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3부
15-2.
“뭐, 언제부터 알았냐. 이런 거 묻고 싶은 거 아니야?”
포크로 스파게티 면을 돌돌 말아 입 안에 넣던 수아가 불쑥 말을 꺼낸다. 대화의 흐름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물음에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눈만 깜빡인 채 앞에 앉은 수아를 쳐다봤다. 물론, 꼭 꺼내야 할 말이었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었으니 지금 나온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었지만 놀란 것이 사실이었다.
“…….”
“뭘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어.”
“…어?”
“할 말 내가 먼저 꺼내줬으니, 이젠 니가 풀어나가야지.”
“아, 어…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컵에 가득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수아가 먼저 말을 꺼내줘서 얘기가 쉽게 나오게 됐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니 목이 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수아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조금은 걱정이 되어서….
“음….”
“…….”
“저기, 그러니까….”
“…….”
“아….”
좀처럼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할 말을 잃고 계속 입만 열었다, 또 닫았다…. 그렇게 헤매기를 반복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기도 했다가, 다시 또 눈앞의 수아를 바라보았다가…. 손을 펼쳤다가, 다시 꽉 말아 쥐었다가….
“그….”
보다 못한 수아가 답답했는지, 놓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래, 그래. 네 맘 다 알아. 말 꺼내기 어려운 것도 다 알아.”
“…….”
“네가 묻고 싶은 게 뭔지도 알겠고.”
“…….”
“내가 뭐 대단한 얘기 꺼냈다고, 말을 못하고 그러냐. 거 참…. 내가 김종인 당황한 것까지 보게 될 줄이야….”
수아의 말에 조금 웃었다. 그 애가 본 게 정말 경수가 맞는지 묻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말을 꺼내질 못했을까. 혹시라도, 만약에. 수아가 정말 경수를 봤다고 할 까봐 망설여졌던 걸까. 수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내가, 경수를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섞여 들었다. 이런 내가 조금,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래, 좋아.”
“…….”
“내가 얘기 할게. 네가 궁금해 하는 것들 말 해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수아가 머리를 긁적인다. 이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되나.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곧 나를 향해 웃음 짓는다. 막상 내가 먼저 말하려니까 막막하긴 하네. 네가 왜 당황했는지 알겠다.
“사실은….”
“…….”
“사실은, 1학기 때부터 알고 있었어.”
조금 놀란 눈으로 수아를 바라보았다.
“너 오티 때 내 옆자리에 앉았던 거 기억나?”
기억이 나질 않아서,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으나 그 짧은 시간에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리려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수아가 됐다는 듯 손 사레를 친다.
“그래그래, 기억 안날 줄 알았어.”
민망하게 웃자, 수아가 못 본척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아무튼, 너 오티 때 술 취해서 옆에 앉은 나 붙잡고 계속 누구 사진을 보여주는 거야.”
“…….”
“그래놓고선, 계속 귀엽지. 잘생겼지. 예쁘지 않냐?…하면서 생전 처음 보는 나한테 자랑을 하더라고.”
“…….”
“슬쩍 얼굴 보니까, 되게 귀엽게 생긴 거야. 그땐 초면이고 해서 장단 맞춰준다고 열심히 고개 끄덕였지. 나는.”
거기까지만 하라고, 수아에게 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수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기억 속엔 없는 장면이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다.
“왜. 부끄럽냐?”
“…….”
“…….”
“…어.”
그러자, 수아가 웃는다.
“근데, 그땐 그냥 각별한 친구 사인 줄 알았어.”
“…….”
“나도 술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직도 부끄러워서 어디 숨고 싶은데 일부러 괜찮은 척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세훈이 녀석이 팔불출이라고, 도경수 밖에 모르는 덕후 새끼라고 놀렸을 때 그냥 웃고 넘겼었는데. 이런 일을 저질러놨을 줄이야…. 눈앞이 깜깜해서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걱정 마, 너 그때 자랑한 거 나밖에 없으니까.”
“…그래.”
수아의 덧붙이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라서…. 근데, 경수가 알면 좋아할 일이긴 하겠다. 경수한테 나중에 말 해줘야지. 내 얘기를 듣고 좋아할 경수의 얼굴이 떠올라서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지금 웃을 타이밍이 아닌데…. 웃어놓고 수아의 눈치를 살피니 쯧쯧, 혀를 차며 말한다. 으이구, 등신. 괜히 민망해서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돌렸다.
“…그래서?”
“아, 그래서. 친군 줄 알고 그냥 넘어갔지. 근데, 3월이었나? 친구 만나러 K대 갔다가 봤어.”
“…뭘?”
“뭐긴 뭐야, 너랑 네 애인.”
그렇게 말하며 수아가 놓아두었던 포크를 다시 잡아 쥐었다. 또 당황해서 할 말을 찾고 있는 나를 한번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포크로 스파게티를 건져 올린다.
“어떻게 알았냐고?”
“…….”
“뭐, 여자의 직감이지.”
“…….”
“…라고 했으면 좀, 신빙성이 없지?”
경수였다면, 이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보다 더 당황했으면 당황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라고…. 아주 잠깐, 이런 일을 생각을 해본적은 있었다. 수능을 치고 대학을 가기 전이었을 거다. 아마. 그때의 나는, 당당하게 나는 경수를 사랑한다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지금까지의 대화로 미루어보아, 모든 것을 눈치 챈 수아에게 마저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조금 아프게 만들었다.
“말 없는 거 보니까, 못 믿겠다는 눈친데?”
“…뭐, 조금?”
“…….”
“…….”
“…….”
“…….”
“알았어, 알았어. 사실대로 말 하면 되잖아.”
수아를 빤히 바라보자, 그 애가 툴툴 거리며 말을 이어나간다.
“눈빛.”
“…눈빛?”
되묻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눈빛 보고 알았다고…. 보통, 친구끼리 그렇게 쳐다보진 않으니까.”
“…어떻게, 쳐다봤는데?”
“음, 뭐랄까….”
“……?”
“…….”
“…….”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그라드는 눈빛이었어.”
내가 경수를,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그라드는 눈빛으로 쳐다본다는 말인가? 제3자에게서 경수를 향한 시선에 대해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딴에는 그냥 본다고 본 거였는데. 시선에서부터 티가 났나…. 제3자가 봐도 저 정도라는데, 경수는 얼마나 오그라들었을까….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더니, 수아가 스파게티나 먹으라며 내 손에 억지로 포크를 쥐어준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그런 거고.”
“…….”
“…걔를, 이렇게 내려다보면서.”
“…….”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너는…. 내가 알던 김종인이 아니었어.”
뭐, 그래서 눈치 챘지. 자세히 보니까, 네가 오티 때 사진 보여주면서 자랑한 걔더라고.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아무튼, 난 1학기 때부터 알고 있었고. 솔직히 아무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야. 충분히 혼란스러웠고, 학교에서 네 얼굴만 봐도 머리가 다 어지러웠고. 근데, 생각해보니까 뭐. 네가 내 가족도 아닌데 네 성적 취향을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더라고…. 괜히, 내가 알고 있는 거 네가 알게 되면 심란할까봐 모른척하고 있었던 건데. 그 상황에서까지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겠더라. 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지, 과 사람들은 다 너 몰아세우고 있지…. 내가 아무리 개인주의라지만, 불쌍한 중생을 구원해줄 정도의 정은 있어. 그래서, 내가 나섰던 거고. 지금 이렇게 너한테 사실대로 털어놓는 거고. 됐냐?
수아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가 말을 마치고 입을 닫는 순간이 되어서야 마음이 놓였다.
“걱정 하지 마.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해.”
“…응.”
내가 모르게, 지금껏 나를 배려해준 수아가 고마웠다.
“아참, 그리고….”
“……?”
“보라 언니는, 네가 이해해라.”
보라 누나의 이름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는지, 나를 빤히 보던 수아가 인상 좀 피라며 핀잔을 준다. 그래서 억지로 웃었다.
“너가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언니가 너 많이 좋아했어.”
“…….”
“억울해서 그랬을 거야.”
“…….”
“에휴, 그러게 오르지 못할 나무를 왜 쳐다봐서는…. 야, 언니 불쌍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모른 척 하는 거다?”
보라 누나를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아를 빤히 바라보며 웃자 그 애 또한 나를 향해 웃는다.
“…….”
“…….”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