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도 별은 뜨지만
눈부신 태양빛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듯이
나 언제나 당신 곁에 서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 가려
당신 위 눈에 보이지 않나 봐요
ㅡ유미성, 그림자 같은 사랑 中
봄의 끝자락에서 겨우 핀 꽃이 간절하게 따뜻한 햇살을 바라는 걸 주제 넘다고 할 수 있을까. 곧 새싹이 돋아나기 위해 내처져도, 꿋꿋이 핀 꽃은 더운 바람에 숨을 고르고 뜨거운 대지에 온 몸이 녹아간다. 그럼에도 그 꽃잎 한 송이 더 피우기 위해 모든 걸 참는다. 오로지 작은 벌과 나비 한 마리를 기다리면서.
그렇지만 자신에게로 향하지 않는 햇살도, 시원하게 불어주지 않는 바람도, 한 방울 떨어져주지 않는 비도 원망할 수가 없다.
그것은 모두 다, 늦어버린 꽃 한송이의 탓이니까.
참 더운 날이었다.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는데,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태양은 도를 넘게 뜨거웠던 날. 방학에 접어들어 수시 실기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여름. 그저 수험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울컥 터지곤 하던 숨막히는 하루 중 어느 날이었다. 방학 중에도 억지로 방과후 수업을 나온 뒤에 학원을 가라던 열정적인 선생님 덕분에, 미대를 준비하는 아이들 대부분은 미술실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에어컨이라도 잘 나오니 좋지 않냐며 우리를 다독였지만, 잘 그려지지 않는 스케치와 엉망으로 섞이는 물감들에 결국 손을 놓아버렸다. 모두들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이 생활이.. 언제쯤 끝이 날까. 우리는 이렇게 그림만 그려서, 제대로 된 대학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포기해버린 성적 혹은 발전하지 않는 실력들이 목을 휘감아 우리를 짓눌러 숨통을 조였다. 누군가는 눈물을 글썽였을 수도.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열린 문과 낯선 목소리는 생각보다 반가웠다. 선생님은 잘 왔다며 어느 누군가를 환영했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들어오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여름에 만났음에도 참 겨울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딘가 지치고 슬픈 얼굴. 그 앞에 드리워진 밝은 모습. 같은 감정처럼 느껴졌기에, 나 혼자만이 느꼈던 동질감. 새하얀 얼굴과 새카만 머리. OOO는 그랬다. 열 아홉, 가장 명확한 점에 도달해야만 물이 끓고 물이 어는, 그 당연한 찰나의 순간 같던 시절. 열기에 지쳐 있던 내게 겨울처럼 다가온 사람. OOO, 너였다.
/멘토..가 되어드리려고 왔어요. 너무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서..
잘 부탁할게요. 미약하게 웃는 모습에 몇몇 남자애들이 박수를 쳤다. 여자애들도 간혹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목소리가 예뻤다.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잘 인식이 될 수 있는지 아는 것 같았다. 들어 온 순간부터 눈길을 떼지 않았지만,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은근한 둔함마저 매력 있었다. 그랬다. 그래서 한 순간도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 공간에서 OOO를 제외하고는 내 눈길을 읽었을 지도 모를 정도였는데. 그 덕분인지 너는 내 멘토가 되어 옆자리에 앉았다. 어색한 듯 웃는 얼굴에 나는 놓았던 연필을 쥐었다. 옆에서 구상이 이렇고, 선의 굵기가 어떻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옆에 네가 있다는 것 자체. 그 하나만이 중요했다.
신기하게도 무언가가 잘 그려졌다. 뭘 그리는 거야? 라는 질문에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나도 무언가를 잘 그려내고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저 옆에서 계속 들리는 멜로디 같은 음성과 얼핏 끼치는 꽃내음. 간혹가다 준 눈길에서 보이는 네 옆모습. 전해지는 정보는 그게 다였다. 여름이 오고 나서 처음으로 그림 그리는 게 재밌는 거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너는 옆에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그린다며, 밝은 모습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 남동생 혹은 남자인 친구를 대하듯이 감정 없는 스킨십. 왜 연필 끝이 미세하게 진동했는지, 눈 하나 마주치는 거로 왜 그리도 버벅거렸는지.
수업이 대충 끝나고 다들 뒷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너는 대충 물티슈로 손을 닦아내고 짐을 챙겼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가서 말을 걸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다들 나 같이 어린애가 좋아한다고 오해하지는 않을까. 의도치 않게 시선이 계속 닿아 있어서인지, OOO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그제서야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순간 놀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왜? 할 말 있어?
조금 당황스러워 했던 것 같기도.
/내일.. 나오세요?
이건 나조차 생각지 못하고 던진 물음이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모습에 초조했다.
/다, 다른 선생님들은.. 내일도 나오신다고 하셔서.
/아.. 그래. 내일은 못 나올 것 같아. 미안..
병신 같이 말이나 더듬고. 작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이게 볼 수 있는 마지막인건가.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던 것 같다. 그 때는 알지 못했으니까. 철 없고 세상이 다 삐뚫게 보였던 열아홉의 나였으니까. OOO는 팔을 이끄는 손길에 끌려 나에게 안녕, 하고는 교실을 떠났다. 다른 애들은 짐을 챙겨 하나 둘씩 반을 떠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질문들을 던진 건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교실에 한두명 밖에 남지 않았을 때가 되서야 나는 가방을 챙겼다. 선생님은 교탁에 키를 두고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부유하는 먼지를 내비쳐주던 순간이었다.
우당탕, 하는 소리에 놀란 건 소리를 낸 장본인이 더 한 것 같았다. 더 커질래야 커질 수 없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헐떡이는 모습에 몸이 굳어버렸다. 앞머리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너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훅 끼치는 바람 냄새가 여름인지 겨울인지 헷갈리게 했다.
/나.. 내일은 못, 나오는데.. 후..
숨.. 고르고 말하세요.
내 말에 너는 멋쩍은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됐다. 그니까.. 네가 내년에 K대 오면.. 내 후배 될 수 있을거야. 그 때는, 맨날 만나자.
너 그림 잘 그리더라. 왠지.. 올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너를 바라보기만 했다. 네 이마에 맺힌 땀이 내 머릿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땀방울 하나 떨어지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그럼, 갈게. 꼭.. 만나자.
꼭 만나자.
그 말에 손이 조금 떨려서 두 손을 주먹 쥐었다. 뒷모습이 서서히 멀어진다. 조금 울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너였다.
나는 결국 너의 작은 땀방울 하나로, 여름에 꽃을 피워버리고 말았다.
바람도 비도 내리지 않는 그 무더운 공기 속에서.
* * * *
야, 경영학과 옹성우 선배 있잖아. 그 엄청 잘생겨서 유명한.
응. 근데 왜?
그 선배 OOO 언니랑 사귄다더라. 우리 과 여신이라고 했던 언니 있잖아. 전부터 붙어다닌다 했더니 결국!
둘이 그 전부터 사귀지 않았어? 경상에서는 옹성우 선배 순정남이라고 유명했어. 여자친구 엄청 잘 챙긴다고.
내가 둘이 지나가는 거 봤는데, 그 때랑 느낌부터가 달라. 진짜..
대학에서의 소문을 우습게 보면 안되는 거였는데. 그저 매번 어떤 계절 쯤 되면 돌아다니던 말들과 똑같은 것들이라고 치부했던, 나의 어리석음의 탓인걸까.
아니면, 정말 계절에 맞지 않게 피어버린 꽃에게 희망조차 없애버리려는 신의 분노일까.
너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뗐던 걸음을 멈췄다. 아주 멀리서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면 좀 더 나았을까. 평소와 같이 웃으며 걸어가는 OOO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옆에 서 있는 옹성우를 가뿐하게 무시해버리면 되는 일인데, 오늘따라 웃는 얼굴에 드는 햇살이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서로 마주치는 눈빛과 마주잡은 두 손이 나에게 비웃음을 건내고 있었다. 그제서야 가벼운 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둘이 지나가는 거 봤는데, 그 때랑 느낌부터가 달라.
다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잖아. OOO, 내 앞에서조차 그렇게 웃어본 적 없는 얼굴로 옹성우를 보고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술이 들어가 발그레 한 볼과 나른한 눈빛, 내가 저를 부르며 달려갈 때마다 환하게 흔들어주던 손, 작은 미소.
그건 정말 다른 거였다. 나를 향한 태도와 옹성우를 향한 태도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던 건 큰 실수였다. 방심하지 말라고 한 건 나인데. 어쩌면 OOO 마음의 크기를 무시하고, 나 홀로 방심과 착각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이 계절만 버티면 괜찮을 거라고. 유난히 힘들어하는 겨울을, 한 번만 더 버티면 내 옆에 둘 수 있을 거라고, OOO는 주지 않았던 여지를 홀로 간직하며 있었던거였다.
최대한 마주치기 않기 위해 뒤를 돌았다. 너에게서 한 번도 뒤돌아본 적도, 뒷걸음질 쳐본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제 너를 마주할 수가 없어졌다. 이건 내 의지가 아닌 드러내지 않은 너의 의지와도 같았다. 무언가를 잘못 먹어 식도가 막힌 것처럼 숨조차 넘어가질 않는다. 나는 어떤 기대를 해왔던 걸까. 너를 내 옆에 둘 수 있다는 것? 조금만 참으면.. 오로지 나만 봐줄 거라는 것? 그 어느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여름이 좋았다. 겨울을 닮았지만 여름 안에 있는 너는 더 아름다웠기에, 햇살이 되어주고 바람이 되어주는 너를 보며 싹을 틔웠다. 내게 꽃을 피게 해주었고 목표가 되었고 이유가 되어주었던 사람. 불안정한 열아홉의 온도를 제대로 맞춰주었던, 그 더위 속에서 송글송글 맺혀있던 땀방울.
걸음을 빨리했다. 다시 너를 마주할 일이 있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너를 볼 용기가 없다. 내 옆이 아닌, 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웃는 모습은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렇다고 너에게 화를 낼 수도 없다. 모든 건 너의 의도도, 네가 원하던 것도 아니니까.
이 모든 건, 늦게 피워버린 꽃 한송이 탓일 뿐이니까.
* 안녕하세요 메타메타몽몽입니당 *
너무 많이 늦은 글이라, 독자님들께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올리겠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며칠 동안을 앓기만 했습니다 ;ㅁ; 이유 모를 몸살이라 제대로 정신도 못 차리고 지냈네요..
아프면서 감정이 낮아져서 그런지, 지훈이의 이야기가 너무 쓰고 싶더라구요.. 갑작스럽게 바뀐 분위기에 적응 안되시는 독자님들께도 죄송합니다 ㅠㅠ
분량도 짧기만 하고.. 너무 죄송하네요..
다음 화는 좀 더 분량 많고 퀄리티 있게 들고 올게요 ㅠㅠ
암호닉은 다음편부터 올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 화에 있던 투표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오늘 새벽까지니 안 해주신 분들 한 번씩만 부탁드릴게요
항상 감사드리고 죄송합니다 ;ㅁ;
(컴백 티저 보셨나요? 옹성우 대존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