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도록 뒤척거리만 하던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난 원래 책만 읽으면 잤으니까 뭐든 읽으면 잘 수 있을 거야.
기지개를 쭉 펴며 거실로 나오자 내 눈에 확 띄는 노트.
진짜 오늘까지만 읽고 정전국 씨 줘야겠다.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노트를 펼쳤고 다시 봐도 웃긴 그의 필력에 감탄했다.
분명 이 뒤에 뭐가 더 있던 것 같은데...
계속 넘겨도 그 재미진 이야기 뒤로 공백만 남아있는 노트에 실망하려던 찰나,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뭐야?"
예상치 못한 그의 일기를 발견했다.
밤마다 쓴다던 게 이건가.
뭐 별거 있겠어, 싶은 마음이 든 나는 창문을 힐끗 보곤 마치 일기장을 검사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이웃이 이사왔다. 여자 이웃은 난생 처음이다. 시꺼먼 남정네는 많이 봤어도 여자는 처음이다. 창문 열었다가 심장 터질 뻔 했다. 진짜 예쁘다. 우리 엄마 이후로 이만큼 예쁜 사람은 처음이다. 내 얼굴에 계란을 던지고 안절부절하던 표정도, 이불 좀 빌려 달라며 눈을 깜빡거리던 것도 하나같이 다 예쁘다. 심지어 내 이름을 전정국이 아니라 정전국이라고 하는 것도 너무 귀엽다. 그래서 그냥 마음대로 부르게 뒀다. 내 이름이 정전국이든 전정국이든 뭐가 중요한가. 이름이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게 중요하지. 그래서 저녁에 먹으려던 빵을 줘버렸다.
그 사람이 나랑 친해졌으면 좋겠다. 좋아하게 되면 더 좋고.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사실 오늘 추웠다. 근데 날씨가 엄청 좋았다. 이게 다 이웃 여자 때문이다. 이름이 성이름 이랬다. 이름도 예쁘다. 혹시 까먹을까 싶어서 책상 위에 적어놨다. 근데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 같다. 오늘 새벽에 옆집이 엄청 시끄럽길래 일어났는데 새벽부터 드라이기 소리가 온 집을 울린다. 여기 방음 잘 안 된다고 말해줄까 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잤다. 자기 몸만한 이불이랑 베개를 팔에 막 안고 날 주는데 내가 놀릴 때마다 표정이 변하는 게 진짜 귀엽다. 옆에 두고 매일 놀려보고 싶다.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멍들었다. 다리에. 엄청 크게. 근데 하나도 안 아프다. 왜냐면 이름이 때렸으니까. 이름이 침대 조립해 달라고 했을 때 엄청 당황했다. 나 침대 조립 못 하는데.
근데 그거 나랑 같은 거였다. 그래서 엄청 쉽게 조립했는데 옆에서 날 쳐다보는 이름 때문에 엄청 긴장됐다. 사실 부품 건네주면서 손 부딪혔을 때 그냥 확 붙잡고 안아버리고 싶었다. 근데 참기로 했다. 나중에 우리 둘이 커플이 되면 하루 종일 안고 있어야지.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딸기 한 박스를 주문했다. 난 원래 귤을 가장 좋아하는데 오늘부터 딸기로 바꾸기로 했다. 딸기를 씻으면서 생각한 건데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이름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매일 밥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름이는 뒤에서 날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 아까 빨래하다가 분홍색 티를 발견했는데 이름이 생각이 났다. 진짜 잘 어울릴 것 같다. 나중에 꼭 입은 걸 보고 싶다.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어제 이후로 이름이 안 보인다. 집에서 안 나오는 것 같다. 소매 접어주니까 가만히 있는 거 엄청 귀여웠는데. 다음에도 접어주고 싶다. 마음 같아선 창문 확 열고 하루 종일 얼굴만 보고 싶은데. 그니까 이제 좀 집에서 좀 나와주라...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이름이 데이트를 했다. 이름도 말해줬는데 기억 안 난다. 기억 나도 기억 안 할거다. 근데 얼굴은 안다. 가끔 집 앞에서 옆집 주인아주머니랑 얘기하는 거 봤다. 만약에 옆집 아들이 그 사람이 아니라 나였으면 나랑 데이트를 했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우리 엄마한테 말해서 내 사진 좀 이름이 보여주라고 할걸. 문 열고 나오는데 진짜 너무 심각하게 예뻐서 그대로 고백할 뻔했다. 그 사람이 이름이를 마음에 안 들어 했으면 좋겠다. 제발.
아 생각할수록 짜증 난다. 내가 더 빨리 태어났더라면 부장 말고 나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 이름이가 그 인간 말고 날 좋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처음 봤을 때 좀 더 친절하게 굴 걸 그랬다. 장난말고 진지하게 굴 걸. 이름이 보고 싶다. 엄청 보고 싶다.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이름이 집에서 노래 부른다.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까는 아니쥬였는데 지금은 쩔어다. 나도 방탄소년단 좋아하는데. 이름이는 누굴 가장 좋아할까? 난 거기 지민이를 좋아하는데. 이름이도 지민이 좋아하려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방탄 얘기 꺼내면서 말 걸어봐야지. 이름이 노래 부르는 거 너무 귀엽다. 하루 종일 노래 불러달라고 하고 싶다.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오랜만에 남준이 형이랑 만났다. 남준이 형은 똑똑하니까 알겠지, 싶어서 이름이 얘기를 했다. 남준이 형이 나한테 그러면 고백을 하라고 했다. 나도 하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난다. 그런데 형이 계속 이러다간 진짜 이름이를 놓칠 수도 있다고 했다. 안되는데... 남준이 형이 미인은 용기 있는 자가 얻는 거라면서 용기를 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잘 되면 자기한테 밥을 사라고 했다. 고백한 건 난데 왜 밥은 형이...? 아무튼 언젠지는 몰라도 언젠가 꼭 고백을 하고 말 거다. 그때 이름이 받아줬으면 좋겠다.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이름이가 누군가와 엄청 열심히 통화한다. 근데 옆집 놈은 아닌 것 같다. 그 사람한테 '야'라면서 반말을 하진 않을 테니까. 아마 친구겠지? 목소리가 엄청 커지고 높아졌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신나게 통화하는 것도 귀엽지? 내 앞에서도 저렇게 종알종알 떠들어주면 좋을 텐데. 나한테도 저렇게 밝게 웃어주면 진짜 좋을 텐데. 오늘은 자기 전에 달에 소원이나 빌고 자야겠다.
[2016년 x월 xx일 날씨 : 맑음]
오랜만에 호석이 형을 만났다. 역시 그 형은 여전히 시끄럽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오랜만에 향수 가게에 가서 향수 하나를 샀다. 나랑 같은 향이다. 이름이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이제 자연스럽게 주기만 하면 되는데. 언제 주지. 진지하게 주기엔 내 마음을 들킬 것 같다.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만약 이름이 이걸 뿌리면 나랑 같은 향이 나겠지? 그러면서 나를 떠올려주면 좋을 텐데. 괜한 기대는 버리는 게 좋겠지. 아무튼 그녀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2016년 x월 xx일 날씨 : 몰라]
방금 향수 주고 왔다. 놀라는 것도 예쁘다. 근데 짜증 난다. 관심 없는 척 슬쩍 주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이름이 전화를 하면서 엄청 좋아했다. 그 옆집 아들인 것 같다. 나를 볼 때도 그렇게 좋아한 적 없었는데. 나 보면서 그렇게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이름이 통화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아니, 바로 옆집이니까 통화 말고 얼굴 보면서 얘기하고 싶다. 근데 망한 것 같다. 그 인간이 이름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안 되는데.
[2016년 x월 xx일 날씨 : 안맑음]
사실 오늘 날씨 되게 좋았는데 나는 안 좋았다. 이름이 그 망할 부장과 데이트하러 갔다. 짜증 나. 오늘도 엄청 예쁘다. 치마도 입었다. 그렇게 예쁜 모습으로 나를 만나러 오는 거면 참 좋을 텐데. 그런데 이름이에게서 내 향수 향이 났다. 뿌린 것 같다. 날아갈 것 같다. 왜 이름이는 날 안 좋아하는 걸까. 나는 엄청 좋아하는데. 날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 인간 말고.
이름이 집에 보일러가 터졌다. 바람 때문에 창문이 흔들거려서 다시 닫아주려고 했는데 집에 물이 차있었다. 그래서 당장 옆집에 말해주고 왔다. 지금 이름이가 집에 온 것 같다. 소리가 들린다. 보일러가 터진 건 싫지만 그것 때문에 그 인간이랑 그만 만나고 집에 온 건 좋다. 아 보일러 고치는 법을 배워둘걸. 지금 이름이 표정 엄청 귀엽겠지. 이딴 거 그만 쓰고 이름이 보러 가야지.
-
일기는 여기서 끊겼다.
술김에 내가 잘못 읽은 거라고 생각하며 두 세 번 반복해서 읽어봐도 같은 내용이다.
꿈일 거야. 이건 꿈일 거야. 꿈이어야만 해.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을 때, 지난 시간 동안 그의 행동이 이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트가 텔레비전 옆에 있었구나.
그리고 이걸 내가 볼까봐 정, 아니 전정국 씨가 노트를 집어던진 거고.
그래서 그렇게 찾은 거고.
"뭐야..."
난 이제 어떻게 저 사람 얼굴을 봐야 하는 걸까.
이제 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 노트를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분명 티가 날 거다. 이걸 읽었다는 게. 그리고 그가 날 좋아한다는걸... 알게 됐단 게.
어떡하지. 진짜 어떡하지.
창문을 열고 닫기를 수십 번. 창문 앞을 왔다 갔다 하기를 수백 번.
그때쯤 나는 조용히 깨달았다.
김석진 씨는 정전, 아니 전정국 씨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그럼 난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아 하는 거지.
전정국 씨가 날 좋아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 아 머리 아파-"
소파에 풀썩 누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분명 자기 위해 읽은 노트였는데 더 못 자게 됐다.
잘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정국에 뷔온대 사담 |
정국이가 이름을 찾았네요. 제가 그렇게 열심히 말씀드렸던 일기장입니다! 정국이의 일기장! 정국이 알고 보니 사랑꾼이었네요. 그저 정국이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름이가 부러울 뿐... |
신청하셨는데 암호닉이 없거나 잘못되어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너와 나, 30cm 암호닉 |
ㄱ 간장밥 / 갓찌민디바 / 고무고무열매 / 구가구가 / 국쓰 / 귤 / 꽃오징어 / 꾸꾸♥ / 낑깡 ㄴ 나의별 / 너를위해 / 늘봄 / 늘품 ㄷ 다미 / 다정 / 달콤윤기 / 둥둥이 ㄹ 랄라 / 레드 / 로즈 / 루이비 ㅁ 마름달 / 목소리 / 무네큥 / 미니미니 / 민슈팅 / 밍뿌 ㅂ 방소 / 뱁새☆ / 범블비 / 분수 / 블라블라왕 / 비림 / 비비빅 / 비븨뷔 / 뷔밀병기 / 빠밤 / 빡찌 / 뾰로롱♥ / 뿡침침슈 / 쀼 ㅅ 사이다 / 순생이 / 슙큥 / 스타일 / 쓰니워더 ㅇ 연꽃 / 오렌지 / 오월 / 용가리침침 / 윤기야 / 융융힝 ㅈ 전정쿠키 / 정꾸기냥 / 정연아 / 정전국 / 정쿠다스 / 제리뽀 / 주황자몽 / 쩡구기윤기 / 쫑냥 ㅊ 참기름 / 채린별 / 초코아이스크림 / 침치미 / 침침이< / 침탵 ㅋ 코코몽 / 콘칩 / 쿠앤크 / 큐큐/ 크슷 / 큄 ㅎ 항암제 / 환타 / 희망빠 숫자, 문자 030901 / 0320 / 0917 / 1234 / 6018 / ♡율♡ / ♥옥수수수염차♥ |
p.s. - 암호닉은 http://www.instiz.net/bbs/list.php?id=writing&no=2743458&&noinput_memo= 이곳에서 받고 있습니다!
p.s. 2 - 드디어 정국이가 이름을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