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E & SEEK
17.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
“나가요, 선배.”
그렇게 말하는 세훈이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턱 부근을 매만지며 짧은 한숨을 내쉬는 녀석이 먼저 걸음을 옮기고, 중간에 서서 나만큼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세훈이를 보던 백현이가 뒤를 따른다.
“뭐해, 빨리 가자.”
얼어있던 것도 잠시, 나를 부르는 백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강의실 문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강의실을 나서기 직전에 힐끗 고개를 들어 확인한 시간은 12시 58분을 달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왜 너랑 이러고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선배.”
강의실을 빠져나와 과방으로 향하는 통로로 걸었다. 세훈이 녀석이 복도로 나가자는 말에 무슨 일이 있겠거니 대충 예상은 했는데 이 정도로 소란이 일 줄은 몰랐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많은 발걸음이 느려지고, 소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술렁임.
“장미 또 왜 저래?”
“둘이 왜 저러고 있는데.”
“모르겠어요, 종인 선배가 아까부터 사과하라고 그러던데….”
빠르게 걸어가던 세훈이 어느 한 곳에서 턱하니 멈춰 선다. 앞을 가로막는 넓은 등이 보인다. 눈앞의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세훈이 고개를 돌려 슬쩍 내 등을 떠민다. 이게 대체 내 레포트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데. 의아한 얼굴로 녀석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앞쪽을 바라본다.
“나 아니야.”
“…….”
“내가 한 거 아니라고.”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다. 격양된 듯한, 장미의 목소리.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이 꽤 사납다. 그리고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뒤통수 또한 낯익다.
제가 한 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장미의 말에도 김종인은 대답이 없다. 고개를 살짝 비틀며 한숨만 내 쉴 뿐이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나는 레포트를 잃어버렸고, 세훈이는 그런 내게 복도로 나가보라 말하며 날 이곳으로 이끌었다. 복도에선 장미가 김종인과 날을 세우고 있다. 정신이 없어서인지, 상황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마음이 급해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멍하니 눈앞의 두 녀석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저거.”
백현이가 내 어깨를 흔든다.
“저거 뭐야. 쟤 지금 들고 있는 거.”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미의 오른손에 쥐어진 하얀 프린트지가 시야에 찬다. 살짝 구겨진 채 쓰레기통 방향으로 떨구어진 아주 낯익은 표지가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설마.
..설마.
이유 없는 의심은 나쁘다. 하지만, 이 상황과 장미의 손에 쥐여진 익숙한 표지. 구겨진 종이. 모두 내 것이 맞았다. 이 정도면 이유 없는 의심은 아니라고 보는데, 나는.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것까지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다. 모함도, 인신공격도 참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이건 아니잖아.
“종인아, 너 진짜 왜 이래.”
“…….”
“내가 한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너 나 못 믿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김종인을 향해 열변을 토하는 장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억울함이 가득담긴 눈이다.
아니야, 난 아니야. 내가 아니야.
상황이 아주 우습게 돌아간다. 며칠 전, 강의실에서 내가 아니라고 하던 그 때의 일이 머릿속에 겹친다. 내가 아니라고 할 때 넌 코웃음을 쳤잖아. 난 그때 제대로 된 증거 하나 없었어. 그런데 너는.
손에 내 껄 쥐고 있으면서도 아니야?
“네 거야? 네 거 맞아?”
다급하게 묻는 백현이를 뒤로하며 장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선배.”
내게 따라붙는 김종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녀석과 장미의 중간쯤에 서서 장미를 똑바로 쳐다본다. 장미가 움찔하며 내 시선을 피한다.
당당하면서 왜 눈을 못 마주쳐.
말 대신 긴 숨을 내뱉었다. 내가 등장하자 새빨갛게 칠한 윗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안절부절 못하던 장미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본다.
“도경수….”
“내놔.”
손을 내밀었다. 내 놓으라고.
내 행동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커진다. 뭐야, 대박. 저거 도경수 거였어? 뭔데? 저거 장미 손에 쥐고 있는 거 레포트잖아. 도경수 꺼 버렸나본데? 장미선배 저 정도야? 미쳤다. 장미가 버리는 거 종인이가 봤나봐. 종인 선배가?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한 번 장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놔.
“…….”
자존심이 상하는 듯, 한껏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치켜 올리며 쥐고 있던 내 레포트를 뒤로 숨긴다.
“선배.”
김종인의 단호한 목소리가 먼저였다. 장미의 시선이 나를 비껴가 뒤에 서 있는 김종인에게로 가 닿는다.
“나 아닌 거 믿으면 줄게.”
“..사과하세요.”
“내가 안 버렸어.”
“그럼 제가 본 건 뭐에요.”
“그건….”
김종인의 말에 장미가 입술을 깨물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생각이 없는지 불안정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선배가 쓰레기통에 넣는 거 제가 다 봤잖아요.”
신기하게도 레포트를 도둑 당한 당사자는 나인데, 장미가 향한 시선도, 이 사건 또한 김종인이 중심이다. 왜 또 너야. 왜 하필 네가 본 거야.
왜 여기에도 네가 있는 건데, 왜.
“…….”
이러니까 내가 널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야. 너랑 엮일 때 마다 이런 일이 생기고, 결국엔 다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돼버리니까.
결국 또 너잖아. 너 때문. 김종인 때문이네, 이번에도.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뒤를 돌아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넌 빠져.”
녀석의 깊은 눈과 마주했다. 내 말에 녀석이 입을 꾹 다문다. 이거 네 일 아니야. 여전히 눈을 마주친 채로 재차 말했다. 녀석이 한숨을 내쉰다. 까맣기만 한 눈동자를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있으면 화가 날 것 같아서 얼른 시선을 피하며 다시 장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뭐하냐. 남의 꺼 들고.”
“…….”
“내놔.”
“…….”
“내놓고 사과해.”
그리고 네 잘못을 인정하라고.
말 없는 대치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된다. 시발, 강의실을 나오기 직전에 12시 58분이었으니 이미 제출하긴 글렀다. 살짝 뒤로 젖혀진 고개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이 모든 것이 짜증이 나서 인상을 찌푸리며 가만히 지켜보는데도 장미는 반응이 없다.
한동안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이대론 안 되겠던지 억울함을 가득 안은 표정이 다시 돌아온다.
“내가 왜 사과를 해? 내가 한 게 아닌데? 내가 한 거 아니야. 종인아. 내가 한 거 아니라고.”
좋은 말로 하면 못 알아 듣는 구나.
말이 통할 녀석이었으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지도 않았겠지.
“그걸 왜 저한테 말해요.”
“…….”
“사과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경수 선밴데.”
역시나 좋은 말로 타이르던 김종인 또한 목소리에서 냉기가 흘러넘친다.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이 꽤나 충격인지 얼어붙은 채 꼼짝도 않는 장미에게로 한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니 녀석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나 너한테 사과 안 해. 난 잘못한 거 없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뒤로 숨긴 오른쪽 팔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 손에 구겨져있는 레포트를 빼낸다. 잡고 있던 장미의 팔을 툭 놓았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던지, 이대로는 제출 할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이 구겨져 있는 레포트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펴본다.
한 번 구겨진 종이는 절대로 다시 펴지지 않았다.
“…….”
손에 쥔 구겨진 종이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올려 장미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래, 하지 마.”
녀석의 어깨에 걸쳐져있는 가방을 낚아챘다. 손쉽게 딸려오는 가방의 지퍼를 열어 거꾸로 들었다. 그 상태로 공중에 두어 번 탈탈 털어내니, 바닥으로 와르르 내용물이 쏟아져 내린다.
“도경수, 너 뭐하는 짓이야!”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지켜보던 장미가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쥐어진 가방을 빼앗아 들고,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본다. 너 미쳤어? 돌았어? 제정신 아니지?
귀를 따갑게 울리는 목소리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상체를 숙여 녀석의 레포트를 들어올렸다. 내 껀 저렇게 엉망인 채로 구겨졌는데 네 껀 너무 멀쩡하잖아.
“너….”
손에 쥔 새하얀 종이를 다른 한 손으로 잡아 쥐었다. 그리곤 힘을 줘 찢어버렸다. 허무하게 두 갈래로 찢어져버린 녀석의 레포트를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니, 장미의 두 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사과하지 마. 나도 네 사과 받을 생각 없으니까.”
구겨진 레포트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버리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그 자리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장미의 레포트를 찢어버렸지만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십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들이 이번 한 달 사이에 두 번 씩이나 일어났다. 멸시의 눈초리도, 집중되는 시선도, 끊이지 않는 악담도 모두 무덤한 척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화가 났다. 왜 그런 일 속에는 항상 김종인이 있는지.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지.
몇 년간 튀지 않게 조용히 지냈던 학교생활도 물거품이 되었으며, 며칠 밤을 새워 작성한 레포트도 결국 버리게 됐다. 동기와 강의실에서 소리 높여 싸우는 건 물론이고, 동기의 레포트를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점점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잔잔하게 흘러가던 내 일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만 같았다.
“…….”
눈가에 몰리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그동안 꾹 참아오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꽉 쥐며 정신없이 걸었다. 집에 가야겠다. 집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쉬고 싶었다.
주머니 속에서 끊임없이 울려오는 진동을 애써 무시했다. 사라져버린 나를 찾고 있을 변백현 같았지만, 지금은 그 누구와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선배.”
그 순간 주먹 쥔 손을 잡아오는 온기가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내 손을 잡아 챈 녀석이 내 걸음을 멈춰 세운다. 녀석에 의해 억지로 멈춰진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또 김종인…. 지겹다, 김종인.
“놔.”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며 시선을 외면했다.
“선배….”
감정이 극대화 된 상태에선 그 누구라도 미워지기 마련이다. 그게 원인을 제공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자꾸만 나를 부르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조금 빨갛게 물들어 있을 내 눈이 녀석의 까만 눈과 마주한다. 그러자 녀석의 눈이 조금 커진다.
“넌 내가 이 꼴이 되니까 우습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김종인에게는 더더욱.
감정에 휘둘리고, 동요하는 내가 싫었다.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괜찮아야 한다. 꾹꾹 눌러 담고 있던 감정이 폭발한 상태의 나는, 그 누구보다 더 싫었다.
“..가라, 혼자 있고 싶으니까.”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녀석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렇게 몇 걸음 옮기면, 정문을 향해 빠르게 옮겨가던 걸음이 어느 순간 느려지고 만다.
지친다. 이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도.
한 순간 힘이 턱하니 빠져버렸다. 난 이렇게 벌써 지치는데,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참고 있는 걸까.
녀석의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인 듯 했다. 멀쩡히 주차 되어 있는 새 차를 누군가 긁어버리고, 사람들이 환영하는 건 녀석의 열린 지갑이었으며, 저를 좋아하는 선배가 저 때문에 다른 선배에게 악행을 일삼고….
넌 도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냐.
한껏 느려진 걸음을 유지하며 정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꽉 쥐고 있던 두 주먹도 어느새 풀린 채였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한 마디로는 정리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장미에 대한 모든 화가 김종인에게로 옮겨가, 녀석에 대한 원망이 들다가도 조금 안쓰러워 진다. 내가 아는 일들이 다가 아닐 것 같아서.
아마 녀석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 오늘을 기점으로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꼴까지 보였는데, 녀석은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조금 전 나를 따라와 붙잡던 모습을 기억한다. 녀석은 다시 돌아갔을까. 내가 나와 버린 후 장미는 어떻게 됐을까. 바닥에 버린 내 레포트는. 강의실에 가방도 놓고 왔는데….
아….
생각 할수록 꼬여온다. 인상을 쓰다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걷고 또 걸었다. 얼굴을 때리는 찬바람을 그대로 다 맞으면서. 이러고 있으면 정신이 좀 들까 싶었다. 감정이 다시 가라앉을까. 평소의 나로 돌아올까.
눈이 시려온다. 두 눈을 꿈뻑이며 자취방 건물 현관으로 들어섰다. 아직 겨울도 아닌데 날씨가 꽤 춥다. 이불 속에 몸을 뉘여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현관 앞에서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삑삑, 전자음이 들려오고, 문득 고개를 돌려 걸어왔던 길을 바라본다.
“…….”
내가 돌아볼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들켰네.”
“…….”
“걱정돼서요.”
민망한 듯 코를 매만지며 웃는 녀석을 말없이 바라본다.
뭉클한 감정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
12월의 기적이네요♥
네이쳐의 기적이야 ... 흡... 빌어먹을 네이쳐....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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