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E & SEEK
19.
시야가 까맣게 뒤덮인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멍하니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에 앉아있는지도 모르겠다. 내내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있었다. 녀석의 행동을 생각할 틈도 없을 정도로.
정신을 빼놓은 말을 귓가에 속삭인 녀석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가까이 머문 것도 잠시,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빼며 제 자리로 돌아간 녀석이 씩 웃었고, 그 이후로 정면으로 고정된 얼굴이 옆을 돌아볼 생각을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스위치를 켜 환하게 불을 밝힌 녀석이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본다.
“가요.”
“…….”
“데려다 줄게요.”
귀신에 홀린 것처럼 녀석을 빤히 보았다. 너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김종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마주한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다.
“..아니, 됐어.”
자리에서 일어서는 녀석에게 말했다.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겠다. 나 혼자서, 천천히.
꽤 단호하게 내뱉어진 말에, 김종인이 소파에 얹어진 외투를 팔에 걸친다. 그러면서 다른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아온다.
“가요, 선배.”
“…….”
“할 말 있어서 그래요.”
그래, 혼자 생각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말을 한 건 내가 아니라 김종인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의 집을 향하던 길에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운전에 집중한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할 말이 있다던 녀석은, 차에 오른 뒤부터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할 말이 있긴 한 걸까.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알쏭달쏭하다. 넌, 참.
생각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정리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의 난 위험요소가 많았다. 짝사랑하는 상대의 행동 하나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멋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판단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싫다. 내 머리 꼭대기에 앉은 김종인을 보는 건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녀석의 눈치만 보고 있었던 나였다. 마음을 깨닫게 된지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면, 앞으론 도대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기분이 좋은지 핸들위의 손가락이 춤을 춘다.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을 땐 언제고, 줄곧 따라붙는 내 시선을 알고 있었다는 거다.
“..과제는 각자 확인하자.”
기억에 남는 것은 단 한 장면뿐이었다. 침대 위의 그 장면.
늘 한 가지 해보고 싶었어.
그대로 가만있어.
움직이지 마.
내뱉을 때 마다 가까워지는 녀석의 얼굴과 결국에는 코앞까지 다가와 대사에도 없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던지고 간 그 목소리.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금요일 하루를 과제에 몰두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 남자의 말 이후에 따라오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 영화에선 마음을 확인한 두 주인공이 키스를 하게 된다.
If you hide, I’ll seek.
그런 대사는 없었어, 분명히.
“확인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대로 제출해도 될 것 같아요, 선배.”
유연하게 핸들을 돌리는 손끝이 가볍다. 오늘따라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런데 왜 난 기분이 엉망일까. 녀석을 볼수록 숨이 턱턱 막힌다. 가슴이 답답했다.
“..선배가 얼렁뚱땅 과제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정면을 향해있던 얼굴이 내 쪽으로 살짝 틀어진다. 눈이 마주치자 또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그럼 왜 맞춰보자고 했는데?”
“..음, 일종의 핑계죠.”
“…….”
“주말에도 선배 보고 싶으니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아까부터 왜 자꾸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자꾸 던지는 걸까.
“…….”
잠깐의 마주침이었을 뿐인데도 강렬한 빛을 내뿜는 녀석의 시선이 압도되어 슬쩍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 아까 그 말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인데.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혼자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왜 입이 열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는 뭐가 무서운 걸까. 녀석에게서 나올 대답을 예상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모르겠다, 정말로.
너무 어렵잖아, 이거.
할 말을 속에 쌓아두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또 왜, 어째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망설이는 거고, 그 이유는 왜 또 너인 건데. 괜히 울컥하며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피하지 말자, 도경수.
피하지 마.
부딪혀 보자, 한번.
“…무슨 뜻이야.”
시선은 아직도 창밖을 향한 채였다.
“설마 뜻을 몰라서 묻는 건 아닐테고….”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을 돌아본다. 휘어진 녀석의 눈꼬리가 제자리를 찾아간다. 꽤 진지한 얼굴로 변한 녀석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말 그대로에요, 선배가 아는 뜻 그대로.”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거잖아, 지금.”
“그게 다인데 뭐라고 말해요.”
“…….”
“정말 그게 다인데.”
말을 마친 녀석이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인다. 정말 목이 타는 건 나야. 질끈 눈을 감았다.
그 뜻이 내가 아는 뜻이 맞다면 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내가 숨으면, 네가 찾으러 온다는 뜻인가. 그러니 숨지 말라는? 그게 아니면, 숨어봤자 네 손바닥 안이라 이거야? 나랑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아, 시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If you hide, I’ll seek.
네가 숨으면, 내가 찾으러 갈게.
아직도 귓가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득하게 멀어질 것 같은 그 순간이.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도 다 안다는 뜻이다. 녀석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다는 뜻.
길을 지나는 내내 서로 약속한 것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으면, 학교 이름이 적힌 표지판이 눈에 띈다. 거의 다 왔다, 거의….
할 말이 있다던 녀석은 아직도 그 말을 꺼내지 않은 상태였다. 나도 묻고 싶은 걸 물어봤지만 완벽한 해답은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도착하게 되면, 차가 멈춰 서게 된다면. 또 대화가 시작될 거다. 내가 먼저 침묵을 깨든지, 아니면 녀석이 깨든지….
입술을 깨물고만 있으면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선다. 그러고 보니 두 번째네, 함께 차를 타고 집 앞까지 온 것도.
5분도 채 되지 않아 입구에 도착한 차가 천천히 멈춰진다. 길가에 차를 세운 녀석이 내게 시선을 준다. 핸들에 손을 걸친 채 고개만 돌리고 빤히 바라본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선배.”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온다. 녀석과 눈을 맞추고 있는 상황에서도 물고 있던 입술은 놓아주지 않은 상태였다.
“입술 상해요.”
손길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자연스럽게 다가와 입술을 쓸고 간 녀석이 또 다시 웃는다. 녀석에 의해 놓친 입술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무릎 위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손끝이 떨려왔다.
한 여름도 아닌데, 손에 땀이 찬다.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네 차 긁은 범인 찾아냈다고 했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 누구야, 장미야?”
아직 묻고 싶은 게 많다. 네 차를 긁은 진범은 누구인지, 네가 찬열이에게 전화로 했던 말은 무엇인지.
네가 입을 열기 전에, 네 할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물어야겠다.
“아, 그거….”
녀석이 난감한 듯 이마를 긁적이며 말을 얼버무린다. 나를 수렁에서 꺼내면서도 끝내 진범을 밝히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혹시나 했는데, ‘혹시나’는 ‘역시나’가 된다.
“나 때문에 일부러 그런 거야?”
내 물음에 녀석이 입을 다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다. 천천히 올라오는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내가 숨으면 찾으러 오겠다는 네 말은 혹시, 내가 짐작하는 뜻이 맞는 건지….
문장에 숨은 의미는 없다던 네 속내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그거, 내가 한 거면 어쩔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말에, 녀석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선밴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선밴 그럴 사람 아니니까.”
이마를 만지던 손가락이 뒷머리를 향해 간다. 습관처럼 뒷목을 몇 번이나 주물 거리던 녀석의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는 채였다.
넌 왜 그렇게 나에 대해서 확신 하는 걸까.
나를, 잘 모르잖아. 너.
“..네가 뭘 아는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알고 있느냐고. 몇 번이고 뒷목을 만지던 녀석의 손가락이 무릎 위로 떨궈지고, 녀석의 목울대가 울렁인다.
“선배가 아닌 건 알죠.”
너는 참 신기하다. 단시간에 다가와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이젠 눌러 앉으려고 작정을 한다.
근데 나는 조금 무섭다. 나를 향한 올곧은 시선이 두렵고, 언제부터 내게 향해있었을지 모르는 그 웃음이 불안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누군가의 꿈은 아닐까.
한 순간 깨버리면 끝날, 그런 허망한 것은 아닐까.
..겁이 난다.
“..내가 한 거 맞으면?”
“…….”
“내가 한 거 맞아.”
그래서 억지를 부렸다. 내가 한 거야, 내가 그랬어. 내가 네게 해를 끼친 게 맞아. 억지라도 부려보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까 싶어서.
계속해서 우기는 내 말에, 고집스럽게 닫혀있던 입술이 살짝 열린다. 그리곤 입 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표정의 김종인이 나를 보며 말한다.
…그럴 리 없는데.
“그거, 내가 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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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의 마지막입니다.
20편부턴 2부가 시작될 예정이고, 드디어 김종교의 시점으로 찾아뵐 것 같아요.
당장 이번주부터 시험이라 시험이 끝나고 찾아와야 될 것 같네요, 조금 쉬어가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잘계셔야해요!
아 그리고 2부 부터는 개인 홈에서만 연재하게 될 것 같아요. 12월부터 개인사정으로 바쁠예정이라서..TT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p.s 첫눈 왜이렇게 좋죠?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