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단이 말했다, 너에게 보낸다고
01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환기를 위해 조금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는 젖은 흙냄새가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열린 창문 사이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사무실 내에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간간이 들려오던 타자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두꺼운 모니터의 밝은 빛에 눈만 깜작였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손목에 둘러진 실 팔찌가 다 낡아 헤져있었다. 붉은 실 여러 가닥은 이미 끊어져 삐져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팔찌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손끝에서는 헤져버린 실의 보드라움이 느껴졌다. 처음 손목에 둘렀을 때의 꺼끌꺼끌한 촉감을 이제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우측에 꽂힌 책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칸막이와 맞닿아 있는, 가장 구석에 숨어있던 다이어리를 꺼내들었다. 책이 거칠게 쓸리는 소리가 났다. 툭,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던 책이 칸막이에 부딪혀 낸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이어리도 팔찌만큼이나 낡아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내 손으로 들어온 것들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손으로 쓸자 뻑뻑한 감이 느껴지며, 먼지가 새까맣게 묻어나오는 것이 청소해야 될 때가 된 듯했다. 서랍을 열자 보인 것은 티슈였다. 아직 뜯지 않은 새 것이었다. 양쪽으로 잡아당기자, 비닐이 죽 늘어지며 찢어졌다. 뽑아든 휴지를 들고 다이어리를 닦아냈다. 메마른 휴지가 검게 변했다. 더러워진 휴지를 둥글게 말아 구겨놓고는 다이어리를 펼쳐들었다. 약 두 달 전에 비가 내렸으니, 다이어리를 꺼내드는 것도 두 달 만인 셈이었다. 종이가 습기를 잔뜩 흡수한 채로 낡아버린 것처럼 구깃구깃했다. 어쩌면 종이가 흡수해 버린 것은 내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넘쳐흐르는 내 감정이라든지. 옅은 커피색으로 물든 종이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바르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았다. 첫 페이지에 끼워져 있던 종이뭉치가 키보드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미 씨.”
“아, 네.”
뒤에서 들려온 부름에 급하게 다이어리를 닫았다. 두꺼운 종이들이 맞부딪히면서 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기울어져 있던 책들을 바르게 세워 생긴 틈에 다이어리를 밀어 넣었다. 팔꿈치에 밀린 휴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의자를 뒤로 밀어젖혔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칸막이를 벗어난 공간에는 차가운 비의 냄새가 가득했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보인 것은 같은 사무실의 직원이었다. 그의 뒤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흐려진 초점에 눈만 연신 깜작였다. 내 뒤에 선 그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담뱃갑을 흔들었다.
“라이터 좀 빌려줘. 아까 나갔다가 잃어버린 것 같네.”
“아, 죄송해요. 라이터는 없는데….”
“응? 아미 씨, 흡연자 아니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내젓는 내 모습을 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에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담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담뱃갑 안에는 한 개비가 작은 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불을 붙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담뱃갑 끄트머리가 뭉툭했다. 여기저기 부딪혀 닳아버린 탓이었다. 그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간지럽기만 했다.
“그러네, 그러고 보니까 이 담배도 파는 걸 본 적이 없네. 뭐예요, 이거?”
“시나브로, 담배 이름이 시나브로예요. 단종된 지 좀 됐을 거예요, 아마.”
“시나브로?”
옆에서 다가온 또 다른 이가 내 책상 위에 놓인 담배를 응시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담배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본 적 있었으나 단종된 이후로는 찾을 수 없었다. 담배 가게에 들어섰다가 나올 때도, 나는 언제나 빈손이었다. 의자에 앉아 빈손으로 나가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주인은 결국 나의 말벗이 되었다. 나보다 일곱 살 정도 많은 여자였는데, 그녀 역시도 시나브로를 피웠다고 말했다. 나는 왜인지 내 추억을 그녀와 나눈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였었다. 짐짓 웃던 그녀가 내게 건넸던 말을 나는 기억했다. 장사가 되지 않아 이제는 가게를 그만한다고 말했던. 당시 삐삐도 없었던 그녀는 내게 연락할 방도를 찾지 못했고, 결국 그녀 역시도 그렇게 나를 떠났다. 다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짧은 회상에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목이 칼칼했다.
시나브로, 시나브로. 많이 들어봤는데. 담배를 유심히 보던 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앉은 의자에서는 꽤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담뱃갑을 조용히 책 옆으로 밀어놓았다. 키보드 위로 떨어진 종이뭉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일 하지 않고 뭐하냐는 호통을 듣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종이들마저도 모두 낡아 있었다. 나 혼자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모두가 나를 지나쳐 흘러가 버리고, 혼자만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열아홉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스물아홉이라는 사실을 내가 가진 추억들이 부정했다. 그것들은 자꾸만 나에게 말했다. 너는 열아홉의 김아미라고. 네 곁에는 김태형이 있을 거라고.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편지 수십 통이었다. 편지 봉투는 더 이상 흰 색이 아니었다. 우측 하단에 적힌 내 집 주소, 그리고 내 이름.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 이름 석 자가 나를 잠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편지 봉투에 적힌 내 이름들은 모두 같은 필체였고, 내게는 참으로 익숙했다. 좌측 상단에 적힌 ‘어느 시인’이라는 이름 역시도 나는 그리워했다. 내게는 쉬이 잊히지 않을 단어라는 것을 알아서 그랬다.
편지 봉투 안에 들어있던 것은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편지지였다. 나는 그 편지지의 출처를 알았다. 내가 살던 집의 주인 아주머니 가게, 그러니까 당시 슈퍼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편지지였다. 문방구도 아니고, 편지지를 왜 가져다 놓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아주머니는 문방구에서 편지지가 불티나게 팔린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슈퍼 한 구석에 편지지를 들여놓았다. 그러나 너무 구석에 모셔두었던 탓인지, 잘 팔리지 않았더랬다. 나는 스치듯 슈퍼에서 파는 편지지가 가장 예쁘다고 말했고, 그 이후로는 항상 같은 편지지에 쓰인 편지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누가 보낸 것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모르는 척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는 내 집 앞에서 항상 우편함에 편지가 있는지 없는지 눈으로 훑었으니, 내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맑게 웃는 그의 얼굴과, 살짝 붉어진 그의 귀 끝을 내 두 눈에 담았기에 모른 척 했다.
편지가 우편함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첫 달, 편지봉투에 적혀있던 내 주소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게 됐을 때였다. 그는 아마, 직접 내 우편함에 손수 편지를 넣었을 거라고 나는 추측했다. 내 집 앞에서 내가 나오길 기다리던 그 때, 편지를 넣었을까. 나는 그가 우편함에 직접 편지를 넣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지만,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부스러질 것만 같은 편지를 꺼내들었다. 편지지에는 뭉게구름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편지지에는 줄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글씨가 제멋대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꾹꾹 눌러썼던 것인지 펜촉이 지나간 뒷면이 볼록했었는데, 이제는 평평했다. 이미 십 년이나 지난 편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흐르는 은하수 어딘가에 투신했다
폐 속에는 시린 물 대신 뜨거운 별이 그득 찼고,
가슴에는 고독 대신 열망으로 그득 찼다
들어찬 별들이 충돌했고
탁, 뜨거운 파열음과 함께
잇따라 가슴에 불이 붙었다
순식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열기에
나는 가파른 숨을 토해냈고
열린 입새론 별들의 잔해가 부서져 나갔다
거듭, 또, 다시, 또 다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봄, 여름, 가을, 겨울
갖은 고초에 나는 고초마냥 시들었다가
봄날처럼 만개하기를 되풀이했다
시리게 찾아온 어느 겨울,
희망으로 둔갑한 죽음이 내 목을 죄었다
나는 그에 매가리 없이 숨을 죽였다
차가운 별이 내 입에서 뿜어져 나오다가
끝끝내는 이울고 말았다
처음으로 스러진 별빛에
별 대신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었고,
별빛의 소실은 나를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다시 투신하듯 빛없는 허공에 몸을 맡기고는
회복되지 못한 몸에서 터져 나오는 아슬한 숨을,
별이 그득하게 채웠던 거대한 열망을 토해내었다
암흑에 멀어버린 눈이 다시 트인 그 짧은 찰나
막혀있던 숨이 탁, 트였다
한 소녀였고,
찬란한 광명이었다
내 고독한 은하수에
죽음으로 탈바꿈한 강물에
아스라이 빛이 사라진 내 가슴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열망이
찬란히 떠오르는 희망이
소녀라는 광명이 발을 들인 것이었다
1999.04.22. 소녀, 어느 시인
그의 필체가 눈에 아른거렸다. 금방에라도 글자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십 년 전, 그날의 햇빛이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나는 책가방을 메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미야.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그의 목소리는 봄과 겨울, 그 모든 것들을 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으나, 보이는 것은 모니터뿐이었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잔잔한 봄의 공기는 없었다. 입 안이 썼다.
편지를 다시 곱게 접었다. 접히는 부분이 곧 찢어질 듯 너덜거렸다. 코끝이 아렸다. 괜스레 뜨여진 두 눈을 더 크게 떴다가 꾹 감았다.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 떨어지는 비는, 내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할 일이 산더미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추억에 잠겨 있을 틈이 없었다. 나는 이제 정말로, 내가 스물아홉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아미 씨, 저번에 말씀하셨던 시집 있잖아요.”
“아, 네.”
“알아보니까 출판을 도왔던 곳이 제 친구가 있는 쪽이라서요. 아마, 물어보면….”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해요.”
내 뒤로 다가온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는 누가 들을 새라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사무실의 다른 이들은 업무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면서 소리를 냈고, 조금은 크게 울리는 내 목소리에 다른 이들이 좋은 일 있어? 라며 물어왔다. 내 앞에 있는 그에게 허리를 수차례나 숙였다. 그의 얼굴에 잠시 당황이 스쳤다. 계속해서 감사인사를 할 생각이었던 나를 제지하고는 이만하면 됐다고 말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게 반복된 인사 때문이었는지,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저번에 비가 오던 날, 다시 편지를 열어보던 나를 보았다. 헤지고 헤진 편지, 그리고 꾹꾹 눌러쓴 글씨까지. 나만 알고 있을 줄 알았던 시를 그는 알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출판되었던 시집 때문이었다. 그는 내게 보내주었던 시들을 모아 출판한 모양이었다. ‘소녀에게’ 시집의 제목이었다. 그 덕분에 시집의 존재를 알게 된 지, 일주일. 나는 어렵사리 시집을 구해냈다. 그의 필체가 아닌 딱딱한 서체가 나는 낯설었다. 나는 며칠 밤을 지새우며 울었다. 김태형. 책 귀퉁이에 적힌 그의 이름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의 이름,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 심지어는 그의 습관까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마 그의 전부를 알았다고 자만했던 모양이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많았으나, 정작 만날 방도는 몰랐다. 내게 어디로 간다고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는 내게 편지들과 함께 추억만을 남겨두고 떠났다. 나는 그 추억 속에 파묻혀 매몰찬 시간을 붙잡고 매달렸고, 그는 매일 밤 내 꿈에 나와 내 이름을 되뇌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매일 밤 나를 부르는 그를, 나는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가만히 앉아 눈만 깜박거렸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게 좋아한다고 속삭여 놓고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버린 그를 나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를 미워한다니,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멀리할 수 없었다. 그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대도 말이다. 다른 이들이 퇴근하기 시작했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오후 12시 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주말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출판을 앞두고 있는 책들이 많았기에 바빴다는 사실은 말하기에도 입이 아플 정도였다. 먼저 가볼게요. 옆자리에 있던 그녀가 내게 말했다. 고개를 숙였다.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서 올리는 진동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을 식당의 주인 아주머니였다. 오랜만에 오는 전화였다. 아주머니는 내가 살던 옛집에 살고 있는 탓에 내게 종종 연락을 하고는 했다. 주로 내게 온 우편들 때문이기도 했고, 알고 지낸 세월만큼 정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면에 마을 식당 아주머니라는 글자가 지나갔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곤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았다.
“네, 이모.”
- 아미여?
“네. 저 아미에요. 제가 먼저 연락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 죄송할 게 뭐 있나. 너 바쁜 거 뻔히 다 아는데.
전화 너머로 상기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요. 아참, 뭐 좋은 일 있으세요? 내 물음에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어찌나 큰소리였던지, 그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크게 울렸다. 나 혼자만 그대로인 것 같다고 생각할 때면 항상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쩌면 변한 것은 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 그건 아녀. 그냥 좀 들러. 보고 싶어 그러지.
“알았어요. 그럼 오늘 갈게요.”
- 웜마? 난 그렇게 재촉까지 안 했는디. 무리할 필요 없어.
“아뇨. 제가 오늘 가고 싶어서 그래요. 보고 싶어서.”
그럼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가.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당연하죠. 종료 버튼을 누르곤 핸드폰을 닫았다. 탁, 닫히는 소리가 빈 사무실에 울렸다. 가방을 챙겨들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를 보다가, 어차피 세워둘 곳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기차를 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직도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을 꺼내들었다. 펼쳐진 우산을 쓰고는 흙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기차 창을 빗물들이 때리고 지나갔다. 나는 가슴 한 구석이 간질거렸다. 시간여행을 위한 기차를 탄 것만 같았다. 차는 한참을 덜컹거렸고, 내 마음도 차가 흔들리는 만큼이나 요동쳤다. 기차역에서 버스를 잡아타고도 한참을 걸어가야만 했다. 내 옛 모습이 내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이 자꾸만 내 앞에서 아른거렸다. 청록색 니트를 입은 그가 내 앞에서 내가 갈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그 환상이 뒤를 돌았다. 아미야, 안 갈 거야? 현실처럼 생생하게 들려온 열아홉 김태형의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선명한 그의 모습에 나는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떠나버렸느냐고, 내게 아무런 말도 없이 가버릴 정도로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아니었느냐고. 그러나 나는 물을 수 없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또, 그 모습은 십 년 전, 열아홉의 김태형이기 때문이었다. 물어본대도, 열아홉의 봄날에 살고 있는 김태형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고 올라왔다. 그것은 아주 뜨겁고도, 넘실거리는 것이어서 나는 그것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토해낸 그것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이라고 쉽사리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추억들이 뒤섞이고, 어떠한 감정들은 배제된 아주 복잡한 감정이었다. 우산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고, 비는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내 앞으로 다가온 그 환상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내 위로 떨어지는 비를 막는 듯 보이는 그의 모습에도, 비는 내게로 쏟아졌다.
태형아, 김태형…. 내 울음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입 안에서 채 내뱉어지지 못한 그의 이름이 굴러다녔다. 이제는 닳고 닳아 모난 곳이라고는 없는지, 내 입 안에 생채기를 남기지는 못했다. 그의 이름이 내 목구멍을 간질였고, 나는 그의 이름을 토해내고 싶었다. 게워낸대도 이미 그의 이름은 나와 한 몸이 되어 붙어있을 것을 알았다. 혀끝에 닿는 그의 이름이 달짝지근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차마 뱉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앞이 뿌옇게 변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 환상에 불과했으니 보이지 않는 것이 맞았다. 울지 마. 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눈가가 따가웠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열아홉의 김태형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내 환상뿐인 그는,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산을 제대로 고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는 환상조차도 사라진 채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다시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잔뜩 꼬부라지고, 포장되지 않은 거친 길을 지나야만 집이 나왔다. 나는 어쩌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보다, 옛 집으로 가는 길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우산을 가지고도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나타나자,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내 등짝을 때렸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녀는 수건으로 내 머리를 문질렀다. 무어라 말을 하려했으나, 그녀의 손길에 나는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우산도 있는 것이 왜 비를 다 맞고 왔어!”
“아니, 그게….”
“됐어. 칠칠맞은 게. 밥은 먹었나? 밥부터 먹어.”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니었던 탓에 식당 안에 손님이라고는 몇 테이블뿐이었다. 구석 테이블에 나를 밀어 넣고 앉히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벌떡 일어섰다. 제가 도와드려야죠. 그러자 그녀는 한 번 더 내 등을 내리쳤다. 쫄딱 젖은 게, 바닥에 물 한 방울도 떨어트리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그녀의 말에 나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 놓인 김치찌개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잘 먹겠습니다.”
어느새 내 앞에 자리 잡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내가 어릴 적부터 살고 있던 집의 주인, 슈퍼 아주머니와 친한 언니동생 사이였다. 그 때문에 볼 일이 잦기도 했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나를 더 챙기기도 했다. 나 역시도 그들을 내 가족처럼 여겼으니, 내가 그들을 얼마나 믿고 따랐는지는 말하기에도 입이 아플 정도였다.
“이모, 요새는 일하는 거 괜찮으세요?”
“괜찮지, 그럼. 가끔씩 와서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그거 다행이네요.”
식당이 마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문 닫는 것을 돕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이미 뽀송뽀송하게 다 마른 내 머리칼에 나를 제지할 핑계거리를 찾지 못했다. 아, 진짜 오랜만에 온다. 저 멀리로 익숙한 대문이 보였다. 그리고 맞은편에 보이는 집에 나는 잠깐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웃어보이곤 다시 걸었다. 그냥, 다리가 아파서요. 내가 살던 옛 집이 가까워질수록 맞은편의 집도 가까워졌다. 김태형이 살던 집이었다. 십 년이 지나고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대문을 열고 나와 내게 인사를 건넬 것만 같았다. 가슴이 먹먹하게 아렸다. 코끝이 찡했고, 괜스레 눈물이 차오르는 것만 같아 두 눈을 크게 뜨고는 힘을 주었다.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눈이 따가웠다. 옆에 있는 그녀에게 들릴 새라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코를 훌쩍였다.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 익숙한 집구조가 나를 반겼다. 나는 이곳저곳, 어디가 낡아있는지 또 수리가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모두 수리했을 터였다. 커튼 새로 보이는 벽지가 새로 발려져 있다는 것이 그 추측에 확신을 주었다. 아저씨는 약속이 있어 오늘 저녁에는 늦는다고 했다. 밤을 새워 수다나 떨자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나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너 내일 간다며, 피곤해. 자신의 바지까지 내준 그녀가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들고 왔다. 속이 공허하게 빈 것 같았다. 숨을 아무리 들이마셔도, 모두 어디론가 새어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분명 숨을 쉬었으나, 쉬고 있지 않았다.
“받어.”
“이게 뭐예요?”
“그동안 다 너한테 온 편지. 네가 너무 오랜만에 왔어. 이제야 주네.”
“죄송해요, 자주 올 걸….”
됐어. 얼른 자. 매몰차게 말한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가구는 모두 내 것이 아니었지만, 방만큼은 예전에 내가 쓰던 방이었다. 깔린 분홍색 이불을 손으로 쓸었다. 다리에 스치는 아주머니의 몸빼 바지가 부들거렸다. 정말로 시간여행을 온 것만 같은 기분에 베개를 내 몸 밑으로 깔고는 엎드렸다. 그리고 그녀가 주었던 편지를 꺼내들었다.
“……어느 시인.”
보낸 이는 또 다시 어느 시인이었다. 벌써부터 코끝이 아리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아 손바닥으로 편지봉투를 몇 번이나 문질렀지만, 글자는 변함이 없었다.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어떤 것을 꾹 삼켜내느라 목젖이 다 아플 정도였다. 속이 뭉글거렸다. 이번에는 우편으로 보낸 것이 맞는지, 우표가 붙어있었다. 시야가 흐렸다. 필체가 익숙했다. 내가 보았던 딱딱한 서체와는 다른 것이었다. 조심히 편지봉투를 찢었다. 벌려진 작은 틈새로 보이는 편지지에 나는 끝내 눈물을 떨어트렸다. 항상 내게 보내던 편지지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완벽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급하게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냈다. 눈물이 베개로 떨어져 작은 얼룩을 남겼다.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그것은 아주 일시적인 것이어서, 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다. 입으로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마치, 누군가에게 전염된 것 마냥 아주 갑작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잔기침은, 내가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놓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터져 나왔을지도 모른다.
담장에 화사한 꽃이 피었다
이로써 여섯 번째의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었다
터질 듯한 내 가슴에는 너라는 열꽃을 피웠다
나는 숙명처럼 열병을 앓았고,
그것은 모두 너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 어쩌면 네가 내게는 운명이라
너라는 열병을 그리 심하게 앓았는지도 모른다
소녀가 없는 봄은 쳇바퀴처럼 돌고 돌았다
제멋대로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내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고 있었고,
수레바퀴의 윤활제인 소녀의 이름을 외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가 품에 안은 따스한 봄의 열기에는 소녀의 온기가 없었고,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슴의 열꽃은 제 계절을 찾은 양 만개했다
그런 열병을 앓은 나는 불치병의 환자였고
너는 내 병을 악화시킬 수 있는 보균자였으며
또, 내 병을 약화시킬 수 있는 의사였다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가슴에 열꽃의 씨앗을 뿌린 소녀를
마주할 수 없이 떠난 겨우내,
내 열병은 걷잡을 새 없이 무섭게 번지었고,
너를 향한 편지 역시도 내 눈물에 검게 번지었다
계절은 자꾸만 돌았고,
나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소녀는 내가 없는 어딘가를 떠돌았고,
소녀 없는 공기는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나를 반기었다
나는 시계처럼 같은 계절을 반복해서 돌았고,
소녀 역시도 내 시계 위를 돌았다
째깍째각, 내 열병에 달아오른 심장이 내는 소리였다
열꽃 씨앗을 내 가슴에 뿌린 소녀는
내가 어찌할 도리도 없이 물까지 주어버린 소녀는
분명 나보다도 빠른 분침이었다
같은 선상 위,
시침과 분침이 결합하는 그 순간,
나는 너와 재회할 것이라고
내가 앓고 있는 열병,
내 생에 가장 화사한 분침,
나의 소녀에게
2005.04.05. 열꽃 시계, 어느 시인.
무려 4년 전에 온 편지였다. 시집이 편찬되고 난 후, 쓰인 편지였다. 이곳에 들를 때도 아무 말 없이 식당에 잠시 들렀다 갔던 탓에, 받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편지의 뒷면이 울퉁불퉁했다. 한참이나 그의 필체를 바라보다가 눈물을 떨어트렸다.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져 나왔다. 행여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입술을 꾹 깨물곤 울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다. 자꾸만 입새로 울음소리가 새어나갔다.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태형아, 태형아…. 내 애타는 부름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 무엇도 잊을 수 없다. 그가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편지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과는 다르게 깨끗했다. 열아홉의 김태형, 그리고 내가 모르는 스물다섯의 김태형. 나를 열아홉에 가둔 이유는, 나는 열아홉의 김태형 밖에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스치듯 마주한 스물다섯의 김태형은, 그와 다를 게 없었다. 뭉게구름, 그리고 꾹꾹 눌러쓴 글씨까지도. 나는 그가 보고 싶었다. 내가 마주한 그의 모습이 더 이상 환상이 아니길 바랐다.
내 꿈에는 어김없이 김태형이 나왔고, 한없이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를 잊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하늘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새가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눈을 뜬 나는,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면 그가 대문 앞에 서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을 뿐, 환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편지까지 모두 챙겨들고는 집을 나섰다. 아주머니는 내게 점심까지 먹고 가라고 말했고, 나는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십 년이면, 슬슬 열아홉을 보내줄 때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렇지만 다시 도착한 편지에 나는 다시 발이 묶여버린 것이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또 와. 그녀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문 앞에 서서, 빈 우편함을 바라보다가, 앞집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그가 대문을 열고 나와 나를 안을 것만 같은데, 대문을 열고 나온 것은 한 소녀였다.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열아홉의 김태형이든, 스물아홉의 김태형이든 나는 보고 싶었다. 태형아, 태형아…, 보고 싶다.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내 옛 추억들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걸었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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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신청 해주신 분들 사랑해요. 쪽쪽 ♥3♥
거부는 거부합니다.
계속 신청 받아요, 주저 말고 해주세요!!!
<사담>
독자님들, 오랜만이에요.
약 한 달만에 돌아왔습니다.
저번처럼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오지는 못할 것 같아요.
가끔씩이라도 올 테니 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달려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