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반드시 재생해주세요!)
우리 인연은 내 기억이 나지 않을때부터, 아마도 내가 아파하면 너도 아파하고 내가 기뻐하면 너도 기뻐했던, 마냥 생각없이 서로의 감정이 자신의 감정이라고 느꼈던 아주 어렸을때부터.
학교에 갈때면 서로의 손을 잡고 힘차게 걸었고, 학교가 끝나면 떡볶이를 사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1학년때부터 6학년때까지 3학년 한번 빼고 쭉 같은반이였던 우리는,
3학년 1년을 서로가 없는 교실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세상이 무너질 듯 슬펐다. 하지만 학교가 끝나면 당연하듯이 서로의 교실앞에서 서로를 기다렸고, 한손에는 실내화가방을, 한손에는 너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아마 내 기억속 가장 소중한 순간들은, 너와 등하교 했던 모든 순간일 것이다.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망설임없이 이석민, 김여주, 서로의 이름을 댔다. 친구들이 너네 사귀냐? 놀려도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 커서 결혼하자, 라는 약속을 하며 서로의 손에 토끼풀 반지를 끼워주기도 했었다. 아, 우리도 참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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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들어가고, 여자와 남자가 되어가면서 우리의 사이가 평범하지 않다는걸 느꼈다. 누군가 물어보면 당연히 친구라고 둘러댔지만, 너와 나 사이에는 친구 이상의 묘한 것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은연중 느끼고 있었지만 서로가 모른척했다. 예전처럼 마냥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나는 석민이의, 석민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엄마에게 말하지 못하는 내 부끄러운 성적도, 친한 여자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깊은 고민도 석민이에겐 털어놓았다.
석민이도 하루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을 내게 말해주었다. 가끔은 말이 많다고 타박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에게 모든걸 말해주는 너가 고마웠다.
하지만 우리사이에 절대 오가지 않았던 주제하나는,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이였다. 가끔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생기는 우리였지만, 얼마가지못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우린 서로에게 돌아왔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거나, 그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조언을 구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마음을 언제나처럼 부정하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나에게 너 이석민과 어느 사이냐 물었고, 나는 당황했지만 태연스럽게 우리 그냥 친구지, 하고 둘러댔다. 그러자 친구는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이석민 좋아하는데, 너가 이어주면 안되겠느냐고.
그때 쿵 하는 가슴으로 나는 알았다. 아, 나는 석민이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그때부터 알았다. 석민이는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꽤 많았고, 다들 숨기고 있었지 활발하고 다정한 석민이를 싫어하는 여자아이는 없었다.
나는 못된심보로, 거기에 이석민이 미워졌다. 그것도 모르고 오늘 축구를 이겼느니, 졌느니 이런 말만 해대는 석민이가 답답하기도 했다.
날 앞서나가며, 누구 속도 모르고 저렇게 신나있는 이석민의 뒤통수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야, 민지가 너 좋아한대. 소개받을래? 예쁘잖아."
그러자 이석민은 동동거리던 발을 가만히 두고, 잠시 멈칫하더니 날 쳐다봤다. 그리곤 내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금 나보고 다른 여자애 소개받으라고 한거야? 진심이야?"
그러고 대답못하는 날 보며, 이석민은 내 어깨를 잡고, 어느샌가 나보다 커진 키를 내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말했다.
"나한테 앞으로 그런 말 하지마. 다른사람은 몰라도 넌 나한테 그런말 하지말아줘."
그러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가까이서 본 너는 꽤 많이 남자다워져있었고, 니 눈빛은 진심이였다. 왠지 모르겠는데 너와 눈을 마주친 후 내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 자리에 멈춰져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석민은 뒤를 돌아보며 해맑게 어서오라고 외쳤다.
나는 그날부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계열이 갈리며 한번도 같은반을 하지 못했다. 멀어져버릴까, 이젠 너가 더 이상 나를 찾지않을까 걱정도 많이 했지만 걱정을 하며 지낸 내 수많은 밤이 무색하게 너는 항상 그자리에 있어주었다.
엄마나 선생님께 혼나 축 쳐져있는 날 보면, 너는 날 절대 가만두지 않고 너가 저번에 먹고싶다고했던 그 빙수먹으러갈래? 너가 보고싶다고했던 그 책 같이 사러가자. 하며 내 기분을 띄워주기위해 노력했다. 야자에 지쳐있는 날 보면 어쩔줄 몰라하며 우스운 개그를 치고, 아파하는 날 보면 약과 초콜렛을 사와 아프지 말라고, 너가 아프면 나까지 힘들다며 징징댔다. 너에게 받는 관심은 너무나도 과분해서 어느순간 잃어버릴까 걱정될 만큼 소중했다.
너는 우울해있는 나에게 여러 방안을 제시해주었지만, 내 선택은 항상 노래방이였다. 평소엔 항상 장난기 가득하던 너였지만, 노래할때만큼 너는 세상 누구보다 진지하고 멋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공간 안에서 너가 혼자 노래를 부르면 괜히 나에게 불러주는 듯 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믿고싶었다. 그래서 너가 애절한 사랑노래를 부를때면, 너가 이 노래를 내 생각을 하며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도 했다.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선 부끄러운 듯 날 향해 헤헤, 웃는 너도 좋았다.
사실 이석민이 노래부르는 모습만큼은 나만 보고싶었는데, 주변 친구들에게 등떠밀려 너는 학교 축제에 나갔다. 사실 너가 축제에 나간다는 사실은 당일까지도 몰랐다.
나와 장기자랑 무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호응만 해줘야지 하고 뒤에 앉으려던 참이였다. 의자를 끌고 뒤로 가던 내 손을 누군가 황급히 붙잡아 뒤돌아 보니,
답지않게 멀끔하게 차려입은 이석민이 상기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해 너 뭐하냐고 묻자, 이석민은 내 손을 더 꾹 붙잡으며 말했다.
"나 오늘 무대에서 노래부르는데, 너무 떨려. 너 보면 괜찮을거같은데, 맨 앞에 앉아주라."
평소답지않은 그애의 진지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친구에게 양해를 구해 맨 앞줄에 앉았다. 석민이의 앞순서에는 계속해서 화려한 무대가 이어졌지만, 나는 박수를 치면서도 대기실에서 떨고있을 너의 모습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너의 차례가 되었고, 이석민의 소문을 익히 들어 기대에 부푼 전교생은 박수로 너를 맞았다. 나는 그저 옅은 미소를 띄고 너를 쳐다보기만 했다.
너도 같은 미소로 날 보며 무대에 섰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래하는 너는 , 아, 멋있었다. 그 노래도 언젠가 내가 우울해있을때 불러주었던 노래였다. 그때의 모든 추억이 떠오르는 것 같아 괜히 벅찼다.
너는 누구보다 진지해보였고 진심을 담아 노래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숨죽이고 노래를 들었다.
줄곧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던 너는,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무대 앞의 관객들을 쳐다보았다. 모든 아이들이 환호했지만 나는 그저 엄지를 세워보이며 입모양으로 잘했어, 해주었다. 석민이도 날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그 큰 강당엔 너와 나밖에 없는것같았다.
너는 무대를 끝나고 내려와 날 밖으로 끌고나갔고, 내 어깨에 머리를 푹 기대며 말했다.
"너 없었으면 죽을 뻔 했어. 그냥 너 우울해하는거 위로해준다고 생각하면서 부르니까 실수 안한것같아."
너는 어쩜 그런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까, 너가 그런말을 내게 할때마다 내 심장은 내려앉아 구름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내게 기댄 너를 꽉 안아주고싶었지만, 나와 이석민은 언제까지나 친구라는 이름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잘했어. 하는수밖엔 없었다.
나는 언제쯤 너를 마음껏 안을 수 있을까 스쳐지나가듯 생각도 했지만, 너의 손을 잡는것보다 더 중요한건 너를 오래토록 보며 내 인생의 한켠에 두는 것이였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서툰 성인이 되어있었다. 교복은 입었으나, 더이상 미성년자가 아니고, 미성년자가 아니지만 어른은 아닌 그런.
나와 석민이는 이제 더 이상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됐다. 서로가 지망하던 대학교에 붙어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마음 속 한구석에서 찌릿찌릿한 것이, 이제 나와 석민이의 인연은 더 이상 이렇게 이어지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생각하면 한없이 우울했지만, 어쨌거나, 아직까지는 내 옆에 석민이가 있어주었다.
수능이 끝나고 우린 여기저기 잘도 놀러다녔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고, 심야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마지막까지 날 일으켜 세워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건 이석민이였다. 석민이네 가족과 함께 새해 일출을 보러가기도 했다. 너와 함께 맞는 마지막 새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떠오르는 해가 마냥 예쁘지만은 않았다. 너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가운 겨울바다에 손을 담구며 나에게 튀기는 장난을 쳤다. 이런 널 보면 넌 여전히 아이같은데, 나 혼자 너무 많은걸 바라고 있구나 싶어서 더 가슴이 아렸다.
20년간 봐온 너는 어느새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존재중 하나가 되어, 만약 너를 잃는다면 공허해져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김여주씨, 또 무슨 생각에 그렇게 빠져있으세요. 스무살인데 이제 좋을 생각에 행복해해야지, 뭐가 이리 심각해,"
하며 아무렇지 않게 내 볼을 쓰다듬는 널 보며 난 결심했다.솔직히 입밖에 내어버릴까 고민도 했지만. 난 널 오래보기위해, 20년간 꽁꽁 싸매왔던 이 마음을 그냥 묻어야겠다.
속도 모르고 이석민은 헤헤 웃으며 내가 추울까 차에서 담요를 꺼내와 나에게 덮어주었다. 뭐라고 해야될지 몰라 널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 난 널 오래보고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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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날이였다. 어느때보다 교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이들과 부모님들로 강당은 북적였다.
우리의 학생회장은 묵묵하게 준비해온 글을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결국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에 따라우는 아이도 몇명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제 봉인해제도 됐겠다, 더 이상 옥죄이는 무언가도 없겠다 하는 기쁨에 한손엔 꽃다발을 들고, 한손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남기기에 바빴다.
나는 부모님께 받은 꽃다발을 양손에 함박 들고 감사했던 선생님과 사진을 몇 장 남겼다. 멍하니 서있는 날 보고 몇명의 친구들이 찾아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리고는 넌 왜 오늘은 이석민이랑 같이 있지 않느냐고, 졸업하면 마지막일수도 있는데 사진하나쯤 찍어두라고 말했다. 그에 어, 그래야지,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은 꽃다발을 들고 교복을 차려입은 널 보면 정말 마지막인게 실감나서, 그래서 내 감정이 흘러나와버릴까봐 억지로 너희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일부러 너가 오는 것 같으면 피했다.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널 찾아나서야겠다고 결정하고 뒤를 도는 순간
넌 내 앞에서 숨을 쌕쌕대며 서있었다.
"진짜, 어디있길래 이렇게 안보이냐? 나랑 제일 먼저 찍으러 와야되는거아냐? 맨날 내가먼저와주니까 당연하지, 김여주?"
꽃다발을 들고 함박웃음 지으며 못된말을 하는 너는 언제나처럼 날 찾아와있었다. 내가 어딜가든, 무슨 감정을 느끼든 항상 내 앞에 있는구나, 너는.
차오르는 눈물을 못참을것같아서 괜히 고개를 숙이고 니 가슴을 퍽퍽 쳤다. 바보야, 이석민.
예상치못한 반응에 당황한 너는 또 안절부절 못하며 내 눈물을 닦으려 내 볼을 어루만졌다.
"어어, 너 졸업이라고 우는거야? 우리사이가 졸업으로 갈라질 사이야? 울지마, 여주야."
그래도 계속 훌쩍이는 날 보며 그저 픽 웃으며 날 안아주었다.
"넌 몸만컸지 아직도 초등학생같아. 대학교가서 나 없다고 울면안된다. 나 없으면 내새끼 누가 달래주냐. "
그러게, 너 없으면 어떡할까, 이석민.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건, 내 마음을 감추는 일 뿐이야. 너랑 있었던 모든 일은 내 첫사랑의 추억으로 가져갈게.
나는 억지로 웃으며 너와 사진을 찍었다. 이석민과, 너와, 내 첫사랑과, 내 고등학교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사진을 찍었다.
내가 나이가 많이 들어 내 어린시절을 떠올릴 일이 있다면, 그저 이석민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행복한 시간은 항상 너와 함께 나누었고, 슬픈 시간도 또한 너와 공유했다. 모든 감정은 너와 함께여서, 어떤 추억을 떠올리더라도 너는 절대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소중하고, 너와의 끈을 어떻게든 잡고 싶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여전히 고개숙이고 있는 너에 대한 감정의 불씨를 완전히 사그라뜨린다.
내 10대와 함께, 가장 찬란했던 첫사랑, 너도 함께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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