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별안간 내 마음을 때려 준 이지훈 덕분에 제대로 잠을 설쳐 버린탓에 늦게 일어난 나는 집에서 부랴부랴 뛰어 나왔다. 근데, 내가 잠이 덜 깼나...? 왜 우리집 앞에 이지훈이 자전거를 갖고 서 있는 것 같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나는 이지훈에게 삿대질을 하며 너 뭐야! 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지훈은 내 당황한 모습을 보고도 어깨를 살짝 으쓱이기만 할 뿐,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에 다리를 걸치고는 어서 타라며 자신의 뒤에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예쁜 색의 하늘색 커버가 씌워진 안장에 앉자, 이지훈은 페달에 발을 올렸다. 이지훈의 집과 우리집은 버스를 타고 두정거장 정도를 가야 할 정도의 거리인데다가, 이지훈은 우리집에 오려면 학교에서 조금 더 멀어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해서 왜 왔냐고 옆구리를 콕콕 찌르자, 이지훈은 시끄럽다. 라며 내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귀여운 자식...
"가까이 앉아라, 떨어지면 우얄라고"
"진짜 가까이 앉는다?"
출발은 했지만 부끄러움에 안장에 제대로 앉지 않은 나를 보며 이지훈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후에 가까이 앉으라며 잔소리를 늘어 놓았다. 나는 진짜 가까이 앉는다? 라며 말한 후에 이지훈을 뒤에서 확- 안아버렸다. 왼쪽 귀와 뺨은 이지훈의 등에 가까이 가져다 댔고, 팔은 이지훈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내게 느껴질 정도로 크게 놀라는 게 보였고, 고개를 살짝 올려 이지훈의 얼굴쪽을 확인해보니 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뭐하냐는 말 조차도 못하고 앞만을 바라보며 페달을 밟는 행동을 보니, 너도 나만큼 설렌다는 거겠지.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 너도 나만큼이나 얼굴이 달아올라 있을 것 같다.
"이야... 확실히 빠르긴하다."
자전거로 오니까 평소보다도 빨리 도착한 학교. 지훈이는 학교의 근처에 있는 전봇대에 자신의 자전거를 걸어 둔 후에 가자며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다행히 지각을 할 정도는 아니었고, 우리 두 사람 모두 옷차림이 단정했기에 학주 선생님은 우리를 한 번 훑어보더니 다른 학생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학주 선생님을 지나치고나서 바로 내 어깨에 올려진 지훈이의 손을 내려서 깍지를 꼈다. 그러자 지훈이가 날 쳐다보며 웃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짙은 봄의 향기는 내 마음을 더욱 설레이게 했고, 맞잡은 두손으로부터 느껴지는 찌릿함은 떨림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느그드을, 사귀나-! 마! 이지훈, 김여주-!!"
설렘과 떨림도 잠시, 우리의 뒤에선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은 사람의 호들갑이 들려왔다. 이지훈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무시하고 앞만 봐라, 알제. 라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라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한채로 빠르게 걸었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이석민의 저 큰 목소리는 전교를 울리는 듯 했고, 우리 두 사람을 지칭하는 이석민의 말들에 지나가던 아이들은 모두 우리를 쳐다봤다.
으... 쪽팔려, 이따가 이석민 죽여버릴 거야.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며 빠르게 학교 안으로 들어섰고, 우리는 이석민을 겨우 따돌리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서 우린 반으로 올라갈 때 까지도 한참을 웃었다. 바라만 봐도 좋다는 듯이.
"히이잉… 왜 나만 싫어하나…"
한편, 자신을 무시하고선 그냥 건물로 쏙 들어가버리는 여주와 지훈의 행동에 석민은 혼자서 입술을 쭉 내밀며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는 자리에 서서 혼자 암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넥타이를 왜 안 했냐며 혼난 듯한 민규와 명호는 와 또 저러는데? 라며 서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몰라… 그런 게 있다, 형수하고 형이 날 싫어하나봐… 석민의 우울한 말투에 민규와 명호는 각각 양쪽에서 석민의 어깨에 손을 두른채로 찌질이 새끼, 그래 크게 소리지르는데 누가 좋아하나- 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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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 삐졌겠다."
"그러게, 이따가 풀어줘야하나?"
옆자리에 앉아 생각해보니 석민이 토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지훈과 여주는 어떻게 해야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주는 이따가 자신이 풀어줘야겠다며 결론을 내렸고 지훈의 표정은 어딘가가 짜증이 나 보였다.
"어떻게 풀어줄낀데"
"몰라, 매점이라도 데려갈까?"
아니면 애교라도 부려야지, 이석민같은 타입이 은근히 뒤끝이 오래간다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여주를 쳐다보던 지훈이 무슨 애교냐며 기겁을 했다. 왜, 내가 애교 부린다니까 더럽냐. 장난스레 지훈을 흘겨보며 말하는 여주를 향해 지훈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그런 게 아냐.
생각보다 진지한 지훈의 대답에 여주는 혹시 석민은 그런식으로 푸는 걸 안 좋아하는 건가, 싶어서 왜? 라고 하며 의자를 조금 더 끌어당겨 지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지훈이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그런 건 아인데, 그냥… 하지마라. 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아, 왜! 말 해줘- 뭔데?"
"… 말 안 할기다, 그리고 좀 저리가라"
"와... 밀당하냐? 왜! 아아- 왜!"
여주의 계속 된 질문에도 대답을 피하던 지훈은 평소에 여주가 하는 것 처럼 엎드린채로 자신의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여주는 어디 한 번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 보자! 라며 계속 물어볼 심산이었지만, 곧 교실로 들어 선 담임 선생님 덕분에 다시 의자를 뒤로 빼곤 책상에 엎드렸다. 엎드린 채로 지훈에게 시선을 두었다.
나쁜 놈… 쳐다보지도 않네. 여주는 약간 서운한 건지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바라봤고, 지훈은 고개를 들어 여주를 쳐다 봤고, 여주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웅얼거렸다. 내도 못 본 건데, 이석민이 먼저 보면 억울하제. 그 말을 들은 여주는 뒤를 돌지도, 다시 두근거리는 심장에 잠이 들지도, 못한채로 굳어버렸다.
지훈은 그 말이 끝난 후에 다시 팔 사이로 얼굴을 감췄고, 어느샌가 빨갛게 달아오른 양 뺨을 책상에 붙인 채로 식혔다. 자꾸 가까이 다가오면,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잖아…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뻤고, 그만큼 더 두근거렸다. 지훈은 이제 좀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자꾸 설레는 마음을 탓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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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야자 요정 등장! 형수도 등장!"
방과후, 오랜만에 제 시간에 야자실에 가방을 메고 등장한 이지훈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하던 이석민이 나를 발견하고는 형수도 왔냐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침에 있던 일들은 생각나지도 않는 건지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참… 저렇게 뻔뻔하고 긍정적인 것도 능력이다 싶었다. 예상했듯이 이지훈은 이석민을 무시한 채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이석민 옆에 서 있던 키가 아주 크고 까무잡잡한 남자애와, 마르고 눈이 땡그란 남자애가 나를 향해 인사했다. 네가 그 야자 요정 부인?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며 말하는 남자애의 명찰을 보니 나랑 동갑인 것 같았고, 이름은 김민규인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애는 서명호. 얘네 둘도 이석민에 대응할 만큼 밝아보였다.
좋은 의미로 끼리 끼리 논다… 이석민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말하자, 세 사람은 우리 칭찬하나봐...! 라며 자기들끼리 좋아하기 바빴다. 먼저 자리로 가서 가방을 두고 온 이지훈은 키도 크고 덩치고 큰 세 사람의 사이에 낑겨 있는 나를 보더니 총총총 걸어와 나를 데리고 가며 세 사람에게 눈빛 레이저를 쏘아댔다.
"이야... 프로텍트 정신, 멋지다."
깝죽 깐족 대마왕 이석민.
"솔직히 본받아야 된다이가."
은근히 사람 성질 긁는 서명호.
"그러게, 두 사람 아주 깨가 쏟아지네."
대놓고 빡치게 만드는 김민규까지.
세 사람은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는 몰라도 조합 한 번 죽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깝죽 트리오하고 연관되는 일은 골치아프다며 내 가방을 자신의 옆자리에 두는 지훈이의 말에 백번 공감한다. 저 셋은 인생 한 번 스펙타클하게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앞으로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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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가 시작되니 모두들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깝죽 트리오도 조용히 공부… 안 하네. 자기들끼리 쪽지를 주고받거나 지우개 가루를 서로에게 던지며 킥킥거리기 바쁘다. 저러다 조금 있으면 야자 감독 선생님한테 쫓겨나거나, 지훈이한테 머리를 한대씩 맞고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큰 덩치인 애들이 조그만 지훈이 한 명한테 당해내질 못하니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세명 다 참 잘생기고 차가운 느낌인데, 입만 열면 웬 대형견 세 마리가 모인 것 같다. 지훈이는 약간 고양이 같달까. 건드리면 싫어하고, 가리는 거 많은, 까칠한 고양이.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문제집 한 켠에 지훈이를 닮은 고양이를 그리고는 작게 웃었다.
그냥 고양이만 그려두기엔 조금 부족하다 싶어서 고양이의 옆에 빨간 볼펜으로 하트도 그려 넣었다. 테두리를 다 그려갈 즈음에 지훈이가 나를 톡톡 쳤다. 뭐지? 싶어서 돌아보니, 자신이 끼고있던 이어폰 한쪽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오늘 mp3랑 이어폰을 두고 와서 잘 됐다 싶었던 나는 웃으며 이어폰을 받아 들었고, 귀에 꽂았다.
"...!"
'왜? 노래 너무 시끄러워?'
놀랍게도 지훈이가 mp3에서 듣고 있던 노래는, 내가 그렇게나 자주 듣던 박기영의 시작이었다. 나온지 5년이 다 돼가는 이 노래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노래가 발매되는 와중에도 내가 맨날 듣는 노래였다. 서울에서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친구들이 옛날 노래 엄청 좋아하네, 4년 전 노래는 너무 심하네, 하며 나를 놀렸었는데… 왠지 나와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에, 지훈이는 내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여주야, 이 노래 별로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 틀었는데'
너도 이 노래를 좋아하는구나. 왠지 기뻐져서 급하게 쪽지에 '나도 좋아해'라고 적은 후에 지훈이에게 쪽지를 건넸고, 지훈이는 그럼 잘 됐네. 라며 입모양으로 말한 후에 문제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입꼬리를 올린 채로 문제집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아까 칠하다 만 하트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나는 빠른 속도로 하트를 빨갛게 칠했다. 좋아해. 작게 적어 둔 내 마음이 들킬까 빠르게 문제집을 닫았다.
후에 지훈이의 수학 문제집과 여주의 한국사 문제집을 잠시 빌린 석민이는! |
"엥? 이게 뭐고" 시험기간이라 급하게 문제집을 빌리려 해 봤지만, 김민규와 서명호는 자기들도 빌리고 다니기 바쁘다며 내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래, 이게 우정이지 거지들아… 눈물을 머금고서 이지훈과 김여주가 있는 반으로 향했다. 당연히 안 빌려줄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시험 공부를 끝낸 건지 흔쾌히 내게 문제집을 넘겨 줬다. 그런데, 이 새끼들은 공부를 하랬더니 문제집으로 연애를 했나보다. 문제집 가득히 서로의 이름을 써재낀 흔적들이 지우개로 열심히 지운 듯 해보여도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요즘 옆구리 시려워 죽겠는데 이렇게 사람을 외롭게 만들어도 되는 거냐고...! 혼자 짜증을 내며 공부를 하다가 눈이 아파서 수학 문제집을 덮자 더 가관이었다. 덮으려다가 잘못 펼쳐진 표지 바로 뒤의 속지에는 나도 좋아해라고 김여주의 글씨체로 적힌 쪽지가 테이프로 붙어져 있었다. 밑엔 이지훈의 엿같은 글씨체로 하트와 함께 김여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이런… 솔로 서러워서 살겠나. - 결국 석민이는 그 뒤로 문제집을 펼치지 않아서 시험을 망쳤고, 지훈이는 수학을 여주는 한국사를 백점 맞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