₁
“ 저 있잖아…. ”
“ ……. ”
무어라 술렁거리는 주변친구들통에 쉽사리 입을 뗄수가 없었다. 딱딱히 굳은채로 내 앞에 서있는 찬열을 멀거니 올려다보자 거만하고도 드센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찬열
이 이 상황이 많이 익숙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 뭐. ” 툭하니 내뱉는 그 한마디에 하려고 했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가라. 찬열아 이리와. 여기저기서 그의 친구들
이 그를 부르는게 느껴졌다. 따가운 눈총들이 나를 벌벌떨게 만들었다.
“ 할말없냐? ”
“ ……. ”
“ 간다. ”
또 이렇게 흘러갔다. …내 4번째 고백은.
₂
바람이 분다. 감흥없는 눈빛으로 칠판을 쳐다보다 시선을 뒤로 옮겼다. 엎어져있는 백현의 옆자리에 앉은 찬열이 알이 없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다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 찬
열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내 책상위를 짚는 딱한 소리에 반자동으로 앞을 쳐다봤다. “ 뭐보니, 너? ” 깐깐한 영어선생님이 안경을 쓱 올리며 내게 물었다. 아, 아니요.
저, 그게…. “ 너 요즘 영어 성적 많이 떨어졌더라. 공부 좀 해. ” 제대로된 말을 하기도전에 말머리를 끊어버리던 영어선생님이 긴 막대기로 내 책상을 두어번 짚다 칠판 앞
으로 돌아갔다.
「 박찬열 그만봐, 미친년아. 」
…….
선생님이 교과서를 보며 설명을 하는 동안 내 앞으로 툭날라온 잔뜩 구겨진 포스트잇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펼쳤다. 안에 쓰여진 글자를 읽자마자 대각선 옆을 쳐다봤다.
저가보낸 포스트잇을 읽는 내 모습을 낄낄거리며 보던 여자애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중지를 들었다. ‘ 더러우니까 쳐다보지마. ’ 그 여자애의 눈빛이 나를 옭아맸다. 그
래. 여자애를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틀어 창밖을 바라봤다. 손에 잡혀있던 구겨진 포스트잇을 갈갈이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 * *
학교종이 치자마자 야자고 뭐고 집으로 갈 생각외에는 들지 않았다. “ 야자까지 째네, 미친. ” 이리저리 수근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책가
방을 쌌다. 서랍안쪽에 있던 교과서를 꺼내들어 가방안속에 집어넣고 필기구를 챙긴채 반을 빠져나왔다. “ 야 미친년, 어디가냐? ” 저의 무리와 함께 화장실에서 나오던 여
자애가 슬쩍 웃으며 물었다. 집. 단조로운 말을 한채 계단을 내려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 뭐? 안들려, 미친년아. ”
“ …집에 간다고. ”
“ 집? 네가 집도 있었냐? ”
비아냥대듯 어조로 말하는 여자애를 지켜보던 여자애의 무리들이 날 비웃기에 바빠보였다. “ 신기하다, 이런 거지년도 집이 있었구나. ”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서슴
없이 내뱉던 여자애가 시선을 돌려 뒤를 쳐다봤다. “ 야, 찬열아. 미친년이 집에간대. ” …찬열이가 있었구나. 찬열이라는 이름에 몸이 움찔했다. 떨궈지는 고개를 치켜들
생각도 않고 누가 잡을새라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갔다.
“ 그러냐?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
₃
쌀쌀한 거리를 정처없이 거닐다가 무엇에 이끌리듯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죽고싶다, 죽고싶어…. 반복적으로 되뇌이던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내렸다. …죽어버릴
까? 정말 죽어버려? ‘ 그러냐?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 머릿속을 맴도는 찬열의 무심한 말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그러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 찬열
아.
“ ……. ”
소리없이 조용한 아파트 옥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바닥에 몸을 뉘였다. 이 세상은 나에게 너무나도 가혹하다. 치가 떨리는 선생님의 잔소리와, 어느때부터가 당연하다
는 듯 차가워진 아이들의 시선. 그리고 그 속에 함께 존재하는 너의 눈빛. 까만 밤하늘에 작게 그려진 별을 하나하나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간앞에 서자마자 눈
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왜 나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였을까, 친구와 함께 웃으며 일상이야기를 하지 못 했을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고백을 하고, 그 고백을 계기로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가 왜 되지를 못 했을까. 왜, 왜 그랬을까 찬열아.
“ ……. ”
무의식적으로 한발한발 허공을 향해 다가서는 발걸음을 늦출수가 없었다. 그것을 생각할때즈음엔.
나는 이미 죽어있었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네가 없는 이곳은 너무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