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님이라고 부르실 필요까지야. 선배님은 학생 회장 치곤 꽤 거친 면모를 갖고 계시더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경수는 잠깐 먼저 가서 공부하고 있을래?"
"왜.. 뭔데!"
"형은 들어가요."
치, 잔뜩 삐쳤다는 티를 내며 혼자 열람실로 들어가는 형이다. 형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둔 백현이 다시 내게 고개 돌렸다. 전과 다른 침착한 눈빛이었다. 난 벌써 내 열등감의 실체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말이다.
"맞은 데 아픈 건 알겠는데 경수 앞에선 허튼 얘기하지 말자."
"아, 뭐. 의외로 입단속시키는 방법이 합당치 못하시길래요."
"합당했으면 큰일이지. 안 그래? 앞으로도 잘 다물고 있으세요, 후배님."
백현이 바닥에 놓여진 캔을 발로 툭 한 번 치고 돌아섰다. 쨍 소리를 내며 엎어진 캔은 아직 다 먹지 않아 안의 내용물이 다 쏟아져나왔다. 그 모습이 내 불난 속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우연히 둘의 사이를 알게 됐다는 사유만으로 백현은 내 자존심을 짓밟았다. 이렇게나 빨리 선전포고를 날리고 싶진 않았는데.
"다물어야죠. 우리 경수 형 위해서라도."
발걸음을 멈춘 백현이 그 자리에 서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내게 말했다.
"네 자신이나 위하세요."
넓고 넓은 열람실 안에 나와 백현은 경수 형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내 아집일진 몰라도 절대 형과 백현이 둘만의 공부 시간을 갖도록 협조하고 싶진 않다. 형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는지 참고서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열심히 그었다. 형 옆에선 형이 아주 작게 혼잣말을 하는 것까지 들렸다. 무언갈 외울 때 나오는 습관인 것 같다. 보편성, 규칙성, 하며 단어를 읽는 모습이 한글을 처음 깨우치는 애 같았다. 나도 형을 따라 사탐 문제집을 펼쳤다. 웃기는 건 백현이 내쪽을 흘끗 보자마자 곧바로 사탐책을 꺼냈다는 것이다. 신경이 곤두섰다.
한 시간 쯤 됐을까 형은 손에 펜을 쥔 채로 고개를 꾸벅이며 졸았다. 귀여워서 화들짝 놀래켜주고 싶었다. 이건 진짜 도촬감인데. 형은 손바닥을 활짝 펼쳐 양볼을 툭툭 치며 잠을 깨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책 위로 엎어져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간헐적으로 새어나오는 숨소리에 나도 나른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도경수라는 경계가 무너졌을 때, 백현과 나는 서로를 노려봤다. 스파크 튀기는 이 눈싸움에서 절대로 지고 싶지 않다. 백현은 무언가 말하려다 도서관임을 인지했는지 피식 웃으며 나보다 먼저 시선을 돌렸다. 눈싸움에서 이겼다고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래봤자 형이 네 거라 이거지? 되게 기분 나쁘네.
원래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것에 대한 취미가 없는 것도 있지만, 백현의 옆통수라도 내 시야 안에 들어오는 것이 불쾌했기에 난 잠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에 왔다는 세훈은 웬일인지 종일 나에게 문자 한 통 없었다. 딱 점심시간인데, 왜 연락이 없지. 결국 내가 먼저 문자를 쳤다. 잠깐만 로비로 나와봐. 곧바로 문자 한 통에 모습을 드러내는 세훈이다. 답지 않게 손엔 웬 서적을 들고 있다.
"웬 책이야?"
"나 중국어 통달할 거다."
"너 진짜 돌았냐? 내가 방금까지 무슨 수모를 겪은지 알아?"
"왜."
"학생 회장님이랑 경수 형 가운데 두고 공부하다 왔다. 공부도 아니지, 아오. 존나 빡쳐. 너 어디 앉았었어."
"칸막이 구석탱이. 집중 잘 돼."
"피방 가자."
"싫어. 공부할 건데."
세훈과 피씨방에 가냐 마냐로 실갱이-이건 상상도 못한 일이다-를 벌이고 있는 와중 백현이 형을 데리고 도서관 입구를 빠져나갔다. 가방을 매지 않고 나가는 걸 보니 점심을 먹으러 가나보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니 세훈과 이러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나도 이 오기로 공부를 하겠다. 나도 백현처럼 사교성 좋고 공부 잘하는 사람이 돼서 2학년 때 학생 회장이 되는 건, 오반가. 세훈을 설득하는 걸 체념하고 난 의지를 다지며 흰우유에 싸구려 편의점 빵을 씹어먹었다. 형과 행복한 식사 시간을 갖고 있는 백현을 생각하며, 아주 우적우적.
작심삼일이라는 단어는 내게 적용되지 않는다. 고작 작심 삼십분이다. 나는 비어있는 내 옆 자리를 보며 나쁜 생각이 들었다. 나쁜 생각이라기보단, 누군갈 좋아하면 그 사람의 전부를 알고 싶어지듯 형의 필기라든지 문제 풀이라든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싶었다. 아까 형이 황급히 숨겼던 공책부터 내쪽으로 살살 끌어당겼다. 보는 사람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고, 공책을 한 페이지씩 넘겼다. 형의 글씨체는 둥글둥글 귀여웠다. 동글동글, 그 동그란 눈동자에 세상을 다 가져다주는 형을 꼭 닮았다.
나는 공책 맨 뒷장을 빼먹지 않았다. 하지만 열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래도 형이 아까 이걸 숨긴 것 같다. 형은 필기할 때보다 더 반듯하고 예쁜 글씨로, 사랑스러운 과학 문제를 만들어놨다.
「백현아아아 얼른 왔으면 좋겟다 내가 내는 문제 맞춰봐
Q. 경수가 가진 디엔에이는?
1)백현이 보고 세포
2)백현이랑 뽀뽀하고 세포
3)백현이 사랑 받고 세포
맞추면 천재!!」
아아... 아프다. 이 말 말고는 내 심정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
글자 하나하나 읽을수록 힘이 든다. 사랑 받고 싶어, 뽀뽀하고 싶어, 보고 싶어. 전부 다 너무 예쁜 말인데도 예쁘지 않다. 형은 열어볼수록 판도라의 상자 같다. 어리석은 나는 뭐가 더 궁금해서 형을 파헤치고 있는가. 백현의 이름 위에 엑스자를 긋고, 내 이름을 써서 그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당치도 않은 바람이기에 미련 없이 공책을 덮었다. 억지로 펜을 쥐고 공부를 하려 노력해본다. 공부가 잘 될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형은 얼마 안 돼 백현과 함께 자리에 돌아왔다. 싱글벙글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다. 백현은 이제 아주 보란듯이 경수 형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나를 쳐다봤다. 자신의 뒤로 교차하는 우리의 시선을 모르는 형은 간지러운지 어깨를 한껏 올려 목을 자라처럼 집어넣었다. 애기처럼 턱살이 접혀 꼬집고 싶다. 둘을 눈 앞에 두고도 또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난 정신차리려면 한참 멀었다. 둘은 금세 애정행각을 관두고 다시 공부 모드에 돌입했다. 백현은 제법 오랜 시간동안 집중을 했지만 역시 형은 공부가 재미없나보다. 귀퉁이에 낙서를 하다 다시 엎드리는 형이다. 시침은 차츰 저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사실 난 형과 집에 같이 갈 생각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저녁까지 백현과 형이 집에 같이 갈 거란 생각은 왜 안 하고 있었는지 나조차도 의문이다. 백현이 자고 있는 형을 깨웠을 때, 나 역시 가방에 교과서와 공책을 챙겨넣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가까스로 일어난 형이 졸음기 가득한 눈을 부비며 좌우를 살피더니 책상 위의 참고서를 급하게 덮었다. 나는 왠지 알고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입에 묻은 하얀 침은 어떡할 건데요, 형.
백현이 형의 팔목을 잡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나는 형 저도 같이 가요, 하며 질세라 둘을 따라나섰다. 백현과 형이 함께한 숱한 날들을 돌이킬 수도, 무마시킬 수도 없는 나이면서 오늘은 괜히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얼마 안 가 백현이 태클을 걸어왔다.
"후배님은 자꾸 왜 따라오는지 모르겠네."
"왜요? 형이랑 같은 동네라 같이 가는 게 문제가 되나요?"
"맞아 백현아! 종인이도 우리집 방향이야. 셋이 같이 가면 되지."
대놓고 심성 나쁜 사람이 되긴 싫었는지, 백현은 별다른 거부 의사를 표하지 못하고 경수 형의 손을 잡았다. 나랑 형은 어부바도 한 사인데 뭐 스킨십도 못할 줄 알고? 평소 같으면 심장이 벌벌 떨려서 엄두도 못 냈겠지만 용기를 내어 형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가 열불 터진만큼 너도 터져봐라 변백현. 형은 나를 올려다보며 놀란 기색이다. 누가 뒤에서 우리 셋을 보면 웃었을 것이다. 한쪽 손을 꽉 붙들린 형, 그리고 형의 작은 어깨 위로 팔을 두른 나. 자연스럽게 나와 백현의 발걸음은 보폭이 좁은 형의 발걸음에 맞춰졌다.
"종인아 근데 너 내일도 공부할 거야?"
"네. 왜요?"
"니가 아플 동안 연습을 못 했잖아. 우린 벌써 곡 하나를 완곡했는데.. 너도 동아리 부원이고 앞에 선다고 약속했으니까 연습해야지 않겠어? 시험기간이라 동아리 시간도 다 자습시간으로 돌려지고 해서.. 그래서 말인데, 내일 우리 집에 올래? 형이랑 연습하자."
"당연하죠. 언제든지 연습할게요."
"하하, 경수야. 너 집에 부모님 계시는데, 게다가 그분들은 주말이 유일하게 쉬는 날이신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아냐! 내일 친구들이랑 부부동반으로 놀러가셔."
"꼭 가야겠네요. 저는 연습이 꼭 필요해요."
"경수야? 너네 집 아파튼데 춤추고 그러면 밑에층이 시끄러워질 거야."
"울 엄마랑 아빠랑 같이 여행 가는 거 밑에층 친구들이야~ 괜찮아."
아까 그렇게 여유롭게 웃더니 불안해 죽겠냐? 백현의 말을 다 받아쳐내는 형의 모습에 깨소금 백만개를 먹은 것처럼 기분이 고소하다. 아주 로케트를 타고 달나라로 날아갈 것 같다.
"내일 몇 시에 갈까요, 형?"
"글쎄? 한 시? 나 내일은 늦잠 자고 싶어."
"그럼 내가 내일 모닝콜 안 해줘도 되겠네, 경수야? 아침부터 경수 보고 싶으면 어쩌지."
"아무리 종인이가 우리 비밀을 안다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러지 마.. 부끄러워."
변백현 선배님 제발, 제발 좀! 그 경거망동하는 입 좀 닥치세요. 우리 형이 부끄럽다잖아요. 부끄러워서 윗니로 예쁜 아랫입술 깨무는 거 안 보여요? 뱉고 싶어도 참는다, 아직 때가 아니니. 밤인데도 잘 보이는 하얀 이까지 예쁜 형이다. 형에게 있어 못난 부분이 있다면 배려심 아닐까. 다른 생명들을 무시하고 자기만 귀여운 그 이기심. 누가 뭐래도 주체할 수 없다. 형의 집 앞까지 도착해 아쉽게 형을 보내고 백현과 나는 다시 한 번 마주했다.
"후배님이 우리 경수를 좋아하나본데.."
"글쎄요. 선배님은 좋아하시죠?"
"좋아하지. 경수도 나 좋아하고."
"그거 참 부럽네요."
"자신 있으면 어디 건들여봐. 도경수한텐 나밖에 없거든."
백현은 뒤돌아 내게 손을 흔들고 멀어져갔다. 알수록 재수없는 놈이다. 사랑 받는 자의 자신감은 하늘 높은 줄을 모른다.
형의 집에 방문하기 전에 난 옷을 대략 10번 정도 갈아입은 것 같다. 빨래통을 뒤져 바지도 몇 번이나 갈아입고, 잘 입던 티도 오늘따라 후져보여서 구석에 있던 것까지 꺼내입었다. 분명 아무 일도 안 생기고 춤 연습만 할 건데도, 왜 이렇게 떨리지. 우리집에서 형네 집까진 거리가 좀 있었기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왔다. 잘하면 잠에서 막 깬 형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버스를 타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초인종을 누르기 전까지 난 기분이 붕 떠있었다.
딩동.
그리고 형이 문을 열었을 땐 긴장이 됐다. 노란 눈꼽이 낀 형도 너무 귀여운 내가 놀라워서 그랬나보다. 형은 보통 사람들에겐 추함의 정석인 후줄근한 추리닝바지를 입고 있었다.
"종인아 형이 방금 일어나서.. 금방 세수만 하고 올게. 내 방에 있어."
"네 형."
방 안은 온통 형 느낌에 형 냄새다. 산신령님께서 지상낙원을 여기다 숨겨두셨네. 쉰내가 나는 내 친구들-이라 쓰고 오세훈이라 명한다-의 방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다. 나는 형의 책상 위에 놓여진 형의 어릴적 사진을 보고 순간, 심각하게 훔칠까 말까를 고민했다. 중딩 때 남자애들 사이에 은근한 도벽이 유행할 때도 흔들리지 않던 나인데. 형이 세수를 마치고 물기 젖은 얼굴로 방 안에 들어왔다. 아, 백옥 같다. 어깨에 이어 베어물고 싶은 저 물광 피부.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잤어.. 미안."
"아니에요, 형. 저도 원래 늦잠 많이 자요."
"방은 좁으니까 거실에서 연습할래? 휴대폰으로 노래 틀면 될 거야."
동아리실도 아닌 가정집 거실에서 대낮부터 좀 뻘쭘했지만, 형은 노래를 틀었다. 혹시 또 허리 인대가 늘어날까 걱정이 컸다. 그래도 예전에 형과 연습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출 수 있는 한까지 췄다. 형은 거기까지 했었구나, 하며 노래를 끄고 다음 동작을 설명했다. 형이 느릿하게 춤을 보이면 나도 따라하고 내가 다 외웠다 싶으면 우린 함께 동작을 맞춰봤다. 사방에 거울이 없으니 마주볼 수밖에.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보다. 형이 나를 쳐다보며 뭐가 그렇게 좋아, 내가 웃겨! 장난스런 소리를 친다. 아니야. 좋아하지 마. 이건 커플 댄스가 아니야. 형은 그냥 시범을 보여주는 거야.
내가 여기 도착한 지 30분도 안 되어서 형의 휴대폰은 울렸다. 어제 그렇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고수하던 백현에게 온 전화다.
"응 백현아, 응! 종인이랑 춤 연습하고 있어. 일? 아무 일 없었어. 알겠어, 연습 열심히 할게."
변백현 당신이 우리의 시간을 방해하려고 노력해도 형과 나는 이미 통하고 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주 긴밀하게 말이다. 형과 난 연습을 더 하다 지쳐 거실바닥에 드러누웠다. 나란히 눕진 않았지만 우린 정수리를 맞대고 함께 천장을 봤다. 그저 막혀있는 천장일 뿐인데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보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힘들지 종인아."
"아뇨. 재밌어요."
"세훈이랑 태민이는 확실히 앞줄에 세우기로 했어. 춤을 참 잘 추는 것 같아. 종인이도 걔네만큼 잘할 수 있지? 앞으로 더 연습하면 돼."
"한 번 해볼게요."
형이 갑작스레 몸을 일으켜 누워있는 내 얼굴 위에 자신의 얼굴을 드리웠다. 아래에서 본 형의 모습, 내가 조금만 몸을 일으킨다면 닿을 수 있는 형의 입술에 잠잠하던 마음은 해일이 들이치는 것처럼 요란스러워진다. 하마터면 좋아한다는 말이 새어나올 뻔 했다. 형이 너무 귀여워요. 형이 너무 좋아요. 나도 형이랑 뽀뽀하고 싶은데. 형이 처음 아니라도 이해할게요. 나는 첫 뽀뽀예요.
"배 안 고파? 형이 맛있는 거 만들어줄까?"
"네..."
형은 그 말을 하고 일어서서 부엌으로 갔다. 역시 형과 뽀뽀를 한다는 건 아직 머나먼 안드로메다의 일인 것 같다.
나는 식탁에 앉아 부담스러울만큼의 시선을 형에게 보냈다. 어차피 형은 뭘 도마 위에서 뚝딱거리며 만드느라 날 의식하지 못한다. 요리를 하는 형의 뒷모습을 보며 결심했다. 형이 비록 연애는 변백현이랑 해도 결혼은 나랑 할 거다. 자고로 결혼은 자신을 더 좋아해주는 사람과 해야 하는 법. 고로 나처럼 형만 바라봐주고 형을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선택 받아 마땅하다.
"종인아! 와서 이거 먹어봐."
형이 달달 볶아 만든 김치볶음밥의 색깔은 그럴싸했다. 김치 국물 때문에 새빨갛게 손이 물든 형이 한 술 떠서 주는 볶음밥은, 사실 맛은 그저 그랬다. 형의 요리 솜씨를 기대했던 난 순간 표정이 멍했다가, 내가 생각해도 인위적이었을 웃음을 지었다.
"맛없어? 미원을 안 넣어서 그래. 그래도 유기농이야."
"맛있어요."
"거짓말."
형이랑 나랑 선후배 사이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말했을 거다. 그래도 누가 만들어준 건데요. 형이 해줬으니까 우리 엄마가 한 것보다 이천 배는 맛있어요. 형은 수저와 젓가락을 가져와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밥그릇도 챙겨왔다. 이게 20년 뒤 우리의 미래였으면 한다. 나는 배부른 줄도 모르고 짧은 시간 안에 적지 않은 양의 볶음밥을 축냈다. 형의 뿌듯한 표정이 좋아서였다.
"이거 되게 맛없는데... 잘 먹어줘서 고마워."
"진짜 맛있어요."
"형은 너같이 착하고 열정적인 후배를 둬서 좋아. 맨날 백현이 얘기 할 곳도 없었는데 내 비밀도 다 말할 수 있고.. 너무 좋아. 그리고 난 형밖에 없어서 동생 갖고 싶었거든. 앞으로 종인이가 내 동생도 해주고, 내 고민 다 들어줘. 알았지?"
"네... 형 죄송한데 저 물 좀.."
결국엔, 결론은 매번 이렇다. 난 목이 메어서 물을 마셔야 했다. 형과 다른 의미로 가까워지고 싶은 나와 전적으로 날 동생 취급하는 형. 오늘 나에게 형은 수평선이다. 무얼 해도 닿을 수 없는. 오늘만이란 말을 붙여 다를 달랜다.
내 걱정도 힘든 마당에 세훈이 무슨 사고를 칠까 걱정하고 있는 나다. 옆 반은 모르겠지만 우리 반은 대부분 중국어 수행평가 준비를 하지 않았다. 세훈과 범생이 빼고. 세훈은 머리가 좋은 척을 하지만 역시 안 좋은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를 하더니 아직도 못 외웠네. 중국어는 수업에 들어와 10분 정도 연습할 시간을 주고, 먼저 보고 싶은 아이들부터 나오라고 했다. 태민과 나는 선두주자로 나가 죄송함다, 기권입니다를 외치고 왔다. 그 다음엔 범생이가 아주 큰 소리로 통째로 외워버린 듯한 본문을 낭독했다. 성조가 시원시원하니 정말 중국인 같았다.
어쩐지 세훈만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태민과 맨 앞에 앉아 루한쌤의 표정을 관찰하려 들었다. 태민에겐 세훈이 루한쌤에게 중국욕을 퍼부을 거라고 거짓말을 해놨다. 실상은 정반대인 오글거리는 사랑 고백이지만. 모두 수행을 마친 후라 그런지 애들은 모두 시끄러웠다.
"오세훈 안 나와? 세훈 최하점 받을 거야?"
"나가요, 나가."
세훈은 당당하게 교탁 옆에 서서 중국어를 바라봤다. 중국어 역시 세훈을 바라보고 섰다. 세훈 같은 골칫덩어리는 수행 같은 건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눈치다. 하지만 세훈은 중국어와 눈을 마주친 그 상태로 말문이 막혔다.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 워, 워.. 그래. 네 마음 이해한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루한이의 눈을 보자마자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졌겠지.
"워.."
"워? 세훈이 너 장난치지 마. 최하점이야."
"워... 씨발 뭐더라? 아 몰라."
태민과 난 당황하는 세훈의 모습에 킥킥대기 시작했다. 중국어도 슬슬 열이 받는지 채점표로 부채질을 했다. 이렇게 세훈의 고백은 말짱도루묵이..
"워아이니 루한!!!"
되지 않았다.
***
독자님들 내일이 월요일이라 슬프시겠지만! 그래도 다음 주 활기차게~ 재미나게~ 보내세요
문단배열이 이상한ㄷㅔ 제가 지금 급하게 컴퓨터를 꺼야 해서ㅜㅜ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