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_기억조작.txt
1. 스무 살. 내 인생 첫 아르바이트, 영화관 알바를 시작했다.
여중여고를 나와서인가, 여러 남자들과 일을 하고 어울리는 게 낯설고 무언가 부끄러웠다.내게 말을 걸 때마다 깜짝 놀라기 일쑤고
장난이라도 칠 땐 어찌할 줄을 몰라 얼버무리고 얼을 탔다.
한 2주는, 난생처음 해보는 일을 배우는데 급급했다.
한 달쯤이 돼서야 적응을 마치고 모든 게 익숙해졌는데
단 하나,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와, ㅇㅇ가 노래 완전 잘하네!!!"
이날은, 나의 환영회 겸 오늘이 마지막 출근인 알바생의 송별회를 가졌다.
첫 회식, 조신하게 술을 마시고 노래방을 왔다.
내가 제일 신입이니 먼저 노래를 하라고 해서 누구나 알 법한 발라드를 불렀고, 그가 감탄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내가 적응이 안 되는 그 사람.
주말,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바빴다.아직 능수능란하게 일을 하지 못해 물건을 채우거나 뒷일을 하던 나는 냉장 음료가 다 떨어져 창고로 가 음료를 들고 왔다.
돌아왔을 때, 홀은 조금 한가해져있었다.
"어? ㅇㅇ야! 무겁게 이걸 네가 왜 들고 와, 다른 남자애들 많은데"
"다들 바빠서... 괜찮아요! 이 정도는 거뜬!"
"그래도.. 야, 권현빈 이거 받아 가 정리해라!"음료 24입 짜리 상자 하나를 들고 오자 그가 달려 나와 받아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 알바를 한 사람이었다. 3년 정도 됐다고 했나?
그는 일도 늘 여유롭게 하고, 다른 알바생들 통솔도 능수능란,
게다가 성격은 남들과 잘 어울리고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설레고 가슴 떨릴 만큼.
2. 나를 보자마자 툭 말을 놓길래, 영 별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통성명도 없이 대뜸 일을 알려주었다.인사는 이렇게, 청소는 이렇게, 뭘 확인해야 하는지 대충 알려주고 나서야
"이름이 ㅇㅇㅇ야? 그럼 편하게 부를게."
이미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으면서.
서비스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는 건, 굉장한 이해와 융통성을 필요로 했다.그런 스킬 따위가 없던 나는, 고객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고 대놓고 욕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늘 그가 다가와
"죄송합니다,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라서요."
능수능란하게 처리를 하고, 나를 혼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괜찮아, 네가 아직 너무 어려서 그래. 이럴 때는…."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하나둘 많은 걸 알려주었다.내가 해야 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곤란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법이라던지 일을 여유롭게 하는 방법이라던지.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가르쳐주었다.물론 혼낼 때도 있었다.
"이거 제가 그런 거 아녜요. 권현빈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왠지 내가 덮어쓰는 느낌에 변명부터 늘려놓는데
"지금 뭐 하냐, 얼른 죄송하다고 안 해?"
그가 꽤나 무섭게 말을 해 놀랐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잘 확인할게요."
"뒤처리랑 교육은 제가 할게요, 매니저님은 가서 쉬세요~"
넉살 좋게 웃어 보이며 말하고는, 내가 벌린 일을 본인이 정리하면서"원래 이럴 때는 바로 죄송하다고 해야 돼, 그래야 잔소리 더 안 듣거든.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면 그래 다음부터 그러지 마, 그걸로 끝나잖아."
"네, 알겠습니다."
정말 그의 말대로 하면 다 옳았다.
또 어찌나 개념이 넘치는지,
내가 잘 보이고 싶어서 못하는 화장을 빡세게 하고 갔을 때
나보다 한 살 많은 오빠가 "야 너 화장이 이게 뭐냐ㅋㅋㅋㅋ 남자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해ㅋㅋㅋㅋㅋ"라며 비웃길래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한 거 아니거든 속으로 생각하며 그래도 오빠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있는데
"야, 남자들이 좋아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ㅇㅇ가 하고 싶어서 한다는데."
그의 모든 말, 하는 행동 하나하나 모두가 미운 구석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알바가 끝나고 다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나온 남자 알바생들이 앞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담배 냄새는 지독히도 싫어하지만 대놓고 피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서 숨만 참고 있는데
뒤늦게 나온 그가
"야, 너네 애를 앞에 세워놓고 왜 담배를 피워, 저기 가서 피우든가. 하여간 예의가 없어요."
라며 내 손목을 잡아 제 뒤에 세웠다.
3. 그를 보면 볼수록 이 사람은 진국이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그가 너무 좋았다. 남자로도 좋았고 사람으로도 좋았다.
개념도 개념이지만, 다정한 성격 때문에 가끔 저도 모르게 하는 설레는 행동들도 그를 좋아하는데 한몫했다.
지각을 겨우 면해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올리지 못한 채 조회를 하러 가자마자
매니저님이 "들어올 때는 머리 올리고 와야지, 일찍 일찍 안 다닐래?" 라며 나무랐다.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고 그의 옆으로 가 조회를 들으며 머리를 묶는데
치마 속으로 넣었던 상의가 자꾸 올라가 꾸역꾸역 내리자
그가 옆에서 상의 뒷부분을 살짝 잡아주었다.
내가 놀라서 쳐다보니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로 조회를 듣고 있었다.
그가 아래로 옷을 잡아당겨준 바람에, 머리를 바로 묶었다.
부랴부랴 온 탓에 입술에 아무것도 바르지 못해 옆에 있던 틴트를 잡아 바르는데
색이 잘 나오는 것 같지 않아 여러 번 덧대어 바르니
거울 속 내 뒤로 비친 그가
"예뻐, 예뻐, 그만 발라도 돼."라고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시간을 맞춰 영화를 보곤 했는데,
그날은 조금 늦은 시간대에 봐서 영화가 끝나고 나오니 어둑해져있었다.
내가 가져왔던 후드 집업을 입고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ㅇㅇ야, 춥다. 지퍼 잠가."
그러면서 그가 내 앞에 쪼그려앉아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주었다.
그 생각에 너무 설레어서 밤잠을 설치기를 몇 날 며칠.
문제는
"야, 현빈아 안 춥냐, 지퍼 닫아라."
그러면서 다른 남자의 지퍼도 쪼그려 앉아 닫아준다는 거지.
차라리 여자한테만 그러면, 어장일까?
나 그 사람 물고기인가 봐. 그런 생각이라도 할 텐데.그저 남자 알바생이랑 같은 존재구나. 내가 그한테는 그런 존재구나 생각하면 한없이 슬펐다.
4. 1년 동안 일을 다녔다. 몇몇 알바생들이 바뀌기도 했고, 수십 번의 회식 자리를 가져서 그의 술 버릇도 알게 되었고,
서로를 아주 잘 알았다. 일 할 때의 합은 말을 하지 않아도 척척이었다.
나는 그를 좋아하고부터 그가 일을 하는 한, 나도 여기서 계속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내 남자친구나 애인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냥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알바생들끼리 어울리는 것도 좋아해서 다 같이 모여 캠핑을 가기도 했고, 겨울에는 스키장도 갔고,
어린이날이나 현충일, 공휴일이면 공원에 모여 치킨을 시켜 먹기도 했다.나에게 그런 추억을 안겨주어서 너무나 고마웠다.
예전부터 썸이 가장 많은 알바가 영화관 알바라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나도 있었다. 내게 관심이 있다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항상 "일을 하러 와서 왜 연애를 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사귀다가 헤어져 관두는 애들도 많았고, 썸만 타다가 멀어지는 사람도 많았다.아마도 그 이유인 듯 했다.
나를 찔러보려고 하는 남자도 몇 있었지만 나는 그 때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끈질기게도 나를 쫓아다니는 연하남이 생겼다.일이 끝나면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제 할 일도 다 제치고 내 일을 도와주려 하고,
내게 예쁘다, 귀엽다 그런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준다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나를 보면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결국 연하남의 끈질긴 고백에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줬으나
날 정말 좋아 해주는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과는 달리그의 어장 속 물고기는 넘쳐흐르고, 나는 겨우 그중 하나였다.
연애에 별로 감흥이 없었던 나는 10일 만에 보란 듯이 차였다.
그리고 연하남은 더 보란 듯이 내가 일하는 시간에 다른 여자와 영화를 보러 왔다.
얼마 뒤에는 아예 일을 관두더라.내가 미치게 좋아하고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첫 연애였는데
꽤나 충격이 컸다.헤어지고 한 달쯤 지났을 때인가, 일이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다른 알바생들이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야, 너 오픈에 그 언니랑 사귄 남자애 알아?"
"알지, 헤어지고 바로 다른 여자랑 영화 보러 왔다며."
사내 연애였으니 내가 뒷담화의 주인공이 될 거란 건 미리 예상했던 일이다.
코너를 돌아 지나쳐 가려는데
"어, 맞아, 나 그 같이 영화 본 여자애랑 동창이라 알게 됐는데 걔 일 관둔 거 종현 오빠 때문이래."
"에? 종현 오빠가 왜?"
그의 이름이 나왔다.
"그 때 영화 보고 나가는데 종현 오빠가 퇴장했었나 봐. 걔가 인사하고 가려는데 불러서 여자 갖고 노니까 재밌냐고, 다시는 일 나오지 말라고. 일 나오면 가만 안 두겠다고 되게 무서운 얼굴로 말했대...완전 발리지 않냐..."
5.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내 구남친에 대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걔가 나를 쫓아다닐 때에도, 사귀게 됐을 때에도, 헤어지고 나서도 단 한번 언급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내가 그를 대하는 행동이 달라져서,
나의 눈빛이 달라져서 아마 내 마음을 눈치채지 않았을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던 탓에 회식자리에서 술을 꽤 마셨다.
잘 마시는 편도 아니고 원래 주사가 있는 편인데."추우니까 지퍼 닫아."
그는 또 다른 알바생 앞에 쪼그려앉았다.
취한 내가 알바생을 밀어내고는 그의 앞에 서서
"그거 하지 말라고, 나한테만 해주라고!!"
소리를 치며 그의 손으로 내 지퍼를 잡게 했다.
술이 깨고 난 후에, 알바생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나가지 말까 했지만
그럴 용기는 또 없었다.
넋을 놓은 채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세뇌를 하며 들어갔는데
다들 웃으며 놀리기 바빴다."오늘은 지퍼 열린 곳 없나 봐요? 종현이 형이 잠가드려야 하는데."
하하 하하하고 사무실이 울려 퍼졌다.
하필 매니저님도 함께 한 회식이었는데, 진짜 미쳤던 게 분명하다.
그는 그런 나를 그저 귀엽다는 듯이 바라만 보고 말았다.
알바생들의 놀림이 끊임없이 계속됐다.
네가 좋아하는 종현이 형이라던지, 종현이가 그렇게 좋냐던지.
그래서 결국엔 내가"그래, 좋다. 아주 좋아!!"
인정을 해버렸다.거기에 미친 사람처럼, 그에게 구애를 하기도 했다.
"오빠, 그거 하지 마요. 다른 사람한테 다정하게 하지마요, 질투 나니까."
"야..진짜.."
다른 알바생들은 그런 모습을 웃으며 재미로 봤겠지만, 그는 머쓱해했고 하는 나는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사내연애가 싫어서 그런 거라면, 제가 일을 관두겠습니다."
"그럼 그러던가."
"제가 싫은 게 아니라면, 제가 관둘.. 네?"
그날도 어김없이 형식적으로 그의 옆에 서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필터도 거치지 않고 그동안 생각했던 말을 내뱉었는데,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응답을 했다.
"진짜로요?...장난치는 거죠?"
"설마 오빠가 일까지 관두려는 애랑 장난치겠냐."
그리고 무릎을 조금 굽혀 나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다른 내용으로 쓰고 싶었는데, 항상 같은 패턴인 것 같네요ㅠㅠ
재밌게 읽으셨다면 댓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