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필수
1.
얼마나 읽었는지 뒤 페이지로 넘기기 전, 다음 구절이 생각날 정도였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 더미 속으로 손에 들린 책을 던지었다. 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났다. 책이 떨어졌다. 한숨이 나왔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왼팔로 두 눈을 가렸을까.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들어오는 햇살에 점점 팔목 부근이 달구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시계만 움직이는 순간, 다른 체온이 느껴졌다. 놀랐지만 마치 나른한 오후의 한 고양이처럼 행동은 느릿했다. 그렇게 다른 체온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봤다.
“형.”
형이라 부르는 목소리가 참 어렸고 여렸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시선이 수평이 되었다. 서로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단정한 검정 머리칼이 땀에 약간 젖어 있었고, 두 눈이 고동빛으로 젖어 들었다. 햇빛 때문이었을까. 소년의 행색이 궁금했던 걸까. 두 눈을 살짝 내리깔자 목 끝까지 잠군 흰 교복 와이셔츠가 눈에 띄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형.”
아무도 오지 않는, 나만의 공간 같던 이곳에 누군가 들어온다면 기분이 나쁠 거라 생각했다. 물론 그 전에 천장에 달려있는 쇠가 곧 떨어질 것만 같은, 먼지로 가득 찬, 보기만 해도 불길한 이 창고에 누군가 들어올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왜.”
분명 먼저 말을 걸어온 건 이 낯선 마음이 가는 소년인데, 막상 대답을 하니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 먼저 눈을 맞춰온 너인데. 눈을 내리깔고 더럽혀진 매트릭스를 만지작거렸다. 남자치고 하얀 손이 점점 더럽혀졌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살짝 웃더니,
“그냥요.”
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은 몇 초 가지 않았고, 금세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셨다.
“볼 일 없음 나가.”
“.........”
“아님 똑바로 하려던 말 하든가.”
“저는 박지민이예요.”
“.........”
“그냥. 제 이름은 박지민이라고요.”
2.
“......학교 안 가냐.”
“여기 좋다니까요.”
“말 돌리지 마.”
‘이렇게 먼지 날리고 더러운 곳이 뭐가 좋다고.’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내지 않았다. 분명 말했으면 아무 말 없이 그저 멍청하게 웃을 아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그 말이 참 어울리는 아이였다. 그리고 난 그 웃음에 유난히 약한 사람이었다.
“형은요?”
“.........”
“형은 학생 아니에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학생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학생이라면 교복도 입고, 학교도 가고, 친구들이랑 함께 지내고. 그런 게 이상적인 학생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기에 학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학생 맞으면서 왜 저한테만 학교 가라고 해요.”
“.........”
“형도 가아죠.”
가지 않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 또한 입 안으로 우겨 넣었다.
“신경 꺼.”
참 무심한 말로.
3.
가끔 소년은 하루 종일 이 창고에 있기도 했고. 가끔 소년은 학교 갔다가 오기도 했고. 가끔은 오지 않기도 했다. 오늘처럼 소년이 오지 않은 날에는 조용한 이곳이 참 어색했다. 원래 그런 공간이었는데. 어색했고, 삭막했고,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걸로 알 수 있었다. 내 창고에, 일상에 소년이 어느 순간 존재했다고.
그 감정들을 떨쳐내기 위해 피아노 위로 손가락을 정말 오랜만에 올렸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고, 두 눈이 파르르 옅게 떨렸다. 그와 같게 두 손도 떨렸다. 그 손으로 건반 하나를 누르자 창고 가득 선율이 퍼져나갔다. 그 선율이 귀에 길게 퍼져 두 눈을 떴을 땐 소름이 돋았고, 떠오르는 기억에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고운 손가락이 거친 바닥에 스쳐 피가 흘렀다. 아팠지만 그보다 아픈 기억에 고통이란 감각을 잃은 듯 했다. 그러다 곧,
“형!”
“.........”
“넘어졌어요? 괜찮아?”
“......어.”
현실의 목소리에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나 너한테 뭐 좀 물어봐도 되냐?”
“드디어 저한테 궁금한 게 생긴 거예요? 뭔데요?”
가로등 빛에 의존하는 어두운 이 공간에서 유난히 빛나는 두 눈동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소년한테 뭘 물어본 적 없구나. 그저 밀어내기 바빴구나. 나 혼자. 그렇게 회피 했구나.
“너 뭐하는 놈이냐.”
“......그 뜻이 뭐예요? 뭐하는 놈이라는 그 뜻.”
“너 보통 학생 아니잖아.”
“.........”
“학교를 가기도, 안 가기도. 그게 일반 학생이 하는 행동은 아니지.”
“.........”
“보아하니 양아치는 아닌 거 같은데, 뭐하는 놈이냐.”
4.
곧 무너질 거 같은 이 창고 안에는 아무도 없을 거 같아서, 그럼 연습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들어온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짧은 찰나,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다. 이 창고의 주인일까. 깡패의 아지트인 걸까. 두려움도 컸지만 지금 당장 이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하여도 두려울 게 없었다. 분명 두려운 게 없었는데 그 마음과는 반대로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그 모습에 내 자신이. 내 자신이 아직은 살고 싶긴 하구나- 생각하게 하였다.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걸었지만 거친 바닥과 내 발걸음은 유난히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채 그저 누워 있었다. 매트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보았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땐 느낄 수 있었다. 주인도, 깡패도 아니라고.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라고.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왜.”
차가웠다는 것이다.
***
그러던 어느 늦은 밤. 창고에 들어서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냐고 물어봤을 땐, 괜찮다고 대답해줬지만 분명 손에는 작은 상처와 바닥의 모래와 피가 고여 있었다. 멍들겠다. 집 가서 깨끗이 씻고 약 바르고 데일밴드 붙여요. 원체 말이 많은 형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아무 말이 없는 게 이상했다. 그러다 형이 말을 걸어왔다.
“나 너한테 뭐 좀 물어봐도 되냐?”
“드디어 저한테 궁금한 게 생긴 거예요? 뭔데요?”
반가웠다. 나는 궁금한 게 많았는데 형은 늘 나에게 궁금한 게 없었기에 무언가 물어본다는 그 자체로도 나에게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곧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너 뭐하는 놈이냐.”
“......그 뜻이 뭐예요? 뭐하는 놈이라는 그 뜻.”
“너 보통 학생 아니잖아.”
“.........”
“학교를 가기도, 안 가기도. 그게 일반 학생이 하는 행동은 아니지.”
“.........”
“보아하니 양아치는 아닌 거 같은데, 뭐하는 놈이냐.”
무용수라고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한테도 인정받지 못하는 내가 무용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한테도 응원 받지 못하는 내가 무용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회에 나간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입 모아 나가지 말라고 한 내가 무용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발악하듯 나간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번복으로 상이 뺏긴 내가 무용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한 겁쟁이 같은 나를 진정 무용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평범한 학생이 ‘무용’이라는 이상을 쫒고 있는 중이라고. 그 대답이 어쩌면 어울린다고.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형 먼저.”
“.........”
“형 먼저. 형은 뭐하는 놈이야.”
5.
방 한 가운데에 있는 피아노를 다양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노려보다 불을 질렀다. 목재피아노여서 그런지 활활 타올랐고, 그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경보음이 들리고, 물이 흘러나오고,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고, 소방차 소리가 들리고.
그보다 내 귀에 들려오는 불타는 피아노의 괴기한 음이 더욱 크고, 뚜렷하게 들렸다.
빠른 수술로 인해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지만 음악인으로서의 큰 지장이 생겼다. 온전한 음을 듣지 못한다. 피아노 건반을 치면 온전한 소리가 아닌, 괴기한 음이 들린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괴기한 음.
차라리 사람 소리가 안 들려도 좋으니, 음이 제대로 들렸더라면 지금의 나는 이렇게 창고에 숨어들었을까.
모든 사람들은 어느 순간 나를 잊었고, 뒤돌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음악을 하지 않는데 그런 사람을 굳이 응원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시선이 180도 달라졌다. 나는 멀쩡한데. 진짜 멀쩡한데. 달라진 게 있다면 온전한 음을 듣지 못하는 내 귀인데. 그 하나 잘못됐을 뿐인데. 내 꿈이 한 순간 으스러졌을, 그 때문에 내가 이런 건데. 인간 민윤기는 여전한데.
매일 교복을 입고 학교가 아닌 창고로 향하던 어느 날, 부모님이 찾아왔다. 멍청하게 앉아있던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웃어 보이며 가지 않아도 좋다고, 나중에 가도 좋으니 괜찮아지면 가자고. 집에 안 들어와도 좋다고, 멀리 가지만 말아달라고. 나쁜 생각만 하지 말아달라고.
그들은 영원한 나의 편이었다.
그렇게 영원한 내 편은 내 창고에 음식을 가져다주기도, 책을 가져다주기도, 게임기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뭐야.”
“피아노.”
“...쓰레기잖아. 이제 나한테 필요도 없는데. 버려.”
“윤기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
“네가 제일 좋아했던 거고, 좋아하는 거잖아.”
“.........”
“이거 사달라고 네가 얼마나 졸랐는지.”
“.........”
“안 사줄 수가 없더라.”
6.
“내 생각이 맞았네.”
“무슨 생각.”
“......형이랑 나랑 같은 처지일 거라는 거.”
“.........”
“형이나 나나. 도망친 거잖아. 여기로.”
“......아닌데.”
“......어?”
“적어도 난 너처럼 겁먹어서 도망치진 않았어.”
“.........”
“그리고 난 음악을 하지 못하더라도, 회복 중이라는 거. 언젠간 이 창고 밖을 나갈 거야.”
“.........”
“네가 여기서 도와달라고 허우적거려도 난 뒤돌아보지 않고 나갈 거야.”
“.........”
“그러니까 너 먼저 나가라고.”
7.
“형.”
“.........”
“윤기 형!”
“왜.”
“제 이름은 박지민이예요!”
“.........”
“제 이름은, 박지민이라고요!”
“너 왜 자꾸 이름 말 하는 거냐.”
“.........음,”
“.........”
“저를 안 잊으려고요.”
“.........”
“저라도 저를 기억해야죠. 또렷하게.”
“박지민.”
“.........”
“그걸로 충분해.”
“네, 형.”
빛나는 조명 아래 서있는 너를 보며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 낡은 창고 아래 어렴풋이 들어온 햇살 아래의 뒷모습과 지금의 뒷모습이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확실한 건, 자랐다. 박지민.
雪中梅花
sketch
설중매화 스케치 버전이었습니다. 원래 설중매화는 여주가 아닌 멤버간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어요.
무용수 박지민 X 피아노 치는 방탄멤버
초기에 제가 생각하던 멤버는 남준 or 윤기였는데 그냥 여주로 싹 다 바꾸고 중학생 이야기로 바꿨어요. 스케치 내용 다 버리고. 살린 건 꿈이네요. 무용수 박지민 X 피아노 치는 여주.
그런데 이 내용은 제가 못 살려서 결국 연중되고 말았죠.
그래서 노트북 파일 정리하다가 이 글 보고, 윤기 노래 First Love 듣고 아 이건 윤기꺼다 싶어서 썼습니다.
설중매화 보신 분들도 기억이 많이 안 나실 거 같은데, 안 보신 분도 많으실 거 같고.
어떤가요 이런 건! 우리 착한 독자님들은 다 좋다고 하시겠지 ㅜㅜㅜㅜ
하지만 설중매화는 아직까지 정식 연재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스케치도 다 보여주면서 어떤 흐름일지 예상 되실 거라 생각이 들고, 지민X여주는 더더욱 힘들고요.
그나저나 여러분 저 시험기간 끝났어요!~
물론 과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연재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많이 주무실 새벽에 오토방구 다녀갑니다.
사랑해요 ~
앗 그리고 시간이 남으신다면, 제 공지글의 장편글 추천해주고 가세요!~
이런 글 형식은 어때요? 평소랑 좀 다르지 않나요. 아니면... 말구요... 윤기에게 온전한 음이 안 들린다고 했는데 중간에 윤기가 치고 놀란 이유는 온전한 음이 들렸기 때문이예요. 그게 호전되어서 그런 건지, 고장난 피아노를 쳐서 괴기한 음이 온전하게 들리는 건지. 그건 우리 독자님들 생각에 맡기겠습니다. 지민이는 결국 무용을 하게 되지만, 윤기는 어떻게 되는지 안 나와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풀어내냐에 따라 뒷 내용이 다양하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