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뻑꿈뻑.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눈부신 햇살을 그대로 내리쬐는 파란 하늘이었다. 어떻게 구름이 한 점도 없지. 되게 파랗다. 찬열은 이런저런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다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인가. 난데없는 폭풍이었다. 조난? 그래, 조난. 조그마한 요트를 타고 여행 중이었던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 찬열은, 난데없는 조난을 당했다. 분명히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올 거라는 말도, 폭풍이 휘몰아칠 거라는 말도 없었다. 저는 쨍쨍해보이는 날씨에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고, 갑자기 강해지는 바람에 배를 모는 선장과 저는 꽤나 당황했었다. 그렇게 점점 하늘이 까매지더니, 결국에는 비가 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이 휘몰아쳤다. 함께 배를 탔었던 선장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조차도 없다. 그저 이 곳이 어딘지 알고싶을 뿐이었다.
"으윽…."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주위에 보이는 건 바다, 모래, 풀, 나무. 이게 뭐지. 여기는 정말 어디인건지. 난생 처음 보는 곳에 온 찬열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 때였다. 부스럭부스럭. 어디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Who are you? (누구세요?)"
…생긴 건 동양인인데, 영어라니. 영어 젬병인 나는 어떻게 하나.
"아, 저 그게…."
"뭐야. 한국인?"
"어? 한국어 할 줄 아세요?"
"내가 한국인인데 모를 리가. 근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조난 당하는 바람에…."
"조난?"
*
저가 이 곳으로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한 찬열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오랜 시간동안 물을 입에 대지 않은 탓도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눈 앞이 캄캄한 탓도 있었다. 물을 좀 달라는 찬열에게 물을 건내다주며 종혁은 물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도 없고?"
"네, 뭐. 그런 셈이죠."
"별로 걱정 안 되나봐?"
"사실 걱정은 되는데, 아저씨 만나니까 그래도 뭔가 안심이 되긴 하네요."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고?"
"촉이 와, 단번에 느껴."
난데없이 노래를 부르는 찬열에 종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요. 근데 아저씨는 어쩌다 여기로 온 거예요?"
"나 피디거든. 다큐멘터리 기획한다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으로 왔는데 살다보니까 마음에 들길래 잠시 머물고 있어. 조만간 나도 다시 한국으로 가겠지?"
"우와, 아저씨 피디였구나."
"응. 너 근데 내가 몇 살인줄은 알고 아저씨라고 부르는거야?"
"모르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
"너 몇 살인데?"
"스물 셋이요."
"허, 얼마 차이도 안 나네."
"아저씨는 몇 살인데요?"
"스물 일곱."
"에이, 네 살이나 차이나네요!"
"네 살 차이면 형 동생이지. 형이라고 불러. 늙은 것 같아서 마음 아프다."
장난스럽게 말하며 씩 웃는 종혁의 모습에, 찬열은 난데없이 심장이 빨리 뛰어옴을 느꼈다. 괜히 더워지는 것도 같고.
*
벌써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시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찬열은 저의 생활이 꽤 만족스러웠다. 한국보다 조용하고 한적한 이 섬도 좋았고, 아직까지는 알 수 없는 감정이지만 나쁘지 않은 종혁에 대한 저의 마음도 싫지는 않았다. 저가 살아온 23년 중, 가장 마음도 편하고 여유가 많은 시간이라고 찬열은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 종혁이 저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형."
"어? 나 온 거 어떻게 알았어?"
"여기서 소리내는 게 형이랑 짐승들밖에 더 있나, 뭐."
"그런가."
"형."
"어?"
"한국 가서, 같이 살 애인 있어요?"
"있으면 애초에 한국 갔겠지?"
"그럼요,"
"……."
"나랑 같이 사는 건 어때요?"
"어?"
"아니, 뭐. 어차피 같이 살 애인도 없다면서요. 그러니까 나랑 살자고. 나, 형 좋아하는 것 같아요."
"푸흐ㅡ"
"왜 웃어요?"
"그러지, 뭐."
"…네?"
"내가 먼저 말 하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조만간 한국은 가야할 것 같은데, 너랑 떨어지기는 싫고 그래서. 근데 꼬맹이가 먼저 선수쳐버렸네."
저가 좋아하는 웃음을 보이며 저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종혁에 찬열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어? 꼬맹이 얼굴 빨개졌다. 꼬맹이 부끄럽구나?"
"아, 아니거든요."
"아니긴. 딱 봐도 부끄럼 타는 것 같은데."
"에이씨, 알면 그만 좀 놀려요!"
하하하, 둘의 기분 좋은 웃음 소리가 섬을 한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