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왜 울어."
박지훈은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왔다. 자기 얼굴만한 손으로 내 앞머리를 넘겨 버렸다. 갑작스럽게 드러난 이마와 눈썹에 놀라 얼굴에 열이 올랐다. 뒷걸음질 치는 내 어깨를 붙잡는 힘에 꼼짝하지 못했다. 붉어진 눈과 코가 훤히 보일거라는 생각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박지훈은 어떻게 해서든 내 얼굴과 마주하려고 했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 울었는지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걸 내 입으로 말하는 순간, 비참해질 것만 같으니까. 벽으로 밀쳐지는 강도가 평소와는 달랐다. 등으로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그만해.. 조금 겁이 올라 목소리가 떨렸다.
"왜 우는지 말해."
강압적인 목소리였다. 직감적으로 박지훈이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걸 어떻게 말해. 너무나도 유치하고 서글픈 이유라서, 말했다간 나만 창피할 뿐이잖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누구라도 너는 몰랐으면 하는 이유였다. 나를 좋아한다고,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며 매일 매일 내게 고백하는 네가 알게 되면, 네가 더 상처 받을 것만 같아서. 나보다 네가 더 지쳐할 것만 같아서.. 박지훈은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끝까지 박지훈을 피하다가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박지훈에게 붙잡힌 어깨와 이마에 닿은 뜨거운 열기에 닭살이 돋았다. 꼼짝도 할 수 없는 힘에 새삼 박지훈이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한참을 눈만 감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박지훈의 숨이 코 끝에 닿고 나서야, 나는 풀릴 수 있었다.
"…배진영 때문이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눈을 뜨고 박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런 즉각적인 반응이 대답이 되었는지 박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씨발. 박지훈은 머리를 거칠게 털어냈다. 몸을 돌리고 걸음을 떼려는 행동에 팔을 붙잡았다. 안 돼. 지훈아, 네가 하려는 그거, 제발 하지마. 참고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박지훈은 나에게 붙잡힌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주먹 쥔 박지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냥 나 안아줘, 지훈아… 박지훈의 몸이 돌아갔다. 나를 보는 눈이 슬픈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내게 지금 필요한 건, 그 누구보다 박지훈의 품이라는 걸 알았다. 여전히 눈물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박지훈은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코 끝으로 박지훈의 체취가 훅 끼쳐왔다. 피부로 느껴지는 떨림이, 울고 있는 나의 떨림인지, 박지훈이 붙잡은 손의 떨림인지, 아무도 모른 채로 그저 한참을 안겨있었다.
[워너원/박지훈] 학원물
박지훈이 내게 마음을 전한 건,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도서관에서 자습 할 생각으로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그 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덜 마른 머리를 탈탈 털며 버스에 올랐다. 여름의 끝자락이라 그런건지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 기사님 덕분에 버스 안은 후덥지근 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잘 열리지 않는 창문을 낑낑거리며 여는데, 갑자기 기다란 팔이 불쑥 튀어나와 내 손을 붙잡고는 창문을 끝까지 밀었다. 순식간에 활짝 열린 창문에 얼떨떨해 하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안녕. 고운 미성이었다. 박지훈은 그 때 나를 향해 참 예쁘게도 웃었다. 그 웃음에 박지훈이 천사 같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음… 아무리 더워도 머리는 말렸어야지.'
박지훈은 나를 오랜 시간 알아온 것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너무 익숙하게 느껴지는 말투에 순간 내가 얘를 알고있나 싶어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라고 해도, 이렇게 친하게 대하는 애를 잊을 리가 없는데. 나는 혹시 상처라도 줄까 싶어 말까지 더듬으며 박지훈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정말 미안한데... 너... 나랑 아는 사이야? 박지훈은 또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오늘 처음 보는데. 열아홉 인생을 살면서 그 때보다 더 당황했던 적은 없다고 다짐할 수 있다. 너무나도 황당한 상황에 입만 벙긋거리는 내게 박지훈은 그랬다. 너한테 반한 것 같아. 우리 사귈래? 씨익,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던 탓인지, 지금도 그 얼굴은 머릿속에 낙인처럼 찍혀 있다.
그 후로 박지훈은 집요하게도 나를 쫓아다녔다. 그 때는 모든 게 갑작스러워서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는데, 박지훈은 놀랍게도 나와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버스에서부터 졸졸 따라오던 박지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도 뛰었다. 교문 앞까지 따라 온 박지훈에게 왜 여기까지 오냐며 소리치고 나서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 모습이 같은 교복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박지훈은 그 때도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드는 나를 붙잡고, 지금처럼 눈을 마주하면서 얘기하기를 원했다. 두 손으로 볼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박지훈 덕에 속으로 몇 번이나 경악을 했는지.
수험 생활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무딘건지. 박지훈을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학교에 꽤 많다는 걸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여름 방학이 끝난 날, 개학식에도 수업을 강행하는 학교 덕에 나는 교실에 널부러져 있었다. 잠도 오고 너무 더워서 기운도 없었다. 쉬는 시간이었나, 그 때가. 짝꿍인 대휘가 엎드려 있는 나를 쿡쿡 찌르면서 뒷문을 가리켰다. 저기 누가 너 부르는 것 같은데?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뒷문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로 박지훈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 같아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보이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박지훈이 내게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그 때 순식간에 쏠렸던 여자애들의 시선이란. 매점을 아예 털어 온 건지, 품 안에 잔뜩 담긴 빵을 내게 건내며 박지훈은 해맑게도 말했다. OOO, 우리 사귀자! 나는 정말 쥐구멍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자애들 사이에선 그렇게 내가 슈퍼스타가 되어 있었다. 말만 슈퍼스타지, 박지훈에게 사랑 받는 만인의 부러움의 대상이나 다름 없었다. 급식실이나 이동수업을 갈 때마다 꽂히는 시선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기도 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엔 결국 적응해버리고 말았지만서도… 박지훈이 새삼 인기가 많구나 느꼈던 계기였으니까. 하지만 여러 말들이 더 많아졌던 건, 내가 2년 째 배진영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 반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애는 없을 정도로 나는 배진영을 열렬히 좋아했다. 8반 배진영, 하면 걔를 짝사랑 하는 1반 OOO. 그리고 그런 OOO한테 매일 사귀자고 하는 2반 박지훈. 결국 얽히고 얽혀 삼각관계 아닌 삼각관계 때문에 선생님들조차 이 상황에 대해 흥미를 가지시곤 했다.
진영이한테 또 차였다면서? 그냥 지훈이 받아줘라, OO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장난치시던 선생님이 그 때보다 원망스러웠던 순간이 있었을까.
박지훈도 내가 배진영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게 사귀자며 학교로 같이 거의 뛰듯이 걸어갔던 날, 내가 겨우 내뱉은 말이 그거였으니까.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박지훈은 그 물음에 가만히 나를 보더니,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래서, 사겨? 그 물음은 은근히 내게 상처로 돌아왔던 것 같기도. 내가 박지훈을 거절하고 있듯이, 배진영은 나를 수도 없이 거절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내가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게 자꾸 여지만 주는, 나쁜 놈이었으니까. 내가 간신히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박지훈은 그러면 상관 없어, 라고 했다. 남자친구가 없는 이상, 누굴 짝사랑 하고 있던 네 마음이니까. 그렇다고 포기하라고는 하지 마. 이건 내 마음이니까. 너무나도 당당하게 마음을 표현하며 학교로 들어가던 박지훈의 뒷모습이 내심 멋있어 보였었지.
"…다 울었어?"
두 엄지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부벼주는 손길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밀려오는 미안함. 얼굴을 만져주는 다정함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박지훈은 그런 내 마음을 다 아는것처럼, 말없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닦기만 하면 피부가 따가울까, 교복 소매를 붙잡고 두드리는 게 마냥 조심스러워서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나는 것처럼 아팠다. 배진영 때문이냐고 묻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배진영한테 차였어? 배진영이 너한테 모질게 굴었어? 배진영 또 찾아 갔어? …아직도 배진영을 좋아해?
박지훈에게 정말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박지훈을 피하려고 했던 거였고, 나는 그저 그걸 실패한 것 뿐이었다.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다짐으로 배진영 앞에 섰고, 배진영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매번 거절했던 그 말로 나를 내쳤다. 미안한데, 난 여전히 널 좋아하지 않아. 그만할 때도 됐잖아. 이제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자꾸 이런 얘기로 애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거 듣기 거북해. 너랑 널 좋아하는 애뿐만 아니라 나까지 불편해졌어.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하자. 나도 힘들어. 지친다고. 정말 일 그램의 감정도 없이 내뱉는 말에, 처음으로 배진영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여지를 주면서 나를 흔들었던 것보다, 차라리 지금처럼 나를 아예 끊어버리는 게… 정말 나를 위한 길인 걸 아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배진영은 내 어깨를 토닥이고는 사라졌다. 그게 정말 고마운데, 너무 고마우면서도, 예쁘게 묶으려고만 했던 리본 끈이 결국 닳아서 끊어져 버린 것처럼, 마음이 동강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배진영에게 거절 당하고 나서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하필 그걸 박지훈에게 들킬 게 뭐람. 평소처럼 다가오던 박지훈을 피하려던 찰나에 붙잡혀서 끌려 온 학교 뒤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박지훈은 여전히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닦으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런 박지훈을 올려다 보았다. 너는 왜 나를 모질게 대하지 않아? 왜 널 좋아하지 않는 나를 끝까지 붙잡아 주는 거야, 지훈아? 쓰읍. 아무런 질문도 건내지 않고, 그저 속으로 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박지훈은 갑자기 아랫입술을 깨물며 혼내는 듯이 눈에 힘을 주었다. 이상한 생각하면 혼난다고 했다. 마치 내 속마음을 다 들은 것 마냥,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것 마냥.
ㅡ 좋아해는 안 쓰고 뭐하는 거냐고 물으시면, 할 말이 없으니 죄송합니다..
저번에 투표에서 기타에 표를 주신 분들 중에서 학원물이 보고싶다고 하셔서 한 번 끄적여 봤습니다..
완성은 아니고.. 언젠가는 뒷 얘기도 같이 끌어서 올 것 같습니다 하하..
좋아해 15편은 오늘 낮이나 밤에 올라올 예정이니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하핳..
(메타메타몽몽 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