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미안해 (inst.) - 정준일
짝사랑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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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현이에게 어디냐는 카톡이 왔고, 나는 알바를 하는 중이라 말했다. 카페로 오겠다는 민현이의 말에 나는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여전히 펑키한 음악을 틀어 놓은 채 창밖에 내리는 비만 보고 있었다. 소나기인줄 알았는데 비가 꽤 왔다. 장마철도 아닌 것 같은데.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다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미처 다 버리지 못한 카페라떼가 담긴 아이스잔이 보였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멈칫했다. 카페라떼를 마시지도 않고 나가버린 옹성우의 말이 떠올랐다.
' 네가 황민현이랑 카페 앞에서 웃으면서 있었을 때 그 때도 화가 났어. '
옹성우가 왜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수도꼭지를 열고 컵을 헹궜다. 이상하게 이제 그런 쪽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많이 지쳐있었다. 내 6년이, 성우의 옆에서 성우의 옆자리를 바라왔던 그 6년이 내게는 많이도 힘들었나보다. 그리고 그걸 자각하게 해준 사람은... 황민현이었다. 컵을 헹구며 계속 민현이에 대한 생각을 했다.
민현이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그 고백을 듣고난 후로 처음 만나는건데 어떻게 대해야할까.
민현이는 혹시라도 내게 실망은 하지 않았을까.
언제 이렇게 황민현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운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옹성우의 말 한마디에 내 심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CLOSED '
설거지를 끝내놓고 카페 문에 'OPEN'이라 적혀있던 알림판을 뒤집어 놓고 앞치마를 풀었다. 12시 30분이 다 돼가는 시간. 의자를 하나하나 올리고 마감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민현이인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민현아, 하고 이름을 부르려는데...
" 어...안녕. "
박광재. 팀플을 같이 하는 12학번 선배였다. 선배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와서는 안경에 김이 서린 채로 날 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하자 그 선배가 머쓱하다는 듯이 우물쭈물거렸다.
" 커피... 마시려고 하는데. "
" ...아... 지금 마감시간이라서요. 머신도 다 꺼서... "
12시가 넘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잘 없다. 특히나 우리 동네에 가끔 새벽까지 공부를 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웬만큼 찾아오지도 않고. 내가 나머지 의자를 위로 올리고 카운터 쪽으로 가자 그 선배가 쭈뼛거리며 카운터 앞에 섰다.
" 지금 주문 받기는 힘들것 같은데... "
" 아...어... 그래? "
" 죄송해요. 근처에 24시 카페는 문 열려져 있으니까 그리로 가시면 될 것 같아요. "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선배는 갈 생각이 없는듯 계속해서 쭈뼛거리며 서있을 뿐이었다. 뭐지? 할 말이라도 있나? 내가 눈알을 굴리다가 뭐, 다른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하고 묻자 그 선배가 어어? 하며 흘러내린 안경을 올렸다.
" 그... 곧 집에 가는거야? "
" 네? 네. 이제 마감도 다 해서... "
" 우산은 있어? "
" 네? "
" 데려다 줄게. 집까지. "
" ...아...아뇨. 괜찮아요. 안 그러셔도 돼요. "
" 아냐... 밤에 위험한데 내가 데려다줄게. "
" 진짜 괜찮아요. "
내가 손사레까지 쳐가며 말했건만 선배는 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포스기를 종료하고 음악을 껐다. 툭. 펑키한 음악 소리가 꺼지자마자 적막이 찾아왔다.정확하게 말하면 빗소리만 들리는 고요함. 우웅. 그리고 그 적막을 깬건 내 휴대폰 진동소리였다. 카톡을 열자 십분 안에 도착한다는 민현이의 말이 보였다.
" ...저...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요. "
" 남자친구? "
" 네? "
"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한거야? "
" 아...아뇨. "
갑자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묻는 선배의 시선을 피하며 열쇠를 꺼냈다. 먼저 가보세요. 가게 문도 닫아야하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선배가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집에 갈 줄 알았더니 선배는 갈 생각이 없이 우산을 쓰고 서있었다. 왜 안 가지...? 내가 카페에 불을 끄고 가방을 챙겼다. 조심스럽게 문을 잠그며 옆에 있던 선배에게 안 가세요? 하고 묻자 선배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 남자인 친구가 데리러 오는거야? "
" ... "
저런걸 왜 묻지. 내가 미간을 좁히며 그런건 왜... 하고 묻자 선배가 갑자기 허, 하고 웃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불쾌한 기분이 올라왔다. 빨리 집에 갔으면 좋겠는데.
" 밤에 뭘 믿고 남자를 불러. "
" ...저기. "
" 남자친구도 아니라며. 남자친구도 없다며. 그럼 난 뭔데? "
" ...네? "
저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혼자 화가 난 듯이 날이 선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저 선배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까전의 어눌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선배가 말했다.
" 나한테는 왜 잘해준건데? 어장이니? "
" ... "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내가 언제 잘해줬다는건지. 내가 저 선배한테 한거라곤 고작 예의있게 대한 것 밖에 없는데. 설마 그 호의를 이상하게 받아들인건가?
" 저기 죄송한데요, 오빠. 저는 절대 그런 의도가 아ㄴ... "
" 얘기 좀 하자. "
그러더니 그 선배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았다. 순간, 정말 잠깐 얼굴이 기억도 나지 않던 열여섯살 때 만났던 그 현우라는 남자애가 생각났다. 소름이 돋았다. 내 손을 잡아 끌고 헤어지자던 말을 무시하던 그 애가 생각이 났다. 눈 앞이 아득해졌다. 내가 뭘 잘못했지? 머리가 웅웅 울렸다. 도망가고 싶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 손목을 잡고 얘기를 좀 하자는 이 사람이 너무나 무서웠다.
" ...저...저는...할 말 없어...요... "
내가 바들바들 떨며 손을 놓으려고 하는데 선배가 우산을 폈다. 집까지 데려다 주면서 얘기 좀 하자고. 그 선배가 아까보다 더 거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인줄 몰랐는데. 성운오빠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가까이 하지 않는게 좋을거라던. 무서웠다. 계속해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
황민현.
오기로 했는데. 십분 안에 오기로 했는데. 민현이가 생각이 났다. 빨리 왔으면. 빨리 달려왔으면. 선배가 내 손목을 여전히 잡은 채로 나를 앞장 세우려는 그 때였다.
" 김여주! "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 목소리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비를 맞으며 뛰어오고 있는 그 사람은.
" 뭐야... 쟤는 저번에... "
그 선배가 아, 씨발. 하고 욕을 중얼거렸다. 나를 부르던 사람이 내게로 다가와 숨을 가쁘게 몰아 쉬고는 선배가 잡은 손을 놓고는 자신의 등 뒤로 나를 숨겼다. 예전 그 때처럼. 열일곱살, 그 때처럼.
" 미친 새끼... 김여주한테 손끝하나도 건드려봐. "
성우였다.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닌, 언제나 기다려왔던 사람. 옹성우. 내 떨림을 옹성우도 느꼈는지 옹성우가 그 때처럼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선배와 옹성우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웅웅 울릴 뿐이었다.
짝사랑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 괜찮냐? "
카페 근처 공원 정자 안. 비는 계속해서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옹성우는 홀딱 젖었고, 나는 멀쩡했다. 옹성우는 내가 그 선배와 그러고 있는걸 보고선 쓰고 있던 우산을 내팽겨치고 달려왔다. 축축히 젖은 회색 후드집업이 옹성우의 다급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옹성우가 그 선배와 무어라 얘기를 하고 옹성우는 내팽겨놓은 우산을 들고와선 내게 씌워주었다. 비 맞으면 감기 걸린다. 김여주. 옹성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 진정 좀 되면 들어가자. 나도 옷 좀 말리고 싶고. 옹성우가 그렇게 말하며 내 대답을 듣지 않고 공원 정자로 향했다. 옹성우가 내게 따뜻한 캔커피를 건넸다. 언제 사온건지는 몰라도.
" ...응. "
내가 짧게 대답하고 캔커피를 꼭 쥐었다. 옹성우가 젖은 후드집업을 벗었고 머리를 털었다. 옹성우가 다시 왜 돌아온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걸 물을 겨를따위 남아있지 않았다. 아까 그 장면만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 어휴... 그 새끼 눈빛이 이상했다니까. "
옹성우가 자신이 사온 캔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추적추적 비는 내렸고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내리는 비를 보고 조금씩 아까 전의 공포에서 벗어나면서, 그제서야 황민현이 생각이 났다. 민현이가 오기로 했었는데. 민현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그 생각에 옹성우가 준 캔커피를 옆에 두고 허겁지겁 휴대폰을 찾았다. 한시 오분. 황민현에게서 부재중 전화와 카톡이 엄청나게 와있었다. 카톡을 누르자 카페 앞인데 어디있냐는 내용이 보였다. 민현이에게 미안했다. 계속 기다렸던 만남이었는데, 민현이가 온다고 해서 마감하는 내내 기다렸었는데 결국에는 이런 일 때문에 만나질 못했다. 민현이에게 미안했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를거라는 생각에 더. 내가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옹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 황민현이야? "
" ... "
" 민현이가 오기로 했었나보네. "
옹성우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응. 카페 마치고 잠깐 보기로 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는 바람에... 전화를 하려다 말고 카톡을 보냈다. 미안하다고. 사정이 있어서 말도 못하고 먼저 가게 됐다고. 대신 내일 보자고. 1이 바로 사라지고 답이 왔다. 응. 피곤하지? 얼른 쉬어. 내일 내가 연락할게. 그 말에 안도감이 들고 마음이 놓였다. 혹시라도 황민현이 상처라도 받아 외면할까봐 두려웠다. 민현이가 혹시라도 나에게 실망을 했을까봐 무서웠다. 조금 전, 민현이가 와주길 바랐던, 마음 속으로 간절히 황민현을 외쳤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 ...민현이 말고 내가 와서 미안. "
옹성우가 그렇게 말했다. 평소같았으면 장난기가 넘치게 말을 했을텐데 이상하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말에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 들었다. 옹성우. 늘 그토록 바라왔던 옹성우가 날 구해줬는데도 열일곱 그 때처럼 내 손을 꼭 잡아주었는데도 내 머릿속엔 온통,
" 성우야. "
황민현뿐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다급한 순간에서도 황민현을 떠올렸고, 황민현이 와주기를 바랐으며 지금 내 옆에 옹성우가 있음에도 온통 정신은 황민현에게로 쏠려있었다. 옹성우의 말 한마디에 머리가 띵 받힌 기분이 들었다. 아니, 사실 나는 그 전부터 황민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안에 가득차 있던 옹성우가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던거다. 차근차근. 옹성우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노력하면서도 놓지 못할 때, 황민현에 대한 내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그 순간부터인지 황민현의 고백을 들을 순간부터인건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금씩 스며든거다. 황민현이 나에게로.
" ...왜? "
옹성우는 평소와 다르게, 너무나도 다른 사람처럼 따뜻하게 대꾸했다. 왜? 옹성우의 젖은 머리에서 물이 조금씩 뚝뚝 떨어졌다. 내가 고개를 돌려 옹성우를 쳐다보았다. 옹성우의 저 모습이 이상하게 내 가슴에 박히지 않았다. 6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아프게 다가오지 않았다. 미미한 떨림. 옹성우의 그 모습에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미안함과 고마움이었다. 내가 처음 황민현에게 그랬던 것처럼. 황민현의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쁘다고 내게 말해주던 그 모습. 내게 용기를 주던 그 모습.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황민현처럼 솔직하게 옹성우에게 내 마음을 내비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라는 관계가, 특별한 친구인 우리가 남이 되어버릴까봐. 네가 나를 외면해버릴까봐 나는 옹성우에게 고백하지를 못했다. 그리고 민현이는 그런 겁많은 나에게, 그 관계를 깨어 버릴 용기도 없는 나에게 말했다. 그게 용기라고.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있다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따뜻한 말투와 따뜻한 언어로 나를 어루만져주었다. 민현이는 어떻게든 옹성우를 오랜시간 앓고 있는 나를 위로해주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난 민현이의 말에 더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짝사랑을 끝내는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상처를 내버린 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끝을 봐야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옹성우에게 물었다. 내가 황민현과 사귀면 너는 어떨 것 같냐고. 내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말한 질문에 장난스럽게 대답해주던 옹성우의 말에 나는 실망을 했다. 고작 그 짧은 한 문장에 나는 내 마음을 다 전했다고 생각하고.
' ...별로? 너 커플 되는걸 내가 어떻게 두고보냐? 난 솔론데. 막상 민현이랑 너랑 잘 된다고 생각하니까 좀 배아프긴 하네. 근데 이런걸 왜 물어? 너 설마... 황민현한테 고백 받았냐? '
황민현에 대한 내 감정이 확실해지고나서야 옹성우에 대한 내 마음이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감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더이상 성우의 말에, 성우의 표정 하나하나에 크게 일렁이지 않는 마음이었다. 나 스스로도 이상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6년동안 옹성우에게 반응해왔던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쩌면 황민현에 대한 생각이 차츰 늘어가면서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옹성우에게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물었던 질문에 답을 들은 그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지금. 황민현으로 내 마음이 가득 차있어서 그런걸까. 이상하게 용기가 생겨났다.
어쩌면 나는 지금 옹성우에 대한 짝사랑의 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6년간 지쳐있던, 한없이 옹성우 앞에서만 작아지던 김여주를 위로해줄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 고마워. 니가 와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
" ... "
" 니가 없었으면 또 혼자 떨었을거야. "
" ... "
" 정말 고마워. 와줘서. "
" ... "
" 그리고 있지. "
네 앞에서 담담하게 내 마음을 꺼낼 수가 있을까 늘 걱정하던 순간들이 있었다. 숱한 밤을 너를 생각하며 두근거리고, 아파하며 잠에 들던 순간들이 있었다. 네 앞에서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한심해지는 나를 나 자신조차도 외면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승완이에게 질책을 들으면서도 너를 놓지 못하고, 혹시나 어쩌면 하는 작은 희망고문에 나를 가둬놓고 네게서 허우적거리며 내 주위를 살피지 않았던 때가 있다. 내 세상의 중심이 너였던 때가, 내 일과의 끝이 너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 너한테 요즘 쌀쌀맞게 군거 진짜로 미안해. "
" 김여주... "
6년. 자그마치 6년이었다. 내 안에 온통 너로 가득찼던 시간들. 너라는 친구를 잃을까봐 친구라는 이름 안에 가둬놓았던 시간들. 내게 너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 네 잘못이 아닌데... 나 혼자 화가 나서 그랬어. "
" ... "
" 민현이 때문도 아니고, 너 때문도 아닌데 그냥 나 혼자 화가 나서... "
" ... "
그 시간들 동안 한없이 작아졌던 나, 김여주를 이제는 내가, 스스로가 위로해주고 싶었다. 황민현이 그런 것처럼 용기를 내서 전하고 싶었다. 네가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나의 마음을. 네가 받아주지 않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내 마음을.
" 있지, 성우야. "
옹.
옹청아.
야.
항상 이렇게만 불렀던 옹성우의 이름이었다. 성우야, 라고 따뜻하게 불러준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성우야, 하고 부르면 따뜻하게 부르는 내 말투와 눈빛에 네가 혹시 알아차릴까봐.
" 나는 널 단순하게 친구로 생각하질 않았었어. "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소나기가 아닌, 어쩌면 정말로 조금 이르게 시작한 장마인지도 몰랐다.
" 너한테 민현이랑 사귀면 기분 좋을 것 같냐고 물었었잖아. "
그리고 그 장마에 나는 알게 모르게 젖어가고 있었다.
" 나는 참 그럴 때만 소심해서 내 딴에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고 생각한 질문이었거든? "
소나기인줄 알았던 황민현이, 내게는 사실 장마였다.
" 근데 너한테는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들렸을지도 모를 질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어. "
" ... "
" 나 사실 엄청 용기내서 한 질문이었거든. "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옹성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할 말이 많은데 머릿 속에서 뒤죽박죽이 되는 것 같았다. 꾹 눌러담았던 6년의 시간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 민현이가 얼마 전에 고백을 했어. 사귀자거나 좋아한다거나 그런게 아니라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대. 그리고 그 때부터 눈에 들어왔었나봐. 만나보니까 더 마음에 들어왔고. "
" ... "
" 가끔 민현이를 보면 내가 생각이 났어. 민현이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꼭 내가.. "
주먹이 쥐어졌다. 민현이도 그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고백을 하면서 이렇게 떨렸을까?
" 너를 바라보는 눈빛 같아서. "
옹성우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옹성우의 마음은 어쩌면 민현이의 고백을 듣던 때의 나같지 않았을까.
" 근데... 참 신기한게 민현이랑 나랑 닮아서 그런건지, 아님 민현이의 고백이 나한테 너무 크게 다가온건지 그 순간부터 자꾸 민현이가 생각이 나고 그렇더라? 웃기지. 그 전까지는 사실... 민현이한테 크게 관심도 없었는데. 정말 홧김에 받은 소개팅이었거든. 네가 그 여자후배랑 잘 돼간다고 그래서. "
나는 너를 좋아했어. 성우야. 6년씩이나. 혼자서 앓아오며, 네가 알아주기를 바라다가도 몰랐으면 하는 모순적인 마음을 가지고서. 남들이 보면 답답하다고 손가락질을 할만한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말이야.
" 그리고 민현이가 되게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민현이는 알고 있었대. 내가 자기한테 마음이 없는걸. 다른 사람한테 마음이 있다는걸. 그래서 그 고백을 듣고나서 너한테 물은거야. 내 딴엔 용기있는 질문으로 내가 민현이랑 사귀면 넌 어떨 것 같냐고. "
" 김여주. "
옹성우가 나를 쳐다보았다. 옹성우의 눈에 가로등 불빛이 비쳐 반짝거렸다. 저 반짝거리던 눈을 보며 혼자 설렜던 적이 몇 번이었을까. 과거형으로 말하는 내가 참으로 신기했다.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옹성우를 바랐던 사람이란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민현을 보면서도 너를 떠올렸던 때가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너를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 시간들이 마치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질 정도로.
" 그래서 혼자 화내고 실망한거야. 바보같이. "
" ...여주야. "
" 그런데 있지, 너한테 실망을 하다가도 문득 민현이 생각이 나더라. "
황민현. 황민현이 너무 크게 들어와서. 언제 그렇게 크게 내 마음에 자리를 잡은건지 모를 정도로 크게 들어와서. 민현이의 모습에서 내가 비쳐보이고, 민현이의 따뜻한 말과 표정에 너를 가끔씩 잊어가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나서.
" 웃기지. 내가 너한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지게 된지 생각보다 꽤 오래됐는데, 알게 된지 얼마 안된 황민현이 이렇게 큰 존재로 다가와서 날 헤집어 놓는게. "
옹성우가 날 부르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괜찮다는 말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네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희한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했다. 아까 전 그런 일을 당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분했다.
" 나 민현이 좋아해, 성우야. "
" ... "
" 그런데 옛날에 너한테 이런 마음이 있었다고 얘기를 하는건, 내가 너무 짠해서. "
" ... "
" 한번도 제대로 표현 못해본 내 마음이 불쌍해서. 아, 걱정은 하지말고. 나 너랑 평생 볼 자신 있어. "
내가 그렇게 말하고 옹성우가 준 캔커피를 땄다. 이미 식어서 미적지근해진 캔이었지만 괜찮았다.
" 좋아했어. 옹성우. "
" ... "
" 그리고 고마워. 오늘 일도 그렇고, 나랑 친구해준 것도 그렇고, 민현이 소개해준 것도 그렇고. "
" ...여주야. "
" 괜히 너 혼란스럽게 했으면 미안. 그런데 진짜로 말하고 싶었어. 한 번이라도 제대로. "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홀가분했다. 이 와중에도 황민현이 생각이났다. 한입도 마시지 않은 자몽에이드를 눈 앞에 두고선 빨개진 귀로 담담하게 말하는 황민현. 보고싶었다. 겁쟁이 김여주의 짝사랑을 위로해준 황민현을, 겁쟁이 김여주의 6년간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게해준 황민현을 보고싶었다.
" 김여주, 너... "
" ... "
" ...황민현이랑 오래오래 가야된다? "
옹성우가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황민현이 나타날 때까지 좀 더 있을 걸 그랬나. 옹성우가 더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을 놀리지도 않았고, 못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옹성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우산을 폈다. 가자. 늦었다.
" ...응. 들어줘서 고맙네. "
" ...민현이랑 사겨도 나 버리지 말고. "
" 아까 한 말 못 들었어? 평생 볼 자신 있다니까. "
" 그래야지. 우리가 뭐 보통 인연이냐? "
옹성우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빨리 가자. 아저씨 걱정하실라. 옹성우가 자연스럽게 민현이로 주제를 돌렸다. 야, 근데 민현이... 걔도 맘 고생 장난 아니었을거다. 그래서 요즘 냉랭했구만? 진짜? 그랬어? 민현이... 기분 많이 안 좋아보였어? 와, 야. 근데 나 좀 섭섭할라그래. 넌 내가 너때문에 발 동동 구른건 생각도 안나지? 황민현, 황민현 타령만 하고. 아니... 민현이 못 본지 좀 됐으니까...
짝사랑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김여주. 넌 진짜 배울게 많은 친구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도 느낀건데,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게다가 이제는 내가 감히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일을 하냐, 어떻게 너는. 아. 내가 왜 다시 카페로 갔냐고? 내가 그랬잖아. 네가 황민현이랑 웃고 있을 때, 화가 났다고. 그 말 해명하려고 간거였어. 그것도 혼자 버스정류장에서 아, 다시 갈까말까 고민하면서. 진짜 웃기지.
" 아... 미치겠네... "
진짜 장난 안 치고 거의 한시간은 혼자서 그러고 있었어. 그러다가 결국엔 해명 아닌 해명을 하려고 막차를 탔고, 내리자마자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내려고 편의점에가서 뜨거운 캔커피도 샀어. 이렇게 보니까 진짜 혼자 바보 같은 짓 했다. 그지? 너는 이미 내 그 말에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을텐데. 그러다가 카페 앞에서 그 장면을 본거야. 그 쓰레기 새끼가 네 손목 잡고 끌고 가려는거. 눈 앞에서 뭐가 확 도는 것 같더라. 열일곱살 때, 네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내가 아니까 우산이고 뭐고 다 버리고 뛰어갔어.
" 미친 새끼... 김여주한테 손끝하나도 건드려봐. "
네 손을 꼭 잡았어. 역시나 넌 덜덜 떨고있더라. 너한테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건지. 내 눈앞에 이 미친새끼를 한 대 치고 싶었는데 억지로 참았어. 그 새끼가 잔뜩 쫄아서 날 보고 뭐냐는데, 그럼 넌 뭐냐고 물으니까 네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그러더라. 이건 또 무슨 병신같은 상황인지.
" 꺼져. 김여주 앞에서 알짱거리지말고. "
" 댁이 뭔데? 참나... 고작 친구주제에... "
고작 친구.
저 사람 말이 맞아서 나는 딱히 반박을 할 수가 없었어. 예전처럼 네 남자친구라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안 나오더라. 결국에는 내가 신고할거라고 하니까 당황하면서 도망가더라. 저 미친새끼.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왔으면 어쩔 뻔 했나 싶어서 그 사람이 가자마자 널 보는데 너는 겁에 잔뜩 질려있더라. 안쓰러웠어. 혹시라도 그 때 그 트라우마가 다시 생각나면 어쩌나 싶어서 조마조마하고.
" 괜찮아? 김여주, 괜찮은거야? "
너를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네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더라. 확실했으니까. 여느 때처럼 애매한 감정이 아니라, 확실한 감정이었으니까. 너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나조차도 주체가 안 될 것 같아서 억지로 참았어. 앞으로 더 꼭꼭 숨기면서 네 옆에 있어야겠다, 네가 알지 못하게 더 꼭꼭 숨기면서... 그리고 네가 민현이에게서 온 듯한 카톡을 확인하며 심각해보일 때 그 마음을 먹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캔커피를 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려고 했어. 내가 아까 그런 말을 뱉었던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그냥 친한 친구 두명이 그러고 있으니까 내가 질투가 난 것 같다고. 혼자 속으로 말을 정리하는데 네가 나를 불렀어.
" 고마워. 니가 와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니가 없었으면 또 혼자 덜덜 떨었을거야. 정말 고마워. 와줘서. 그리고 있지. "
네가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어.
" 너한테 요즘 쌀쌀맞게 군거 진짜로 미안해. "
" 김여주... "
" 네 잘못이 아닌데... 나 혼자 화가나서 그랬어. "
" ... "
" 민현이 때문도 아니고, 너 때문도 아닌데 그냥 나 혼자 화가나서... "
" ... "
" 있지, 성우야. "
김여주.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말을 하고 싶었는데, 김여주는 말을 이었다. 혼자 화가 났다고. 도대체 뭐가 널 화나게 만들었을까. 단 한번도 네가 그랬던걸 나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 나는 널 단순하게 친구로 생각하질 않았었어. "
그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멍청한 내게 김여주가 말했다. 날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다가도 무서웠다. 우리가 만약 연인이 된다면, 그래서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면.
" 너한테 민현이랑 사귀면 기분 좋을 것 같냐고 물었었잖아. 나는 있지. 참 그럴 때만 소심해서 내 딴에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고 생각한 질문이었거든? "
그랬었다. 바보같이 멍청한 나는 그 질문에 장난스럽게 대답을 했다. 김여주가 그런 마음일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차라리 그 때 너에게 솔직히 말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용기를 조금만 냈더라면, 너를 잃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내 진심을 말했다면 지금 우리가 앉은 이 간격이 몇 뼘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 근데 너한테는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들렸을지도 모를 질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어. 나 사실 엄청 용기내서 한 질문이었거든. "
그리고 김여주는 그 질문의 의도를 캐치하지 못한 내가 아닌 자신을 질책했다. 자신의 탓이라고. 그 질문이 그렇게 들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 민현이가 얼마 전에 고백을 했어. 사귀자거나 좋아한다거나 그런게 아니라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대. 그리고 그 때부터 눈에 들어왔었나봐. 만나보니까 더 마음에 들어왔고. 가끔 민현이를 보면 내가 생각이 났어. 민현이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꼭 내가.. "
김여주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주저하더니 한참을 있다가 말을 이었다.
" 너를 바라보는 눈빛 같아서. "
고개를 숙여버렸다. 김여주가 나를 좋아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버렸다. 마음이 이상했다.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너를 좋아하면서도 억지로 마음을 억누르려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네가 내게 애매하게 굴지 말라고 했던 때가 떠올랐다. 좋으면 사귀는거고 싫으면 아닌거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걸 그랬다. 너에게도, 복잡하게 얽힌 우리의 관계에 그냥 그 간단한 공식을 적용할걸 그랬다.
" 근데... 참 신기한게 민현이랑 나랑 닮아서 그런건지, 아님 민현이의 고백이 나한테 너무 크게 다가온건지 그 순간부터 자꾸 민현이가 생각이 나고 그렇더라? 웃기지. 그 전까지는 사실... 민현이한테 크게 관심도 없었는데. 정말 홧김에 받은 소개팅이었거든. 네가 그 여자후배랑 잘 돼간다고 그래서. "
홧김에, 라는 단어가 아프게 박힌다. 내가 신이 나서 말했던 얘기, 사실 그 후배도 너와 비슷한 성격이어서 눈에 들어왔던건데. 나는 멍청하게 내 감정을 늦게 깨닫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니게 애매한 위치에 서있다가 이제서야 너를 이렇게 좋아하게 되어버렸는걸.
" 그리고 민현이가 되게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민현이는 알고 있었대. 내가 자기한테 마음이 없는걸. 다른 사람한테 마음이 있다는걸. 그래서 그 고백을 듣고나서 너한테 물은거야. 내 딴엔 용기있는 질문으로 내가 민현이랑 사귀면 넌 어떨 것 같냐고. "
" 김여주. "
황민현은 참 멋있는 놈이다. 너무 멋있어서 내가 비참할 정도로. 네 이름을 불렀는데 너는 특별한 반응이 없이 말을 이었어. 네 눈빛에서, 네 표정에서 느껴졌어. 늘 괜찮다 말하면서도 괜찮지 않았던 네가, 늘 힘들 때마다 강한 척 하던 너는 표정에서 다 느껴졌는데... 지금은 확실히 알 것 같아. 네 표정이 말해주고 있어. 네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걸. 멍청한 나도 알 수 있을만큼 확실하게. 6년이나 너를 알아온 내가 오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 그래서 혼자 화내고 실망한거야. 바보같이. "
" ...여주야. "
바보같은 내가 원망스러워서, 너의 말을 멈추고 싶었어. 그렇게라도 듣고 싶지가 않았어. 내 마음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서.
" 그런데 말이야, 너한테 실망을 하다가도 문득 민현이 생각이 나더라. 웃기지. 내가 너한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지게 된지 생각보다 꽤 오래됐는데, 알게 된지 얼마 안된 황민현이 이렇게 큰 존재로 다가와서 날 헤집어 놓는게.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황민현이랑 같이 있는걸 보고 화를 냈다고 말했던 내 모습을 너는 지금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까? 아닌 것 같았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어. 네 마음에는 이미 민현이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내가 소개해준, 내 절친 황민현.
" 나 민현이 좋아해, 성우야. "
결국엔 듣고야 말았다. 황민현에 대한 너의 마음을.
" 그런데 옛날에 너한테 이런 마음이 있었다고 얘기를 하는건, 내가 너무 짠해서. 한번도 제대로 표현 못해본 내 마음이 불쌍해서. 아, 걱정은 하지말고. 나 너랑 평생 볼 자신 있어. "
얼마나 오랜 시간을 좋아한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네 마음의 크기가 어느정도였는지는 짐작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지를 않기 바라는 것 같았다, 너는. 나는 이제 확실히 네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질 알았고, 더 이상 나의 말 하나에, 행동 하나에 너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 좋아했어. 옹성우. "
좋아했다고 말하는 너는 너무 평온해보여서,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황민현을 보고 있는 너에게 지금 내가 사실은 너를 좋아한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네 마음도 나처럼 이렇게 설레고 떨리고 아팠을 때가 있었을까?
" 그리고 고마워. 오늘 일도 그렇고, 나랑 친구해준 것도 그렇고, 민현이 소개해준 것도 그렇고. "
" ...여주야. "
" 괜히 너 혼란스럽게 했으면 미안. 그런데 진짜로 말하고 싶었어. 한 번이라도 제대로. "
섭섭하게도 너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마치 제 3자가 얘기를 하는 것처럼 홀가분해보였다. 그리고 그 말에 나는 마음을 먹었던대로 짝사랑을 포기하려고 한다. 아니, 사실은 포기가 되지 않겠지만 그래보려 노력이나 해보려 한다.
" 김여주, 너... "
" ... "
" ...황민현이랑 오래오래 가야된다? "
진심이었다. 완벽한 진심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그러길 바랐다. 나를 얼마나 좋아했던간에, 얼마만큼이나 좋아했던간에 나에게 소중한 친구였던, 그리고 앞으로도 소중한 친구일 네가 정말로 행복해졌으면 해서. 너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 하겠지만, 깨달은지 얼마 되지 않은 이 감정을 다시 숨겨야겠지만 언젠가 내 감정이 차차 식을 때, 네가 웃는걸 보고 싶으니까. 네가 크게 웃는 걸 항상 보고 싶어했던 나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너희가 잘 되는걸 보기가 괴로울 것 같다.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너희를 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황민현도 너도 좋은 사람이란거 나는 잘 아니까. 나를 좋아했던 시간이 많이 지치고 힘들었다는 너를 위로해준게 황민현이니까. 민현이가 힘들어했던 너를 벗어나게 해줬으니까... 민현이가 참 부럽다.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너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저 너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짝사랑을 시작할 엄두도 내지 않았는데 민현이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너를 알면서도 짝사랑을 시작했으니까. 민현이의 용기가, 민현이의 강함이 나는 부럽다. 그래서, 그래서 황민현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괴롭더라도, 너희의 행복을 바라줄 수는 있다.
대신 나는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너를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앓다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에 너를 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대해볼게.
항상 좋은 친구로 남아줄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짝사랑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 다 말했어. 옹성우한테. "
[ 대박이다... 김여주,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거야? ]
새벽 3시. 아직 자고 있지 않다는 승완이의 카톡에 전화를 걸어 조금 전의 이야기를 하자 승완이가 계속해서 와.. 하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 진짜로. 김여주가 웬일이래, 옹성우한테 고백을 다하고...
" 그러게. 나도 좀 놀랐어. 거기서 그런 말 할 줄 알았겠냐. 게다가 좋아했다고 말한건데. "
그럼, 황민현은?
승완이가 빠르게 물었다. 내가 옹성우한테 용기를 내서 말할 수 있었던게 누구 덕인데. 내가 그렇게 답하자 승완이가 이게 진짜 무슨 일이라냐... 하며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놀랄만했다. 승완이 앞에서는 언제나 옹성우 얘기에 한없이 작아졌었으니까. 언젠가는 옹성우가 내 발목을 잡을거라며 그렇게 말했었는데.
[ 여튼 대견하다, 김여주. 내 친구지만 진짜 멋있어. 짱짱. 완전 둔탱이에 답답이인줄 알았는데... ]
" 뭘... 어쨌든 그렇게 됐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네가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서. "
[ 나까지 홀가분하다. 진짜로. ]
승완이와 전화 통화를 간단하게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눕자 베란다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더 잘 들렸다. 소나기가 아닌 장마였다. 황민현이라는 소나기가 스쳐지나가고 다시 옹성우라는 태양이 떠오를 것만 같았던 때가 있었다. 옹성우 생각을 하면서도 황민현이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고, 잃고 싶지 않은 감정이 들던 때가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이 차르르 지나가고 황민현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황민현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황민현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고맙다고, 네 덕에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그리고... 좋아한다고. 나를 먼저 좋아해줘서, 나의 뒤에서 나를 항상 묵묵히 지켜봐왔던 시간들을 내게 솔직하게 말해줘서.
[ 잘자 내일 황민현 잘 만나고 ]
우웅, 진동이 울리고 카톡이 왔다. 옹청이라고 적힌 이름에게서 온 카톡.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옹성우를 홀가분하게 대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이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답장을 할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지난 날들의 나의 고백을 들으며 아무렇지 않게 여겨주는 너에게, 나의 고백을 장난스럽게 넘기지 않은 성우에게... 고마웠다.
옹성우는 내게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아, 남자나 이성 그런 관계로 말고 정말로 고마운 친구. 6년의 시간동안 힘들었지만 옹성우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옹성우에게 나도 그런 존재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 간만의 편안한 밤이었다.
짝사랑을 끝낸, 내 6년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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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죄송해요 ㅠㅠ 빨리 온다고 그래놓고... 결국엔 또 늦게 온 저란 사람... 또륵...,,,,,,
암호닉은 공지로 정리해서 띄울게요 ㅠㅠ!! 제가 바빠서 글만 올리고 후다닥 가야될 것 같슴니당 8ㅅ8
댓글 정말 하나하나 너무 잘 읽고 있어요 제 맘을 울리는 댓글도 있는거 아시나요..?
그리고 저번편.. 유효댓글수도 60개가 넘고 추천도 19개에... 암호닉도 다들 너무 많이 신청해주셔서 ㅠㅠㅠㅠㅠ
진짜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게다가 초록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진짜 정말 완전 대박 리얼 완전 헐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암호닉 최종확인 공지 따로 띄울테니까 신청해주신 분들은 그때 확인해주세요 ㅠㅠ!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ㅠㅠㅠㅠㅠ 12편은 빨리 돌아오도록 할게요
아 그리고 이제 진짜 여주의 남자가 결정이 났습니다
저 진짜 어남옹 외치셨던 분들께 죄송해요
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
복잡한 여주의 마음을 따라가려고 ㅠㅠ 짝사랑 하는 사람의 시점에서 쓰다보니 본의 아니게 남주가 이제서야 드러나게 됐습ㄴ디ㅏ..
무조건 여주의 편을 들고 싶은 작가 맴....,,,,
저 성우 좋아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성우야 미안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 정말로 처음부터 민현이를 생각하고있었어여... 여러분이 못 믿으실 수도 있겠지만 ㅠㅠ
( 일부러 11편 메인만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민현이와 성우 투샷이 아닌 성우만 올렷슴니당.... 혹시
헐 메인 성우니까 성우가 남주!?!? 하셨던 분들 진짜 죄송해요 ㅠㅠㅠㅠ )
바빠서 주저리는 이까지 하겠습니다!
언제나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추천 눌러주시고 신알신 해주시는 착한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완결까지 열심히 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