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투명한 (ME TOO) 02
입시미술도, 취미 미술도 아닌 화가를 하겠다고 찾아와 천덕꾸러기가 될 줄 알았던 너는 의외로 잘 지냈다.
입시미술 하는 애들에게서는 시기와 부러움의 눈빛을,
그보다 어린 애들에게서는 동경과 선망의 눈빛을,
또 직장인들에게는 귀여움을 담뿍 받으며 매일 나를 찾아왔다.
원장님께 이런 케이스는 어떻게 하냐며 여쭤봤지만 민형이가 깜찍하지 않느냐는 흐뭇한 소리나 들었다.
사람 눈은 다 똑같구나.
“수만 쌤, 안녕하세요.”
오전 여덟 시에 나와 같이 출근을 하면 너는 내가 퇴근하는 오후 열시까지 있었다.
하루 종일 어떻게 학원에 와 있냐고 물으니 너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애초에 다녀본 적이 없다고 했다.
"킨더가튼이 제 사회생활의 끝이었어요.
그거 빼고는 없어요.
친구는… 아, 가족 같은 크루가 있어요.
NCT라고, Nice Co-Technician의 약자예요.
그냥 같이 그림 그리고, 전시회도 하고 해요.
다 천재들이예요. 쌤도 좋아하실 텐데."
나는 그들도 너처럼 투명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처음엔 너와 있는 게 어색했다.
타인과 이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있는 것은 가족 빼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이 있으면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람과 나의 목소리가 눈앞에 어지럽게 번져서 피곤했고,
결국에는 짜증을 내 버렸다.
내가 겨우 초등학생 때 학교를 때려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너와의 대화는 엷은 분홍빛이었다.
내 목소리는 분홍이었고 네 목소리는 물처럼 투명해서 내 목소리를 희석시켰다.
나는 너와 이야기를 할 때 언제나 엷은 분홍의 대기 속에 편히 유영할 수 있었다.
그런 네게 감사하는 시간을 갖도록 내버려둔 것도 잠시, 유리색 위로 진한 물빛이 눈앞을 덮었다.
너는 화선지를 뭉쳐 가지고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못 말려. 짱구도 아니고.
실험 정신 하나는 높게 쳐 주고 싶었다.
너는 셀로판테이프와 화선지로 만든 아그리파를 내게 건넸다.
나는 그걸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해낸 거라기엔 너무 심각하게 천재적인데.
“손재주가 좋네. 민형아. 조소 해 봤어?”
“해봤는데, 저랑은 안 맞더라고요.
갇혀 있는 형태를 꺼낸다느니, 생기를 불어넣는다느니 하는 로맨틱한 말이 저한테는 조금, 별로여서.
저는 제가 만들 것들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쌤.
오히려 그 반대죠.”
문득 가슴이 서늘해졌다.
너의 세월은 얼마나 슬펐던 걸까.
어떻게 하면 열아홉이 행복하기도 전에 슬플 것을 먼저 생각하지.
그것도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의 감정을.
그림자가 드리웠던 너는 이내 원래의 이민형으로 돌아와 다시 뭔가에 열중했다.
먹을 갈던가, 붓으로 참으로 다양한 시도를 한다던가.
나를 깊은 생각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도, 그 속에서 끄집어내어 현실로 돌려놓는 것도 모두 너였다.
"수만 쌤, 이건 어떻게 해요?"
"수만 쌔앰, 저건요?"
너는 매일 계속해서 질문을 해 댔다.
그것도 어려운 질문만 골라 해 댔다.
왜 안 돼요, 하고 네가 물을 때면 머릿속에서는 이론들이 복잡하게 엉켰다.
너는 서양화처럼 동양화를 그리려고 해서 애를 많이 먹었다.
민형아, 난은 그렇게 치는 게 아니야.
매화는 그렇게 쭉쭉 뻗은 가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여기의 산은 꼭대기가 날카로우면 안 되지.
꽃잎을 그렇게 겹쳐 그리면-
아, 나는 순간 말을 멈췄다.
그동안 나는 이론에 맞춰 말하고 있었구나.
너의 화풍일 텐데.
내 속을 알아챈 너는 잽싸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수만 쌤이 그러고 있으면 내가 미안해지잖아요."
너는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도 장난끼 넘치는 눈을 하고 내 팔을 건드렸다.
“알려주세요. 선생님 그림은 어떤지 보고 싶은데.”
“예시로 많이 그려줬잖아.”
“그거 말고, 진짜 각 잡고 그려주세요. 네?”
나는 조금 몸을 물렀다.
네 얼굴이 너무 가까운 탓이었다.
숲 이슬을 함빡 머금은 새벽 냄새가 너에게서 났다.
이 냄새는 향수인가, 비누일까, 그냥 너일까.
나는 네 편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먹을 갈았다.
먹 가는 소리인 옥색이 눈앞을 채운다.
희말간 네 목소리가 들린다.
"쌤, 손이 되게 고와요. 뭐 핸드크림 이런 거 발라요?
나는 고개를 작게 젓고 먹을 내려놓는다.
너는 희말간 미소를 지으며 내가 그리는 물고기를 바라본다.
네가 처음 그려달라던 것이 물고기여서 그랬나 보다.
붓이 적셔질 때 나는 네 시선을 담은 붓이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다.
너는 나를 떨리게 만든다.
마치 처음 묵향이 폐를 흠뻑 적시던 날처럼.
내가 붓을 처음 놀렸던 순간처럼.
아이처럼 좋아하는 너를 보니 그린 보람이 있었다.
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내 손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본다.
"와, 이 손이 이걸 그렸다고요. 완전 쪼마난데?
쌤 혹시 천재 아니예요?
엔씨티 들어올래요? 우린 회원 모집 수시로 하거든요.
수만 쌤이라면 만장일치로 통과예요.
절이라도 할 걸요?"
재잘대는 네게 궁금했던 걸 하나 물었다.
아, 그냥 묻지 말 걸.
“민형아, 너는 왜 그 때 물고기를 그려달라고 했어?”
“물고기는 팔딱거리잖아요. 물을 떠나면 몸을 뒤틀고, 헐떡거리고, 끝내는 죽잖아요.”
“그게 절 닮았어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면 저는 죽을 거예요.”
네 눈은 너무나 단호해서, 나는 수긍하고 말았다.
그래, 너는 죽을 테지.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나조차도 죽을 테지.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너는 나사가 어디 하나 빠진 것처럼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 때가 제가 죽기 직전이었어요.”
나는 무의미하던 고갯짓을 멈춘다.
네 큰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너는 아직 울지 않는다. 아직은.
“딱히 별 의미는 없어요.
시한부 환자가 거울을 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냥, 그런-”
네가 말을 잇지 못하고 내게로 허물어진다.
지금이 너의 슬럼프임을 비로소 깨달은 나는 네게 한없이 미안해하면서, 너를 토닥인다.
너는 쉽게 추슬러지지 않는다.
너는 으깨진 시체처럼 나에게 기대어 흐느낄 뿐이다.
나는 얼마일지 모를 너의 깊은 슬픔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너의 슬픔을 내게로 옮겨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보니 네 목소리는 먹먹한 눈물의 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