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투명한 (ME TOO) 04
여느 날과 같았다.
유리색 모터가 돌아가는 에어컨과 아직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고들지 못한 서늘한 토요일의 미술 학원.
나는 간만의 거의 완벽한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먹의 농담을 조절하려다가 실패한 민형이 벼루와 연적을 다루며 흐린 초록색을 눈앞에 끼얹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민형의 손을 벗어난 붓이 공중을 날았고 먹물을 흩뿌린 붓은 내 앞치마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얘는 내가 한 달 동안 더럽힌 거랑은 비교도 안 되게 단박에 더럽히는 재주가 있었다.
“수만 쌤, 죄송해요. 그, 붓 좀.”
“죄송하면 화가로 일찍 대성하자. 우리 민형이.”
내 말에 너는 입을 꾹 다문다.
걱정이 되어 살펴본 너는 다행히 아무런 기색이 없다.
나 혼자만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집중하며 난을 치는 네가, 내리깐 눈이 유난히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쌤은 저 어디선가 본 적 없어요?”
“응, 없어.”
“한 번은 봤을 텐데. 진짜로요?”
“없어.”
“이상하다. 단 한번도?”
“없다니까.”
“오늘 약속도 없겠네요?”
“없어!”
“그럼 나랑 영화 봐요.”
요즘 애들은 이렇게 당돌하니, 민형아.
아니면 그냥 네 성격이 이런 걸까.
눈앞에 엷은 유리색만이 물결칠 때가 되어도 신선한 충격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저런 화법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도대체.
“야, 이 맹랑한 아가야, 쌤은 너보다 나이가-”
“약속해 줘요. 네?”
“안 돼.”
“내 그림이 모마에 걸리면 그 때는 만나줄 거예요?”
*모마: 뉴욕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의 줄임말
웃음이 났다.
그래, 모마 정도면 화가로서 대성이지.
학원 졸업해도 되겠네.
아니, 그냥 학원 하나 차려도 되겠다.
학원은 간지가 안 나니까 아카데미, 뭐 이런 걸로.
“만나기만 하겠니. 너랑 사귀어 줄게.”
“와, 수만 쌤. 진짜죠?”
“응, 진짜.”
“약속해요.”
“그래.”
그 정도면 은팔찌는 안 차도 되겠지.
네 그림이 모마에 걸릴 때쯤이면, 시간이 그래도 꽤 흐른 뒤니까 말이다.
너도 다른 사람을 찾아볼 테고,
나도 잦아드는 청첩장에 결혼을 할까 말까 조금 망설이고,
더는 다른 애인이 없을 나이겠지.
나는 그렇게 일을 일단락하려고 했다.
네가 폰으로 뭔가를 찾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너는 휘파람마저도 투명하다.
드뷔시의 달빛이다.
트와일라잇에서 나오기 전부터 좋아했는데,
달빛을 들을 때면 눈앞이 칙칙한 잿빛이어서 나도 모르게 조금 인상을 썼었다.
하지만 네가 부는 휘파람은 네 목소리의 색을 닮아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거 봐요.”
잔뜩 신난 네가 짠, 하는 효과음을 곁들여 폰을 내려놓았다.
가로 6미터, 세로 2미터의 거대한 캔버스 앞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네가 개구쟁이처럼 앉아있다.
아, 이거 몇 번 본 것 같은데.
꽤나 화풍이 독특한 군상화였다.
이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설마.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을 확대했다.
오른편 아래쪽에 MARK LEE라고, 어린애 글씨가 사인 마냥 쓰여 있었다.
익숙한 헤링본 스타일의 바닥, 콘크리트로 마감된 천장과 회색 톤의 벽.
말도 안돼.
너와 이 그림이 있는 곳은,
모마다.
“너 혹시 마크니?”
“딩-동-댕-.”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마크.
마크 리.
현대미술의 천재.
일곱 살에 첫 개인전을 열고도 그 이후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활동하는 어린 화가.
마냥 꼬마로만 기억되던 게 너였는데.
내 기억 속의 마크 리는 기사사진 속에서 브이를 하고 있는 일곱 살 정도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서양화가 조금 질리기 시작해서요.
한때 미친 듯이 그렸는데.
그냥,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느낌도 안 들더라고요.
제가 보는 세상이 조금 잘못되어서 그런가, 붓이 안 움직여요.”
너는 애써 웃어본다.
붓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쿡쿡 심장을 찌른다.
나 역시 그랬다.
미대를 들어가려고 입시미술을 하루에 열 시간도 넘게 하던 시절.
붓이 도저히 움직이질 않았었다.
쉼이 필요한 건 천재나 바보나 마찬가지인가보다.
나는 감히 측은한 마음이 들어 네 등을 토닥였다.
네가 나를 처음 찾아왔을 때, 죽기 직전이라고 했던가.
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니까, 슬럼프도 괜찮은 것 같아요.
슬럼프가 오니까 한국 땅도 오랜만에 밟고, 동양화도 배우고,
수만 쌤이랑 사귀기도 하고.”
“뭐?”
“수만 쌤이 그랬잖아요.
모마에 내 작품 걸리면 나랑 사귄다고 약속까지 해놓고선.
책임져요.”
“ 민형아.”
머리는 복잡한 계산으로 인해 틀어져 버린다.
나는 왜 이렇게 일을 키우는 걸까. 왜.
영화만 보면 됐잖아.
한편으로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잘 모르겠다.
“수만 쌤은, 저랑 사귀기 싫어요?”
싫냐고? 싫을 리가 있겠니. 좋아 죽지.
문제는 나의 양심이다.
대답이 늦어지자 너는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나를 쳐다본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