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동안 멍하니 있었다.
뭐부터 해야하지?
그래- 일단, 지호에게 다시 연락해야한다.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유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주무르다
저 멀리 던져 놓았던 핸드폰을 가져왔다.
전화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미칠듯이 떨려왔다.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급히 귀에 댔다.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
"아 x발 진짜!"
유권은 신경질적으로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다시.
'지금 전화를 받-'
'지금-'
그렇게 몇 차례를 반복한 뒤에 제 풀에 지쳐 쓰러져버렸다.
유권은 침대에 나뒹굴면서 간간히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우지호.. 죽여 버릴거야 진짜.."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유권은 부리나케 일어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여보세요? 우지호?"
"..."
"우지호. 나 화 안낼테니까 뭐라고 좀 해봐."
"...권아."
"응."
"나 일본 가."
"이미 다 들었어."
"..화 안났어?"
"안났다고 했잖아.
가는 건 어쩔 수 없는데 내 연락은 왜 씹어?"
그리고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유권은 몇번씩이나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똑같이 머뭇거리고 있을 지호가 느껴져서.
"미안해..."
".."
"학교, 에, 소문, 이상하게, 난 것, 도, 미안하고....
일본, 가는 것, 도, 미안, 하고...."
울음 섞인 말소리가 외마디져서 들려왔다.
유권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우지호."
"..."
"너 일본 간다고 우리 끝이야?"
"..."
"왜?"
"권아.."
"왜 끝인데? 연락하면 되잖아.
너 일본 친구들이랑 연락하고 그랬었다며.
나랑도 하면 되잖아. 왜 안되는데?"
유권은 중간 중간 올라오는 화를 눌러 담으면서 말을 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랑 끝내고 싶어?"
".."
"우지호."
"..응."
그리고는 또 다시 정적.
"..알았어."
-
여름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지호가 떠났다고 들은 후에도 학교는 변함 없었다.
지호가 오기 전에는 혼자 등교하고, 혼자 하교하던 거리도 그대로였다.
경은 유권의 눈치를 보며 평소보다 밝게 행동했고,
유권도 그 사실을 알기에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었다.
그렇게 지루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호가 없는 나날도 살 수는 있구나.
"야 김유권! 피시방?"
"넌 집에 좀 들어가라. 어머니가 걱정 안하셔?"
"야. 엄마 얘기 하지 말라고!"
유권은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려 걸었다.
노을이 뉘엿뉘엿 져가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즈음 새 노래가 흘러나왔다.
'무슨 노래 들어?'
버스 정류장에서 나눴던 첫 대화.
너와 들었던 노래.
유권은 잠시 멍해졌다.
이어폰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유권은 발길을 돌려 지호의 집 쪽으로 걸었다.
아무런 목적은 없었다.
네가 머물렀던 그 장소에 가 보고 싶었을 뿐.
-
쭈뼛거리던 것도 잠시, 유권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문은 잠겨있지도 않은 채 맥없이 열렸다.
텅 빈 방과 메마른 벽지.
탁한 공기가 숨을 가득 메웠다.
'맛있는 거 해준다며!'
'아 좀 있어봐! 옷부터 갈아 입고!'
'야 나도 교복이야! 치사한 새x'
손가락 끝으로 회벽을 쓸어내리면서 지호의 방에 들어섰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가 전부였던 방이 가구가 모두 사라지고 나니 유난히 커보였다.
'너가 그린 거야?'
'응.'
'자식, 그림 좀 그리네..'
그리고 풋, 하는 지호의 웃음 소리까지.
조금은 어색했던 그 순간이 한 컷의 필름처럼 지나간다.
그 때 넌 내게 초록색이라고 했었지.
네가 좋아하는 색이라고.
아마 네게 빠졌던 건 그 때 부터가 진짜 였을지도 몰라.
유권의 시선이 멈춘 곳은 지호의 그림이 붙여져 있었던 벽이었다.
청량한 색으로 가득 물들었던 벽에는 이제 온통 종이의 잔해들이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붙이기는 쉬워도 떼는 일은 어려웠다.
우지호의 그림도, 우지호에게 준 정도.
유권은 그대로 돌아서서 문을 닫고 나왔다.
바깥이 제법 깜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