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염 05
: 사슬(Chain)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민형아.
네가 원한다는데.
우리는 빌라로 들어갔다.
대부분이 외국계 혼혈이고, 한국인들도 딱히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장은 자비로운 사람이어서, 새로 온 모델들을 환영하기 위해 클럽을 대관한다 어쩐다 난리였다.
사장은 나 역시도 참석하길 원한다고 세 번쯤 말했다.
그래서 결국엔 실용성 없는 구두와 등이 파인 원피스를 입어야만 했다.
나를 소개해야 하는 자리에서 민형은 짧게 말했다.
"제 가족인 김심입니다."
나는 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마음속에 있던 죄책감을 일그러뜨렸다.
가족이니까 신경 쓰는 거고, 가족이니까 그렇게 불가피한 살인도 함께하는 거라고.
나는 뒤틀린 양심을 가지고 숨죽여 웃었다.
바쁜 도중, 너는 어딘가로 불려 가고, 나는 혼자 있었다.
혼혈 애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 제 이름은 텐이에요."
"저는 김심이요."
"민형이랑 가족이시라고요."
"네."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태도가 나왔는지, 텐은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물렀다.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이 가벼웠다.
"긴장 풀어요. 나쁜 사람 아니니까.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이인데."
"그랬나요, 그랬구나."
네 쪽을 바라보니 너는 예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민형아, 어쩌면 내가 너를 붙들어 놓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나라는 사슬로 널 얽어매서 아무데도 못 가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민형이랑 친하신가 봐요."
"아직은요. 걘 비밀이 너무 많아요.
조금이라도 옛날 이야기를 물으면 그냥 웃어버리죠.
혹시 아는 거 있어요? 사고치고 다녔나요?"
나는 교활한 천사의 웃음을 지었다.
네가 알 리가 없지. 알 리가. 그건 세상에 우리 둘 밖에 몰라.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낼까, 말해 볼까.
말해 버릴까.
"사고요? 그럼요. 전 몸을 팔고, 약도 팔았어요.
우리 둘은 사람도 꽤 죽였고요."
텐에게서 터져나온 것은 비명도, 막힌 숨소리도 아닌 웃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말한다면 우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걸 말하려던 그 때, 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는 농담이네요, 심. 저, 일이 있어서 이만."
높은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팠고, 술은 독했다.
속이 울렁거려서 몇 번이고 토할 뻔 했다.
음악은 이제 귀 뿐만 아니라 내 몸 전체를 울렸다.
사장이던가, 부사장이던가. 사장. 사장이다.
마녀가 나를 있는 힘껏 두들겨 팼을 때처럼 머릿속 어딘가가 깨질 듯 아팠다.
공황 상태가 오는 건 질색이다. 허겁지겁 네 팔을 잡고 말했다.
시끄러운 데다 내 입술이 말을 뭉개서 잘 들리지도 않았을 테지만.
"나가자."
"심아, 괜찮아요?"
"제발."
너는 두말없이 대화를 마무리짓고 재킷으로 나를 감쌌다.
가죽 냄새와 네 향수 냄새가 섞여 콧속을 파고들었고 나는 숨을 깊게 쉬어야 했다.
몸을 놓아버릴까 하다가 내가 힐 위에 있다는 걸 깨닫고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정신이 그런 대로 자리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무너지고 싶었다.
"심아, 걸을 수 있어요? 걸을 수 있지.
띵, 엘리베이터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머리가 멍했다.
땅이 일렁이고, 점차 꺼져가는 기분.
안돼, 안-
마녀가 금방이라도 내 머리채를 휘어잡을 듯한 공포가 내 목을 조여 왔다.
"민형아, 민형아!"
"정신 차려요. 김심, 심아.
내 말 들려? 심호흡 해.
천천히, 그렇지. 지금 괜찮아, 괜찮아요.
너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내가 마녀를, 죽음을, 가끔은 나 자신을 본다는 걸.
내가 죽어야 끝이 나는 악몽에 시달린다는 것을.
마녀는 내 주변을 배회했다.
으깨진 채로.
"업혀요, 제발."
너는 내게 등을 내었다.
널찍한 등이 외롭고 따뜻했다.
넌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민형아.
언제부터 내가 너를 믿었을까.
아마도 처음부터였겠지.
네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오페라의 유령의 사운드 트랙이었다.
And in this labyrinth, where night is blind
the Phantom of the Opera is here inside your mind
내가 쓰는 제비꽃 향수와 네가 부르는 노래는 사치였다.
그 시절에 우리는 묶여 있으므로.
우리는 허황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밤길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자유로운 꽃잎들이 휘르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저게 꽃인가 했다.
꽃은 한데 묶일 때 아름다운 법이다.
저렇게 잎잎이 떨어져 내리면 시드는 일밖엔 없으니.
그 다음 날은 네가 어른이 되는 날이었다.
느지막하게 일어난 나는 선물을 건네려 했지만 넌 이미 걸터앉아 내 선물을 들고 있는 채였다.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열어보라고 하기가 무섭게 재빠르게 넌 포장을 풀었고 어느새 발 밑에는 포장지며 리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내가 쓰는 제비꽃 향수.
"기억하고 있었네요.
심이랑 같은 향수 쓰고 싶다던 말."
“어른이 된 걸 축하해.”
난 삼년 전처럼 분홍 장미 꽃다발과 제비꽃 향수를 건넸다.
네가 나를 믿어줬으면.
네가 향수를 뿌린 손목을 문질렀다.
죽기까지 믿어줬으면.
눈은 곱게 내리깐 채, 입은 미소를 살짝 머금은 채.
나는 그 순간을 음미했다.
내게서 나는 향과 네게서 나는 향이 같아진 순간이 행복했다.
우리의 마지막마저 같을 것만 같아서.
그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길 빌었다.
그러나 우리 둘 다 알듯, 그건 헛된 바람이었다.
“심아, 미안하고, 고마워요.”
여전히 눈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불안이 슬그머니 그림자를 드리웠다.
너의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작은 주먹이 문을 두드렸다.
딱딱딱딱딱, 신경질적인 소리가 머리를 깰 듯 울렸다.
나에게만 들리는 환청, 내게만 보이는 환각.
가늘고 여린 팔다리를 가진 불안이 문틈 사이로 새어들어왔다.
씩, 웃었다. 고른 스물여덟 개의 치아가 빛나는 걸 보며 나는 저게 어른도 아니면서, 했다.
어느새 불안이 온몸을 감쌌다. 가는 팔다리가 내 목을 서서히 조였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순간에, 귓가에 불안의 속삭임이 들렸다.
넌 행복해질 수 없어.
꿈속에 수십 번도 더 나왔던 마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아냐, 무슨 소리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정말, 정말 그럴까.
나는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 너를 응시했다. 아니지, 민형아.
알면서 너 왜 모르는 척 해. 불안이 귀를 씹었다.
네가 향수병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날 봤다.
내 생에 가장 쓰라린 침묵에 입 안이 바짝 말라갔다.
“그날, 나랑 같이 살인을 저질러줘서.”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너는 고마워하면 안되지, 너는 소리쳐야 하잖아. 발악해야 하잖아.
왜 나를 이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왔느냐고 소리를 쳐야 하잖아.
나를 짓밟아야 하잖아.
처음 느끼는 생소한 절망에 나는 너를 말없이 올려다봤다.
아득한 낭떠러지로 한없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착한 넌데, 왜 그런 얘기를 하는 걸까.
마녀의 죽음은, 그 살인은 우리 사이에서 암묵적인 금기였다.
마녀의 죽음으로 우리 모두 그 악몽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우린 공범이었고, 아직 공소시효는 지나지 않았다.
“너 무슨 일 있었지.”
“아니요.”
“말해. 너 거짓말하고 있잖아.”
너는 뭘 숨기려는 걸까.
우리 사이에 뭘 더 속일 수 있을까.
보고 지낸 세월만 십 년이 넘는데.
“말 안 할 거예요.”
“말해. 안 그러면 나 떠날 거야.”
그 말에 네가 주춤, 흔들려.
아, 민형아. 그러지 말지. 입술을 깨물지 말지.
선홍빛 입술이 잘게 떨리고 어둠보다 검은 눈빛은 어지럽네.
어쩌면 좋아, 너는. 거짓말을 못해서 어떡해.
“사실, 나, 정원사에게…….”
너는 한참 머뭇거려서 나는 네 뒷말을 알아 버린다.
아, 그 말.
차마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성폭행, 당했었어요.”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진실에 나는 주저앉는다.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으니까.
카페트의 잔털들이 촉수처럼 내 몸을 비집고 들어온다.
아냐, 아닐거야. 쟤가 또 장난을 쳐.
불안이 내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뭘 모르는 척 해.
너는 참으로 다정하게도 앉았다.
내게 진실을 알려주려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넌, 친절하게 설명했다.
“열 살부터였을 거예요.
심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날 혁대로 묶어서 끌고 갔어요.
화장실에서 가끔 당하고 대부분은 그……”
가만히, 네가 눈을 감고 힘겹게 소리를 뱉는 모습이 심장을 찢는다.
두꺼운 조직들이, 혈관들이, 찢겨 나간다.
날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숲에서, 당했어요.”
네가 고통을 감추고 희미하게 웃어.
숨을 천천히 내쉬는 네 얼굴이 꼭 시체 같아서, 나는 눈을 감는다.
아름다운 숲속에서 내가 귀를 막고 있을 동안 너는 얼마나 처절하게 소리 질렀을까.
네가 죽어갈 동안, 도대체 난 뭘 했을까.
난 아무 말도 못한 채 널 끌어안았다.
바스락, 금박 포장지와 새틴 리본이 구겨지면서 분노 속에 몸을 감췄다.
정적 가운데서 몸이 덜덜 떨렸다.
눈물이, 서러움이 북받쳐 흘렀다.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넌데, 내가 울어 버렸다.
“왜, 말 안했어? 왜!”
파들파들 떨던 너를, 나는 왜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아니 왜 보려 하지 않았을까.
그 절뚝임을. 해가 질 때까지 그림자와 앉아 있던 너를.
“당신이 걱정하니까.”
“말했어야지. 나한테 말해줬어야지.
난 그것도 모르고……”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난 외면한 셈이다.
네가 있었을 숲을, 떨고 있던 너를.
그 사실을 조금만 들췄으면 알았을 텐데.
너의 눈물을 난 왜 보질 못했을까.
알았다면…
그 새끼를 내가 죽였을 텐데.
“난 당신이 웃는 게 좋아.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저리 가. 꺼져, 꺼져!”
내 사나움에 넌 당황한 듯 내 어깨를 감쌌다.
왜 넌 물러서질 않니. 민형아.
왜 넌 떠나질 않아.
난 도리질 치며 너를 밀었다.
밀쳐나가도 다시 되돌아오는 파도처럼 너는 안쓰럽게 밀려온다.
"심아."
날 안다고 하지 마.
널 보호해주지 못했던 나를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나는 너를 방 밖으로 밀쳐 냈다. 불안이 널 따라 밖으로 뛰어나간다.
주저앉은 채 모든 걸 이해한다는 네 눈빛이 나를 안심시켰다.
난 너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겠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그래, 그날 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울고, 또 울다가 밝아오는 해를 보고 난 밤새 울었단 걸 알았다.
“심, 문 좀 열어봐요.”
잠긴 방문 너머에서 네가 말했다.
고요하게 흐느끼는 목소리를 알아챘을까.
유년의 너와 꼭 닮은 지금의 나를 너는 알까.
문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너도 그랬나 보다.
문을 통해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너의 목소리가 울린다.
내 몸을 두드리고, 우린 잠시 침묵으로 대화를 한다.
문을 열면, 네가 벌떡 일어나 나를 마주 본다.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무엇일까.
참회, 후회, 혹은 그 무엇.
“민형아."
“괜찮아요.”
네 대답에 나는 겁을 먹는다.
네 마음을 난 알 수 있기에.
이젠 너무 커버린 네 가슴에 내가 기댄다.
심장 고동이 내게로 번져온다.
천천히, 느릿하게 나를 울려오는 익숙한 리듬 그대로.
그 리듬에 나는 울어 버린다.
너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네 눈을 가려도 될까.
네 팔다리를 끊고, 소리 지를 수 없게 입조차 막아버려도, 될까.
정중하게 협박을 하며 절박하게 너를 팔로 감는다.
도망치지 못하게, 발버둥 칠 수조차 없도록.
아무리 두려움을 속삭여도 너는 날 피하지 않아.
아무리 아픈 상처가 있어도 너는 내색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