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선샘미가좋마묘
나의 봄
上
살랑 살랑 불어오는 봄 바람에, 내 마음도 살랑 살랑. 해맑게 웃는 네 얼굴 위에는 햇살이 드리워지고 가벼운 봄 바람에 갈색 빛이 도는 네 머리도 살짝 흩날린다.
햇볕에 눈이 부신 건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도 참 예쁘다. 순영이는.
순영은 누구나 한 번쯤은 혼자 좋아했을법한 인기 많은 남자아이였고, 여주는 그냥 저냥 있는 듯 없는 듯한 정말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여주가 처음부터 순영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우르르 몰려다니며 순영을 바라보는 여자아이들을 보며 쟤를 왜 좋아해...? 라며 고개를 갸우뚱,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여주가 하루아침에 그 여자아이들과 동급으로, 아니 그녀들보다도 더욱더 순영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크다면 큰 것이었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었다.
우연히 학교 근처의 영화관에 친구들과 놀러가게 된 순영은 혼자서 영화를 보러 간 여주를 보고서는 같은 반 친구가 아니냐며 인사를 하러 가다가 계단을 올라가는 여주의 교복치마 속을 찍는 남성에게 시원하게 욕을 해줬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순정 만화의 여주인공 처럼 자신의 이름을 남자주인공이 기억해 주었다는 심각하게 사소한 이유도 아니고, 왕따를 당하는 여자 주인공을 위해 대신 계란을 맞아줘서는 더더욱 아니였다.
그저 처음 겪어본 일에 당황해서 어버버 거리는 여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괜찮냐고 물어온 것, 이게 여주가 순영을 좋아하게 된 단순한 이유였다. 고백조차도 할 수 없었다.
워낙에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순영이기에 순영이 혼자 있는 것을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순영이 혼자 있더라도 여주는 그 근처에 가까이 갈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 너는 왜 앉아있어? 어디 아파?"
"시, 심한 건 아니구... 그냥 발목이 좀..."
체육시간에 모두가 피구를 하는데 혼자 구석에 앉아서 같은반 친구들을 구경하는 여주의 모습에 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기심을 보였다. 저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눈빛이지만 또 한 번 제게 직통으로 꽂히는 순영의 시선에 여주가 자신의 시선을 운동장 바닥으로 내리 깔았다.
어색하게 대답하는 폼새에 순영이 같은반 친구끼리 왜 이렇게 낯을 가리냐며 여주의 옆에 털썩- 앉았다. 어쩜 순영은 모든 게 자기 자신과 잘 어울리는 건지- 짙고 까만 머리칼의 색도, 도톰한 입술과 볼살도,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도, 앉을 때 풍겨오는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기도, 모든 게- 권순영스러웠다.
"우리 중학교도 같이 나왔는데 같은 반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치?"
"너 나랑 같은 학교 나온 건 어떻게 알았어...?"
"에이, 내가 그렇게 바보같이 보이나? 김여주 너 중학교 3학년 때 이지훈이랑 전원우하고 같은 반이었지 않나?"
"어, 어... 그건 그런데... 너 진짜 똑똑하다."
"너는 나랑 같은 중학교 나온 거 기억 하잖아"
"너는 눈에 엄청 띄는 애고... 나는 평범하잖아. 기억 날 듯, 안 날 듯, 그냥저냥 평범한 애."
여주의 대답에 순영의 미간이 아까 햇볕이 얼굴에 내리 쬘 때보다도 더욱 짙게 좁혀졌다. 그런 게 어딨어- 아까보다 조금 딱딱해진 듯한 말투에 여주가 조금 더 긴장을하며 순영을 돌아봤다. 설마 화내는 건 아니겠지? 눈에 띈다는 게 문제아 같다는 뜻이 아니라 인기가 많다는 뜻이었는데... 혹시 기분 나쁜가?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며 이미 울상을 짓고 있는 여주의 모습에 결국 순영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은근히 웃기는 애다. 순영이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며 말을 하자, 여주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웃는 거냐며 순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도 깔깔 웃던 순영이 여주의 질문에 다시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으며 여주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냥, 내가 목소리 좀 굳혔다고 세상 무너지는 표정을 짓길래-"
순영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여주가 시선을 운동장 쪽으로 고정시켰다. 두 사람이 빠졌는데도 애들은 잘도 논다. 그래도 내심 자신을 찾아주길 바랐는데, 아무도 안 찾아준다며 입술을 쭈욱 내민 순영의 모습에 여주가 웃음을 띄웠다.
다시 한번 더 옅은 바람이 불어오고, 운동장의 흙이 눈에 들어올새라 여주가 눈을 살짝 찌푸리면 순영이 나직히 여주를 불렀다. 여주야.
"응? 왜?"
"아까 너가 평범하댔잖아, 난 눈에 띄고"
"으응... 그렇지-"
생각지도 못한 순영의 폭탄 발언에 여주가 눈을 동그랗다 못해서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크게 뜨며 순영을 쳐다봤다. 귀가 빨갛다.
아까 목소리를 굳힐 때는 언제고, 입을 꾹 다물어서 빵빵한 볼살이 두드러지는 권순영은 내겐 찬란한 봄이다. 나와는 너무도 다르게 너는 눈부신 봄이다.
너는 따뜻한 나의 봄이다.
나의 봄
下
순영이가 내게 폭탄 발언을 한 이후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아직도 순영이를 바라보고 있었고, 순영이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은 순영이와 말을 한 번 해보겠다고 애를 썼으며, 남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순영이는 이곳 저곳으로 불러다녔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달라진 게 딱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나만 순영이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순영이도 나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우리 둘의 사이를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그래, 남들이 말하는 '썸' 정도겠다. 원래는 나보다 앞자리였지만, 며칠전에 자리를 바꿔서 이제는 나보다 뒷자리인 순영이의 모습을 보려면 고개를 한참이나 돌려야 했고, 순영이는 내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먼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달아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내일 금요일인데, 같이 영화 보러 갈래?"
"어? 웬 영화?"
"재밌는 거 나왔다길래... 싫으면 안 가도 괜찮고."
싫을리가 없다는 말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급한 나머지 순영의 손을 덥썩- 잡는 여주의 행동에 순영이 앞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너도 좋은 거 맞지? 예매한다?
순영이 휴대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영화 예매를 마쳤고, 여주는 옆에서 그런 순영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일 날씨 좋았으면 좋겠다. 순영의 웃음 만큼이나 맑게 갠 날씨면 좋겠다는 생각을 삼키며 제 자리로 돌아가는 여주다.
-
아... 제발... 날씨 왜 이래! 절망적인 표정으로 창 밖을 쳐다보던 여주가 꾸물거리는 하늘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창 밖을 오랫동안 쳐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돌려 엎드려버렸다. 어젯밤에 내가 날씨 좋게 해 달라고 얼마나 빌었는데! 잔뜩 심통이 난 여주가 입술을 쭉- 내밀자,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순영이 실실 웃었다.
삐져도 귀엽냐. 순영은 날씨 같은 건 신경쓰이지도 않는 건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여주는 계속해서 책상을 내리치며 하늘을 원망했다. 어떻게보면 첫 데이트인데, 너무해...
-
"영화 재밌었어. 그치?"
"그러게... 진짜 재밌더라, 왜 유행하는지 알 것 같아!"
영화를 다 보고서 나오니 시간은 벌써 8시가 다 넘어가고 있었다. 봄인데도 불구하고 8시가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밖은 어둑 어둑 했고, 계속 꾸물거리며 비가 올 것같이 흐리던 하늘에서는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결국, 날씨 안 좋구나... 영화관 건물의 출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여주의 표정이 침울하기만 했다.
우산... 써야겠지? 라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던 여주에게 순영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 밖에서 논 것도 아닌데 비 오는 걸 왜 이렇게 싫어해?
"...그냥"
"에이, 이유가 있으니까 이러는 거 같은데-"
"말 안 해줄 거야!"
계속해서 순영의 대답을 회피하는 여주의 모습에 순영이 관심을 가졌다. 결국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여주에게 계속 왜 그러냐고 묻는 순영 덕분에 여주는 얼굴을 잔뜩 붉히고는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손... 잡고 싶었단 말이야. 우산 쓰면 못 잡잖아... 고개를 푹, 숙인채로 말을 하던 여주가 말을 하고나니 부끄러운 건지 자신의 우산을 펼치며 너는 우산 안 꺼내? 라며 물었다.
"아... 두고 왔나봐, 같이 쓰자"
순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여주가 우산을 높이 치켜들자, 순영이 씨익 웃고는 자신이 우산을 들었다. 야, 이런 건 원래 더 큰 사람이 드는 거야. 순영의 말에 여주가 이제 가자. 라고 하자, 순영이 여주의 어깨에 손을 올려서는 자신에게 가까이 오게 만들었다. 밀착한 상태로 걷는 게 처음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여주의 얼굴은 아까 순영에게 놀림을 받을 때 보다도 더욱 붉게 물들어 있었다.
토독 토독. 일정한 소리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붙어있는 몸 덕분에 두 사람은 자연스레 말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조금 기울어져 있던 우산은 이제 완벽히 여주가 있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순영의 교복은 왼쪽과 오른쪽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여주와 맞닿아 있는 오른쪽은 방금 입은 듯 깨끗한 상태였고, 왼쪽은 등부터 어깨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푹 젖은 교복이 기분 나쁘지도 않은 건지, 여주를 조금 더 끌어 당기며 비를 맞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 순영의 목소리가 아까보다도 더 달았다.
"너무 아쉬워 하지 마, 여주야"
"… …"
여름을 데리고 오는 계절의 비는, 김여주의 권순영을 따뜻한 봄에서 금방이라도 녹을 듯 뜨겁고 달콤한 여름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그리고, 순영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우산을 두고온 척 연기하는 자신의 가방에 우산이 있던 걸 여주는 이미 진작에 눈치 챘다는 것을 말이다
으아 이제 새작 올릴 수 있어요ㅠㅠㅠㅠ(광광) 읽어주신 모든 분들 아이시떼루...사담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