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임창정 - 슬픈 혼잣말
"○사원! ○사원!!"
어느덧 휴가철은 끝물에 접어들어, 나 또한 별반 다를 바 없이 휴가의 여운이 잦아들었다. 날은 좀 선선해지나 싶더니 곧 다시 후덥지근한 기운이 몰려왔다.
대체 이놈의 여름은 언제 끝나는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계팀으로 향하려는데 누군가 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하고 열림 버튼을 급하게 여러 번 누르니 입사동기인 박사원이었다. 개인적으로 친하지는 않지만, 동기랍시고 몇 번 밥을 같이 먹었던 분이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니 오래간만이에요. 휴가는 다녀왔어요? 하며 친근하게 물어오는데, 오랫동안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일단 내렸다.
"미안해요. 급한 일 아니면 잠깐 이야기 좀 할까 해서."
"아, 네... 회계팀에 이거 갖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뭐, 딱히 나한테 일이라기 보다는... ○사원한테 일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일이요? 저한테요?"
걸음은 자연스럽게 직원 휴게실로 향하고 있었다. 회계팀에 지출결의서를 제출해야 했지만 급한 건 아니라 잠깐 정도는 시간이 있었다.
마침 팀장님도, 과장님도 다 안 계시고 해서 어느 정도의 여유는 부려도 되겠지 하고 박사원을 따라갔다. 박사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일이라니... 내게 일이랄 건 없는데. 빠르게 휘리릭 머리를 굴려봐도 당장 떠오르는 게 없어서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유지했다. 박사원은 휴게실에 자리한 소파에 차분히 앉았다.
"다행이다. 아무도 없어서."
"......."
"혹시 옹과장님, 지금 자리에 계세요?"
"아니요. 아까부터 자리에 안 계시던데....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게 뭘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그거.... 근데 왜 ○사원이 모르지? 말이 안 되는데."
"........"
대체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 좀 답답해졌다. 어차피 말할 거라면 그냥 말해주면 안 되나....
빨리 알려주기를 바라는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박사원이 미안, 미안해요. 그냥 나도 들은 지 얼마 안 된 이야기인데 잘 안 믿기기도 하고 그래서... 하며 말을 흐렸다.
나는 가만히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스윽 한 번 휴게실에 누가 없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듯 눈을 굴린 박사원이 운을 뗐다.
"이직하신다면서요, 옹과장님."
"예?! 이직이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내 생각보다 크게 나온 목소리에 내가 더 되려 깜짝 놀랐다. 박사원은 쉿쉿, 너무 크게 말하면 안 돼요. 하면서 입술 위로 검지손가락을 올렸다.
나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이 빠진 눈빛으로 박사원을 쳐다봤다. 박사원은 ○사원이 모르고 있었네, 이걸.... 하면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채로 넋을 놓았다.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그게 아니면 박사원의 입에서 나온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박사원은 최대한 목소리를 줄여가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혹여 한 마디라도 놓칠까봐 마음을 졸이며 귀를 기울였다.
아직 공론화된 건 아닌데,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윗분들은 이미 다 알아서 인사총무팀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사람 찾고 있다나봐요. 그래봐야 옹과장님 대체할 인재 찾는 건 힘들겠지만...
저는 저희 부장님이랑 경영지원부 부장님이랑 이야기하시는 걸 어쩌다 듣게 되어서, 듣자마자 ○사원은 알고 있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사원 어딨는지 찾았는데 자리에 없다고 하길래...
한참 찾다가 엘리베이터 타려는 ○사원 뒷모습 보고 불렀던 거예요, 제가. 타이밍이 좋았어요.
박사원의 말을 듣긴 듣는데 머리가 점점 멍해지는 게 느껴졌다. 사실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저 막연히 일어나지 않기만 바랐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길을 잃어버린 눈동자에 힘을 주고 박사원을 쳐다봤다. 박사원은 근데, 그 옮기려는 회사가....
"동경에 있대요. ○사원 지난 번에 옹과장님이랑 둘이 도쿄 출장 다녀왔다고 했죠?"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 이런 걸까. 띵 하니 모든 사고회로가 멈춰버리는 것 같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고 싶은데 맘처럼 되지가 않는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자꾸만 아득해진다.
이직이라니. 그것도 동경이라니. 과장님과 내가 함께 다녀왔던, 그곳이라니. 박사원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는데 내가 듣고 있는 말은 죄다 믿기가 힘들었다. 믿을 자신이 없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마른 침을 꼴깍 삼켜봐도 어떤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떠도 변한 것 하나 없이 여기는 직원 휴게실이 맞다.
상당한 충격을 받은 나를 눈치챈 박사원은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쓸어주었다. 손길은 따뜻한데 어쩐지 그마저 따갑게 느껴져버린다. 믿을 자신이 없다. 인정하기 싫은 거다.
"아마 지금 옹과장님 자리 비우신 거, 부장님 포함해서 팀장님들, 과장님들 다 모아놓고 말씀 나누느라고 그런 걸 거예요."
"......"
"모른척 하는 게 좋겠다는 말 할 수도 없는 게, 아마 굳이 모른척 하지 않아도 곧 다 알려질 거라.."
"........"
속이 타기 시작했다. 어쩐지 영업마케팅부서 과장님들, 팀장님들이 싹 안 계시는 게, 그것도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공식적인 회의라도 있다면 공지가 올라와서 그러겠거니 하는데, 그렇게 공지가 된 것도 아니니 대체 무슨 일 때문인 건지 궁금했다.
박사원이 아니었으면 영영 모를 뻔했다. 지금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으려나. 무엇보다 그 걱정이 제일 먼저 되었다.
윗분들이 옹과장님을 곱게 보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나도 옹과장님을 그냥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보낼 수 없어봤자 어쩔 거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사실이 그랬다.
박사원은 아, 내가 너무 시간 많이 뺏은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회계팀 가려고 했었죠? 얼른 가요, ○사원. 하고 내 등을 떠밀었다.
그대로 떠밀리기에는 차마 일어나지지가 않아서, 축 늘어진 몸을 소파에 기댄 채로 멍하지 앉아있었다. 박사원은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다른 건 다 공론화되어도, 이 말은 아닐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
"옹과장님한테 그렇게 허다하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어도, 이렇게 오케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대요."
"......."
"그래서 부장님 말씀에, 떠나는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해원이 싫어서는 아닐 거라고 그러시더라고요."
"......."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기지 않은 이상.... 옹과장님이 그렇게 가버리는 건 말이 안 된다고요."
전쟁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꼭 나온다.
주인공이 상대편을 총으로 잘 쐈다고 생각했는데, 좀 멀리서 쏘는 바람에 상대편에게 총알이 제대로 박혔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할 때 한 번 더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 말이다.
나는 그렇게 확인사살을 당했다. 옹과장님의 이직이라는 사실이야 쉷게 결정된 것도 아닐 뿐더러 쉽게 바뀌지도 않을 거라고 하더라도,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있어야 했다. 나는 말은 안 했지만 그 이유가 '나'이지는 않기를 바랐고, 행여 내가 이유의 일부를 구성하더라도 전부는 아니기를 바랐다.
박사원은 그런 나의 바람은 택도 없다는 듯 확인사살을 해주었다. 정말, 고맙게도.
"물론 옹과장님 성격에 그 이유가 뭔지를 알려줄 리는 없다고."
"......."
"나중에, 아주 나중에 전략팀 황대리를 쪼면 알 수는 있겠지만,"
"......"
"사람이 떠나는 데 굳이 그럴 필요 있겠느냐고....
하신 게 제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리고 그게 내가 박사원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기도 했다. 손에 들린 지출결의서가 사각사각, 얕은 소리를 내며 떨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지출결의서를 들고 있는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박사원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에. 그냥 아주 만약에 말인데... 옹과장님 안 계시면 어떨 것 같아요?
그 날, 황대리의 질문이 다시금 내 마음을 울렸다.
-
회의실에서 나오는 옹과장님과 눈을 마주쳤다. 이야기가 언제 끝나나 하고 계속 회의실을 쳐다보고 있었으니 눈이 마주치는 건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과장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리며 나를 향해 웃어 보이셨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모습에 되려 박사원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라게 되었다.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거다. 믿기지도 않았고, 믿기도 싫었고.
웃는 과장님의 얼굴을 향해 어떤 표정을 지어보여야 할지 고민하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봤다. 눈은 하나도 웃지 않는데 입만 웃는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을 거다.
마음도, 표정도 숨기지 못하는 나 자신을 자책해보다가, 어느샌가 옆으로 와 앉은 과장님에게 시선이 갔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을 하기에는 아직 공식적으로 내가 들은 이야기는 없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이야기를 들은 이상 마냥 참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 들은 티를 내는 것과 모른척을 하는 것은 결국 비슷한 부담일 거라는 판단 하에 과장님께 말을 건넸다.
"과장님, 잠깐 저 좀...."
"응? 왜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응? 왜요? 하며 나를 향해 묻는 모습에 말을 고르며 머뭇거렸다. 나가서 해야 하는 말인가? 하고 물으시길래 나는 네.... 하고 답했다.
그럼 잠깐 같이 나가요. 하는 과장님. 과장님은 더 이상 나와 나란히 걷지 않으셨다. 저 앞으로 멀어져가는 과장님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과장님은 층계로 향했다.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
"............"
막상 층계에 도착했는데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과장님은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나를 쳐다보지는 않으셨다. 창 밖에 늘어선 빌딩들에 시선을 고정하고 계셨던 거다. 이렇게 과장님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아서 목소리를 냄과 동시에, 과장님이 뒤를 돌아보셨다. 얽히는 두 개의 시선. 훅, 하고 닿아오는 과장님의 향수 냄새.
"과장님...."
"........."
"..........."
과장님이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웃으셨다. 그 미소가 어쩐지 좀 슬퍼보이고, 쓸쓸해보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어버릴 것 같은 건 나다. 다정한 미소와 눈빛은 그대로인데, 달라진 게 없는데, 둘러싼 공기가 너무나 달라져버렸다. 그게 내 탓인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팠다.
"...두 달만 달라고 했으니까."
그 한 마디를 내뱉은 과장님은 씁쓸한 미소를 내보였다. 웃는다고 해서 농담일 리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없는 말을 할 분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보다 ○사원이 조금 더 빨리 알게 되어서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영영 모를 일은 또 아니라서..
그 말 끝에는 멋쩍은 웃음이 이어졌다. 한 사람의 웃음이라는 게 이렇게 시시각각 바뀌고,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보는 건 드문 경험이다.
과장님은 멋쩍게 웃는데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금방 맺힌 눈물은 숨길 틈도 주지 않고 금방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과장님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
과장님은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훔치셨다. 왜 울어요, ○사원. 이라는 나긋나긋한 말도 잊지 않으셨다.
충분히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정한 말투가 나오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옹과장님이다. 바로 내 앞에 선 그 분이 맞다.
옹과장님이 내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을 훔쳐내기가 무섭게 눈에서는 또 새로운 눈물방울을 만들어냈다. 과장님은 아니, 왜 울고 그러는 거야... 하며 장난스레 웃으며 눈물을 닦아주셨다.
"....자격 없는 사람이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건데...."
"......."
"...미안해요."
나는 옹과장님이 내게 무엇을 미안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안해 할 건 과장님이 아니라 나여야 마땅했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게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 나는 더 울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게 정말 고역이었다. 눈물을 멈추고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은 어디 숨어 있던 건지 계속 제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다.
과장님은 웃음을 걷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과장님과 눈조차 마주칠 수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과장님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양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주셨다. 화장이 지워져버릴 거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 또한 잠시였다. 쏟아지는 눈물에 정신이 없었다.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요. 응?"
"............"
"진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몸에 힘이 빠지면서 곧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과장님은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 등을 감쌌다.
자연스럽게 내 머리가 과장님의 가슴팍에 닿았고, 그대로 안겨있지도, 그렇다고 안 안겨있지도 않은 자세가 되어버렸다.
나는 흐으, 흐으, 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고, 과장님은 조금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내 눈물이 과장님의 셔츠를 적셨다.
과장님은 내 등에 얹었던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끅, 끅, 하며 눈물이 잦아들었다. 나는 과장님의 가슴팍에 기댔던 얼굴을 떼어냈다.
두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잔뜩 젖은 얼굴에 이미 화장은 다 지워져버렸을 거다. 볼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여주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울리려고 한 결정 아닌데 이렇게 울면 어떡해요."
"......과장님..."
"서로 편하자고 한 건데... ○사원이 이러면 나,"
"........."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과장님은 장난기도, 농담도 하나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셨다. 오히려 그 눈빛에 바짝 날이 서서 나를 더 주눅들게 만들었다. 나는 차마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과장님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하다가 이내 이를 내어 입술을 깨물었다. 나와 과장님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싶었는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나와 과장님 사이를 가로막던 무언가가 탁, 하고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건 트이는 느낌이라기보다도 멀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과장님도 나처럼 고개를 숙이셨다. 나는 어느 정도 빠진 울음기를 견뎌내고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과장님..."
"........"
"저 때문에... 정말 다 죄송해요."
"........."
"제가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과장님..."
과장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무슨 말이 떨어질까 두려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든 나는 편치 않았다. 편할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과장님이 편한 쪽으로 아무 말이라도 뱉어주는 게 나았다. 두려웠지만 그래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너가 무슨 잘못을 해."
"......"
"...뭐가 죄송하고, 뭐가 다 네 잘못인데."
"........"
"...나한테는 이거 말고는 길이 없어서."
"......."
"그래서 떠나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
"끝까지 모른척 해줘. 울지 말고."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로 과장님은 내게 말했다. 이거 말고는 길이 없어서, 본인이 떠나는 거니까, 그러니까 나는.... 모른척 해달라고. 눈물 없이.
과장님은 내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곤 문을 열고 층계를 나가셨다. 층계에는 혼자 남아 다시 울음이 터진 나만 있었다.
과장님은 내게 울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정말, 모든 게.
-
(강다니엘 시점)
[옹성우랑 잠깐 할 말이 있어. 미안한데 오늘은 먼저 들어가.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자.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게.]
전송 버튼을 눌렀다. ○○에게 가 닿은 메세지는 아직 1이 없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그렇게 휴대폰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시선은 입구를 향해 있었다.
올 시간이 되었는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초조해졌다. 사실 긴장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주 긴장이 안 되는 건 또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손 옆에 놓인 컵에 담긴 물을 한 번 다 비웠다. 바싹 타들어가는 입 안을 증명해보이려는 듯 자꾸만 물이 당겼다. 후우, 한숨이 깊게 나왔다.
어서오세요- 하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 시선은 다시금 입구를 향했다. 별다른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가게로 들어선 건 옹성우가 맞았다.
나는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손을 들어보였다. 옹성우는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곤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옹성우가 자리 잡기를 기다렸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목이 턱 막히기까지 한 느낌이라,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부르긴 했는데 막상 오니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옹성우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봤다. 왠 일이냐, 니가 나를 보자 하고.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일단 뭐라도 시켜. 하면서 직원을 불러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이거랑 참이슬 하나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그대로 옹성우의 얼굴을 응시했다. 건조한 두 개의 시선이 섞였다. 나는 혀를 내어 입술을 적셨다.
옹성우는 내 얼굴을 쳐다보던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맨정신에 그럴듯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리란 생각에 일단은 술이 필요했다.
안주보다 먼저 나온 소주를 땄다. 사이 좋게 나눠 마실 관계는 아니라, 내 앞에 놓인 두 개의 잔 가득 술을 따르고 한 잔을 옹성우에게 내밀었다.
잔을 받아든 옹성우는 내가 잔을 들기를 기다려 굳이 짠, 하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피식, 얕은 웃음이 새었다.
"........"
"............"
그로부터 두어 번 더 잔을 부딪히자 금방 소주병은 바닥을 드러냈다. 참이슬 한 병 더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직원이 한 병을 더 가지고 왔다.
그렇게 안주가 채 나오기도 전에 두 병을 거의 비웠다. 아무런 말도 없이, 어떤 의사소통도 없이.
사실 안주가 나온 후에도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둘 중 누구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속이라도 한듯 그랬다.
두 병을 다 비웠을 때 내가 먼저 옹성우를 향해 말을 뱉었다. 옹성우는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부터야."
"...뭐가."
"나가겠다고 생각한 거.... 언제부터냐고."
한 달 됐나. 옹성우가 유리잔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답했다. 얼마 안 됐어, 마음 정한지. 부가적인 설명이 따라온 건 그 직후였다.
사이에 어색하게 낀 안주는 자리를 잘못 잡았다는 듯 식어만 갔다. 참이슬 한 병 더요, 이번 목소리는 옹성우였다. 직원은 한 병을 가지고 와서 빈 병 둘을 들고 돌아갔다.
옹성우는 뚜껑을 따서 나의 잔과 그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쨍, 하고 부딪히는 유리잔, 그대로 목울대로 사라지는 술. 따가울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유가 뭔데."
"......."
"아까 그 자리에서 이야기한 거 말고."
낮에 팀장님과 과장님을 모셔둔 자리에서 말했던, 당치도 않은 이유를 제하고 말하라는 거였다. 옹성우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하고 내뱉는 숨에 알콜향이 퍼진다.
.....뭐겠냐. ○○○가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옹성우. 알면서도 물어본 나는 무슨 횡재를 바라자고 굳이 그걸 확인하려 했는지,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
"나 차인 건 알 거 아냐."
"...."
"잊겠다고 두 달만 시간 달라고 한 것도."
"....."
"계속 보이면 그게 잊히겠냐. 잊으려는 사람이 떠나야지."
옹성우가 말했다. 나는 마땅히 이어갈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물어볼 질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가려둔 것 하나 없이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는 문제였다.
자신 없으니까. 자신 없는 사람이 지는 거고... 그래서 난 졌어. 그게 다야. 이 말 듣고 싶었어? 묻는 옹성우의 말에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얼마 간의 정적이 우리 사이를 타고 흘렀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불러놓았는데 오히려 나는 계속 할 말을 찾고만 있다. 할 말이 많은 건 내 쪽이 아니라 옹성우였기 때문이다.
"너가 이겼어, 다니엘."
"....."
"나한테 미안해하는 건 네 자유인데,"
"......"
"그러기엔 내 자존심이 좀 상해서. 별로 미안해하지는 마라."
옹성우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는 빈 잔에 다시 소주를 따르더니 곧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입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소주보다는 물이 급해서 물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옹성우는 너는, 아직도 내가 밉지. 하며 운을 띄웠다. 나는 무슨 소리냐는 물음을 담은 눈빛을 하고 그를 쳐다봤다. 장난기 어린 미소가 나를 향해 있다. 최근 얼마 간은 본 적 없던 표정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고, 그런 잘못을 해놓고 어떻게 그렇게 낯짝 두껍게 네 여자까지 뺏으려 했나 싶고, 그렇지. 넋두리하듯 옹성우가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답도 없이 옹성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떠나는 마당에 뭘 더 가리고 숨길 게 있겠냐 싶어서 말하는 건데."
"......"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니었어."
"......."
"나 그때, 아무런 힘도 없었거든."
"...무슨 소리야."
박과장님 그렇게 떠나고... 팀 분위기 그렇게 험악해지는 꼴 보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눈 가리고, 귀 막고, 팀장님한테 무릎 꿇고, 엎드리고...
그거밖에 못했어. 내 행동 하나하나가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질 수 있던 때에 널 위로하고 챙길 겨를이 없었어. 그럴 용기가 없었어.
힘도 권력도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아끼는 사람을 어떻게 챙겨. 행여 그게 그 사람을 등지는 일이 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권이 너무 적은데 어떡해.
그렇다고 그게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건 알아. 이제서야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라 떠들게 되는 것도 웃긴데, 지금이니까 너도 가감없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옹성우는 그렇게 제 마음에 한참을 두고 끌고왔던 말을 내 앞에 쏟아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내가 옹성우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옹성우는 너가 나한테 했던 게 오해라고는 생각 안 해. 오히려 나야말로 알면서 모른척한 거니까, 내가 더 나빴던 걸 수도 있어. 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나.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차피 똑같은 선택할 거야."
"........."
"그러니까 미안해 해야 할 건 나지, 너가 아니야."
"....형."
".....앞으로도. 미안해하지 말라는 소리야.
그건 내가 할 테니까."
나는 근 2년 사이에 처음으로 옹성우를 형이라 불렀다. 성우형, 성우형, 그리도 많이 불렀던 그 이름이 왜 이렇게 어색해졌는지. 어쩌면 이렇게 어색할 수 있는지.
옹성우는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우는 게 더 맞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웃음도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함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소리다.
"○○한테도,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 없다고 전해줘."
"....."
"내가 말하긴 했는데, 통 안 들리는 것 같아서. 네 말이라면 들을까 싶다."
"......"
"...둘 사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는데. 내가 경솔했어. 인정."
병에 남은 술을 다 따르니 잔 절반이 겨우 채워질 정도였다.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야기라 더 이상 술을 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
마지막 남은 술을 삼키니 옹성우의 시선이 닿아왔다. 애틋함과 후련함을 고루 담은 깊은 눈이 꼭 대학 다닐 때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황민현 결혼식은 보고 가서 다행이다."
"......"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너네 결혼식에는 나 부르지 마라."
깽판친다. 장난스럽게 뱉은 말을 끝으로 크게 소리내어 웃는 형이었다. 그 모습은 그 옛날 내가 우러러 보던,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성우형이 맞았다.
웃는 형을 따라 나도 웃었다. 한 병 더 시키면 안 되냐. 묻는 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자, 내일 반차 내. 나도 질세라 한바탕 소리를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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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편 암호닉 (0차~마지막 암호닉 신청자에 한함. 34편 업로드 전 댓글 달아주신 분들에 한함.) [늘봄] [맡] [크뽀] [도앵도] [녤루] [피치씌] [녜리] [피치수플레] [리본] [유우] [강심장] [녤과장] [강천사] [뚠뚠] [백설탕] [12] [녜리12] [데헷] [덧깨비] [열혈사원] [다녤잉] [댕 댕 이 강다니엘] [댕/댕이] [퐁퐁] [필통] [블라썸] [마다녤] [국국] [강옹량] [체크남방] [에비츄] [춘쟝] [재환콩] [슬] [파리링] [121027] [코타] [루쇼] [0709] [연두] [요니] [민트향] [황사] [자몽맛구름] [강단2] [웖] [구낸내] [몽글] [율예] [뉄뉄] [강낭콩] [뇽뇽] [수 지] [옹기종기] [칸타타] [쿠쿠] [분홍색솜사탕] [다녤맘] [강단] [꽃녤] [엘제이] [유나] [다녤쿠] [요거팅팅] [피아] [우럭] [하늘연달] [퍼지네이빌] [DMR] [새벽] [우주] [녤둥] [휘린] [사용불가] [녤볼루션] [짠따라] [다비밥] [강달리엣] [갓의건] [다정] [지블] [수저] [12100809] [@불가사리] [지니] [0226] [슝왈이] [계란찜] [11023] [짚고긴한커피] [일이일공] [아이셔] [샤넬] [핸] [녤롱] [응] [녤꽃] [녜리2] [키친타올] [일오] [꼬꼬망] [진이진] [딸기모찌롤] [꾹꾹스] [다니스] [비버] [옹성우] [이히] [어어] [형광개구리] [쫑쫑] [츄얼] [남융] [과장님나이스샷] [다녤이랑워니랑] [황제] [박우진라면] [강단이의꼬맹이] [다댕이] [뀨쓰] [♤기쁠희♤] [마카롱] [포카] [수박바라밤] [마요] [불꽃] [현] [비눗방울] [숨] [뿌랑] [송송아] [마이관린] [황금알] [메론바] [일개사원] [짹짹이] [녤리리아] [mj] [라온하제] [박참새] [영단즈] [수수나무] [태침] [딸기맛초코파이] [댕댕민현] [윙지훈] [몽쟈] [무네큥] [이불] [달달한복숭아] [빨간머리] [카르스트] [1122] [쌈장] [뚜띠따띠] [깡구] [녜르] [아마수빈] [포카리] [무리] [몽구] [옹침] [리베르떼] [징징이]
안녕하세요, Y사원입니다. 평일에 올 수가 있다니!! 정말 행복할 따름입니다...ㅠㅠ 제가 일이 요즘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가지구 하루종일 정신없이 사는데, 그래도 오늘은 꼭 34편 들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일하고 이제사 글 올립니다... 엉엉 나 자신 잘해써...ㅠㅠ 혹시 오탈자 있으면 작가가 진짜 힘들었구나... 하고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고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현생에 치이는 동안 울 슈스원은 엘에이도 다녀오고... 누나가 열씨미 챙겨보고 이떠 얘드라...ㅠㅠㅠㅠㅠ 자랑스러워 우래기들... 엉엉 암튼 제가 답댓은 못 달아드려도 떡밥 따라잡기 + 댓글 정독하기는 꼬박꼬박 하고 있단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답댓 못 달아드린다고 서운해하지 말아주세요... 저 진짜 댓글 하나하나 다 읽고 힘내고 있으니까요ㅠㅠ 그리고 제가 단편을 약속드린 독자님이 계신데, 늦어진다고 해서 까먹은 건 아니니깐 헉 혹시 까먹은 거 아냐? 하지 마시구 기다려주시어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쓰겠습니다... 여튼 오늘도 찾아와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이번 편 찌통인 건 너무... 잘 알고 있으니... 이만 말을 줄이겠....☆ (사실 피곤해서 주글 것 같다고 한다) 다음편은 또 언제 들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ㅜㅜ 생각보다 일찍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고요! 그치만 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즐거운 밤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