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남자는 딱 두 부류로 존재한다.
나와 친구거나
친구가 아니거나
그렇기에 친구라고 생각한 네가 다르게 느껴질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는데
미안
내가 변했네
친구라는 이름으로
W. 파워지식인
성이름&
nbsp;
이어폰을 뚫고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돌아보지 않아도 너는 나에게 올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야, 성이름- 하고 네 목소리가 한 번 더 이어폰을 뚫고 들어온다. 드르륵- 이내 내 옆에 자리를 잡았는지 의자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로 귀찮게 하려고 온걸까. 뻔히 네가 왔음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여러모로 지금 기분이 조금 안좋거든. 내가 안일어나면 자기가 알아서 가겠거니라고 생각한 나와 달리 너는 나에게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뭐지, 평소같았으면 때리거나 괴롭힐텐데. 평소와 다른 네가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져 실눈을 뜨고는 너를 쳐다봤다. 야- 언제부터 날 쳐다본건지 내가 실눈을 뜬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토끼눈이 된 나와 달리 너는 뭐가 재미있는지 씩- 웃고는 나를 강제로 일으켜세운다.
아, 왜. 날 억지로 세운 너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며 웃기만 바빴다. 왜 자꾸 웃는거야, 자꾸 정들게. 웃고있는 너를 보자니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치마자락을 꽉- 쥐었다. 왜 왔냐니까. 너를 바라보던 시선을 창 밖으로 던져버리곤 너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야, 나 좀 봐봐. 나를 툭툭 건들이며 나를 부른다. 내가 쳐다보지 않으니 내 팔을 잡고는 흔들며 자신을 봐달라고 칭얼대기 시작하는 너였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 쓰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입안에서 자꾸만 쓴 맛이 도는 기분이었다. 하-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추운 날씨에 연하게 입김이 났다. 티내면 안돼, 정신차려. 그렇게 속으로 수십번을 다짐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너를 바라봤다. 뭔데-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지금 보냐"
"보면 된거지. 왜 불렀냐니까?"
"내가 네 이름 5번 정도 부른 건 아냐"
"왜 자꾸 얘기를 삼천포로 내빼. 빨리 용건이나 말해"
오늘 같이가
왜?
왜냐니. 우리 원래 같이 갔잖아
...
끝나고 너네 반 앞으로 올테니까 어디 가지말고 기다려
수업 들어라- 그렇게 말하곤 너는 무심하게 내 머리를 툭- 치고는 내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네 손길이 스쳐간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왜 머리를 만져.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던 손놀림을 멈추고는 또다시 창 밖을 쳐다봤다. 눈이 온다. 솜털마냥 사라락- 내려오는게 괜히 마음이 떨렸다. 때마침 종이 울렸고 영어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참나, 이번 첫 눈도 내가 니들이랑 맞이하다니- 라는 한탄에 아이들은 아- 라는 야유를 보냈다. 그러고보니 올해의 첫 눈도 너랑 보내지 못했네. 자자, 교과서 134 페이지를 피도록- 서랍 속에 쭈굴쭈굴해진 영어교과서를 꺼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작년도, 제작년도, 3년 전 겨울에도 우린 다른 반이었고 서로 다른 장소에서 첫 눈을 맞이했다. 책을 넘기는 중간중간, 내게서 책을 빌려갔을때 해놓은 것인지 너의 낙서들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나라고 그려놓은 것도 있었다. 엄청 못그리네, 박지훈.
이 문장은 being이 생략된 분사구문으로- 교실 안 곳곳에는 영어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너는 영어도 지질나게 못해서 항상 나에게 얻어맞곤 했지. 중3때도 넌 나에게 영어성적 내기를 했다가 된통 얻어터진 적도 있었는데- 꽤나 즐거운 기억에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세어나왔다. 그래봤자, 지금은 하지도 않을 내기지만 말이야. 아마 내가 하자고 말하면 넌 '네가 이길게 뻔하잖아'라고 말하고는 얼굴에 책을 덮은채 꿀같은 낮잠을 청하겠지. 그 대답을 너에게 듣는다면 조금, 아주 조금은- 그래, 좀 슬플거야. 근데 어쩌다가 너랑 내가 이런 사소한 내기조차 하지않게 됐더라. 필기를 하고 있는 손과는 달리 머릿속은 점점 박지훈으로 가득해졌다. 툭- 잘 나아가던 샤프심이 부러져버렸다. 이런- 나는 다시 샤프심을 넣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칠판에 필기를 이어나가는 선생님의 뒷모습만 멍청히 쳐다봤다. 힘이 든다.
필기를 다시 해보려 샤프심을 넣고 다시 샤프를 손에 쥐었지만 어째선지 쉽사리 필기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어나가려고 고개를 들면 언제 그 많은 단어들을 적으신 건지 칠판에는 이미 빼곡히 영어가 차있었다. 마치 나에게 한 눈 판거 다 알아- 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달까. 끝내 나는 필기하는 것을 포기했다. 필기를 하지 않아도 성적은 이미 똑같을텐데 뭘- 열심히 받아적고 있는 옆짝꿍의 영어 교과서를 훔쳐봤다. 교과서가 많이 더럽네. 뚫어져라 짝꿍의 교과서를 쳐다봤다. 뭐랄까, 내 마음같아서 자꾸 쳐다봤다. 더럽고 어지럽고 지저분한게 꼭 나같잖아. 허- 하고 바람빠지는 웃음을 내뱉고는 창 밖을 쳐다봤다. 괜히 이 학교로 진학한걸까. 고3 끝무렵에 와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있다. 사실 내가 어디학교를 가든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 애들 있잖아. 죽어라 노력해도 아예 안했을때만 못한 녀석들. 그게 나라고 해야하나. 노력해도 안되고 잘하는 것도, 하고싶은 것도 없는 녀석. - 그나마 영어는 중상위권이었지 - 그에 비해 너는- 영어를 제외하곤 딱히 못하는 것없이 두루두루 잘하고 생기기도 잘생겨서. 나랑 좀 다르네-
사람들은 우리를 흔히 불알친구라 부른다. - 우린 중학교 2학년 때 만났는데 말이야 - 그니까 우린 처음부터 잘맞았고 자석처럼 끌렸다. 이성이 아니라 친구로서, 밥 같이 먹고, 심심하면 편하게 전화하고, 기쁘고 힘든 일에 울어주기에 서로가 서로를 가장 편하고 만만하다 생각하고 있다고나할까. 그렇다보니 이젠 네가 가장 불편하고 어렵다. 뭐든 너에겐 털어놔야만 할 것 같고 우리 사이에 비밀따윈 사치라고 정해버린 너때문에 내 마음조차 누군갈 쉽게 좋아하지 못하고 접으려하고 있으니까. 왜 세상엔 두 부류의 남자들이 존재한다. 친구이거나 아니거나. 그러니까 너는 나에게 친구다. 아닌게 되버리면 끝에는 아닌게 되는거니까. 펄럭- 꽤나 강한 바람이 창문을 강타했다. 교실을 둘러보니 나와 짝꿍을 제외한 3명만이 이 수업을 듣고있다. 하기야 수능도 끝났는데 뭐하러 수업을 들어-
모두가 자고있음에도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사랑을 한 번 저렇게 해봐야할텐데. 놓고있던 샤프를 들고는 교과서 구석탱이에 대충 끄적였다. 박지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작조차 하기 어려운 놈. 박지훈. 써놓았던 이름을 쭉- 줄그어 지워버렸다. 누가 내 마음도 쫙- 그어버렸으면 좋겠다. 누가 이미 시작한 마음을 좀 잡아주면 좋겠다. 자기 마음하나 다잡는건 뭐가 이리도 어렵고 빠른지 잡으려고 쫒아가면 금세 달아나고 열심히 뛰면 너무 빨라서 나만 숨이 찬달까. 사랑을 하면 그런 마음이 들곤한다. 아- 상대방이 내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근데 또 막상 덜컥 알아버리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는게 현실이랄까.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사랑이 참 모순적이라고 느껴졌다. 안할때는 멈출 수 있다고, 자제할 수 있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포기할 자신도 있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되게 어렵다-
툭- 열심히 칠판필기를 하던 선생님의 분필이 부러졌다. 닳아없어지고 있던 분필 앞부분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바닥과 맞닿은 분필은 붕- 하고 한 번 튀어오르더니 이내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박지훈한테 차이면 내 마음이 저럴려나. 생각해보면 너는 그 잘난 얼굴로 여자친구 한 번 사겨본 적이 없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너희 반으로 전학을 와서 그런지 몰라도, 너의 일거투수족을 다 아는게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알고있는 중학생 박지훈은 사계절을 넘나들어 교복 와이셔츠에 체육복 반바지차림으로 더위든, 추위든 내 알바아니야- 라는 태도로 축구에 빠진 중학생이었다. 차라리 니가 여자친구라도 많았다면, 좋고 싫음이 확실한 아이가 아니었다면 너한테 차일까 불안한 마음이 덜하지 않았을까. 왜 너인걸까-
"박지훈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집중 좀 하지"
"어?"
"거슬린다고 니가 쓸데없는 거 썼다, 지웠다거리고 내 교과서 쳐다보는거"
"성이름, 너 재수생 아니냐? 정신 좀 차려"
걔 좋아하면 누가 대학 보내준데?
그렇게 말하고는 인상을 쓰는 짝꿍이었다. 이름이 배진영이라지- 꽤나 매서운 눈매로 나를 째려보고는 다시 공부에 집중하는 진영이었다. 재수. 대학. 그래, 나는 어쩌면 배진영에게 실패자이고 낙오자처럼 보일지도- 나는 학교 내신도, 이번 수능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선생님도 내 성적을 보고는 수도권 지역의 어느 대학에도 붙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 나는 내 수능 성적표를 맞이한 동시에 박지훈에 대한 내 마음도 맞이하게 됐다.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너는 꽤나 좋은 대학에 붙었음에도 재수를 선택했다. 넌 미친 놈이었다. 학교는 난리가 났고 너네 집안도 뒤집어졌다. 모두가 너보고 대학을 가라고 애걸복걸하는데도 너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수를 결심했다. 그 날밤, 너의 폭탄발언으로 학교는 뒤집어지고 너의 부모님은 결국 너에게 손찌검을 해 내가 너에게 달려간 날. 우린 말없이 놀이터 그네에 앉았고 나는 짧게 물었다. 왜 그랬어?
대학가자, 이름아대
학까지 포기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냐
그 날밤, 분명 너를 위로하려 달려갔는데 끝끝내 내가 너에게 위로를 받고 말았다. 말없이 등을 두들기는 너의 사소한 행동에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 마음이 그렇단 것을- 어려서부터 운동만해서 무식했던 나를 유일하게 진심으로 달래주는 이가 너뿐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너는 참 미친 놈이었다. 난 너에게 가장 편하고 만만한 친구였다. 애석하게도 그 날밤 공원은 너무도 밝아서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잘 작동하지 않았던 가로등이 그 날 아침에 고쳐진 바람에 나는 학교 내에서 낙오자로 찍혔다는 현실과 너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속이 꽉- 조여오는 것만 같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고 넌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내었다. 그 날은 쓸데없이 밝은 겨울밤이었다.
어느샌가 영어수업은 물론 종례까지 끝이 나 있었다. 반아이들은 하나 둘 집에 가거나 야자나 보충학습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진영은 이미 가버렸는지 옆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재수없는 녀석. 문득 자신을 낙오자로 바라보던 진영의 눈빛이 떠올라 괘씸했다. 배진영의 책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짐을 쌌다. 집에 가야지. 대충 짐을 싸고는 서둘러 반을 나왔다. 반에서 나오니 아이들로 북적한 복도였다. 너네 오늘 어디갈꺼야? 우리 오늘 떡볶이 먹자. 야, 그건 어제도 먹었잖아- 제 옆을 지나가는 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참 다정해보였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떡볶이 하나에 히히낙낙 웃음꽃이 가득하다. 그 아이들을 쳐다보다 주변을 둘러보고는 옆 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빼꼼- 유리창 너머로 박지훈의 자리를 확인했을때 녀석의 자리는 깨끗했고 책가방도 걸려있지 않았다. 나는 가방끈만을 꽉- 쥔 채 느릿하게 복도를 걸어나왔다. 기다리라고 그랬으면서.
중앙현관을 나와 신발을 갈아신던 중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꽤 오랫동안 자리에 서서 아이들을 본 것 같다. 운동을 그만할 건지 배드민턴 라켓을 창고에 넣어놓고는 학교로 들어가버린다. 나는 대충 신발을 구겨신고는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체육창고에 들어갔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니 아까 여자애들이 썼던 배드민턴 라켓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뚝- 라켓 앞에서 걸음이 멈췄고 천천히 라켓을 집었다. 1년 만에 집어보는 것 같다. 오랜만에 잡아본 탓일까, 괜히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후- 추운 공기 탓에 입김이 났고 콧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라켓을 위로 번쩍 올렸다. 침이 말라오는 것만 같았다. 팅- 힘을 주어 라켓을 휘두르려는 순간, 어깨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고 나는 라켓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괜찮아졌을거라 생각했던 어깨는 절대 나아지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너무 억울해서, 억울해서 울화통이 터져서 눈물이 났다.
"여기서 뭐해"
"..."
"내가 간다고 기다리라고 했잖아"
니가 찐따야? 왜 여기서 질질 짜고 있어, 짜증나게
누군 울고 싶어서 우는 줄 알아? 나도 억울해
너 대학 못간 것도 서럽고 나 운동 못하는 것도 서럽고
네 앞에서 두 번이나 우는 모습 보이는 것도, 찐따같이 보이는 것도 쪽팔리고 억울해- 뒤돌아보지 않아도 너라는 것을 알아챈 나는 더욱이 눈물이 났다. 넌 왜 이럴때만 나타나는거야. 쪽팔리고 속상한 마음에 뒤돌아보지 않고 주저앉은채로 계속해서 울었다. 그게 너는 마음에 안들었는지 성큼성큼 내 옆으로 걸어와서는 내 팔을 붙잡고는 나를 일으켜세운다. 그리곤 지금까지 본 적없는 무서운 얼굴을 한채 나에게 화를 내는 너였다. 왜 네가 화를 내? 화나는 사람은 나고 화낼 사람도 나란 말이야. 말없이 너의 말을 듣다가 '짜증나게'라는 한 마디에 가슴이 아팠다. 결국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소리치며 아무 잘못도 없는 너에게 화풀이를 했다. 사실은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에 나 자신에게 난 짜증임을 알면서도 너에게 화를 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서러운 마음에 또다시 눈물샘이 터졌고 너는 굳었던 얼굴을 풀고는 나를 천천히 안아주었다. 애석하게도 너의 품 하나에 울컥했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려버린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안녕하세요! 파워지식인입니다:) 오늘은 단편작을 가지고 왔습니다. 불알친구(?)인 지훈이를 좋아하는 이름이의 이야기를 써봤는데 잘 쓰였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제 건강상태를 걱정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많이 좋아졌다는 말 전해드리고 싶어요:) 통증이나 그런건 없는데 그냥 흉터만 안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ㅠㅠ 모두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고 저는 또 다음 작품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단편은 암호닉 받지 않아요~ 다른 글에서 쓰신 암호닉으로 달아주셔도 상관없지만 안쓰셔도 상관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