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 HERO
(부제: amore, 친구들.)
그 날 이후로 나는 백현이랑 꽤 친해졌다.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는가 하면, 주말에 밥 먹었냐는 안부 문자를 보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잠을 자면 꿈을 잘 꾸지 못하는 나의 꿈에는 어느 순간부터 백현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매일 밤 기도가 ‘백현과 친해지게 해 주세요’ 가 아닌, ‘백현이 저를 조금이라도 좋아하게 해 주세요.’로 바뀌었다. 백현은 나에게 친절했다. 말투부터 배어 나오는 상냥함과 친절함은 세상 그 어떠한 것보다도 따뜻했고, 두근거렸으며, 다정했다.
“나 피아노 진짜 못 쳐.”
“그니까, 어느 정도인지를알아야 할 거 아니야, 바이엘도 안 뗐어?”
음악 수행평가 때문에 점심시간에 음악실에 온 백현과 나는 서로 먼저 쳐 보라며 다투었다. 나야 피아노 잘 치는 건 백현이 아는 사실이었고, 또 못 친다는백현의 실력을 확인하려는 것뿐인데도 백현은 주춤거리며 진짜 쳐? 진짜 쳐? 하며 내게 망설임의 물음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해보라며 백현을 재촉했고, 내 말에 백현은 못이긴 척 피아노 의자에 앉아 뜸을 들이다가 피아노를 치기시작했다. 처음엔 도, 레,미. 가볍게 손으로 눌러보던 백현은 능숙하게 선율을 부드럽게 이어가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나는 그런 백현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못 친다며. 하는내 말에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손가락을 놀린다. 백현의 다재다능 함은 대체 어디까지 일까. 절로 나오는 감탄에 입이 벌어졌다. 예쁜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백현의 모습이 더욱 빛나 보인다. 백현이 지금 치고 있는 것은 쇼팽의 녹턴 3번이었다. 그것은 중학교 3학년즈음이던가, 음악실이 비면 내가 자주 치곤 했던 곡이었는데, 백현이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블라인드 새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나는 백현을, 백현은 피아노 건반을 바라보며 집중했다. 녹턴의 특징은 아름다운꿈의 선율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백현은 그것을 완벽히 살려냈다. 아름다운 선율, 그리고 고운 손 마디 마디, 살짝 돌릴 때 마다 흔들리는 머릿결.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말 해주면 믿을 정도로. 피아노를치는 백현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뜨겁지만 빛으로 가득한 여름날의 태양 같다고. 백현은 곡을 중반까지만 치다 멈췄다. 피아노에서 손을 뗀 뒤에 백현은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못 친다며. 정말잘 치는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응.”
“피아노를 정말 예쁘게 잘 치는 사람이 있어.”
“응.”
“그 사람 따라 갈려면 아직인 것 같은데?”
백현의 말에 나는 뒤늦게야 누군데? 하고 물었다. 그게 과연 여자일까.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호기심에 고개를휘휘 저었다. 백현은 대답 해 줄 생각이 없는 건지 제가 앉은 피아노 의자 옆 자리를 툭툭 치며 웃었고나는 조심스레 백현의 옆에 앉았다. 백현은 교실에서 내려올 때 가지고 온 무엇인지 모를 종이뭉치를 피며내게 보여주었고, 나는 그걸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 것또한 중학교 3학년 때 많이 쳤던 곡이었다. 손에 익을 정도로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반가운 우연이었다. 나는 백현에게물었다.
“이 곡 좋아해?”
백현은 내 말에 한참 동안 악보를 주시하다 말했다.
“원랜 아니었는데,”
“응.”
“어느 순간부터 좋아졌어.”
설핏 웃던 백현에게 물었다.
“그렇구나. 이걸로연습하게?”
“응, 네가 잘하니까나는 반주할게, 네가 주선율 쳐.”
나는 백현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가 앉았고, 백현 역시 내 쪽으로조금 더 붙어 앉았다. 건반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누르기 시작했다.예상 외의 호흡이었다. 연탄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둘이서 잘 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의외로 백현과 나의 호흡은 훌륭했다. 차근차근 걸음마떼는 아기들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며 건반을 누르던 우리는 어느새 피아노의 선율을 부드럽게 이어 가고 있었고, 두번째로 완곡을 끝내고선 백현이 입을 열었다.
“amore.”
“응?”
“학원 선생님께 배웠는데.”
“응.”
“악보에서, 애정을 가지고 사랑스럽게 연주하라는 말이래.”
애정을 가지고 사랑스럽게. 나는 백현의 말을 내내 곱씹었다. 지금 치고 있는 곡과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SUPER HERO
변백현의 무리. 애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잘 생기고 재미 있는 걸로. 여자애들쯤으로 치자면 수지네 무리랑비슷했다. 변백현은 학교에 있는 시간 내내 자기 무리 아니면 나랑만 붙어있다시피 했고, 그 덕분에 나도 변백현의 친구들과 말도 한번씩 섞어 봤다.
“변백현, 얘 오늘도꾸벅꾸벅 조는데? 또 수면 뭐시기 온 거 아니야?”
“가만 냅둬.”
“ㅇㅇㅇ, 졸리면좀 자.”
그 중에서도 박찬열과 루한이라는 애는 제일 상냥했다. 다들 옆에서가만히 있으면 나를 신경 쓰는 축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신경이라도 써주는 정도. 어차피 내가 버티려고 해도 결국엔 잠든다는 것을 안 후에도 찬열과 루한은 염려스러운 투로 걱정을 해 주었다. 특히 중국계 한국인인 루한은 가끔 가다 한국말이 어눌하게 발음 될 때도 있었는데, 말을 아끼다가도 나에게는 자주 말을 걸어주려고노력하는 편인 것 같았다. 나랑 꽤나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노력했다. 백현의 친구들과 되도록이면 친해지려고. 친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행복한 기분이 늘 지속됐다. 평화로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약을 안 먹고 온 날에는 항상 장시간 잠을 잤다. 안 그런 날도있긴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백현이 친해지기 전 보다 편해진 뒤로 수면발작을 일으키는 날이 더 늘어났던것 같았다. 어떤 날은 잠이 들어서 아침도 점심도 못 먹고 홀로 교실 안에 남은 날이 있었다. 자고 난 뒤의 기분은 항상 개운하지만, 그 날은 혼자라는 사실에유독 어딘가 찜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턱을 괴고 텅 빈 교실에서 멍을 때리고 있는데, 복도 어딘가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교실 문을 크게 열고 닫으며 들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변백현과 그의 친구들이었고, 뒤 따라 들어온 여자애들은 모두 수지의친구들과 수지였다. 그들이 서로서로 친한 탓에 전혀 나 때문에 온 것이리라는 생각도 못했는데, 검은 봉투가 백현의 손으로부터 내 책상에 툭. 하고 떨어지고 나서야알았다. 다들 저들끼리 시끌시끌 떠들고 있는 것 같았어도, 나를위해 와 준 거였다. 교실에 혼자 남아 있을 나를 위해. 수지친구 중 정수정이란 아이는 날 향해 말했다.
“앞으론 약 꼬박꼬박 챙겨 먹고 다녀, 바보야. 많이 잤어?”
수정의 말에 조용히 흘러가던 내면의 바다가 확 일렁였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나는 거기서 울었다. 차마 소리 내어 울진못하고 한참을 엎드려서 울었다. 친구들이 생겼다. 이젠 수지한 명, 변백현 까지 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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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엘때도 대충 다니던 피아노학원이었는데… 제가 얘네 때문에피아노 공부를 다시 했네요…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