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 오세훈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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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때 부터 부모님을 여의고 태운 그룹 후원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 때 당시에는 재단 봉사랍시고 보육원에 태운의 사모님과 그의 아들이 오면 항상 고개 숙여 꾸벅 인사하는 게 보육원 아이들에겐 철칙같은 것 이었는데, 어느 날은 태운의 아들이, 흑갈색 머리에 예쁜 쌔 까만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 흙으로 모래성을 쌓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났다. 털썩 주저 앉아서는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게 안녕. 하고 건넨 인삿말의 나직한 음성이 내 뇌리에 진득하게 배어 있다.
"응, 안녕."
뭣도 모르던 순수한 여섯 살 소녀는 열 다섯의 소년이 함께 모래성을 쌓아준다며 제가 쌓은 모래성 위에 모래를 얹는 것에 들떠 해맑게 웃었다. 구김 없이 잘 다려진 맵시 좋은 오부 정장 바지, 흑갈색으로 맨 멜빵, 새하얀 셔츠. 걸치고 있는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목걸이. 뭣도 모르는 여섯 살 소녀는 그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소년이 재단 사모님과 함께 온 아들이라는 것을. 소년은 소녀를 끔찍이도 귀여워 했다. 마치 제 친동생이라도 된다는 마냥. 형제 하나 없는 소년에겐 보육원에서 제일 어린 소녀가 귀여워 보일 것은 당연 했다. 꼼지락 꼼지락 거리는 고사리 같은 손을 붙들고 소년이 말했다.
"오빠 자주 놀러 올게. ㅇㅇ아. 다음에 올 때는 편식 하면 안돼."
소년은 듬성 듬성 귀찮다며 빠지던 보육원 봉사를 매일같이 나갔다. 제 친동생같은 아이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가엾고 안쓰러운 그 아이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건 저뿐이라고 생각했다. 열 다섯.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제법 어른스러운 의젓함이 묻어나는 이유였다.
"나는 나중에 세훈 오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 하고 싶어."
"응? 왜?"
"오빠 돈 많지? 부자 잖아. 돈도 많고 착하니까! 부자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야."
소년은 아이의 말에 픽 웃었다.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아이의 대답이었다. 인기척이 들린 뒤에는 소년의 어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소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오빠 다음 주에 올 게. 그 말을 끝으로 아이는 소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여섯 살 아이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소년을 하루 종일 찾으며 울었다.
악덕 오세훈 사장님
사회 생활은 언제나 고단하다. 공장일을 마치고 온 나는 기름과 먼지 냄새 잔뜩 배인 작업복을 빨래통에 넣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고아란 이유로 천대받고 살았는데, 또 보육원을 나와 취업을 하자니 변변한 대학 하나 못 나왔다고 받아 주는 곳이 없다. 어떻게 된게 내 인생은 이 모양 이 꼴 인지. 벼룩시장을 뒤지고 뒤져 겨우 찾은 곳이 이 공장일 하나였고, 얼른 보육원에서 나가고 싶었던 내겐 빨리 취업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배란다 너머로 우뚝 솟아 있는 높은 고층 건물을 바라 보았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달 보다도 더욱 탐나는 빛은 저 곳의 가지각색의 조명들이었다. 태운그룹…. 이 스펙으론 어림도 없지. 나는 한숨을 쉬고 냉장고를 열었다. 오랜만에 캔맥주나 까 마실까 했는데 그것 마저도 내겐 허락이 안되나보다. 대충 옷을 갈아 입고 현관을 나섰다.
캔맥주 몇 캔과 말린 안주 몇 개를 사들고 집으로 가는 언덕을 밟았다. 캔을 열어 맥주를 홀짝이며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어 죽일 듯 한 추위와 오르막길을 오르는 힘든 느낌이 싫어 냅다 뛰어 갔다. 달빛에 역광으로 검게 실루엣이 비친다. 나는 그 검은 실루엣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콸콸 쏟아지는 캔맥주는 부딪힌 상대의 옷과 구두에 축축이 젖고 있었고, 나는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비싸 보이는 세련된 검은 수트. 금빛으로 반짝이는 넥타이 핀. 얼추 보아도 비싸 보이는 악어 가죽의 재질로 된 구두. 깔끔하게 쓸어 넘긴 포마드 머리. 쭉 훑는데 몇 분은 간 것만 같았다. 남자는 아무 표정도 없이 자신의 셔츠에 묻은 맥주를 털어 낼 뿐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못 봤어요. 제가 세탁비 드릴게요!"
"세탁비요?"
"네…."
"그 쪽 여기 살아요?"
"예… 그런데요…?"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기분 나쁜 비소가 내 심기를 툭툭 건들였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거 세탁비 줄려면 댁 6년 정도 숨도 안쉬고 일 해야 할텐데."
"예...?"
나는 남자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얼마라는 거야…. 난감한 내 기색이 드러 난 걸까. 기분 나쁜 비소를 짓던 남자는 입을 달싹이다 이내 제 지갑에서 명함으로 추정되는 것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정 갚고 싶음, 연락 하고."
계속해서 셔츠를 털어내던 남자는 내리막길을 밟으며 유유히 내려 갔다. 나는 남자가 건네고 간 명함을 쭉 훑었다.
태운 백화점 CEO 오세훈
010-0000-0000
sehunmyhusband@Sarang.hae
기본적으로 적혀있는 회사 이름, 회사 로고, 직위,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팩스 번호, 회사 홈페이지 주소. 그 많은 글자들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 세 가지였다.
'태운 백화점', 그리고 'CEO',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세훈'.
오세훈…. 낯설지 않은 이름에 인상을 찌뿌리며 명함을 빤히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