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가슴이 말해(inst.) - 김나영
짝사랑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8
옹청이
[ (사진) ]
[ 혼밥인증 ]
[ 혼자 먹는게 더 맛있다 ]
[ 진짜임 ]
[ ㄹㅇ임 ] 오후 8 : 30
황민현의 자몽에이드 잔에 맺힌 물방울이 모두 흘러내려 테이블이 흥건히 젖는 순간이 되어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민현이와의 많지는 않았지만 함께했던 순간들이 고백과 함께 밀려와 마음이 저릿했다. 애초부터 오만한 생각이었다. 황민현이 내게 사귀자는 말을 할거라는게. 나에 대한 황민현의 마음을 나 스스로가 너무 가볍게 여겼다는게 부끄러웠다. 황민현이 3년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부터 고백을 하는 순간까지도 나를 배려하는 사실이 자꾸만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멍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멍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이 몇 시인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은채로 무작정 걷는 내 머릿 속에는 온통 황민현의 말뿐이었다. 말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뱉어버리면 나조차도 감당이 되지 않을만큼 거대하게 눈덩이처럼 커져버리니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랬다.
내게 말이라는 것은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도구였다. 그리고 황민현은... 최대한 억누르고 억눌러서 내게 말했다. 빙빙 돌려서 좋아한다고. 나를 좋아해왔다고. 그 긴 시간동안 나의 뒤에 서있었다고.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나 조금 전에 울린 진동이 황민현에게서 온 연락은 아닐까 싶어서. 못 바래다줘서 미안하다는 황민현에게서 잘 들어갔냐는 그런 내용의 카톡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 ...아. "
그리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황민현이 아니었다. 애초에 황민현이 그런 말을 하고나서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마음 속에서 무언가 작게 일렁였다. 실망감일까, 후회일까. 민현이에 대한 감정이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옹성우의 연락에도 황민현의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해서, 더구나 김여주라는 사람은 참으로 마음이 갈대 같아서 오늘 낮에 다잡았던 마음은 스르르 풀려 온데간데 없어진다.
혼자 잘 먹네
맛있겠다 진짜로
ㅋㅋㅋ
액정을 톡톡 터치하곤 다시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역시나 금세 울리는 진동에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문득 지금 걷는 이 거리가 옹성우와 어제 걸었던 거리라는 걸 깨닫고 나는 한동안 그 길에 서서 쳐다보았다. 옹성우가 재잘대며 걸어가고 나는 옹성우와의 추억에 혼자 잠겨 가던 길을 멈췄다. 민현이도 그럴 때가 있었을까. 손에 꼽힐만한 그 만남 중에서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옹성우에게 온 카톡이 잠금 화면에 떴다. 홈화면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옹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늘 내 마음을 복잡한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라도.
[ 집에 가는 중? ]
" ...응. "
[ 어쩐지... 심심해서 전화했구만? ]
" ... "
발랄한 옹성우의 목소리에 나는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처럼 내 몸을 덮치는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울컥, 뭔가가 올라오는 듯하기도 했다.
[ 뭐야...? 왜 답이 없냐? ]
" ...아니... "
[ 어라, 목소리에 힘도 없네. 너 무슨 일 있었어? ]
조금 전의 발랄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에서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건지 눈이 따끔거렸다. 옹성우가 나를 걱정하던 순간들은 많았다. 나를 지켜준 순간들도 있었고, 나에게 위로를 건네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느꼈던 감정은 설렘과 비참함이었다. 너에게 나는 고작 친구일 뿐인데, 너는 나에게 '친구' 라는 이름만큼의 호의를 베푸는건데 나 혼자 이렇게 설레는게 비참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원망스러움. 차라리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네가 지금 나를 걱정해주지 않았더라면. 네가 못됐더라면, 그래서 나같은건 친구일뿐이라서 장난이나 치는 사이였더라면. 내가 너와 이렇게 대화를 할 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너와의 시간들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지금 조금은 홀가분해졌을까. 조금 전에 카페를 벗어나려는 민현이를 잡을 수 있었을까? 나와 황민현 사이의 정적을 내가 먼저 깰 수가 있었을까?
[ 김여주. ]
대답이 없는 나를 이제는 단호하게 불렀다. 으응, 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다시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옹성우가 한결 안도하는 목소리로 놀랐잖아. 하곤 장난스레 말했다. 6년간 너를 놓지 못했던 이유, 황민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네가 얼마나 성우랑 지금 관계를 깨는게 무서울지, 나는 상상도 못하겠어. 그렇지만 여주야, 그것만으로도 대단한거야. 그 관계가 네 마음 때문에 깨져버릴까봐 그 마음 억지로 참는거. 네 마음 꾹꾹 눌러 담아서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는거. 그거 정말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해. '
나는 이때껏 혼자 생각했다. 고백할 용기도 없는 내가, 옹성우와 친구라는 관계를 끊을 용기도 없는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고 바보같다고. 애가 탈 정도로 좋아하면서도, 긴 시간을 끌면서 좋아해왔음에도 그런 용기조차 없는 내가 멍청해보여서... 그런 내게 황민현은 말했다. 내가 대단한 용기를 지니고 있다고. 내 마음을 억지로 참고, 꾹꾹 눌러 담아서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게 그 자체로 대단한 용기라고.
[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
" ...옹성우. "
[ ...뭐야. 휴대폰을 타고 흐르는 이 긴장감? ]
그리고 나는 지금 깨달았다. 짝사랑을 할 때 내 마음을 억지로 참고, 꾹꾹 눌러 담아서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아등바등 관계를 유지하려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 나 황민현이랑 사귀면 너 기분 좋을 것 같아? "
짝사랑에서 벗어날 때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 ... ]
" ... "
찌르르. 근처 공원에서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후덥지근한 공기는 그 어떤 밤보다 모순적이게도 서늘했다.
[ ...별로? ]
" ... "
[ 너 커플 되는걸 내가 어떻게 두고보냐? 난 솔론데. 막상 민현이랑 너랑 잘 된다고 생각하니까 좀 배아프긴 하네. ]
" ... "
[ 근데 이런걸 왜 물어? 너 설마... 황민현한테 고백 받았냐? ]
" ...알 거 없잖아. "
[ 야, 알 거 없기는. 너 근데 진짜로 설마... ]
" 끊자. 조금 있다가 연락할게. "
[ 야야, 김여주... ]
뚝.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별로'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로 아주아주 큰 돌이 내 심장을 후려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도 설마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런 생각에 잠시나마, 아주 찰나 동안 기쁨을 맛봤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흘러나온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또 롤러코스터가 추락하듯 좌절하고야 만다. 너는 여전히 나를 뒤흔들어놓고, 내 감정을 헤집어놓는다. 황민현이 다시 차곡차곡 쌓은 모래성을 너는 파도 하나로, 작은 파도 하나로도 훑어버리고 모래성은 형태도 없이 망가져버린다.
성우야. 너는 내게 여전히 아프고도 슬픈 사랑이지만, 나는 이제 지쳐만간다. 용기를 내서 이 짝사랑을 끝내겠다는 생각에 홧김으로 내지른 외침이었지만, 결국 너에겐 그저 한없이 작은 평소와 같은 언어에 불과했다.
다 나의 잘못이다. 친구라는 이름을 혼자서 아등바등 잡으며 절대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던 나의 잘못이다. 그렇지만 나는 또 나락으로 빠져버리고, 너의 그 장난기 어린 말투에 지옥을 맛본다. 끝을 내야겠다는 생각이었으나 결국엔 끝을 내지 못하고 썩어 문드러진 동아줄을 억지로 붙잡았다. 여전히 너는 나를 웃고, 울게한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더이상 이 지친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고 싶지 않았는데...
옹청이
[ 야 ]
[ 왜그래 ]
[ 너 진짜 왜 그러는거야 갑자기 ㅜ ]
[ 내가 뭐 잘못했어? ]
황민현에게 드는 감정도, 옹성우에게 드는 감정도 너무 깊어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우웅, 우웅. 전화벨 소리 대신 진동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힘든 밤이었다.
정말로 힘든, 밤이었다.
[ 누나!!!! ]
아, 깜짝아.
다짜고짜 걸려온 재환이의 전화를 받자 재환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아아, 누나. 죄송해요. 급해서. 재환이가 민망한지 꺄하하핳 하고 고주파 웃음소리를 냈다.
" 무슨 일인데? "
[ 아, 그게요. 제가 이번주 목금 마감 알바를 못할 것 같은데 혹시 누나 대타 되시나 싶어서... 제가 진~~~짜 누나 귀찮게 안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급하게 공연 리허설이 잡혀가지구... ]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김재환이었다. 재환이는 주말이 아닌 평일에는 마감 알바를 했다. 실음과에 다니고 있는데, 기타를 위해서라면 이 한몸 바쳐 일을 해야해야 된다나. 평일엔 알바를 하지 않았지만, 마감타임이면 학교 수업이 끝나도 부담스럽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알겠어. 하고 짧게 답했다.
[ 헐!!! 진짜요? ]
" 응. 너 어쩔 수 없이 대타 구하는거잖아. "
[ 와... 누나 천사. 지성이 형은 학회 행사 때문에 이번주 마감타임은 못해준다 그랬거든요. ]
" 마침 나도 시간 비고, 오빠도 안 된다고 했으면 어쩔 수 없지. 사장님한테 말 좀 해줘, 내가 간다고. "
[ 네네. 누나 짱 감사해요. 진짜로. ]
" 아냐. 리허설 잘하고. "
[ 네~ 대신 다음에 누나 썸남 데리고 오시면 제가 그냥 스을쩍 돈도 안 받고 맛있는 커피 한 잔 드리겠습니다. 오케? 오케오케~ ]
재환이가 자문자답을 하며 다시 고주파 웃음 소리를 뿜어냈다. 썸남이라는 단어에 급하게 내 표정이 좋지 않아지는 걸 느꼈다. 이틀이 지났다. 민현이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오지 않았고, 나는 옹성우의 연락을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옹성우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자신이 없었다. 옹성우가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연락을 기다리는 쪽은 황민현이었다.
말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섭다. 민현이가 꺼낸 말에 6년이라는 나의 시간동안 억눌렀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꺼내보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민현이가 꺼낸 말에 6년이라는 나의 시간이 조금은 아물어가고 있었으니까.
[ 어쩌죠 ㅠㅠ 다들 목요일 밖에 안 될 것 같은데 ]
[ 여주씨 알바라고 하셨죠? 몇 시부터 알바에요??? ]
저 8시요! 6시부터 한다고 하셨으니까 최대한 참여하고 가보겠습니다 ㅠㅠ
오케오케맨 김재환의 알바 대타를 하기로 한 목요일날. 나를 제외한 모든 조원이 하필이면 또 목요일 밖에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늦게 끝나서 할 일 더 생기면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제가 할게요. 내가 말을 덧붙이자 그제서야 사람들이 좋다는 카톡을 보내온다.
[ 저... 저도 8시에 일이 있어서 그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ㅠ ]
마지막으로 뜨는 팀플톡을 확인하고 단톡방 알림을 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옹성우에게서 온 읽지 않은 카톡을 누르지 못하고 그저 쳐다만 봤다.
알바 대타까지 하면 진짜 바쁘겠다!!!
옹성우가 보낸 몇개의 카톡 중 가장 마지막 말이었다. 옹성우의 연락을 차마 이유 없이 피하진 못하겠어서 바쁘다고 말했는데... 채팅창 목록 화면을 더 아래로 내렸다. '황민현' 이라는 이름이 저 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누를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엔 누르지 못했다.
" 오오~ 여주야, 여기서 뭐해? "
단과대 테라스에 앉아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승완이와 성운 오빠가 보였다. 성운 오빠는 한 살 많은 동기 오빠였는데, 승완이와 같은 전공 수업을 들어서 수업을 마치면 항상 같이 공강시간인 나를 찾아왔다. 특히 요즘 손승완은 더 하다. 하루종일 우울해보이는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다가도 그저 한숨만 푹푹 쉬는 나를 보고선 자기도 따라 한숨을 쉬곤 옆에서 옹성우, 그 자식이 문제야. 하곤 중얼거렸다. 평소보다 더 심란해보이는 내 곁을 손승완이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게 눈에 보여서 고마웠다. 성운 오빠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것 같긴 하지만.
" 한참 찾았잖아. 카톡도 안 보고. 테라스에서 궁상맞게 뭐해, 김여주. "
"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 "
" 으휴... "
" 여주, 무슨 일 있어? "
성운 오빠가 난데없이 물었다. 기분 안 좋아보이는데...? 성운 오빠가 나를 흘금보더니 다시 승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승완이가 고개를 내젓는게 보이고, 승완이가 내게 음료수캔을 건넸다. 이거 마시고 정신 좀 차려라. 이 기지배야. 승완이가 그렇게 말하며 내가 앉은 벤치 옆에 털썩 앉았다. 덩달아 성운 오빠도.
" 아, 맞다. 여주야. 너 광재 선배랑 팀플한다며? "
성운 오빠는 눈치가 빠르다. 일부러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화 화제를 돌리는게 아주 선수급이었다. 승완이와 성운 오빠의 배려에 고마워 애써 밝은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선배 가까이 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
성운 오빠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내가 들고 있던 음료수캔을 따서 제 것인 냥 마셨다. 어어, 오빠! 그거 왜 마셔요! 여주한테 주려고 사온건데! 승완이가 빽, 소리를 지르고 성운 오빠가 가볍게 무시했다. 어허헣, 나 목말라서. 내가 왜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두사람이 투닥거렸다. 물론 손승완 혼자 일방적으로 투덜댄거지만.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머릿 속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조별과제를 같이 하는 선배의 얘기까지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까.
" ...아... 오빠도 이 버스 타세요? "
" 응? 아...으응, 나 집에 일이 좀 생겨서 가는거라. "
양해를 구하고 카페에서 바리바리 가방을 싸고 나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같이 조별과제를 하는 12학번 선배, 성운 오빠가 말했던 광재라는 선배였다. 어쩌다보니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오게 됐는데, 이번에 또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다. 버스 안에는 사람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고, 뒷문쪽 봉을 잡고 서서 이어폰을 끼려고 하는데 그 선배가 내 옆으로 슥 다가왔다.
" 아... "
" 그 때 카톡에서 말했는데...나도 8시까지 가봐야한다고... "
" 제가 그 때 정신이 없어서 톡을 제대로 못 봤나봐요. "
내가 들으려고 뺐던 이어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같이 가는데 이어폰 꼽고 노래 듣고 가면 재수없는 후배라고 생각하겠지...? 딱히 그 선배도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괜히 흘끔흘끔 쳐다보는게 티가 나서 억지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 저기... 너 또 저번에 내린데서 내리지? "
" 네? ...네. "
" 아. 나도 거기서 내려서. 알바 대타간다고 했던가? 어디서 알바해? "
" ...집 근처 카페요. "
갑자기 우두두 쏟아지는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답을 하자 선배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쓸며 씩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 아...네. "
" 저기 그럼 내가 데려다 줄까? "
" 네? "
아뇨. 라고 말을 했어야했는데 너무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되물어버렸다. 그 선배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아아아, 그냥. 나는 가는 김에 커피도 한 잔 사먹을까 해서.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 ...아.. "
" 너도 혼자 가면 심심할거고... "
" 급한 일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집에... "
" 어... 커피 한 잔 마실 정도는 시간 돼서. 하하하... "
" ...네...그럼... "
찜찜했지만 그냥 알겠다고 해버렸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자꾸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옹성우와 황민현 때문인건지, 그냥 몰아치는 일상의 휴우증 같은 것인진 잘 모르겠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버스가 멈추고 나와 선배가 같이 내렸다. 내가 먼저 앞장서자 선배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내 표정이 좋지 않아보였는지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이 없이 카페까지 도착했을 때, 나는 표정을 더 굳힐 수 밖에 없었다.
" 왜 그래...? "
옆에 선 선배가 내 표정을 빤히 보다가 묻고는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는
" ...김여주. "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옹성우가 서있었다.
" ...저기... 여주야? "
선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선배가 움찔하더니 아... 음. 커피는 다음에 마실게. 하며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옹성우가 그제서야 내게 한걸음씩 다가왔다. 옹성우의 표정이 더 잘보였다. 잔뜩 인상을 쓰고있었다.
" 뭐야, 쟨. 저번에 버스 정류장에서 본 그 사람 아니야? "
옹성우가 턱짓으로 선배가 떠난 쪽을 가리키고 내가 말없이 옹성우만 쳐다봤다. 옹성우가 여기에 왜 와있는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저런 표정을 하고선.
" 넌 뭔데. "
" 뭐가? "
" 넌 뭐냐고. 넌 왜 여깄냐고. "
" 너 알바 대타한다며. "
" ...그러니까 내가 알바 대타를 하는데 네가 왜... "
"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러니까 "
" ... "
" 그냥 찾아왔지. 얼굴 보고 얘기하려고. "
" ... "
" 지금도 표정 봐. 무서워 죽겠네. 너 진짜 무슨 일 있는거지? "
옹성우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고서 내 얼굴을 요리조리 쳐다봤다. 내가 옹성우의 시선에 못 이겨 고개를 돌리자 옹성우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야, 김여주. 너 나한테 화난거 있냐? 옹성우가 물었다. 마치 고등학교 3학년, 그 때 그 버스정류장에서처럼. 대학 합격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지 않았음에 인상을 쓰고 물었던 것처럼.
" 없어. 비켜. 나 들어가야 돼. 시간 다 됐어. "
" ...나한테 화난거 있는거지, 너. "
옹성우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종소리가 들리고 어서오세요! 라는 밝은 지성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여주야!!! 지성오빠가 손을 흔들며 앞치마를 벗었다. 미안미안, 내가 오늘 학회 뒷풀이가 있어가지구 지금 빨리 가봐야 돼서. 뒷정리는 다 했으니까 바로 좀 부탁할게!!! 지성 오빠가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내 손에 앞치마를 쥐어주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내 뒤로 시선을 옮겨선
" 손님, 주문은 이 분한테 하세요~ 여주! 나 그럼 가본다. 안녕! "
뻣뻣이 서있는 옹성우에게 인사를 하고선 명랑하게 카페를 나섰다. 후우, 한숨을 쉬고 앞치마를 입었다. 카운터로 들어가 서있으니 가만히 서있던 옹성우가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 아까 간 알바생이 너한테 주문하라고 하네. "
" ...뭐 마실건데. 아이스 카페 라떼? "
참, 멍청하게도 물어봐놓고 나는 이미 포스 기계에 아이스 카페 라떼를 찍었다. 옹성우가 좋아하는 커피 취향까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가 참으로 멍청해보였다. 그만큼 옹성우가 깊게 스며들어 있었던겠지.
" 잘 아네. "
옹성우가 만족한다는 듯이 씩 웃었다. 됐어, 돈 안 줘도 돼. 내가 그렇게 말하곤 원두를 갈았다.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잔잔한 음악 소리도 들렸지만 어째서인지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 아, 나 샷은 하나만. 밤에 자야되니까... "
옹성우가 말을 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샷을 하나만 넣는 중이었다. 옹성우의 취향까지 이렇게 꿰뚫고 있는데, 의식적으로 옹성우의 연락을 피하려고 피해봤자 달라지는게 뭐가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테이크 아웃잔에 담긴 옹성우의 커피를 옹성우 앞에 내밀었다.
" 오늘은 여기서 다 마시고 가려고 했는데. "
" ...그러든지. "
" ...내가 왜 여기서 마시고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냐? "
옹성우가 다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몰라. 내가 짧게 말하곤 일부러 뒤로 돌아 선반을 닦았다. 옹성우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뭐가 그렇게 답답한데. 너는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 너 나한테 화난거 있는 것도 맞는 것 같고 무슨 일 있는 것도 맞는 것 같은데 "
" ... "
" 그거 들으려고 내가 여기까지 온거잖아. "
" ... "
" 안 말해줄거야, 진짜로? "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지마. 그렇게 부드럽게 말하지 말라고.
속에서 외친 말들이었다. 나때문에 일그러지는 얼굴이, 나때문에 다정해지는 말투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괴로웠다. 희망고문. 어쩌면, 혹시나 하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에 상처 받는 사람이 나인것을 알기에. 천성이 착한 너를 내가 또 오해하고, 너에게 상처받고, 너때문에 무너져내리는 내가 너무 싫으니까.
" ...에휴. 일단 오늘 손님도 없고 하니까 앉아서 마시고 간다. 돈은 여기. 이렇게 손님도 없는데 돈 안 받으면 사장님한테 짤려. "
옹성우가 조그맣게 투덜대며 카운터 근처 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선반을 더 열심히 닦았다. 옹성우의 시선 끝이 나인 걸 알고 있으니까. 옹성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옹성우는 어떤 생각으로 저런 말들을 뱉은걸까.
" 어서오세요. "
다행히 손님이 왔고, 나는 억지로 손님에게만 집중했다. 카페라떼를 마시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옹성우를 무시하고 싶었다.
" 주문하시겠어요? "
" 아, 저는... 자몽에이드요. "
자몽에이드. 갑자기 심장이 저릿해져왔다. 얼마 전,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힌 자몽에이드 잔이 생각났다. 황민현이 마시지도 않았던 그 자몽에이드.
" 저기요. 여기 카드요. "
" 네? 아, 죄송합니다. "
손님이 건넨 카드를 받아들고 결제를 하고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자몽에이드를 만드는 동안 황민현의 모습이 생각났다. 황민현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황민현은 내 생각을 이제 아예 하지 않을까? 황민현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그런 고백을 한걸까... 자몽에이드를 손님에게 건네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는 옹성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옹성우가 기다렸다는 듯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바보같이 그 웃음에, 그 표정에 조금은 설레는 내가 정말로 미웠다.
" 야, 옹. "
" 왜왜. "
옹성우는 불러주길 기다린 강아지 마냥 벌떡 일어서서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옹성우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하려 괜히 머리를 정리했다. 저기 있잖아. 내가 어렵게 말문을 열자 옹성우가 눈을 반짝였다. 왜왜, 뭔데.
" ...황민현 요즘 뭐해? "
" ...엥? "
옹성우가 내 질문을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 음. 옹성우가 무안한지 헛기침을 하고선 나를 쳐다봤다. 내가 옹성우를 흘끔 쳐다보자 옹성우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씩 웃었다.
" 아, 나 뭔지 알겠다. "
" ... "
" 너 민현이랑 무슨 일 있었지? 그래서 계속 기분 안 좋았던거지? "
" ... "
싸운건 아니겠지, 설마? 그럼 주선자가 곤란해지는데.
옹성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싸우긴 무슨. 내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자 옹성우가 흐음, 하고 턱을 매만졌다. 민현이 뭐.. 그냥 학교 다니고 그러지. 아, 근데 좀 묘하게 쌀쌀맞아졌어. 멍때리는 것 같기도 하고? 걔가 안 웃으면 좀 냉미남이지 않냐. 옹성우가 그렇게 말하고는 근데 왜? 정말로 무슨 일 있었던거야? 민현인 아무 말도 안하던데. 하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내 질문에 속절없이 답하는 옹성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미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제 그 순간에 내가 뱉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조금씩 접어가자고 그렇게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옹성우의 그 무심한 말에 띵한 기분이 들었다.
말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하고 무서워서 뱉어버리면 감당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내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정도의 배짱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옹성우에게 홧김에 물은 질문에, 그리고 당연히 예상한 그 답에 이렇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있으니까.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너 표정 안 좋은거 보니까 좀 마음이 그렇네. "
" ... "
" 그렇다고 나한테까지 그런 표정 짓지는마라. 오빠 상처 받는다. "
옹성우가 그렇게 말하곤 내 앞머리를 흐트렸다. 정신 좀 차리세요. 알바생아. 손님 왔네. 옹성우가 아직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인 손님을 눈짓으로 가리키고는 씩 웃었다. 커피 잘 마시고 간다. 정 그렇게 속 답답하면 술이나 한 잔 하든지. 황민현에 대한거라면 내가 다~ 알려줄게.
" ... "
" 나 간다. 김여주. "
옹성우가 내 눈 앞에서 손을 휘휘 젓고는 인사는 해줘야지. 하고 익살스럽게 웃었다. 아, 어... 잘가. 내가 옹성우에게 말을 하고 옹성우가 휘적휘적 걸으며 카페 문을 열었다. 손님이 들어왔고 옹성우는 나갔다. 어서오세요. 떨떠름한 목소리로 손님을 반기고 주문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온통 딴 곳에 정신이 팔린 내가 한심했다.
저기 민현아
아니다. 이건 아니다. 쓰던 말을 지우고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옹성우의 말이 걸렸다. 묘하게 쌀쌀 맞아진 황민현의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항상 예쁘게 웃어주던 황민현이라 차가운 모습을 보일거란 생각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민현아 잘 지내?
아. 이것도 아니다. 머리를 짚었다. 황민현에게 연락을 하는게 맞는걸까? 고백을 듣고도 다시 연락하면 그게 진짜 나쁜년이 아닐까? 그런데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어쩐지 조금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황민현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릿하다는게 제일 적절한 표현이었다. 자몽에이드를 보는데도 그 순간이 생각이 나고, 황민현의 연락을 기다리며 황민현과의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그랬으니.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연락을 하는건 어쩌면 민현이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민현아 오랜만이지
무슨 백만년만에 재회하냐. 결국엔 폰을 엎고 말았다. 황민현에게 뭐라고 보내고 싶은데 보내는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뭐라 말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가 결국엔 다시 휴대폰을 들고서 카톡앱을 눌렀다. 황민현의 그 고백에 아무런 답도 해줄 수 없었던 내가, 황민현의 그 고백에 차마 이름조차도 소리내 부를 수 없었던 내가 너무 한심해서 만회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만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두근거리고 이렇게 저릿한데...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황민현이 답을 해주지 않더라도, 황민현이 나에게 혹여나 욕을 한다더라도 한번쯤은, 딱 한번쯤은 솔직해보고 싶었다. 내 감정에. 황민현이 그랬던 것처럼. 황민현의 말에 용기를 얻어 옹성우에게 한번쯤 내 감정을 슬그머니 내비친 것처럼, 나도 황민현에게 딱 한번쯤은... 솔직해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토독토독, 키패드를 누르고야 만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러분 T^T 7편 초록글도 실화인가요...? (말잇못)
게다가 추천수도 무려 7개... 7편이라고 7개 주신거에요? 눙물...
진짜진짜 너무너무너무 감사드려요 ㅠㅠㅠㅠ
지난편에 하나하나 답글은 다 달아드리지 못했지만 읽고 정말정말 힘이 많이 됐답니다
암호닉은 8/29 23:59 까지로 마감이고...!
일부러 딱 맞춰서 글 올리려고 노력했슴다 ㅠㅠㅠㅠㅠ
점점 여주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시죠...?
곧 있으면 성우의 마음도 나오니까 어남옹 분들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ㅋㅋㅋㅋㅋ
어남황 분들도 !
암호닉 안 받습니다!!!!!
암호닉
호두 / 옹옹 / 요뎡 / 옵티머스 / 민트초코 / 콜국 / 푸름 / 빈럽 / 쩨아리 / 헬리코티카 / 꾸쮸뿌쮸 / 여름 / 루쇼 / 다녜리 / 뀨뀨 / 류제홍 / 포뇨 / 옹히 / 애플파이 / 여름동화 / 1111 / 밍밍♥ / 뚜기 / 두부 / 흰둥이 / 배배 / 갸똥이 / 윤윤이 / 충성황제 / 쥬쥬 / 옹기종기 / 즈쿠 / 0622 / 햄아 / 1232 / 김짼
님들 감사합니당!!!! 앞으로 열심히 달려요 슝슝
혹시 빠진 암호닉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들 개학, 개강 시즌이라 바쁘실텐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들 되세용 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