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우지호! 빨리 와서 너 짐 안 치워!"
"아 그만 좀 보채!"
-
유권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그 날로 돌아가보자.
지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유권의 몸이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언제나 힘 쓰는 쪽은 자신이었기에 조금 놀란 유권은
곧 그대로 지호를 들어올려 한 바퀴 돌렸다.
"뭐하는거야! 내려놔!!"
기겁하는 지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못 이기는 척 내려놓는 유권이었다.
이어 유권의 손이 지호의 턱을 들어 입을 맞췄다.
아직 서로를 잊지 못했더라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을텐데,
지호는 처음 숨결을 나눴던 그 날처럼 떨려왔다.
갈증을 해소하려는 것처럼 서로의 입술을 나누던 그들은 곧 고개를 떼었다.
물론 애정이 흐르다 못해 넘실대는 둘의 눈빛은 여전히 서로에게 붙박힌 상태였다.
"좋다."
"나두."
한참을 또 바보같이 서로를 쳐다보는 둘.
지호의 눈꼬리에는 언제부터였는지 옅은 물기가 글썽였다.
"김유권.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유권은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
"연락도 안하시던 분이 뭐 그리 나에 대해 궁금하실까."
"..그건.."
"장난이야 장난.
선생님이 너 가고 얼마 안되서 다 얘기해주셨고,
어떻게 된건지도 다 알아요."
그 순간 지호는 일말의 배신감을 느끼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이 설명해주셨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한 것도,
없던 일처럼 덮어두자고 한 것도 선생님.
그랬던 선생님이 전부 설명해줬다니 지호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럼 그 동안 내가 꾹꾹 참으며 살아왔던 건 뭔데?
"와- 표정 봐.
나 이제 안 반가워?"
"그게 아니라.. 그냥 너무 허탈해서."
"너 가고 나서 나도 혼자서 생각 많이 했어.
아마 우리가 계속 연락했더라면
생각이 정리되기 보다는 더 힘들었을 것 같아.
난 비어 있었던 시간이 아깝지만은 않아.
그 동안 너도, 나도 열심히 살아왔어.
그래서 지금 이렇게 떳떳하게 만나러 왔잖아, 너."
사뭇 진지한 말투로 유권이 말을 이어가자 지호는 울컥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김유권, 언제 이렇게 다 컸대.
남자네, 남자야.
"그러니까... 그건 아는데.. 어떻게 알고 왔냐구.."
"아, 그거."
유권은 빙긋이 웃더니 핸드폰을 꺼내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곧 이어 내민 것은 몇 개월 전 있었던 시상식의 사진이었다.
"어디서 났어?"
"너 일본 간다고 할 때 경이가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대.
친한 친구가 일본에 미술하러 간다고.
그 때부터 아버지가 협회에 후원하셨대.
그래서 프로모션 행사 때마다 초대받으신다더라.
시상식때도."
박경.
새삼스러운 이름이었다.
지호는 가만히 입 속에서 이름을 굴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나 찾아 온거야?"
"당연하지."
자랑스러운 듯 환히 웃는 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니.
네가 다시 내 것이라니.
실은 지호는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경이는 잘 지내?"
"야, 말도 마.
걔 아버지 사업 물려받는다고 요즘 정신 없어.
연락도 잘 안 된다."
그랬구나. 경이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셨구나.
어쨌든 내가 받은 후원금의 일부는 경이 아버님이 주신 거네.
지호는 괜히 마음이 뭉클했다.
"넌."
"응?"
"넌 잘 지냈어? 얼굴이 왜이렇게 핼쓱해."
슥 얼굴을 쓰다듬는 손에 또 움찔.
지호는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네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네 손길을 다시 느끼는 것도.
그렇지만 좋아. 좋은 낯설음이야.
"아니야- 그냥 요 며칠 비엔날레 준비하느라."
"아는 형이랑 같이 산다며?
좋은 분이야?"
"응. 엄청. 나야 그 형 덕분에 용됐지-"
흐흐. 하고 웃어버리는 모습에 유권도 싱긋 웃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새 남자친구 생긴 거 아니지?"
"미쳤어?"
유권은 깜짝 놀라 동그랗게 토끼눈을 한 지호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지호의 손을 꽉 쥐는 것이었다.
"우지호. 나 너랑 같이 살려고 왔어.
나 도쿄돔 음향 디렉터로 스카우트 됐어.
나 조금만 여기서 열심히 하면 금방 자리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예술계의 신인한테 안 꿀리는 남자친구,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지호 씨. 어떻게 생각하시죠?"
갑작스러운 소식에 지호는 입만 벌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감출 수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산다니, 같이 살자니!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어.. 일단 너무 축하해 권아. 너무너무 축하해!
나 지금 너무 당황해서.. 뭐라고 할지도 생각이 안난다.
진짜, 이건, 진짜 너무 행복해서 다 꿈 같아.
거짓말 치는 거 아니지?"
유권은 빙그레 웃으며 지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선 다시 입을 맞췄다.
쿵쾅대던 지호의 심장 소리가 가라앉고 나서야 유권은 입을 떼고 지호를 마주보았다.
"이래도 꿈같아?"
-일주일 안이야. 방 빼고 들어와.
유권의 닦달에 못 이기는 척 지호는 싱글벙글 짐을 싸고 있었다.
태일도 아쉬운 내색은 했지만 실은 표지훈을 들일 수 있게 되어 서운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형, 저 나가요!"
"우지호! 너 연락 안하면 죽어!"
쨍쨍한 태일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지호는 집을 나섰다.
유권의 집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
짐이 많았지만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사하러 가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지호는 고개를 돌렸다.
모자를 내려 쓴 유권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아 뭐야 김유권- 전화도 안 받더니!"
"원래 이런건 깜짝 등장해줘야 더 산다니까."
티격태격하다가도 금새 짐을 나눠들고는 사이좋게 걸어가는 두 사람.
그리고 막상 집에 도착해서도-
"야 우지호! 빨리 와서 너 짐 안 치워!"
"아 그만 좀 보채!"
-마냥 조용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다시,
두 사람은 재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