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혁x박찬열] 제 전용 돌고래가 되어주세요
"후…."
길게 숨을 내쉬고,
삐익ㅡ
청명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첨벙ㅡ
그 여느 때처럼 레이스는 시작되었다.
*
"찬열이, 많이 늘었네?"
"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며 꾸벅 고개를 숙이는 내 모습에 종혁선배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내게 고생했다고 말해주었다. 아, 멋있다. 왜 저렇게 멋있어? 사람이 저래도 돼? 얼굴도 잘생겨, 키도 커, 몸도 좋아, 운동도 잘해, 집안도 좋아, 성격도 좋아, 착하기도 엄청 착하고, 말도 잘하고. 당연히 인기도 많고. 들어보니까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체육 특기생 중에서 제일 잘했다던데. 역시 신은 불공평하다. 으으. 선배가 가지지 못한 건 뭐지? 응?
종혁 선배는, 음…. 이런 말하기 낯간지럽지만 내가 운동을 시작하고서 처음으로 닮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존경. 그래, 존경이었다. 어린 후배가 엄청난 기록을 자랑하는, 그런 선배에 대한 존경. 선배를 존경하는 마음은 순식간에 불어나 꽤나 깊은 마음이 되었고, 그 당시 어렸던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기 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아,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거구나. 좋아하고 있구나.
물론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그간 연애라는 건 여자와 해본 적 밖에 없었고,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은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더군다나 내가 평소에 좋아했었던 귀여운 스타일의 사람이 아닌, 나보다도 남자다운 사람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선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터닝포인트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했던 내 미래의 삶은, 사랑하는 부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과 함께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이었는데. 남자라니. 떳떳하게 연애도 못할 것이고, 결혼도 못할 것이었으며, 자식들도 낳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다 저렇다, 현실을 파고 들기엔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컸다. 그래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그 다음은? 선배의 취향도 모르고, 현재 선배에게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선배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며, 내 마음을 섣불리 전했다가는 영영 불편한 사이로 지내야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선배한테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쳐. 그 다음은? 연예인은 아니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운동선수인 우리가 연애를 해? 일반적인 커플도 아니고 게이커플이 될 텐데? 그럼 나라 망신은 우리가 다 시키는 거잖아. 그리고 가족들은? 선배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을 선배의 가족들이나, 여태껏 나 하나만 믿고 바라보며 살아온 우리 가족들은? 우리가 평생 고마워해야 할, 그 소중한 사람들이 받을 상처는?
결국 나는 내 감정을 끝까지 묻어두기로 했고, 선배와 그저 돈독한 사이의 선후배로 남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내 감정이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을 어쩌리. 그렇게 기를 쓰고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는 와중에도 날이면 날마다 깊어지는 감정을 나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말하기로 했다. 너무 불쌍하잖아. 이렇게 시도조차도 못 해보고 외면당하는 마음이라니. 나는 내 자신이 상처 받는 꼴은 죽어도 볼 자신이 없다. 그래. 사내새끼가 고백 쯤이야. 한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가 이 정도 깡다구도 없으면 어쩌냐, 박찬열. 해보자. 해보는 거다.
…그래도 그렇게 쉽게 전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닌 걸 어떡해. 흐엉.
*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는 소리, 그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수영장 안. 덕분에 선배가 가르는 물살의 소리는 더욱더 크게 들려왔고, 그와 비례로 내 심장 박동 소리 또한 더욱더 커져만 갔다. 수영장 안에는 선배와 나 뿐이었고, 선배는 여느 때와 같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 물론 내가 왔다는 사실을 선배는 아직 모르고. 어디 보자, 수건이…. 아. 저기 있네.
"푸하ㅡ"
물에서 밖으로 올라온 선배에게 수건을 들고 종종, 빠르지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여기요, 선배. 이걸로 닦으세요."
"어? 아, 고마워. 근데 너 여긴 어쩐 일이야?"
"저, 그게…."
"응?"
"할 말이 있어서요."
"아, 그래? 할 말이 뭔데?"
"어, 그러니까…."
"좋아한다고?"
"네…. 네?!"
"푸흐ㅡ 귀엽긴. 일단 좀 앉자. 애기가 짧게 끝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거지."
어, 그러니까…. 선배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티를 많이 냈었나? 아닌데? 나는 내 나름대로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배가 눈치가 유달리 빠른 게 아니라? 내가 티를 많이 낸 거라고? 도대체 어딜 봐서?
"그래서, 연애하자고?"
"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좋기는 한데, 연애는 싫다고?"
"아니요! 그건 더 아니고…."
"그럼?"
에이씨, 나 놀리는 것 같아. 능글맞게 웃으며 물어오는 선배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하는 게 싫을 리가 없잖아요. 그랫으면 이렇게 냅다 말을 하지도 않았겠죠. 창피하게 뭐 그런 걸 물어요. 부끄러워 죽겠네….
"하, 하고 싶기는 한데…."
"한데?"
"서, 선배 마음은 모르는 거니까…."
"푸흐ㅡ 하여간 귀엽다니까. 키는 엄청 큰 게, 말은 또 왜 더듬고 그래."
나는 내 커다란 귀가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선배가 보면서 또 웃겠지.
"하하하ㅡ"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또 웃기 시작했다. 으으, 창피해….
"그래서, 내 마음이 궁금하다?"
"네? 아, 뭐…. 그런 셈이죠…. 기대도 안 하지만…."
"조금은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네?"
"나 너보다 티 많이 냈는데. 넌 우리 둘끼리 있을 때만 티 냈지? 난 다른 사람들 다 있는 데서도 티 내고 다녔었는데."
"그게 무슨…?"
"너 빼고 다 아는 사실인데. 내가 너 많이 아끼는 거."
"……."
"후배로써가 아니라, 장차 내 애인 될 사람으로써."
그 순간, 정말이지 온 몸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
"연애하자고."
"……."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고 싶으니까."
…와. 미쳤다. 선배도 나도, 세상도. 전부 다, 미쳤다. 우리가 연애를 하다니. 오종혁이랑 박찬열이, 연애를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