 투덜대던 아까의 나와는 참 모순되는 상황이었다. 눈썹 끝부분을 문지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너..화났어? 아직도?”
-뭐?
“아니, 난 아침에 분명 말했는데 너가 그러고 가니까....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솔직히 아까 그렇게 보내고나서 남주혁네 집으로 걸어올 때까지 계속 생각나긴 했다. 하필 혼자 하교한 날 나쁜 일을 당하면 어떡하나 말도 안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랬다는 걸 김여주가 아는 건 아니잖아. 아직까지 불만을 갖고 있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멍청한 생각이 든다. 이럴 때 보면 내가 김여주 아래에 있는 것 같다. 퍽 짜증이 일다가도 끝은 결국 내 잘못인가 의문을 가지는게 한두번이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고, 김여주가 인상을 찡그리면 난 그랬다.
-안 났거든. 넌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거야?
“굳이 말하자면 삐순이 정도?”
-죽을래? 삐순이?
순간의 적막은 그렇게 사라졌다. 또 다시 열을 내는 김여주에게 농담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하여간 사소한 거에 발끈 참 잘해. 돼지 꼬리처럼 꼬불꼬불한 전화줄을 손으로 빙빙 꼬며 대화를 이었다. 언제는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하는게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내일은 같이 가.”
-…
“왜 대답이 없어?”
-너 내일 방과후 있어 멍청아.
“..아?”
-괜찮으니까 끊어. 아침에 같이 등교해.
결과는 말짱 도루묵이였다. 방과후가 있는 걸 깜빡했다. 어째 내 스케줄을 나보다 김여주가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녀석은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뭐가 이렇게 매정해.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내며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뭐, 멀쩡히 도착해서 다행이다.
전화기를 대충 정리한 후 안방을 나오자 다시끔 눈 앞에 펼쳐진 거실의 풍경이란 고개를 절로 젓게 만들었다. 테이블을 저 멀리 치우곤 둥글게 앉아 콜라병과 남주혁을 번갈아 가리키는 모습에 걸음을 빨리해 빈틈을 찾아 엉덩이를 붙혀 앉았다. 딱 보니 아까 계획했던 것처럼 남주혁이 첫 번째 타겟으로 걸렸나보다. 으아, 소리를 내며 마른 세수를 하는 모습이 확신을 줬다.
“진실게임 벌써 시작한거야?”
“너 전화 할 때 시작했는데 어떻게 딱 남주혁이 걸려버렸네.”
“야 내가 물어본다? 남주혁 너 똑바로 대답해.”
옆 친구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지수는 벌써 자세까지 고쳐 앉고 남주혁을 주시했다. 장내의 공기는 아직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잔뜩 달아올라 안 그래도 더운 여름 날을 더 후덥지근하게 만들었다. 남주혁은 체념한 듯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지수와 시선을 나눴다. 뭐, 물어봐. 뭐. 툭툭 내뱉는 소리에 부담이 한가득이다.
“너 좋아하는 사람 누구야~?”
얄밉게 입꼬리를 말아올린 지수가 물었다. 남주혁 빼고 모두가 알고있던 첫 번째 질문이 드디어 터진거다. 남주혁은 당황한 건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손을 휘저었다. 야 제발 다른 거 물어봐. 하지만 지수가 누구더냐. 아마 며칠 전부터 이를 갈고 이 날만을 준비 해왔을 놈이다.
“다른 거는 무슨. 너 내가 다 알아. 저번에 여자애들 놀고 있는 거 빤히 보는 걸 내가 봤어. 어? 누구야!”
“아 지수 너 진짜 이러기냐?”
“우리 다 비밀로 할거야~ 그치~?”
굴러가는 상황이 생각보다 재밌다. 남주혁이 저렇게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 하는 것도 처음 보는 모습이다. 녀석은 작년 빼빼로데이 날 제 책상에 빼빼로가 한가득 쌓여있는 걸 보고도 어깨만 으쓱였었다. 그렇게 인기 많은 놈이 좋아하는 애는 누굴까. 지수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있긴 있나보다. 예쁘다고 소문난 김진아? 맨날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던 이현지? 아님 제일 친하게 지내던 김예림?
“아.. 그럼 진짜 비밀로 해야 돼.”
“당연하지이!”
정말 단념했나보다. 눈가를 비비며 말을 망설이는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울 수가 없다. 남주혁은 아무래도 민망했는지 연신 숨을 푹푹 내쉬다 손을 내렸다. 여러개의 눈들이 모두 저만 쳐다보고 있자 곧 웃음을 터뜨린다.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져 시선을 내렸다. 야 빨리 말해~! 한참 말이 없는 남주혁에 재촉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불쌍한 남주혁. 가기 전에 다 털리는 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이었다.
“…여주. 김여주.”
수줍은 듯 중얼거린 남주혁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쪽팔려 죽을 것 같던 그 표정은 어디로 가고,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다. 김여주? 방금 전까지 나랑 통화한 그 김여주? 순간 목구멍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리를 지르며 남주혁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왜? 너 김여주랑 친했냐? 고백은 할거야? 전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남주혁의 귀가 붉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답을 내뱉는데, 그게 참 가관이었다. 체육대회 날 스텐드에 앉아있는 김여주를 우연히 봤는데, 하필 그때 바람이 불어 김여주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댄다. 긴생머리가 휘날리는게 그렇게 예뻤다고. 소름이 오도도 돋아나는 기분에 팔을 비볐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유로 지금 김여주를 좋아한다는 거야?
“김여주는 아냐? 너가 걔 좋아하는 거?”
“당연히 모르지! 알면 안돼. 평생 몰라야 돼.”
남주혁과도 맨날 어울려 다니고 김여주랑도 그렇게 붙어다녔는데 단 한번도 이상함을 인지한 적이 없다. 내가 이런 쪽으로 둔하긴 하지만, ..그래도. 얼이 빠진 채로 남주혁을 바라보던 눈을 떨궜다. 뜨거워진 목울대를 만지작거리며 빨라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 근데 나 왜…
“넌 왜 아무 말도 없어 정재현?”
나 왜 막 짜증이 나지…?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양을 오백마리 가까이 불렀는데도 잠이 오질 않는다. 오히려 양들이 모두 김여주 얼굴을 하고 있어 오는 졸음도 쫓아낼 판이었다. 지끈 아파오는 머리에 한숨을 푹 내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왜 이래 정재현. 제발 자. 자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이불도 퍽퍽 차대봤지만 머릿속에 남는 건 여전히 김여주였다.
아까 남주혁이 김여주를 좋아한다고 밝혔을 때부터 그랬다. 원인 모를 짜증이 샘솟고, 가슴이 막 텁텁한게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부터 열어 냉수를 들이킬 정도였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럴까 한참을 생각해 얻은 결론은 두 가지였다. 알고보니 내가 남주혁을 싫어한 것, 그게 아니라면 알고보니 내가 김여주를 좋아한 것. 부정했지만 생각에 생각을 해도 답은 똑같았다. 근데 내가 남주혁을 싫어했을리가 없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같이 잘만 놀던 놈이다. 그럼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김여주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까. 둘 중 하나일 바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좋아하는게 나았지만, 상대는 김여주였다. 미쳤어? 내가 김여주를 좋아하게.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 의 정의가 뭘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깨닫는 걸까. 우리 학년만 해도 벌써 커플만 세 쌍인데 걔들은 어떻게 제 마음을 인정한 거지? 남주혁은 많고 많은 여자애들 중 왜 하필 김여주를 좋아해서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거냐고. 새벽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반이 푸념이었다. 이성을 좋아한다는 건 아직 낯선 현상이었고, 그렇기에 한번도 내 마음을 의심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쟤를 좋아하나? 하고.
그런 내가 지금 의심을 해본다. 상대는 김여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앞서 말했듯 이런 쪽으론 워낙 둔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짚어나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안 좋아하는 거다 생각을 끝내려 해도 막상 김여주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붙어다니는 걸 상상하면 속에서 열불이 난다 이거다. 이게 뭔 놀부심본가 싶었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같았다. 당장 남주혁을 생각해도 그래. 막 짜증이 난다고.
“아..”
마음이 심란했다. 뚜렷한 결론이 나질 않아 이불을 열번이나 차댄 것 같다. 잠도 오지 않는 상황에 이렇게 멍청히 시간을 보낼 바에야 일어나서 질문을 하는게 낫겠다 싶어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아빠가 코를 고시는 소리가 드렁드렁 조용한 집안에 울려퍼지고 있었고, 난 조심조심 걸어가 컴퓨터 전원을 꾹 눌렀다. 동시에 화면이 켜지며 어두웠던 시야를 밝게 비췄다. 행여나 엄마가 깨실까 무서워 재빨리 손을 마우스로 가져가 클릭질을 해댔다.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 했고, 빠르게 타자를 쳤다.
[ 안녕하세요 저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남학생인데요. 어렸을때부터 친했던 여자애가 있는데 제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어떤 증상이 있나요? 내공 100 겁니다. ]
“다녀왔습니다!”
급하게 신발을 벗었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안 건 헐레벌떡 내뱉은 인사에 돌아오는 말소리가 없을 때였다. 아빠는 아직 회사에 계실 거고, 엄마는 분명 김여주네 집에 계실 거다. 난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켰다. 오늘 방과후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없었다면 김여주와 하교까지 같이 했었어야 했는데, 오늘 하루 녀석이 신경 쓰이느라 죽는 줄 알았다. 아침에도 정말 힘들었다. 내가 평소에 얘를 어떻게 대했나 생각이 나지 않아 모든 행동이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급히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로그인을 하자 새 소식 알림창에 붉은 색으로 1 표시가 떠있었다. 얼른 그 것을 클릭 하자, 어제 올려둔 질문에 달린 답글이 화면에 올라왔다.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며 천천히 답글을 읽었다. [초등학생이라면 그런 감정에 미숙할 수 있어요^^ 오랜 친구를 좋아하는 것 같다니 생각이 복잡하겠네요.] 로 시작하는 꽤나 긴 글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보통 나타나는 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옆에 있으면 계속 눈길이 가고 안 보이면 자꾸 신경이 쓰이기도 합니다. 괜히 걱정을 하는 것도 포함이 된다고 볼 수 있어요. 다른 이성과 함께 있는 걸 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죠. 다정하게 말을 나누고 있다던지, 장난을 친다던지, 혹은 스킨쉽을 나눈다던지. 그런 상황을 목격 했을 때 짜증이 난다면 그건 보통 질투를 한다고 보면 됩니다. 또 무얼 하든 예뻐보이고, 미운 짓을 해도 밉지 않을 거에요. 일명 콩깍지가 씌인거죠. 이게 제일 무섭습니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다 해주고 싶거든요. 또한 그 사람한테는 한 없이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화를 잘 못 내겠고, 화를 내더라도 바로 미안해지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먼저 사과를 하는 일이 잦죠.
마지막으로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린다면,
“야 정재현!”
“..”
“떡볶이 먹으러 가자!”
좋아하는 겁니다.
2009년 봄. 정재현, 중학교 1학년.
“아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진짜! 지인짜!!!!”
“알면 좀 잘해, 어?”
“여기서 얼마나 더 잘해야 돼. 이 정도면 됐지.”
중학생이 됐다. 김여주는 입학하기 며칠 전부터 교복을 입고 우리집에 찾아와 물었다. 예쁘냐? 그럴 때마다 나는 미쳤냐? 라고 반문했지만 사실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김여주와는 당연하다시피 같은 중학교, 그것도 모자라 같은 반이 돼버려 올해도 붙어다닐게 눈에 훤했다. 반배정이 뜬 날엔 같은 반이라며 질색팔색을 하더니 지금은 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란다. 제 교복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복도를 걸어가는 눈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자꾸 이곳저곳을 살핀다.
“저기 봐. 저 언니들 다 화장했어.”
속삭이듯 말하는 김여주를 옆으로 끌었다. 못 본 척 해. 괜히 눈 마주치고 그러지 말고. 내 말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낯선 광경에 겁을 먹은 것 같다. 하지만 바로 몇 발자국만 더 걸어가면 목적지라 저 멀리 껄렁하게 걸어오는 여자 선배들은 얼른 피하면 그만이었다. 걸음을 빨리했다. 김여주는 내가 이끄는대로 따라왔고, 난 1학년 2반 이라고 적혀있는 교실 뒷문을 조심히 열었다.
“…”
“..”
먼저 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나와 김여주 쪽으로 쏠렸다. 지각을 한 건 아닌데, 이미 거의 모든 자리가 채워져 있어 김여주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시야를 내렸다. 녀석도 당황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따로 앉아야겠다. 김여주가 조용히 중얼거렸고, 먼저 걸음을 옮겨 빈 자리를 찾아갔다. 딱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뒷모습이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제서야 나도 김여주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교실 안 아이들은 언제 우리를 쳐다봤냐는 듯 저마다 옆에 앉은 짝꿍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제일 어색한 상황이었다. 괜히 목덜미를 쓸어넘긴 후 교복만 만지작거리는데, 누군가 책상을 툭툭 쳐 내 시선을 끌었다. 희고 길쭉한 손을 따라가니 옆 자리 남자애가 입꼬리를 올리고 있더라.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안녕. 나는 김동영. 넌?”
“아, 나는 정재현이야.”
“정재현? 진짜 정재현 처럼 생겼다, 너.”
아, 잘생겼다는 말이야. 칭찬.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나와 김동영, 요 근방을 도롱도롱 맴돌았다. 씩 웃으며 김동영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도 김동영처럼 생겼어. 나도 칭찬. 내 말과 함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큭, 하고 웃음을 터뜨린 나와 김동영은 다시한번 만나서 반갑다는 싱거운 인사를 건넸다. 당연히 김여주랑 앉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다른 누군가와 말을 틀 줄은 몰랐는데, 김동영은 상당히 살가운 놈이었다. 초등학교는 어디 다녔어? 집은 어디야? 국어 좋아해 수학 좋아해? 오 나도 국어 좋아하는데! 대화를 이끄는 김동영 덕분에 어렵지 않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만난지 십분도 안됐는데 꽤나 죽이 잘 맞았다. 다리 위에 올려놓았던 책가방은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가 있었다.
“저기 3분단 맨 끝자리에 앉은 여자애 보여? 둘 중에 머리 더 긴 애가 나랑 초등학교 같이 나왔어. 이름은 정수정.”
“아 그래? 나는 그 옆에 애랑 소꿉친군데. 쟤 이름은 김여주야.”
“헐 진짜로? 어쩐지 아까 같이 들어오더라. 난 소꿉친구는 아니고, 정수정이랑 3학년 때부터 친구였어.”
대화 도중 김동영은 김여주가 앉아있는 쪽을 가리키며 정수정이란 여자애를 소개했다. 같이 초등학교를 나온 애라는데, 신기하게도 김여주랑 같이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애였다. 들뜬 마음에 나 역시 그 쪽을 가리키며 김여주를 소개 시켜줬다. 소꿉친구라는 내 말에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뜬 김동영이 우와, 소리를 내며 신기해했다.
“그럼 이따가 점심 넷이 먹을래?”
“그래. 안 그래도 점심을 어떡해야하나 걱정 했었는데.”
먼저 점심을 제안하는 김동영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첫 날부터 예감이 좋은 친구를 사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같은 중학교로 올라온 친구들은 얼마 없었고, 그 마저도 모두 다른 반으로 배정 돼 내심 걱정이었던 속이 찬물에 씻겨 내린 듯 시원해졌다.
얼마 안 가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간단한 인사를 끝낸 후 강당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학식 후 정상수업 이란다. 그 말에 김동영과 또 한번 소곤소곤 불만을 나눴다. 멀끔히 차려입은 교복을 다시 한번 매만지며 김동영과 나란히 뒷 문으로 나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쿡 찔렀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김동영이 소개한 정수정이 김여주와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 너가 여주랑 제일 오래된 친구라며?”
안녕 만나서 반가워 따위의 인사는 쿨하게 넘긴 정수정이 당차게 물었다. 김여주는 그런 정수정을 꾹 잡은 채로 내 옆에 있던 김동영과 인사를 나눈다. 잠시 당황한 나는 어… 하고 말을 얼버무리다 이내 헤실 웃고 있는 김여주에게 시선을 두며 답했다.
“징글징글하게 오래 됐지.”
갑자기 들이닥친 김여주에 급히 모니터를 끄며 입술을 꾹 깨물던게 벌써 반년 전이다. 반 년 뒤엔 12년 쯤 되는 긴 시간이 있고, 지렁이 굴러가는 글씨를 쓸 때부터 내가 매년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 평생 친구하자 김여주. 생일 편지의 맨 마지막을 담당했던 문장이었다. 내가 그런 말을 몇 년 간 써왔는데 이제와서 김여주를 이성으로 좋아한다니. 모니터를 가득 채웠던 답변이 모두 맞아 떨어지고도 며칠을 더 부정했지만 그 며칠간 마주한 김여주는 미쳐버리게도 매일 매순간이 예뻤다. 전학을 핑계로 김여주와 포옹한 남주혁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분이 차오르고, 계단에서 넘어져 엉엉 우는 김여주를 망설임 없이 업어 양호실까지 달려간 적도 있다. 국어 시간에 지각을 할게 뻔한 걸 알면서도 나는 전력으로 달렸었다.
김여주를 좋아하는 걸 내 스스로 인정한 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김여주에게 난 그저 좋은 친구였고, 그 사실이 너무나도 뚜렷해 속이 좀 아릴 뿐, 그게 다였다. 십년을 넘게 지속한 관계는 쉽게 바뀔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 관계를 모난 곳 없이 유지하는 건 어쩌면 간단했다. 뒤늦게 알아차린 이 미숙한 마음을 서툴더라도 숨기면 되는 거였다.
난 김여주의, 제일 오랜 친구니까.
2010년 겨울. 정재현, 중학교 2학년.
“아까 여주한테 전화 오더라 재현아.”
“응? 김여주?”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을 나오며 머리를 탈탈 털었다. 엄마는 쇼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핸드폰을 가리키며 그런 나를 지나치셨다. 전화? 김여주한테? 수건을 대충 머리에 얹히곤 쇼파 쪽으로 걸어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불덩이같은 핸드폰에 알람이 수두룩이였다. 부재중 통화가 다섯 통, 메세지도 두개 쯤 와있다. 발신자는 모두 김여주였다.
[야 나 우산 없는데 데리러 와주면 안돼?]
[아 왜 전화 안 받아ㅠㅠㅠㅠ 뭐해 정재현ㅠㅠㅠㅠㅠ]
급히 확인한 문자 메세지는 몇 초간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20분 전에 온 문자들이다.
“엄마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고개를 돌려 확인한 창 밖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씨. 작게 중얼거린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수건을 내팽겨친 후 현관 쪽으로 뛰어가 아무 우산이나 잡아쥐고 밖으로 나갔다. 화요일이니 지금쯤 수학 학원에서 집으로 와야 할 김여주였다. 계단을 두개씩 뛰어내려 빗 속으로 들어갔다. 대충 핀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귓가를 찔렀다. 구겨신은 운동화 안으로 물이 들어오는 건지 발 끝은 금방 축축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다. 우산도 없는 애가 설마 출발했을까. 얼른 학원 앞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아파트 단지 앞까지 달렸는데, 시야에 차오른 건 비를 맞으며 걸어오는 김여주였다.
“..김여주!!!!!!”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걸 그대로 맞고있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녀석의 이름을 버럭 부르자, 일순 발걸음을 멈춘 김여주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툭 내미는게 보인다. 한숨을 푹 내쉰 내가 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런 나보다 김여주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내가 숨을 고르기도 전에 나를 향해 달려왔다. 순식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우산 안으로 들어왔고, 물기 어린 손으로 우산을 쥔 내 손을 잡아왔다.
“아 왜 이제 와!”
내 바로 앞에서 멈춘 김여주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제대로 말하자면 째려보는 거지만, 무슨 눈으로 날 보던 숨이 턱 막히는 건 같았다. 길게 내려오는 머리가 축축히 젖어있다. 옷도 다 젖고, 가방도 그랬다. 아 오늘 프린트물 있는데. 짜증이 난 목소리가 우산 위로 투둑투둑 울리는 소리와 겹쳐 쿡 들어왔다. 차갑게 얹혀있던 김여주의 손이 떨어지자 우산대를 쥔 손이 작게 떨렸다.
“미안.”
“..”
“샤워하느라…전화 못 받았어.”
작은 우산 안에 사람이 둘. 그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 모든 걸 삼키는 빗소리. 비릿한 흙냄새. 원래 이렇게 사람을 떨리게 하는 것들이었나.
“근데 너 안 추워?”
“어..?”
“반팔에 반바지잖아.”
속눈썹마저 젖은 채 나를 보는 네게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말도 잘 나오지 않고, 숨도 잘 못 내쉴 정도로. 그만큼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사람을 떨리게 하는 것들이었나.
“왔냐?”
“어, 김여주는 어디 가고 혼자 와?”
“걔 오늘 아파. 어제 비 잔뜩 맞았거든.”
김여주는 결국 감기에 걸려 결석을 하고 말았다. 재현아, 여주 아파서 학교 못 간대. 오늘 너 혼자 가야겠다. 라고 말씀 하시던 엄마가 생각나 눈가를 꾹 눌렀다. 혼자 등교한 나를 이상하다는 듯 보던 김동영과 정수정은 내 말에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프대? 정수정의 물음에 조용히 말했다. 그런 것 같아.
“그래서 표정이 울상이야?”
“나?”
“응. 너.”
정수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김동영이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본다. 무슨 상황인데 이거. 가방을 열어 필통을 꺼내던 나는 괜히 이상한 느낌에 침을 꾹 삼키고 말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아프고 그럴 수도 있는거지 무슨.
덤덤한 척 그런 말을 내뱉었던 나는 한심하게도 학교가 끝나자마자 김여주네 집을 향해 달렸다. 오늘 하루 수업에 집중을 못한 탓에 지적을 두번이나 받았다. 정재현, 무슨 생각을 하는데 집중을 못해? 그 말을 두번씩이나 들었다는 거다. 웃긴 건 그런 지적을 받을 때 마저 내 정신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내가 샤워를 안 했다면. 조금 일찍 했다던지, 아예 늦게 했더라면 김여주가 겨울비에 몸살로 고생하는 일이 없었을텐데. 그런 생각만 하루종일 했던 것 같다.
“어 재현이 왔어?”
“네 이모. 김여주 자요?”
“응, 아까 약 먹고 잠 들었어~”
“아아..저 잠깐 들어가봐도 돼요?”
단숨에 달려온 김여주네 집에 들어가자 이모가 나를 반겨주셨다. 김여주가 아파서 그런 건지 평소보다 집 안이 따뜻한 것 같다. 김여주의 방에 들어가도 되냐는 물음에 이모는 당연히 된다며 들어가라는 손짓까지 해주셨다. 조심히 문을 열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린 문 틈새로 들어온 빛이 어두운 방 안에 한가닥 줄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가 문을 닫자, 곧 까맣게 물들어 방 안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
그 어둠 속에서 김여주를 찾았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작은 보폭으로 일곱 걸음만 걸어가면 바로 침대였으니까. 나는 익숙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김여주가 새근새근 내쉬는 숨소리가 제일 크게 들리는 순간이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 했는지 깜깜했던 시야에 김여주의 얼굴이 들어왔다. 세상 모르고 잠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바닥에 조심히 앉았다. 작은 소리라도 내면 금방이라도 깰 것 같았다. 줄곧 매고 있던 가방을 벗어 옆에 놔두곤 김여주의 이마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아직도 열이 높은 건가 했는데, 이마가 불덩이였다. 그러니까 비는 왜 맞고 와서. 그냥 거기서 좀 더 기다리지. 속상한 마음에 미간을 좁혔다.
“으음..”
“..”
그때 김여주가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놀란 마음에 이마에서 손을 뗐는데, 김여주의 눈이 조금씩 떠진다.
“…”
“..”
멈칫. 어중간한 허공에 손을 멈춘 채 게슴츠레 날 보는 김여주와 시선을 나눴다. 입술이 바싹 마르는게 느껴졌다. 목울대에 열이 올랐다. 어떡하지. 뭐라고 말하지. 요란하게 머리를 굴리는 날 비웃듯 김여주는 다시 눈을 감았다.
“추워..”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침대 위에 놔둔 내 왼손 끝을 잡는다. 뜨거워진 침을 꾹 삼켰다.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가운 손 끝이 내 손에 닿을 때 올라온 전율이 아직 남아있다. 김여주가 다시 숨을 고를 때 즈음 허공에 떠있던 오른손을 내려 김여주의 작은 손을 감싸쥐었다. 춥다는 너에게 내 온 온기를 주기 위해 말이다.
김여주는 오늘도 결석이다. 어제 내가 준 온기로는 부족했나보다. 점심을 먹고 온 친구들이 축구를 하러 가자 부추겼지만 나는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입맛도 없어서 밥도 깨작거렸다. 이게 다 김여주 때문이다. 아니다. 나 때문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야 정재현.”
“왜.”
옆에서 정수정이 날 불렀다. 같은 반인 김여주가 이틀 째 결석이라 정수정이 우리 반에서 점심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틀 째였다. 시큰둥하게 답한 목소리가 책상에 막혀 조용히 울렸다. 김동영이 그런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는게 느껴진다. 어휴, 정재현 어떡하냐. 뭐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하더라.
“너 김여주 좋아하지.”
근데 정작 날 벌떡 일으킨 건 정수정이었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정수정의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확신에 찬 목소리가 교실 바닥에 가라앉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다 간신히 한마디 뱉었다. 무슨 소리야.
“야 부정하지마. 우리 이미 다 눈치 깠어.”
“그래. 아니라고 하기만 해.”
나와 정수정, 김동영. 세 명 밖에 없는 교실에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온전히 내게 시선을 둔 정수정을 한 번, 김동영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혀로 입술을 축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목울대가 울렁이는게, 금방이라도 감정을 토할 것 같아 두 손만 꾹 눌러 잡았다. 안돼. 안 들키려고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 내가 정수정 아프다고 막 얘네 집 찾아가고 그러는 거 봤어?”
“어우, 야 상상만해도 소름 돋는다. 일어났더니 보이는게 네 얼굴이라니.”
“야 나도 싫거든? 애초에 넌 아픈 날이 없잖아 너무 건강해서.”
“뭐 인마? 그거 칭찬이냐?”
앞에선 계속 큰소리가 오간다.
“아니 아무튼. 너 김여주가 뭐만 하면 실실 웃는 거 알아?”
“아, 그리고 너 말이야 정재현. 그러다가 김여주가 다른 남자애들이랑 장난치면 표정 완전 썩는다?”
“그리고 있잖아. 너 김여주가 애교 좀 부리고 그러면 마음 약해져서 걔 부탁 다 들어준다?”
“그리고 또 있어. 정재현 너, 너도 모르는 사이에 김여주 걱정 엄청 하는 건 아냐?”
정신이 없었다.
“이런데도 안 좋아한다고 할래?!”
“이런데도 안 좋아한다고 할래?!”
“아 뭐야, 찌찌뽕. 빨주노초파남보.”
정수정이 쾅 내리친 책상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작 정신을 차리게 만든 사람은 앞에서 김동영 팔뚝을 꼬집으며 빨리 색깔 찾아, 따위의 말을 하고 있지만, 일단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헤집었다. 몇 년을 숨기려고 노력했는데, 저 둘은 내가 쏟아부은 노력을 모두 꿰뚫어 본 듯 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현상. 김여주를 좋아한다는 걸 결국 인정하게 만들어버린 그 신기한 현상들. 눈을 질끔 감았다.
“좋아해.”
“빨, 저기 주…뭐?”
그때 아마 바람이 불었나.
“나 김여주 좋아해.”
발끝이 저릿해 주먹을 쥐었을 거다.
숨기려 했는데. 난 정말 노력했는데 여주야.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컸던 걸까. 새어나가는 건 어쩔 수 없나봐.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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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9화 답글 달러 오겠습니당 초록글 너무 감사드리구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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