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_기억조작.txt
1. 대학생이 되기 전에 나는 남자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대학생이 되면 생기겠지, 남자친구도 사귀겠지 생각했었는데 절대.
관심이 없는 걸 떠나 나는 남자가 싫다.
대학교에 와보니 더욱 더!!!!
입학 후, 신입생이라는 이유로 선배들의 관심을 온몸으로 받았다.
그들 중에 복학생이 있었는데 예쁘다 하는 신입 여학생에게 구걸하는 모습은 아주 걸작이었고,
어떻게든 신입생 중에 누구 하나 엮어보려는 선배들의 모습은 역겨웠다.
개 같은 한국 전통문화 때문에 그런 선배들에게 늘 깍듯해야 했고,
싫은 티 한번 내지 못하고 불려 다녀야 했다. 같이 입학한 남학생들도 별다를 건 없었다.선배들에게 불려 다니는 꼴은 비슷했지만 그들도 누군가와 엮여보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 한 명 빼고.
이름이 특이한데 얼굴도 꽤나 잘생겨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애였다.
성실하고 학교생활에 매사 열심이었지만
여자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그래서 내가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고 싶은 동기였다.
하지만 나는 소심해서 먼저 다가가지는 못했다.
나는 학교와 집이 멀어 자취를 했는데 그 아이가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매일 등하교를 하며 마주친 탓에 그제야 그가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등하교를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다고 걔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2. 첫 MT, 원치 않았지만 거절하지 못해 1학년 총무를 맡게 된 탓에 전날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음에도 빠지지 못했다.
아침에 만나 기차역으로 가는 내내 성우는 가도 되겠느냐 물었다.
"너 그냥 가지 마, 총무 내가 하지 뭐."
나도 참, 뭐 좋은 곳이라고 그렇게 만류하면서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름 MT라고 기대했었는데, 그저 술판이었다.
남들이 술 마시는 걸 구석에서 가만히 보며 피하고 있었는데
"야, ㅇㅇㅇ, 너 술 안 마셔?"
3학년 선배가 받으라며 술잔을 건네었다.
머리 아픈데.. 나 술도 못 마시는데..
울상으로 거절도 못하고 소주잔을 받아들자
"얘 지금 술 못 마셔요, 감기 때문에 아파요."
옹성우가 갑자기 나타나 내 손에 들린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가까이서 보고 느낀 바로 그 아이는 누구에게 미움받을 짓은 하지 않으나
늘 옳은 행동만 하고 옳은 소리만 하는 아이였다.그래서 더 가까이 지내고 싶었고, 이성으로써의 관심 말고 사람으로서 관심이 갔다고 해야 하나.
얼마나 지났을까, 또 다른 선배가 다가와 왜 너는 멀쩡하냐며 맥주를 병째 쥐여주고는
짠- 하고 병을 부딪혔다.우물쭈물하며 병을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또 어디서 나타난 건지
"어허-"
하며 병을 빼앗았다.
"야, 옹성우 너 뭐야."
"선배님, 얘가 지금 아파서 술을 마실 수가 없는 상태라.."
"그래서?"
"저랑 대신 짠- 하시죠?"
옹성우는, 넉살 좋게 웃어 보이며 선배와 병을 부딪혔다.
그런 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카톡을 보냈다.
[고마워.]
[그럼 방에 좀 들어가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라.]
나 대신해서 먹은 술의 양이 꽤 됐다.
미안한 마음에 빈 방으로 들어가 구석에 다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아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두운 방, 앞에서 색색- 하는 숨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사람의 형체가 보여 흠칫 놀랐다.
"나야."
"옹성우?"
그의 작은 숨에서 술 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취했어?"라고 물으니
"아니, 열 좀 내렸는지 보러 왔어."
라며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취기가 잔뜩 오른 얼굴, 눈빛으로.
3. 엠티 이후로, 우리는 조금 더 친해졌다.
매일 등하교만 같이 하는 사이였는데 학교생활에서 내 옆에 늘 네가 있었다.
조별 과제도 같이, 개인 과제도 같이, 시험공부도 같이, 밥도 같이.
주위에서는 둘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냐고 물었지만 너는 늘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그리고 근래, 우리가 점점 더 친해지면서
나는 맘에 안 드는 남자아이들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조별 과제를 할 때 은근슬쩍 숟가락 얻는 새끼들이나,
혹은 다른 여자 동기를 떠봐달라며 카톡 하는 선배 새끼나,
나를 만만하게 보는 새끼들까지.
"진짜 짜증 나게 한다니까."
그날도 어김없이 짜증 섞인 얘기를 하며 집으로 가는데
잘 걷던 옹성우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내가 멈춰 서 뒤돌아보자
"그럼 싫다고 하면 되잖아."
너는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싫다고 해, 그딴 연락하지 말라고, 나 무시하지 말라고."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소심해서 말 못해라고 사실을 말하긴 싫었다.
"꼭, 그렇게 해."
너는 내 머리를 흩뜨려놓고는 다시 걸었다.
4. 1학년이 끝나갈 즈음, 선배들 졸업도 축하할 겸 모두 모여 술을 마시자고
1학년 단톡방에 올라왔다. 과대에게 선배가 직접 연락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자리에 모였을 때 다른 여자 선배들은 없었다.
최악이었다.옹성우가 맞은편에 앉았고 굳이 자리를 바꿔가며
3학년 선배가 내 옆에 앉았다.
워낙에 하고 다니는 행실이 별로였던 사람이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술을 두세 잔쯤 마셨을 때, 그 선배가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저 아무런 티도 내지 않은 채 올려진 손을 피하거나 손으로 살짝 쳐내었다.
그러나 그 새끼는 취한 척 은근슬쩍 끝없이 손을 올려댔다.화장실이라도 간다고 자리를 비워야 하나 생각하던 때,
"어깨에 손 좀 내리시죠?"
시종일관 아무 표정 없이 앉아있던 네가 말했다.
"뭐?"
여전히 시시덕대며 못 들은 척 선배가 되물었다.
"ㅇㅇㅇ 오른쪽 어깨에서 손 떼라고요."
"하하, 이거?"
그 선배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제 손을 위로 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내 어깨를 감싸 쥐고는
"왜? 얘도 가만있는데."
순간 기분이 나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둘이 뭐 하냐? 앉아."
선배가 그제야 얼굴을 굳혔다. 주위가 조용해지며 모두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난처해질까 봐 다시 앉으려는데
"앉기 싫음 앉지 마, 괜찮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라며 네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게서 난생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아마 불안에 떨고 있는 나를 본 모양이다.
"앉기 싫음 앉지 마? 옹성우 너 미쳤냐? 이게 선배가 말하는데."
결국 그 새끼가 술잔을 쾅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하지만 너는 꿈쩍하지 않았다.
내 생에 가장 살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럼 싫다고 하면 되잖아.'
'꼭, 그렇게 해.'
머릿속에는 네가 전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렇게..여자.."
"뭐? 뭐라고?"
"그렇게 여자를 옆에 끼고 놀고 싶으면 룸살롱을 가, 이 미친놈아!!!!!"
선배에게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맥주 한 잔을 원샷했다.
다른 선배들이 만류한 덕에 일이 더 커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기들의 도움으로 그 선배를 대숲에, 대자보에 오르내리게 했다.너는 그런 나를 흐뭇해했다.
5.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면, 아마 너와 친해지고 싶었던 때를 지나고부터
아마 널 좋아했던 것 같다.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네가 신경 쓰였고, 너의 모든 것이 좋았다.
너를 기다리게 됐고,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을 기대하게 됐다.그때 일을 이후로 너와 내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혹시나 친구로도 멀어지게 될까 봐 남들이 물을 때마다 격하게 부정하며 절대 아니라고 답했다.
친구라도 좋았으니까.
2학년이 되고 나서 주토피아라는 영화가 나왔고 네가 거기 나오는 주인공 캐릭터를 닮아
별명이 닉이 되었다. 너는 옹닉이나 닉이라고 불리웠다.
점심시간, 과방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학년 선배들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 닉 여자친구"
"아..아녜요, 저희 그런 사이.."
"지금도 닉 기다리는 거 아냐?"
"그건 맞지만..."
진짜 아닌데.... 나는 이럴 때마다 옹성우가 정말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어 절망스러웠다.
"진짜 그런 사이 절대 아녜요."
"오다가 내가 닉 만났는데, 걔는 아무 말도 안 하던데?"
"맞아, 우리가 여자친구 만나러 가냐니까 그렇다고 하던데?"
순간 설마 그 사이에 여자친구가 생긴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자친구가 아닌 건 괜찮지만, 네게 다른 여자친구가 있는 건 싫어...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허나 누가봐도 곧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정말 싫어..
그 기분은 모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야 옹성우."
"응?"
네가 옆에서 초콜릿을 까먹으며 대답했다.
"너 여자친구 생기면 나한테 꼭 말해줘."
풉- 하고 웃었다.
나 진지한데.
"뜬금 없이?"
너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아예 멈춰 서서 박장대소를 했다.
"아 왜 웃어!!!!"
내가 노려보며 묻자 방금까지 먹던 초콜릿을 내 손에 쥐여주고는
"귀엽잖아."
라고 말했다.
너를 좋아하고,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누가 나 여자친구 생겼대?"
"아니, 그냥 너가 말 안 해줄 것 같아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뾰로퉁하게 말하자
"너잖아, 내 주디."
"내가 널 이렇게나 쫓아다니는데, 여자친구 생길 일이 어디 있겠어. 여기에 있지."
너도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게 감격스러워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보던 너는 꼭, 안아 달래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