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자꾸 기어올라요 w. 채셔
03. 주인, 첫째 날
주인, 첫째 날.
분명히, 분명히 귀신이었다. 내가 분명히 차 위에 타고 있는 할머니를 봤는데, 다시 보니까 없어졌다. 이건…, 이건 영화에서나 보던 괴담이다. 멍해진 나를 빤히 바라보던 고딩은 푸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 따위 상관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걸 현실에서 보다니. 나는 후다닥 집까지 뛰었다. 어어, 하고 뒤에서 고딩이 나를 따라 뛰었다. 자취방까지 죽도록 뛰어서 엘리베이터까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심호흡을 했다. 뒤따라 탄 고딩도 힘겨웠는지 숨을 밭아냈다. 뒤늦게 고딩이 들고 있는 큰 봉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무거운 봉지를 들고 뛰느라 빨개진 손도. 새삼 미안해져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후, 씨…. 며칠 운동 안 했다고… 힘드네, 후우."
"미, 미안해요. 너무 무서워가지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고딩은 손사레를 쳤다. 괜찮다고 하는 게 더 미안해져서 괜히 발 장난을 쳤다. 띵동,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고딩을 뒤따라 집 앞에 섰다. 비밀번호. 고딩이 짧게 물어보자, 나는 130613이라고 일러주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힘들게 공들인 머리가 눕기에는 불편해서, 그냥 풀어버렸다.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하지. 고딩이 있는 건 그렇게 선호할 일이 아니다만, 그 때 고딩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딩마저 없었다면 울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봤던, 우물에서 기어나오는 귀신이 너무 충격적이던지라 그 때 이후로는 절대 공포 영화 같은 건 보지 않았는데. 그걸 오늘 실제로 봤다. 나는 아직도 저려오는 심장을 마사지해주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똑똑]
누워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기에 몸을 일으켰다. 고딩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배고파, 하고 짧게 말해왔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니 당돌하게도 '끓여줘.'하고 말한다. 내가 끓인 건 맛 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에 아까 그렇게 준비 운동도 없이 달리기를 시킨 게 미안해서 그냥 끓여주기로 했다.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벗어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냄비를 꺼내려고 보니, 이미 라면을 끓일 세팅이 다 되어있다. 러그에 앉아 한 손에는 숟가락,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고딩이 귀여워서 허, 하고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충 라면을 끓여서 계란까지 퐁당 넣고 고딩에게 손수 대령해주었다.
"어……."
고딩에게 라면이 담긴 냄비를 주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고딩이 나를 보고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뒤돌아 고딩을 바라보자, 고딩 표정이 멍-하다. 고개를 까딱이자 고딩은 '뒤에….' 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말해왔다. 이내 떨리는 손으로 내 뒤를 가리켰다. 갑작스레 오한이 드는 것만 같아서 뒤를 천천히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에이, 장난 치지 마요. 괜히 센 척을 해보았지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애기야…, 너 왜 여기 있어……? 고딩이 내 다리 쯤을 보고 이야기하는데, …고딩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떨린다. 나는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자꾸만 등이 쌔해진다. 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추위에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자, 자, 장난 치지 마요오."
"…애기야, 엄마는 어디 갔어……."
"자, 장난…."
나는 결국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내 몸을 감싸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울어야 했다. 우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귀신이 안 보이니까 막 저리 가라고 할 수도 없고, 때릴 수도 없으니까. 아이처럼 울자, 고딩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왜, 왜 이렇게 울어. 이내 내 앞에 쭈구려 앉은 고딩은 내 얼굴을 바라보려고 애를 썼다. 이내 고딩은 힘겹게 눈높이를 맞추고는 우, 울지 마, 하고 제 손등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귀, 귀신 갔어요? 없어요, 이제?'하고 묻자, 뜬금없이 고딩은 웃음을 흘려왔다. 응, 갔어. 따뜻한 목소리로 고딩이 말해주었다. 이상하게 그 따스한 말투에 진정이 되는 듯 했다.
뚝 그치고 고딩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올려주기에 눈을 꼭 감았다. 후우, 하고 고딩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을 꺼주는데, 자꾸만 아까 그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정말 죽은 것처럼 피를 흘리고 있던 할머니. 차에 딱 붙어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던 할머니가. 나는 결국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생각이 나서인지, 할머니의 모습은 내 머릿속을 떠날 생각을 않았다. 그저 재생되고, 또 되감기되어 재생될 뿐. 나는 결국 베개를 들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라면을 먹고 있던 고딩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조그맣게 고딩에게 속삭였다. 정말 쪽팔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서프라이즈에 나오는 귀신들도 못 본단 말야. 작년 추석엔 서프라이즈에 나오는 귀신을 보고, 7살 난 조카랑 잔 적도 있다. 그러니까….
"혼자 못 자겠어요오…."
첫 만남에 이게 무슨 추태냔 말이다. 고딩은 나를 바라보다, 제 옆을 손바닥으로 콩콩 쳤다. 이리 와. 나는 쫄래쫄래 베개를 안고 고딩의 옆에 앉았다. 라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빨리 먹을 테니까. 고딩은 내게 강아지에게 명령하듯이 말하고는 냄비에 얼굴을 박고 라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이상하게 오늘 처음 본 고딩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덧붙임
정꾸와 라면.. 오늘의 키워ㅜ드..
오늘도 반가웠어요, 이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