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 날이다.
아직 외워야 할 구절의 반의 반도 읽지 않았는데.
대부님이 아신다면 경을 치실거야.
이를 어쩌면 좋지?
"이름 아가씨! 이름 아가씨!"
잔뜩 손톱을 물어뜯는 내 앞에 거짓말처럼 네가 나타났다.
평소보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여자라 해도 믿을듯한 미모의-
"지호야-"
나의 소년.
우지호.
-
"이름 아가씨, 또 손톱."
너의 눈꼬리가 올라간다.
한껏 위협적인 표정.
"또 이러면 정말 대부님께 말할거라고 했잖아요!"
"아아- 하지만 떨리는 걸 어떡해.
낭독은 잘 되지도 않고. 다 읽지도 않았는걸."
눈이 또 저만큼 커져서는, 잔소리 할 때 마다 나오는 표정이다.
"그치만 세 시간도 안 남았는데..
제가 도와드릴테니 어서 읽으세요!"
"흐음- 그치만 하기 싫은걸.."
보란듯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 곁눈질로 널 살폈다.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대는 꼴이라니.
"그냥 오늘은, 확 놀아버리자. 어때?"
"아가씨!"
"아, 농담이야 농담. 농담도 못해?"
치맛자락을 팩, 들어올리며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너는 내 눈치만 살피며 졸졸 따라오고 있겠지.
"아가씨이.. 같이 가요오.."
양반은 못 되는구나, 우지호.
-
"그러니까- 좋다라고만 하지말고 어떤지 제대로 얘기를 해보란 말이야!"
"하지만 전.. 정말 좋아서.. 좋다고 한 것 뿐인데요.."
또 다시 시작된 우지호와의 실랑이.
사실 나의 일방적인 괴롭힘일 뿐이다.
어쩔 줄 몰라하면서 붉어지는 저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썩 좋아지거든.
"대부님이 혼내시면 네가 책임질거야? 어? 책임질거냐구?"
"..."
너무 심했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잔뜩 움츠러든 너를 보니 마냥 재밌지만은 않았다.
이거 뭐, 반응이 있어야 재밌지.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날 도울 방법이 있으면, 도와줘도 좋다는 거지."
괜히 미안해져 누그러진 말투로 네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무룩했던 눈이 생기를 띄면서 웃더구나.
앙큼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럼 이 미천한 제가 아가씨를 도와드려도 될까요?"
"아, 뭐. 좋을대로."
온갖 생색은 다 내고 있지만,
나도 우지호도 지금 이 순간 갑이 누군지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네가 그리도 신나 보이는 거겠지.
"아아- 하지만, 대부님께서 아시면 제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에요.
아, 물론 이름 아가씨도.."
"우지호! 이 잔망한 것아. 어서 도와주지 못해?"
결국 무너져버린 내 모습에 너는 맑은 웃음꽃을 잘도 피워내더구나.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머금은 네 모습에 나는 화도 낼 수 없었다.
"네, 아가씨.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이름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날 가지고 노는구나. 우지호.
-
"그러함은.... 것 이고..... 하여.."
"크흠, 됐다. 오늘은 그 정도로 하거라."
"..네, 대부님."
"낭독이 많이 늘었구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은 모양이야."
대답 대신 수줍게 웃어보였다.
아가씨라면 무릇 이런 덕목은 갖추어야지.
"이만 들어가 쉬도록 해라. 지호를 불러야-"
"지호는 제가 심부름을 보냈기에 소녀 혼자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편히 계십시오, 대부님."
최대한 예절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나왔다.
문을 벗어나자 마자 치마를 걷어올리고 다락방에 올라갔다.
"지호야! 우지호!"
"이름 아가씨.. 콜록콜록"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네 모습에 미안함이 밀려들어왔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콜록콜록.. 먼지를 조금 먹은 것 빼고는 괜찮아요.. 콜록"
새하얀 너의 얼굴이 뿌연 석탄재를 뒤집어쓴 걸 보니 안쓰럽기까지 했다.
옷을 힘껏 털어주느라 내 치마에도 먼지가 묻었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아가씨 치마가.."
"신경꺼."
".."
너는 잠자코 내게 제 몸을 맡겼다.
흘끔흘끔 내 표정을 살피는 걸 보니, 내가 화난 줄 아는 모양이지.
"..아가씨. 낭독 정말 잘하시던데요. 보고 하는 티도 안났어요."
"그거야 대부님이 한번도 고개를 드시지 않으니까.
티가 안 났던 것 뿐이야."
다락방에 숨겨진 통로를 타고 내려가 병풍 뒤에 숨겠다고 한 것은 지호였다.
위험할 것 같아 말렸지만 극구 우기기에 내버려두었더니,
그렇게 먼지를 뒤집어썼을 줄이야.
"다 너 덕분이야. 너 아니었으면 혼날 뻔했어."
"전 몸만 썼을 뿐일걸요. 다 아가씨 머릿속에 들어있었던 거에요."
톡톡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끔 얄밉긴 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는 없는 너.
나는 너의 은백색 머리카락 위에 붙은 먼지를 털어냈다.
얼굴에 묻은 그을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아가씨, 저 지금 많이 더러워요?"
"응? 아니. 거의 다 털어냈어."
"그럼, 아가씨도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실래요?"
생전 이런 말 안하던 애가, 갑자기 왠 어리광이래.
"그럼.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여기 내려갔다 오는 거 빼고."
쿡쿡 웃는 네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넌 곧 다시 순진한 표정을 띄더니 입을 열었다.
"키스해주세요, 아가씨."
"..뭐?"
"제 얼굴 중에서 가장 안 더러운 곳에 키스해주세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너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제 머리칼에 있던 내 손을 내리더니,
옷 소매로 내 손가락을 열심히 닦아내며 물었다.
"너무 큰 소원인가요?"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또 다시 웃고 말았다.
"아니."
너에게 더러운 곳이 어디있겠니.
늘 나의 가장 창피하고 부끄러운 곳까지 덮어주는 너인데.
기댈 곳 하나 없는 괴팍한 아가씨라는 뒷담화에도 나를 감싸주는 너인데.
너의 순백이 나에게도 스며들어오길 바라며,
나는 선뜻 입술을 포갰다.
"사랑해요, 이름 아가씨."
"고마워, 지호야."
평생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 줘.
내 곁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
나만의 영원한 소년.
우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