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19
칼로 물 베기
어두컴컴한 배경을 바탕으로 번쩍이는 불빛 아래 보이는 나를 바라봐주던 눈과 좋아한다 말해주던 입술. 도토리같이 야무지게 생겨 하루종일 만지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던 뒷통수. 수족냉증때문에 얼음장과도 같았던 내 손을 어루어 만주던 손.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가 분명한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너가 아니였으면 싶다. [권순영❤] - 약은 먹었어? 이제 훈련 끝나고 집왔어ㅠㅠ 언제부터 너네 집이 클럽이였냐 순영아. 1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도통 올 생각을 하지 않는 답장에 순영이 불안한듯 입술을 깨물었다. 많이 아픈가. 자신에 대한 걱정보단 여주의 걱정이 더 앞서가는 순영이였다. 오자마자 2시간째 쭉 핸드폰만 보고 있는 제가 탐탁치 않았는지,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여자에 순영은 표정을 굳힌체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나 이제 보내줘." "야,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인데." "여주 많이 아파." 목소리 끝에 힘이 들어갔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다들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을까, 틈을 노린 순영이 자켓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일 축하했어 준영아, 나 먼 저 간다. "야 권순영!" "...... "아, 새끼 칠칠맞게 핸드폰 두고 갔ㄴ," [❤] - 너는 클럽이 집이구나 "......" 어느덧 점이 되어버린 클럽입구를 빠져나가는 순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준영이 살며시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순영아 미안, 너 좆 된것 같아. 숨차게 클럽입구를 빠져나온 순영이 그제서야 생각난 휴대폰에 "...아, 시발." 짜증스레 미간을 구기며 뒤를 돌았을까 "......" "......"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 쓴, 작지만 익숙한 체구가 제 앞에 서있었다. ...여주야. 단호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떨리는 순영의 목소리가 허공에 떨어졌다. 여러가지 의미로 답답함에 눌러 쓴 모자를 벗은 여주가 앞머리를 짜증스레 털었다. 집이라며. "전부 다 설명할테니까 일ㄷ," "나는 너가 나한테 설명해야하는 이 상황이 싫어." "......" "왜." "......" "설명해야만 풀리는 일을 만들어." "......" "누가 그러더라." "......" "비밀이 생기는 순간 끝이라고." "김여주." 순영이 여주의 팔을 잡았다. 뿌리치는 힘에 두 팔 모두 맥없이 떨어졌다. "...내가 만약 여길 안왔다면 너는 이 상황을 무덤까지 끌고 갔겠지?"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 "미래란 걱정은 없었어?" "......" "지금 당장 말고, 나중에. 뒤늦게 알게 된다면 넌 그때 뭐라 할껀데." "......" "...혹시 알아, 지금이 미래일지." "김여주!" "그렇잖아, 너는 항상 지금 당장만 보는 애라, 지금 이 상황도 너가 클럽을 드나드는 몇번째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잖아. 니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깨질것 같은 고통에 여주가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 행동의 끝자락을 놓칠리 없는 순영이 다급하게 여주의 두 팔을 잡았다. 일단은 집에 가자 너 열나. 어? 여주야. 따라 제 팔을 잡아 오는 손길에 그제서야 순영의 눈이 풀렸을까,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순영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굳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만하자." 독한 놈. 자신을 향한 순영의 소리였다. 마음은 텅 비었는데, 예상외로 잘 풀리는 훈련에 순영은 이런 제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렇게 너를 보낸후로 이주일이 흘렀다. 서로에게 솔직하자 다짐했던건 순영이였다. 순영이 먼저였다. 얼굴을 타고 내려가는 물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만큼 순영은 시간동안 많은 눈물을 흘렸다. 아, 말도 안돼. 100번은 넘었을 부정에 순영은 바닥에 몸을 뉘였다. "......" 약지에 껴 있는 반지를 살짝 올려보자 검붉그스름 자국이 나 있었다. 이만큼 깊었고, 여전히 깊었다. 나는 너를 죽을때까지 놓지 않는다. 순영이 다짐스레 다시 반지를 끼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여주의 반지에 눈치를 보던 친구들중 하나, 혜원이 밥을 먹다말고 입을 열었다. "...너 헤어졌냐?" 당사자빼고 꽂혀오는 시선들 속엔 야유의 눈길로 있었다. 뭐 임마, 너도 궁금했었잖아! 금세 수그러드는 눈길과 동시에 여주가 입을 열었다. "이제 알았냐." 덤덤하게 국을 떠먹는 수저질에 모두 다 할 말을 잃었다. 생각보다 태연한 모습에 어느덧 총대를 멘 혜원이 내친김에 두번째 질문을 던졌다. 조금은 조심스럽게. "왜 헤어졌는데." "클럽." "뭐?" 물론 권순영이 클럽. 당사자빼고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김여주를 위해 살고 김여주가 뒤지라면 뒤질 것 같은 그였는데. "쓰레기네! "그러네, 개쓰레기야." 친구들의 열분에 여주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권순영이 쓰레기? 그건 아직까지 답을 내리지 못했다. "너 근데 괜찮냐." 정확히 답을 내린 질문이였다. 김여주는 괜찮지 않았다. "야, 김여주 많이 먹어. 먹고 더 좋은 남자 만나." ...좋은남자. 여주는 남몰래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없다. 이세상엔, 권순영보다 좋은 남자. "야, 여주야." "어?" "교문 앞에 니 남친."
어깨를 들썩이며 능글맞게 지나가는 주환의 말에 여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교문 앞에 서있는 형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체 발장난을 치는 모습에도 여자들이 두 번씩은 쳐다보고 지나갔다. 사귈땐 권순영이라는 벽에 가려져 안보였는데, 헤어지나고 나니까 또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도 느꼈던 녀석과 나의 벽의 크기가. "......" "......" 할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 녀석의 앞에 섰다. 조심스레 올라오는 고개가 어느덧 내 눈을 맞추고 있었다. 이래서 얼굴을 보면 안된다. 흑발은 또 드럽게 잘 어울리는 얼굴에 화가 풀릴뻔 했지만, 애써 녀석이 기댄 벽에 시선을 돌린체 물었다. 왜 왔어. "......" "......" 뭐하는 건가, 싶었다. 사람 신경쓰이게 찾아와놓고 권순영은 3분째 말 없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나를 바라보기나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점 열이 받기 시작해 굳게 마음을 먹은체 미간을 찌푸리며 녀석을 바라보았, ...야 잠깐만 너 울어? "...야, 뭐야." "......" "야 순영아. 울어?" "......" "야, 너 왜 울어. 응?" 나의 다독임에 녀석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게 안겨오며 엉엉 울었다. 쉴새없이 들썩이며 안겨오는 힘을 감당못하고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게 되자 내 허리를 감은 팔이 더 세게 나를 올메어왔다. "흐너 홰 내흐누안흑혀어!" 너 왜 내 눈 안마주쳐. 울음 잔뜩 섞인 녀석의 말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자 반대로 녀석은 울음을 더 터뜨려온다. 알겠어, 안 웃을게. 덩치는 산만한게 한번 안겨오겠다고 안겨 온 몸을 토닥이자 어느덧 잠잠해진 그 몸이 간간히 히끅였다. 드럽게 만지고 싶었던 뒷통수를 부드럽게 쓸어주자, 내 어깨가 축축하도록 눈물을 쏟았던 그 얼굴이 살며시 들렸다. "...준영이 생일이였단 말이야." "응, 그래서." "...나는 클럽 가본적 없단 말이야, 처음이였다고." 권순영은 울고 나면 애가 되곤 했다. 억울하다는듯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얘기하는게 너무 웃겨 뒤질뻔했다. 웃음 꾹 참고 녀석의 얘기를 경청하기로 했다. 응 그래서? "...그러니까 미래 걱정할 필요 없다구." 구우, 하면서 쭈욱 나온 입술에 결국 터졌다. 지 주댕이를 잡고 흔들며 웃어 재끼는 내 행동에 녀석은 그믄흐으. 하면서도 따라 웃어왔다. 손가락에 닿는 녀석의 입맞춤이 참 오랜만이라서 좋았다. "야, 미안하면 뽀뽀나 해봐." 가볍게 닿았다가, 짧게 여러번 닿았다가, 점차 길어지는 입맞춤에 녀석의 배를 찔렀다. 여기 학교앞이에요 님아. "사랑해." 응, 나도. 나는 또 너란 벽 뒤에 숨어 세상을 등지기로 했다. 아마도 이젠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