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혁x박찬열] 제 전용 돌고래가 되어주세요 번외
"저 장거리로 종목 바꾸려구요."
"장거리?"
"네. 1500m로."
"갑자기 왜?"
"단거리로 쭉 밀고 나가긴 힘들 것 같아요. 선배처럼 스타트가 빠른 것도 아니고, 순발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장거리로 바꾸려구요."
"단거리는 아예 안 뛰고?"
"아니요. 뛰기는 뛰는데, 부종목으로 뛰려구요."
"그럼 뭐야. 이제 세 개나 뛰는거야? 200, 400, 1500?"
"네. 아마."
"안 힘들겠어?"
"장거리 준비하면 폐활량 늘어서 단거리에도 도움될 텐데요, 뭐."
"열심히네. 조만간 나 따라잡겠다?"
"저 옛날에 꿈이 뭐였는지 알아요?"
"뭐였는데?"
"여자친구보다 잘난 남자친구."
"그게 무슨 꿈이야."
"선배가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중엔 선배보다 잘나갈거예요."
"못해도 상관은 없어. 내가 먹여 살리면 되니까."
"선배도 못해도 돼요. 제가 먹여 살리면 되니까."
"말만이라도 고맙네요, 박찬열씨."
"이런 애인 둔 걸 고맙게 생각하세요, 오종혁씨."
"으이그. 말이나 못하면. 그나저나, 그 호칭 좀 고칠 생각 없어?"
"호칭이요? 오종혁씨? 이렇게 부른 거 처음인데."
"아니. 그거 말고."
"그럼요?"
"선배. 딱딱해. 형도 있고, 여보도 있고. 많잖아. 하다못해 오빠도 있는데."
"아, 선배!"
"푸흐ㅡ 장난이야, 장난. 어쨌든. 호칭 바꿔줄 생각 없나, 우리 후배는?"
"뭘 원하는 건데요?"
"네 성격에 닭살스러운 호칭은 기대도 못하겠고. 형, 해봐. 형."
"…형."
아씨, 이게 뭐라고 부끄럽고 그러냐. 형이라는 호칭은 널리고 널렸는데. 심지어 나는 우리 누나한테도 형이라고 부르는데.
"이름 붙여서."
"…종혁이형."
"뭐? 안 들려."
"아씨, 형! 종혁이형! 오종혁형! 형!"
*
그 뒤로 나는 장거리 훈련에 매진했다. 장거리로 주종목을 변경한 이유는 스타트에 그리 강하지 못한 내가 지속력과 후반 스퍼트에 강하다는 것을 연습 시간에 알게된 탓이었다. 하도 기록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좌절한 나에게 종혁선배가 제안한 훈련 방법은 매일 수영장을 몇바퀴씩 도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나는 새로운 나의 강점을 찾아내게 되었다. 남보다 좋은 폐활량과 지속력, 그리고 강한 후반 스퍼트. 모두 장거리에 적합한 강점들이었다. 그렇게 처음 시험 삼아 달려본 1500m에서는 생각보다 좋은 기록이 나왔다. 코치님과 상의해본 결과, 장거리 1500m를 주종목으로 뛰고 단거리 200m와 400m를 부종목으로 뛰기로 했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야간훈련에 임하고 있다. 정규훈련 시간은 아니지만, 보통 장거리 선수들보다 늦게 장거리에 도전하게 된 터라 하루라도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됐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운동장 다섯 바퀴를 뛰고, 샤워를 하고나면 조식 시간이 된다. 그럼 나는 아침을 먹고, 소화를 시킨 뒤 운동장 세바퀴를 뛴다. 그리고 나서는 오전연습에 임하고, 점심을 먹고, 소화를 시킨 뒤 또 운동장 세바퀴를 뛴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나면 오후연습 시간이 된다. 그렇게 죽어라 연습을 하고 나서 저녁을 먹고, 태릉 안의 정규 스케줄은 끝이 나게 된다. 적당히 소화를 시킨 뒤 또 운동장 세바퀴를 뛰고 나서 또 다시 물에 뛰어들어 그 뒤로는 나 혼자만의 야간훈련이 시작된다. 봐주는 코치님들도 없고, 같이 훈련을 하는 다른 선수들도 없는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 된 수영장에서 몇 바퀴인지도 모를만큼 수영장을 돌다가 숨이 차면 조금 쉬고, 그러다 다시 또 수영장을 돌고. 그렇게 한참을 돌다 보면 종혁이형이 온다. 형이 오면 뭐, 이런 저런 얘기도 연애도 하고 그러는 거지.
어쩌면 남들은 많이 힘들지 모를 이 스케줄을 버티며 나는 생각하고는 한다. 종혁이형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수영을 그만뒀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죽어라 해도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기록을 붙들고 스트레스라는 스트레스는 모조리 다 받았을 것이고, 그렇게 페이스가 무너지면서 점점 더 몸놀림은 둔해졌겠지. 새로운 훈련 방법을 제시해 준 형에게 난 그저 고맙기만 하다.
*
다섯 달이 지났다. 종혁이형과 연애를 한지도, 내가 주종목을 장거리로 바꾼지도. 그리고 일주일 뒤면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을 예정이다. 일주일이 지나면 선수들의 희비가 엇갈려 있겠지. 그렇게 몇 달을 지내고 나면 또 올림픽이 다가올테고, 전 세계가 매일을 응원 속에 보낼 것이다. 날이 갈수록 부담감이 나를 덮어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국가대표 선발전이 처음이기도 하고, 혹시라도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내가 이렇게도 조그마한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나. 나름 강심장이라고 생각하고 지냈는데.
"이런 저런 생각 많이 들지?"
"어? 형 언제 왔어요?"
"방금. 얼마나 깊이 생각을 했길래 누가 오는지도 몰라."
"히ㅡ"
"잡생각 많이 들어서 힘들지?"
"그냥,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할 거야.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너한테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으니까. 너는 처음인데. 그치?"
"네…."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냥 너 자신을 위해서 꼭 이겨내야할 일이라고 생각해. 언젠가는 이겨내야할 일. 박찬열 성격 그대로 가면 어차피 해야할 거 최대한 빨리, 제대로 하려고 할 것 같은데. 아닌가?"
"…맞아요."
"나도 그랬어. 쏟아지는 시선에, 어쩌면 전부가 라이벌일지 모를 이 태릉 안에서 기댈 사람도 없고. 나만 믿고 계시는 코치님한테도 말씀드리기 죄송한데다, 평생 나만 바라보셨을 부모님께 이런 일로 징징거리기에는 민폐 투성이인 것 같고."
형도 그런 때가 있었구나. 시합만 나갔다 하면 금메달을 휩쓸어오는 형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구나.
"근데 그렇게 이런저런 거 생각 다하다 보면 괜히 더 피곤해진다? 그냥 네가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평소에 하던만큼만 침착하게, 열심히. 단거리는 모르겠지만 장거리는 너 확실히 가능성 있어. 지금까지 연습해온 것만 봐도. 그러니까 자신감 가지고 열심히 하자.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알겠지? 잘할 수 있지, 박찬열?"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그저 종혁이형에게 안길 뿐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고마워요, 형. 형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형. 수영이라는 걸 배우고, 형을 좋아한 건 제가 살면서 제일 잘한 일 같아요. 형한테 부끄럽지 않은 애인 되도록 노력할게요. 정말 잘 할거야. 국대도 될 거고, 금메달도 따 올게요. 항상 좋은 말 많이 해줘서 고맙고, 나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