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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헌터(City Hunter)

 

1부   -   2부

 

 

 

 

 

 

 

 



 

시티헌터(City Hunter)
W. Morning

 

 

 

 

Prologue

 

우린, 그들을 기억해야만 해.
그들을 잊어서는 안 돼.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기억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한 남자가 무언가에 굉장히도 몰입한 표정으로 컴퓨터의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바삐 타자를 쳐내려가는 그는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자신의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다른 이가 결국엔 그의 머리 뒤통수를 탁,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게끔 때리며 소리를 쳤다.

 


" 야, 이창선! 넌 하라는 일은 안하고 매일 이 짓이야? "
" 아, 선배! "
" 야 인마. 네가 평범한 회사원이야? 허구한 날 이런 글 놀이나 하고 자빠져 있게? "
" 아씨, 어차피 임무도 없잖아요! "

 


자신의 꾸짖음에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타자를 쳐내려가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결국엔 쯧쯧, 혀를 차며 한 마디 내뱉었다.

 


" 네가 그건 써서 뭐하게? 이 사람들이 제 친구들입니다. 하고 광고라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네가? "
" 아씨, 난 그 정도로 속물 아니거든요! "
" 그럼 이걸 책으로 내려는 이유가 뭔데. 국가 망신시키려고 아주 작정을 했어? "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툭툭 내뱉듯 기분 나쁘게 말하는 선배의 태도에 기분이 나쁜 듯, 창선이 양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항상 큰소리만 뻥뻥 치고 다니지. 이런 남자가 자신의 선배라는 사실에 창선이 답답한 듯 한숨을 푸욱 내쉰다. 이제 조금 있으면 끝이 나는데, 자꾸만 와서 닦달을 해대니 집중이 안 돼서 써내려 갈 수가 없잖아! 결국엔 소리를 치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는 창선이었다. 그에 남자가 혀를 차며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고, 그에 기쁘다는 듯 속으로 연신 예스를 외친 창선이 본래 자신이 하던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낼 수가 있다. 이제 단 몇 줄만 써내려 가면, 그러면 모든 것이…

 


" …다 됐다. "

 


드디어 완성되었다. 이제 이것을 세상에 발표하기만 된다는 사실에, 뿌듯한 마음이 앞서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그리움이 피어올라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들 멤버 중 자신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던 그 한 사람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당신들의 용감함을 내가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꼭 알리고야 말겁니다. 당신들이 목숨 걸고 싸워주었던 그 모든 시간들은 절대로 이대로 묻혀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요. 국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나는, 당신들을 적으로 맞아야만 했었죠. 그랬기에 나는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후회하고, 또… 앞으로를 후회하며 살 겁니다. 아마도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당신들을 꼭… 다시 만나고 싶어요. 다시 만나서 물어보고 싶어요. 모두가 겁내고 피하던 국가에게 도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덤빈 것이냐고. 그렇게 덤벼서 당신들은 과연 무엇을 얻었냐고, 언젠가 꼭 한 번 만나서 물어보고 싶네요. 그럼 저는 당신들을 만날 그 날만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그렇게까지 몇 년을 노력한 책은 출판이 되긴 했으나 국가의 압력으로 인해 금세 단종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퍼지고 퍼져서 이내 모든 포탈사이트의 검색어 1위를 차지했고, 이 모든 일을 벌인 창선은 결국 자신의 직장조차 그만두고 국가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지만 어디로 숨어버린 것인지 국가조차 그를 찾지 못하였고 이내 사건은 일파만파 커져 국가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국민들은 분노하였고, 국가는 변명을 하기 바빴다. 자신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이것은 모두 지어낸 일들이라고 말이다. 그 사건이 더 커지자 국민들은 책을 다시 출판하라며 항의를 하였고, 결국 그 책은 다시 출판이 되어 베스트셀러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야, 너 그 책 읽었어? "
" 당연히 읽었지! 넌? "
" 나는 오늘 집에 가면서 사서 보려고! "
" 야, 그거 진짜 대박이야. 그, 남우현인가? 그 사람하고 김성규라는 사람 어찌나 불쌍하던지. 진짜 눈물겹더라. "
" 아 진짜? 그 정도야? "
" 응, 완전 슬프고 감동에다가 멋있고. 진짜 베스트셀러일만 하다니까? 게다가 실제 사건이니까. "

 


여전히 국민들의 화젯거리는 창선이 썼던 그 책이었고, 학생으로 보이는 두 소녀는 책의 내용을 이야기 하며 이내 학교 앞에서 헤어졌다. 아직 책을 사지 못했다던 소녀는 서둘러 서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소녀는 바로 앞에서 자신과 똑같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외모가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일까,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는 얼른 책을 계산하고 서점을 빠져나갔다. 그런 소녀가 귀여웠는지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들어 맨 뒷면을 펼쳤다. 그리고 곧 그 페이지를 본 남자의 얼굴이 내용을 약간은 씁쓸하게 일그러졌다. 바짝 마른 입술을 반들반들하게 침으로 축인 남자는 책을 펴둔 채로 분주하게 서점을 빠져나갔다. 그가 아무렇게나 두고 간 책의 맨 뒷장이 펼쳐져 그 안의 내용들이 고스란히 보여졌다.

 


국가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남 우현.
가족에게 버림받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김 성규.

그리고 그런 그 둘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섯 명의 친구들
이 호원, 장 동우, 김 명수, 이 성열, 이 성종, 정 아란.

국가는 눈물겹고 아픈 싸움을 벌이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고, 끝끝내 죽이려 들었지만 그들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국가와 맞서 싸워주었다.

 

  ……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시티헌터 (City Hunter)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무척이나 괴로운 듯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한다. 이불을 쥔 손조차도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이 보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들 정도의 몸부림이었다. 악몽이라는 꾸는 것인지 두 눈을 꾹 감은 채 괴로워하는 그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모두 젖어버린 상태였고, 이내 그 눈물은 침대 시트를 흠뻑 적시고야 말았다. 무엇이 이리도 남자를 괴롭게 하는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남자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악몽에 시달려야만 하는 것일까.

   [ ' 우리 아들…. 너만은, 너만은 꼭 살아다오. ' ]
   [ ' 우린 널 원망하지 않는단다, 우현아…. ' ]
   [ ' 도망가… 도망가, 우현아! ' ]


" 가지마. 나만 두고 가면 안, 돼…. 으윽, 으아악! "

 


같은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던 남자가 꿈에서 깨어난 것인지 몸을 벌떡 일으키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 얼굴은 여전히 눈물범벅이고, 그는 괴로운 듯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며 잔뜩 몸을 웅크렸다. 그 때 마침 도어락이 해제 되는 소리가 들려오고, 두 사내가 집으로 들어서다가 잔뜩 웅크리며 괴로워하는 그 모습에 놀라 재빨리 달려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남자의 팔을 잡아챘다

 


" 정신 차려, 남우현! 나 이호원이야! 우현아! "
" 하아….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

 


호원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우현은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우현에게 호원이 한 마디 더 하려던 찰나, 그의 동생인 성종이 막아서며 자신이 하겠다며 호원을 다독였다. 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는 그의 행동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성종이 이내 고개를 돌려 우현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몸부림 치고 있는 우현의 팔을 강하게 끌어 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 가녀린 체구에서 어찌 그리도 강한 힘이 나오는 것인지, 여전히 몸부림치는 우현을 꼼짝 못하게 자신의 팔로 감싸 안은 성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괜찮아요, 형. 다 괜찮아요. 형 탓이 아니에요. 아줌마도, 아저씨도… 그리고 부현이 형도, 원망하지 않아요. 절대로 형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형, 제발… "
" 흐윽…. "
" 그 악몽에서, 이제 그만 빠져나와요…. "

 


편안하고도 따뜻한 그의 음색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던 우현이 서서히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성종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고, 호원 또한 애써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꽈악 물어본다.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잠잠해진 우현이 서서히 성종의 품 안에서 나와 조심스레 이불을 그러모아 쥐었다.

또다. 또 다시 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한참동안이나 이불을 쥐고 있던 우현이 주먹에 힘을 풀어 보이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 왔어? 아침에는 오지 말래도. "
" 네가 이렇게나 괴로워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안와? "

 


정말 바보 같다 너는. 등신 머저리 같은 새끼야. 남우현, 너는. 완전히 까지는 아니어도 이제 조금 덜 아파할 때도 되었는데…. 저 등신 같은 새끼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더 괴로워했고, 슬퍼했다. 내 목숨과 다를 바 없는 남우현 너는… 여전히 1년 전의 그 악몽에서 빠져 나오질 못하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너는 굉장히 밝고 장난스러운 아이었는데. 지금의 넌 꼭 물을 먹지 못해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는 식물의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1년 전의 그 사건은… 너에게서 수분을 앗아가고 여전히 너를 죽이려든다. 남우현, 내가 널 어쩌면 좋을까. 내가 널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제발… 그 입을 열어 대답 좀 해주라.

가슴이 먹먹해진 호원이 거칠게 셔츠 단추 두어 개를 풀어 헤치고 털썩, 소리를 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그를 보며 픽, 하고 웃어버린 우현이 침대에서 내려와 팔짱을 낀 채로 호원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콜라 한 잔 할 테냐, 라고 물어왔다. 그에 더더욱 마음이 아파 좀처럼 표정이 풀리지 않는 호원이다.

잠에서 깨어난 너는 1년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남우현인데… 너는 어찌하여 그 악몽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일까.

 


" 그래 인마, 콜라 한잔 내와라. 자식이, 그래도 내가 콜라 좋아한다고 늘 사다놓는 모양이다? "
" 그럼, 우리 몇 년 지기인데. 잠시만 기다… "
" 이미 제가 가져왔지요, 콜라! "

 


콜라를 가지러 부엌으로 향하려던 우현의 발걸음이, 그새 콜라를 따라 쟁반에 얹어 가져오는 성종으로 인해 멈추어 섰다. 재빠른 그의 행동에, 하여간. 이성종 눈치 빠른 건 거의 신 급이라니까? 하며, 못 말린다는 듯 미소 짓는 우현이었다. 타는 듯한 갈증에 성종이 가지고 온 콜라를 꿀꺽꿀꺽 목으로 넘긴 호원이 이내 끄억, 하고 트림하자, 우현과 성종이 소리를 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호원은 밀려오는 창피함에 발끈하며 냅다 소리를 질렀고, 두 사람은 배를 잡고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도 웃어서 당겨오는 배를 부여잡으며 침대에 걸터앉은 우현이 가만히 성종을 응시한다. 성종은 콜라가 담긴 컵을 잠시 내려놓고는 팔을 걷어 부치며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그런 그에게 물음을 던지는 우현의 음성이 굉장히 조심스럽다.

 


" 어때? 진전이 좀 있어? "
" 야, 말도 마라. 성종이 저 자식이 눈에 불을 켜고 매일 컴퓨터만 만져대는데도 영 진도를 못나가고 있어. 너도 알잖아, 인마. 성종이 혼자서는 절대 못 뚫어. 그쪽 프로그래머들이 만만한 실력인 것도 아니고. "

 


성종을 향한 물음에 대답한 것은 호원이었다. 가득 담겨져 있던 콜라를 그새 다 마신 것인지 빈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호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성종도 답답한 듯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 형, 나는요. 나 이성종은, 내 실력에 절대로 의심을 갖지 않았어요. 내 실력은 정말 최고인데…. 그렇게만 믿어왔는데. "
" ………. "
" 뚫을 수가 없어요. 내가 간신히 암호를 풀고 들어가려 하면 그쪽의 여러 명이서 또 다시 방화벽을 쳐버리고 말아요. 악순환의 반복이에요. 나 같은 해커가 단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잠시나마 보안을 뚫는 건 가능할 텐데…. "
" 이성종, 내가 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 말랬지. 지금 우현인 절대로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몰라? 이 상황에 생판 모르는 사람을 들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너는? "
" 알아. 나도 안다고!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더 미치겠는 거 아니겠냐고! "

 


성종의 조심스런 제안에 호원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고, 성종 또한 호원을 노려보며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두 형제의 다투는 모습에 우현의 미간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자신의 일에 두 형제를 개입 시키는 것이 아주 이기적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호원과 성종이 반드시 필요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주는 친구들이고, 마지막 남은 가족이었으니까.

나는 국가에게 배신당했다. 내가 그리도 사랑하고 사랑하던 국가에게 아주 끔찍한 배신을 당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아니, 반드시 찾고 말 것이다. 꼭 찾아서 복수 할 것이다. 나에게 지옥을 보여준 그들에게… 더한 지옥을 맛보게 하고 말 것이다.

한동안 세 사람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았고 싸늘한 정적만이 주위를 맴돌았다. 이런 분위기가 싫었던 우현이 한마디 하려던 찰나, 호원의 핸드폰이 신나게 울려댔다. 그에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발신자를 확인한 호원의 입에서 낮은 욕 짓거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는 호원이었다.

 


" 네, 여보세.… "
[ ㅡ야 이 자식아! 너 제정신이야, 이호원?! ]

 


하지만 곧이어 터져 나오는 상대방의 목청에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또 다시 낮게 욕을 읊조리는 호원에게, 으이구- 이 욕쟁아. 하고 우현이 핀잔을 주자, 조용히 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 보인 호원이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 아이, 우리 예쁜 창선이가 왜이러실까, 응? "
[ ㅡ너 당장 안 들어와?! 이게 어디서 허구한 날 지각이야, 지각이! ]
" 안 그래도 들어가려고 했… "
[ ㅡ30분 내로 팀장님 눈앞에 안보이면 감봉 될 각오하래! 그런 줄 알고, 끊는다! ]
" 아, 저기 창선아! 이창선!? 아, 미치겠네, 진짜? "

 


끊긴 전화기를 멍하니 쳐다보며 답답하단 듯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는 모습을 바라보던 우현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 얼른 들어가 봐. 이러다 진짜 해고라도 당하면 어떡해? 그럼 우리 프로젝트도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 알지? 얼른 가봐. "
" 아, 국정원은 뭔 놈의 쉬는 날이 없어! 공무원인데 완전 개 부리듯 부려먹고. 아아, 내가 이럴 시간이 없는데? 나 간다!"

 


정신없이 마구 투덜대던 호원이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린 듯 허겁지겁 겉옷을 챙겨들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집을 나섰다. 그런 호원을 보며 성종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하여간. 철이 없어요, 철이. 자신도 모르게 뱉은 그 말에 우현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고, 그런 그의 모습에 성종이 입을 샐쭉거리며 말했다.

 


" 형은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요? “
" 응? 그냥. 너희들 티격태격 하는 거 보면 웃기거든. "
" 하긴. 저 멍청이 이호원이 웃기긴 하죠. "

 


뜬금없는 그의 반말에 우현이, 뭐? 이 자식이 어디서 형한테? 하며 성종에게 꿀밤을 먹였다. 그에 성종이 왜 때리느냐 소리를 쳤지만 우현은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의 웃음에 성종은 잠시 동안 슬픔에 휩싸였지만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잠시뿐이었다. 곧 우현이 눈치 채지 못하게끔 환히 웃어 보인 성종은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형을 위해서… 나는 꼭 이 비밀을 풀어야만 해.

그렇게 성종이 다시 컴퓨터에 몰입하고 있을 때, 우현이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성종이 그의 팔을 저도 모르게 잡아채고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 물어왔다.

 


" 형, 어디 가게요? "
" 매일 가던 Bar에. "
" 이 아침부터요? "
" 뭘 새삼스럽게 그래? 원래 늘 이 시간에 갔잖아. "

 


1년 전, 그 일이 있던 후 부터 단 하루도 술을 떼고 살아본 적이 없는 우현은 늘 아침에만 술을 입에 대곤 했다. 그리고는 집에 와 하루 종일 자고, 또 다시 악몽을 꾼 채로 잠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우현은 여전히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는 예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남우현인데, 막 잠에서 깨어난 그는 너무나도 아프고 괴로울 뿐인… 그런 남자였다.

늘 그래왔듯 오늘도 역시나 술을 마시러 간다는 그의 말에 성종이 한숨을 크게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술로써 잠시나마 고통을 잊으러 가는 그를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호원이형이었더라면 어떻게든 말리기라도 했을 텐데, 나 이성종은 그러지를 못한다. 술이 들어가야만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다는 그를 어찌 말릴 수가 있을까.

 


" 그럼 다 마시고 올 때 연락해요. 데리러 갈게요. "
" 그래. "

 


자신을 걱정하는 성종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선 우현이 택시를 잡아타고는 매일 가던 Bar의 이름을 대었다. 그러자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출발시켰다.

늘 자신을 걱정해주는 호원과 성종에게는 딱히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더더욱 속만 썩이고 마는 못난 자신이었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다. 이렇게나 한심하게 구는 내가 뭐가 좋아서 너희들은 그렇게나 날 감싸고도는 것일까. 우현은 문득 자신의 왼쪽 손목에 끼워져 있는 하얀색 밴드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자살시도를 했던 그 날, 의식을 차린 나에게 너희들은 왜 그런 미련한 짓을 했냐며 다그치는 말이 아닌… 눈물범벅인 얼굴로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바로 그 날, 처음으로 너희들에게 안겨 펑펑 울었었지. 아마도 그 때 모든 감정이 터져버렸던 것 같아. 가족들의 죽음에도… 나는 가슴만 찢어지고 뭉개졌을 뿐, 눈물은 나오지 않았는데. 나보고 살아주어서 고맙다는 너희들의 그 진심어린 한마디에… 내 눈물샘이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막을 힘이 더 이상 없었나봐.

 


" 다 왔습니다. "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택시기사의 말에 우현이 돈을 내밀고는 택시에서 내려 자신이 늘 찾던 Bar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꼭… 자신의 가족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 날처럼.

 

 

* * *

 

 

한편, 우현이 들어간 Bar에서 살짝 떨어진 건물 뒤편에서는 한 남자가 마악 건물로 들어간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내 손에 쥐고 있던 사진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 찾았다, 남우현. "

 


그렇게 말한 남자의 재킷 안쪽에서는 은색의 작은 리볼버가 그 빛을 발하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이내 품안의 그것을 꺼내어 들어 작게 입 맞추고는 다시 품 안에 조심스레 넣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입가엔, 여전히 의미 모를 웃음만을 머금은 채로.

 

 

 

 

 

 

 

 

 

 

 


시티헌터(City Hunter)  

 

 

여유로운 미소를 매단 채 국정원 본사로 들어섰지만 이내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선배들과 동료들의 시선에 호원은 미소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제 때 출근한 적이 손에 꼽을 만큼 매우 적은 자신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눈총을 받는 것 또한 당연했다. 이렇게나 불성실한 일 태도라면 잘릴 법도 했지만, 국가는 호원을 자르지 못했다. 그는 이 국가 안보팀에 단연 1위로 입사한 특채 중에 특채였다. 뛰어난 두뇌와 언변, 그리고 엄청난 전투능력까지. 모두가 그를 보며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어떠한 사건이 주어졌을 때 그가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은 없었다. 그랬기에 이러한 그의 태도에도 국정원은 주의만 줄 뿐, 그를 내치지 못했다.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몸을 낮게 숙이고 들어오는 호원의 모습에 창선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런 그를 보며 호원이 바보같이 헤- 하고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는 것인지, 정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창선의 어깨를 툭, 하고 친 호원이 잠깐만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해보였다. 얼씨구, 오자마자 이건 또 땡땡이 칠 궁리만 하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 같은 호원의 모습에, 절로 한숨을 나왔다. 그렇지만 마침 자신도 답답하던 참이어서 결국엔 그를 따라 나서기로 한다.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휴게실로 나가자 자판기에서 막 뽑은 듯한 차가운 캔 음료를 던지며 호원이 미소 지었다. 얼떨결에 음료수를 받은 창선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음료수 캔을 따 입안에 한 모금 털어 넣는다.

 


" 팀장님 화 많이 났지? "
타는 듯한 갈증에 음료수를 계속해서 들이키던 창선에게 말을 건네는 호원이었다. 그에 음료수를 원 샷 해버린 창선이 캔을 시원하게 구겨버리고는 입을 연다.
" 그걸 아는 녀석이 이렇게 매일 늦어? "
" 뭐, 늦어도 난 안 잘리잖아? "
" 얼씨구? 너 조심해. 그러다가 진짜 훅 간다? "
" 야야, 너도 알잖아. 난 누구한테 얽매이는 거 싫어. "
" 그런 놈이 그럼 여긴 뭣 하러 계속 다니고 있대? 그만두고 다른 직장 구하면 되잖아. "

 


그리고 그 순간, 내내 장난스레 웃으며 대답하던 호원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히고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이 처참히 구겨졌다. 창선은 갑작스레 굳어진 그의 얼굴에 내심 당황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호원 때문에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았고, 그 긴 시간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호원이었다.

 


" 내가 이곳에 계속 남아있는 이유를 알고 싶어? "
" 야 인마, 왜 혼자 심각… "
" 나는 이곳에 남아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

 


그렇게 말하는 호원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했다. 그의 진지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던 창선으로썬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호원이 아픈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창선아 미안해. 넌 나에게 있어서 정말 좋은 친구지만 언젠간 우린 적으로 만나게 되겠지. 너를 속이고 이곳에 있어야만 했던 나를… 너는 과연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호원이 시선을 돌려 휴게실의 투명한 문 맞은편에 있는 국가기밀자료 열람실 쪽을 바라보았다. 저곳엔 분명히 있을 텐데. 우현이 너를 그리도 아프게 만들었던 이들의 자료가, 저곳엔 분명히 존재할 터인데.

계속해서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눈치 챈 창선이 호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 이호원. 제발 저곳은 넘보지 마라. "

 


날이 선 창선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호원의 시선은 그곳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런 그의 태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창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너 저번에도 저곳 근처에서 얼씬거렸다는 것만으로도 한 달간 시달렸잖아. 너 정말 그러다 큰일 난다. 혹시나 의심이라도 사는 날엔 너도 남우현 팀장님처럼…! "
" 남우현처럼? 남우현이 뭐. "

 


창선의 입에서 나온 우현의 이름에, 호원이 얼음장같이 표정을 굳히며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창선이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지만 말은 이미 뱉어진 후였다. 이호원 앞에서 남우현이란 이름은 금지 중에 금지인 것을 잠시 잊었다.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호원을 마주한 창선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아니, 나는 그냥…. 혹시나 네가 실수해서 남우현 팀장님처럼 그렇게 될까봐… 걱정,돼서…. "
" 이창선. "
" ………. "
" 다시는, 내 앞에서 남우현 이름 꺼내지마. "
" 야, 이호… "
" 오늘 어차피 일 없지? 난 출석도장 찍었으니까 이만 간다. 팀장님한텐 잘 말해줘. "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휴게실을 나가려는 호원에게 다급히 소리치는 창선이었다.

 


" 우현 팀장님 기일이 얼마… 안 남았지? "

 


그의 말에 서둘러 움직이던 호원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어 섰다. 그에 창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혼자 속 끓일까봐 그런다. 넌 우현 팀장님이랑은 더 각별했으니까. 혹시 술 상대 필요하면 부르라고. "
" …필요 없어. "

 


걱정 어린 그의 말에도 호원은 꿈쩍 안 하고 다시 발걸음을 바삐 하며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가 나가버린 그 자리엔, 호원이 먹다 말고 구겨버린 음료수 캔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창선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호원, 너는 어째 좀 가까워졌다 싶으면 멀어지고… 그런다. 참 아이러니한 놈이야, 너는. 쓴 미소를 짓던 창선이 이내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빠져나간다.

 

 

* * *

 

 

홀로 복도를 터벅터벅- 힘없이 걷는 호원의 표정이 점점 구겨져간다. 무표정하던 그의 표정은 이내 보는 사람까지도 슬프게끔 일그러지고 말았다.

 


" 남…우현. "
너는, 왜, 어째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너는, 너는, 너는……

" 하아…. "
네가 왜… 죽은 사람이어야 해? 어째서 네가, 도대체 남우현이 왜… 모든 사람에게 죽은 사람으로 기억 되어야만 하는 건데? 너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마음의 병을 앓고 있긴 해도 너는 여느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먹고, 웃고, 울고 다 하는데. 어째서 남우현 너는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선 죽은 사람이어야만 하는 거야? 네가 뭘 잘못했어. 너의 가족만큼이나 이 나라를 사랑해서 국가가 시키는 일은 뭐든 기쁘게 했던 네가… 그런 네가 왜 이런 아픔을 받아야만 하는 건데? 우현아, 나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가. 그건 아마…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똑같을 거야. 왜 하필 너여서, 하필 남우현이어서…

 


" 우윽… "

 


네가 울지를 못하니 내가 대신 울어줄게. 내가 힘들 때는 네가 나대신 울어주었으니, 이번엔 내가 너를 대신해서 울어줄게.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만 했던 너를 대신해서, 내가 아파해줄게. 차라리 네가 아무것도 기억 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예전의 밝고 밝던 남우현으로 돌아가서 환히 웃어만 준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와 성종이는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남우현 너만 그렇게 웃어준다면.

 

 

* * *

 

 

Bar 안으로 들어선 우현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의아해했다. 원래 아침에 사람이 별로 없긴 했지만 아예 없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게다가 바텐더까지도 없다니. 이상하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우현은 이내 늘 가던 자리로 향했다.

 


" 이게… 뭐야. "

 


자신이 자리에 늘 마시던 술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항상 이 시간에 오는 자신을 위해 바텐더가 놓고 간 것일 거라 생각한 그가 자리에 앉아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이상하게도 이곳에만 오면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항상 이곳만을 찾았다. 그것도 늘 같은 시각에. 또 다시 떠오르려는 아픈 기억을 애써 떨쳐내려 고개를 휘휘 저은 우현이 다시 술잔을 기울이려 하는데-

끼이익-

웬 남자가 자신의 옆자리에 있던 의자를 빼더니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자리도 많은데 왜 굳이 자신의 옆자리인 것인지,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느껴졌지만 옆자리에 앉는다고 그다지 해가 될 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겨버린다. 하지만 곧 옆의 남자가 계속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우현은 차마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힘들었다. 불쾌해진 기분에 한마디 하려는 우현을 제치고 남자의 음성이 먼저 들려왔다.

 


" 노래 한 곡 들으실래요? "
" …네? "

 


뜬금없는 남자의 말에 놀란 우현이 되묻자,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살짝 미소를 머금더니 이내 그 조그마한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했다.

 

Lips are turning blue
A kiss that can't renew
I only dream of you
My beautiful

입술은 파랗게 변해가고
다시 키스할 수 없지만
난 당신만을 꿈꿔요
내 아름다운 이여.

Tiptoe to your room
A starlight in the gloom
I only dream of you
And you never knew
발소리를 죽이고 당신의 방 안을 걸어요
어둠속에서 별빛이 빛나네요
내 꿈엔 당신만 보이는데
당신은 그걸 모르는군요.

Sing for absolution
I will be singing
And falling from your grace

용서받기 위해 노래해요
난 노래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은총을 잃게 되겠죠.

There's nowhere left to hide
In no one to confide
The truth burns deep inside
And will never die

더 이상 숨을 곳은 없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진실은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져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

Our wrongs
Remain unrectified
And our souls
Won't be exhumed

우리의 죄는
정화되지 않고 남아있고
결국 우리 영혼은 구원받지 못할 거예요.

 


처음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지만 우현은 남자의 노래에 점차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허스키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노래가 끝난 후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받은 우현이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왠지 이곳에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불안하게 마구 뛰어대는 심장고동을 느끼며 우현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던 찰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Stop. 남우현씨 거기까지 입니다. "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모르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놀란 우현이 몸을 돌려 그와 얼굴을 마주한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 게다가 아까부터 남자의 입가에 자리하고 있는 저 비릿한 미소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온 몸을 덮쳐오는 불쾌함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계속해서 변하는 자신의 표정이 오히려 남자에게는 즐거움이 된 것인지, 그는 더더욱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고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이 열리고, 곧 이어 나긋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 이름 남우현, 나이 27세, 혈액형은 B형, 현재 직장은 없지만 1년 전까지만 해도 국정원… "
" 당신, 누구야. "
" 흐음- 글쎄요. 내가 누군지는 차차 알게 될 거고…. "
" ………. "
" 남우현씨, 저는 당신에게 두 가지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 두 가지 용건…? "
" 네. 일단, 첫째는… "


철컥-

조그맣고 새빨간 입술을 열어 말하던 남자가 표정을 굳히며 품 안에 있던 은색의 리볼버를 재빠르게 꺼내어 우현의 이마 정중앙에 겨누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등에선 연신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의 이마에 겨누어진 총구가 굉장히 서늘했다. 당황한 그의 표정을 즐기는 듯 하던 남자가 다시 한 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 당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
"  ………. "

 


자신의 존재는 호원과 성종만이 알고 있을 텐데 대체 누가 그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남자는 살인 청부업자인건가?

이마에 총이 겨누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현의 머리는 재빠르게 회전했다. 아까의 당황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검은색의 동공은 얼음장 같이 차게 식어 있다. 남자는 그의 반응에 또 다시 재미있다는 듯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두 번째 용건은. "


……!!!

남자의 두 번째 행동으로 인해 우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마에 겨눠진 총이 서서히 내려가, 은색의 작은 리볼버는 이내 다시 남자의 품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당신과, 거래하기 위해서예요. ”

 


갑작스런 그의 제안에 우현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자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살인을 하러 온 것이 첫 번째 용건. 그리고 또 다른 용건이… 자신과 거래하는 것이라니. 우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를 노려보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왠지 그 미소가 묘하게 야해 보여, 밀려드는 이상한 감정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곧, 남자의 탐스럽고 붉은 입술이 또 다시 곡선을 그리며 열렸다. 


…도대체 당신은.


"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남우현씨. "

 


……누구야.

 

 

 

 

 


시티헌터(City Hunter)

 


"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그런 우현의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앞에 놓여있던 보드카를 술잔에 따라 제 입에 한 모금 털어 넘겼다. 그리고는 한참을 아무런 말도 않고 앞만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우현은 아까부터 내리 웃기만 하는 그의 모습이 기분 나빴지만 이대로 몸을 돌려 나갈 수도 없었다. 자신의 신상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한 것이 첫 번째 이유요, 그 '거래' 라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은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남자가 이내 제 품에서 쪽지 한 장 꺼내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우현이 이런 것을 왜 자신에게 주냐는 듯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 김성규입니다. 자세한건 그 쪽지에 적혀있는 제 번호로 연락 주시면 얘기해드릴게요. 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연락 주세요. "
" …뭐라고요? "
"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자신의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성규였다. 그에 어이가 없어진 우현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을 때엔 이미 그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에, 우현이 제 이마를 짚으며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이 모든 것은 꿈인 것일까? 전혀, 도저히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성규라는 남자가 어째서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자신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도대체 살인청부업자가 자신에게는 무슨 볼 일로 온 것인지.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았다. 우현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명함을 조심스레 다시 움켜쥐며 낮게 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 * *

 

 

" 왔어? 어딜 갔다 온 거야. "
" 만날 사람이 좀 있어서. "
" 혹시… 남우현? "
" 응. "

 


우현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성규에게 웬 남자가 컴퓨터 앞에서 지금 막 끓인 듯한 커피를 마시며 물어왔다. 우현을 만나고 왔다는 말에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었다. 정말? 정말? 하며 재차 물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성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을 눈치 챈 남자가 이내 미소를 거두고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궁금한 것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인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여는 남자였다.

 


" 어때? 우리와 함께 일해 보겠대? "
" 본론은 아직 말 안했어. 그냥 내가 궁금하면 연락 달라고 했지. "
" 에? 그러다가 연락 안 오면? "
" 이성열, 동우 형은 어디 갔어? "
" 형 운동 갔… 아씨, 성규 형! 연락 안 오면 어떡할 거냐고! "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응답하려다가 이내 당했다는 표정으로 소리치는 성열의 모습에 성규가 푸흡, 하고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이성열 단순한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열의 머그컵에서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맡고 있으니 자신도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주전자에 물을 채워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리자, 몇 분 안 되어 물이 팔팔 끓어올랐다. 성규는 커피 잔에 커피가루를 넣고, 불을 껐음에도 여전히 팔팔 끓는 주전자의 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뒤에서 쫑알대는 성열에게 여전히 답해주지 않은 채 다시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조심스레 커피 잔을 들어 아직 뜨거운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계속되는 물음에도 대답해주지 않고,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성규의 태도에 잔뜩 열이 오른 성열이 몸을 홱- 돌려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떼었을 때가 되어서야, 나지막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 이성열. "
" ………. "
" 넌 내가 그렇게도 바보 같아? 내가 승산 없는 게임 시작하는 거 봤어? "

 


성규의 물음에 성열이 좌우로 고개를 휘저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여워 보여 성규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커피향이 입안을 맴도는 듯 했다. 그에 그가 꽤나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조금만 기다려봐. 3일이야. "
" …어? "
" 그 안에 반드시 연락이 올 테니까, 가만히 앉아서 지켜만 보라고. "

 


그렇게 말한 성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도 여전히 입가에는 미소를 매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성열이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저 형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 * *

 

 

한편, 호원은 한동안 찾지 않던 스쿼시센터를 찾았다. 웬만해서는 자주 오는 곳이 아니었지만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이곳에 와서 마음껏 라켓을 휘두르며 땀을 빼곤 했다. 그러면 뭔가 마음이 편해지고 후련해졌다. 아까 국정원에서 있었던 창선과의 마찰로 인해 가슴이 답답해져 이곳을 찾은 호원은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늘 자신이 가던 룸으로 향했다. 막 그곳에 다다른 호원의 발걸음이 순간적으로 멈추어 선 것은 그때였다. 이곳은 구석이라 웬만하면 사람이 없는데 한 남자가 열심히 라켓을 휘두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른 곳을 찾아볼까 하던 호원은, 막 운동이 끝난 것인지 뒤쪽의 의자에 가서 앉는 남자를 보고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물을 들이키던 남자가 이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호원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시선이 저절로 그에게 향했다.

남자는 막 운동을 시작한 호원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열심히 라켓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여 자연스레  양 미간이 찌푸려졌다. 호원은 그렇게 30분이 넘도록 쉬지 않고 뛰어 다녔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집중해서 하려고 했던 호원은 뒤쪽에서 계속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 때문에 도저히 운동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그가 한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본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무 무리해서 운동하면 안 좋아요. 몸에 무리가 간다고요. "

 


갑작스런 그의 목소리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아는 사이도 아닌데 충고를 하는 그가 마음이 안 들어 저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남이 운동하는데 그게 무슨 볼거리라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 호원이 샐쭉거리며 입을 열었다.

 


" 제가 무리해서 운동을 하든 말든 그쪽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왜 계속 그렇게 쳐다보시는 건데요? "

 


성난 짐승이 발톱을 세우듯 호원의 목소리에도 날이 섰다. 그런 그의 반응에 당황한 남자가 마구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 아, 아니 저는 그, 그저…! "
" 지금 그쪽 때문에 운동에 집중이 안 되잖아요. "
" 아, 아아- 죄, 죄송합니다. 방해가 될 줄은 몰랐어요. 그저 너무 잘생… "
" …네? "
" 아,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저는… ! "

 


순간적으로 튀어나와 버린 잘생겼다는 말에, 호원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에 더욱 더 당황한 남자가 또 다시 손을 마구 휘저으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더듬거리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결국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손사래를 치던 남자의 행동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갑자기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남자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호원이었지만 이내 라켓을 챙겨들고 그곳을 빠져나가려 몸을 돌렸다. 이 정도면 스트레스도 충분히 풀렸고, 어서 이 찝찝한 몸을 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틀어 나가려는 그의 모습에 놀란 남자가 재빨리 달려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갑작스레 잡혀진 자신의 소매에 뒤를 돌아본 호원이 무슨 일이냐는 듯이 남자를 바라보자, 이번에는 아까처럼 더듬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하는 남자였다.

 


" 제 이름은, 장동우구요. 직업은 의사입니다! "

 


갑자기 달려와 자신을 붙잡고는 제 소개를 하는 뜬금없는 그의 모습에 호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얼빵한 사람이 의사였다니. 조금 의외인걸. 고개를 갸웃하는 그의 모습에 동우가 또 다시 말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 그, 그러니까! 의사로써 그런 충고를 한 것뿐이니까, 오, 오해는 마시라고요! "

 


동우의 말에 호원이 이제 서야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자, 동우의 얼굴이 또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호원은 그런 것 따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둔하고 둔한 남자였다. 그는 여전히 동우의 얼굴을 붉게 물들일만한 멋들어진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 아아… 걱정 마세요. 오해 안했습니다. 그런 거 할 이유도 없고요. 그럼 전 이만. "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그곳을 벗어나는 호원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던 동우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를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자해를 하던 동우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곧, 자신도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 형, 왔어? "
" 어어…. "
" 어땠어? 오랜만에 운동하니까 좋아? "
" 그래, 그래…. "

 


집으로 돌아온 동우에게 이것저것 캐물으며 졸졸 쫓아다니는 성열이었다. 하지만 동우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대충 대답하며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성열이 열 받은 듯 볼을 잔뜩 부풀리며 소리쳤다. 

 


" 아, 왜 다들 나만 무시하는 건데!! “

 


그런 성열의 외침마저도 동우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동우의 머릿속엔 호원의 얼굴만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이내 그가 우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드디어 미친 것이다. 어떻게 여자도 아닌 남자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또  다르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호원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름은 뭘까, 나이는? 직업은? 여자친구는 있는 것일까? 혹, 나를 또라이로 봤으면 어쩌지? 하는 수많은 질문들이 그의 얼굴과 함께 떠다녔다. 결국 동우는 침대에 철퍼덕 누워 이상한 괴성과 함께 마구 몸부림을 쳤다. 

 

" 으아악!! 나 이제 어떡해애!! "

 

 

 

 


시티헌터(City Hunter)

 

 


" 형, 성규 형은? "
" ………. "
" 아씨, 형! "

 


분명 한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성규의 모습을 본 것 같은데 잠시 낮잠을 잔 사이에 사라진 그의 모습에, 성열이 의아해 하며 동우에게 물었다. 하지만 동우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허공을 응시하며 성열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아 진짜 저 형이 어제부터 왜 저래? 어제 운동을 갔다 온 후로 부쩍 이상해진 동우의 모습에 성열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내 성열이 허리에 손을 얹고는 터벅터벅 동우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마구 휘젓자, 그제 서야 눈에 초점이 돌아온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성열을 봐주었다. 그에 이를 악물고는 다시 한 번 성규의 행방에 대해 묻자, 동우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대며 의뢰를 받고 나갔다고 알려주었다. 그 대답에 기가 찬 듯, 또 다시 코웃음을 치며 입을 앙 다문 성열이었다.

김성규 그 일 좀 제발 그만 하라니까. 하여튼, 어지간히 말도 안 들어요. 답답해진 마음에 성열이 냉장고쪽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 찬물을 꺼내어 병 채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아, 시원해. 그제 서야 부글부글 끓던 속이 진정된 것인지 꽤나 만족스런 웃음을 지은 성열은 이내 겉옷을 챙겨 입고는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신발을 신었다. 갑작스레 외출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에 놀란 동우가 드디어 관심을 가져주며 물어왔다.

 


" 너 어디가? "
" 친구 만나러. "
" 오- 네가 친구도 있었어? "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동우의 말투에 성열이 발끈하여 나 친구 있거든?! 소리치고는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섰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 잔뜩 받았던 열이 그나마 좀 식는 느낌에, 입술을 씰룩이며 발걸음을 옮기는 성열이었다. 아주 그냥 나는 우습다 이거지? 하여간 장동우, 김성규 이 못돼 쳐 먹은 뒷방 늙은이들!!

성열이 속으로 열심히 성규와 동우를 씹으며 도착한 곳은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지는 삐까번쩍한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하여간, 김명수 이 자식 허당인 주제에 겉멋만 들어가지고는. 입을 샐쭉거리며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비서인 수연이 또 왔냐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애써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소파로 걸어가 털썩, 하고 앉은 성열이,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 저 마녀의 잔소리가 시작되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수연이 허리에 손을 척 하고 올리고는 자신에게 다다다 쏘아붙였다. 왜 또 오신 거냐는 둥, 변호사님이 그렇게 한가하신 분인 줄 아냐는 둥, 성열씨는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 거냐는 둥 별별 잔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성열이 귀를 막고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수연씨, 그만해. 성열이는 내 손님이라고 했잖아. "

 


문 밖에서 들려오는 수연의 목소리에 성열이 온 것을 감지한 명수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제 서야 한시름 놓은 성열이 귀 옆에 갖다 대었던 자신의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에 살짝 미소 지은 명수가 성열에게 다가가 안 들어오고 뭐했어. 하며 그의 팔을 다정스레 잡아 이끌었다. 그에 쌤통이라는 듯 성열이 수연에게 혀를 내밀어 보였지만 수연은 자신이 언제 성열에게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쏘아대었냐는 듯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차 준비 하겠습니다, 변호사님. 하고 탕비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난 성열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하며 헛웃음을 짓자 명수가 그만하고 들어가자. 응? 하며 자신을 끌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늘 이렇게 마찰이 일어나고 마는 수연과 성열이었기에 더 이상 마찰이 불거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재빨리 데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성열이 아쉬움에 입을 삐쭉이자 명수는 그 모습이 귀여웠던 것인지 그를 단숨에 끌어당겨 자신의 품안에 가두었다.

 


" 이쁜아, 보고 싶었어.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거야? "

 


김명수 또 시작이다. 저 놈의 이쁜이라는 소리. 사실 자신과 명수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고2 때 처음 만난 사이인데, 만나자마자 대뜸 얼굴이 이쁘다고 난리를 쳐대더니 그때부터 줄곧 자신을 이쁜이라고 불러온 명수였다. 물론 초반엔 엄청 말렸었다. 게이로 의심이라도 받고 싶은 것이냐며 방방 뛰며 여러 번 주의를 주었지만 명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결국엔 먼저 두 손 두 발 든 성열이었다.

사실 명수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도 계속 연락을 이어 온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서로 연락이 끊겨버려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명수가 어떻게 안 것인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네 번호 수소문해서 찾느라 나 진짜 고생했어, 이쁜아. 라고 하며.

왠지 저 이쁜이란 말을 들으면 순식간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분명 자신은 명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다. 오늘도 역시나 금세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낀 성열이 서둘러 명수의 품에서 빠져나와 소파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그런 성열이 마냥 귀여운 것인지 명수도 미소를 머금고는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연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명수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성열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성열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애써 그를 무시한 채 차만 홀짝홀짝 마셔대었다. 한참의 정적 후에 먼저 입을 열어준 쪽은 명수였다.

 


"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거야? "
" 응? 뭐가? "
" 왜, 너 무슨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을 때 마다 나한테 와서 한바탕 풀어놓고 가잖아. "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해오는 명수의 모습에, 성열의 가슴에 무언가 와서 콕- 박혔다.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한 그의 모습에, 명수가 슬그머니 입 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배를 잡고 한바탕 웃기 시작했다.

 


" 풉- 푸하핫!! "
" 뭐야, 김명수! 왜 웃어! "

 


숨까지 제대로 못 쉬어가며 웃는 그의 모습에, 성열의 얼굴이 또 다시 붉게 달아올랐지만 명수는 연신 자신의 배를 부여잡으며 아이고, 배야. 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성열의 표정이 안 좋게 변한 것을 눈치 채고는 얼른 웃음을 멈추는 명수였다.

아까 그렇게 웃어댈 때는 언제고 자신이 표정을 굳히니 금방 눈을 데록데록 굴리는 명수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성열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에 그제 서야 안심한 명수가 작게 숨을 내뱉으며 헤- 하고 해맑게 웃었다.

 


" 말해봐.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

 


편하게 미소 지으며 물어오는 명수의 모습에, 성열은 아까 두 남자가 자신을 무시했던 일을 떠올리며 볼을 부풀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아, 너무 귀엽다, 이성열. 그가 귀여웠던 것인지 명수는 잔뜩 부풀어 오른 성열의 볼을 양손으로 마구 잡아당기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그에 성열이 당황하여 어버버 거리며 소리쳤다.

 


" 기며스! 다자 이그 아 놔?! "
" 푸하핫! 뭐라고 성열아? "
" 너 이그 아 노면 전가이에 피머드 쭈 아러! " (너 이거 안 놓으면 정강이에 피멍들 줄 알어!)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엄포하듯 말을 하는 성열의 태도에도 명수는 그저 자신의 손에 잡혀 어버버 거리는 그가 귀여워 놔 줄 생각을 안했다. 자신은 잡힌 볼이 너무 아파 죽겠는데 정작 얄밉게 실실 웃기만 하는 명수의 모습에, 성열은 점점 자신의 분노게이지가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참을 忍자를 새기며 3초를 줄 테니 어서 이 손을 놓으라 다시 한 번 말했지만 정말 겁을 상실한 모양인지 명수는 여전히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싫은데? 싫은데? 하며 성열을 약 올리기 바빴다. 결국엔 모든 것이 다 터져버린 성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명수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세게 차버렸다.

 


" 우아아악!! "

 


명수는 습격을 받은 자신의 정강이를 부여잡고는 바닥을 이리저리 뒹굴었다. 성열이 그런 명수를 보며 내가 분명 경고했지? 네 정강이에 피멍 들게 해주겠다고! 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명수는 자신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이는 것을 느끼며 이쁜아아… 이건 피멍 정도가 아니라 금갔겠다아…. 하며 신음했다. 하지만 성열은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렸다. 한참을 자신의 정강이를 문지르던 명수는 그제 서야 고통이 가신 것인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씩씩거렸다. 으이구, 변호사씩이나 되는 녀석이 품위 없게 촐싹대기나 하고 잘한다, 잘해. 성열이 속으로 명수를 마구 씹으며 한심하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변호사가 된 것은 정말 놀랄만한 일이긴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 바로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분명 형사가 될 거라고 큰소리를 떵떵 치던 녀석이었으니까 말이다. 후에 왜 형사가 아닌 변호사가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형사로 일을 했었는데 큰 사건을 맡았다가 심하게 다쳐 한동안 혼수상태였다고 한다. 어차피 자신은 이런 일을 각오하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만 하라고 애원을 하셨단다. 더 이상 자식이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마음이 너무 아프시다고. 매사에 진지함이 없고 늘 장난스러워 보여도 누구보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명수였기에,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원하던 변호사가 된 것이라고. 원래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는 늘 상위권에 머물렀던 아이어서 사법고시쯤은 금방 패스했다고 한다.

성열은 문득 형사로 일을 했을 때의 명수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그때는 과연 행복하게 웃었을까? 자신이 보는 지금의 명수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가 않는데…. 저렇게 웃고 떠들어도 무언가 공허해 보이는 명수의 눈빛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아릿해져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자신이 이런 걱정을 해준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명수의 부모님은 여전히 생각을 바꾸실 마음이 없으시고, 명수 또한 이제 와서 다시 형사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 성열은 마음속으로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도 명수가 웃으며 건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주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것이냐는 등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려오며 수연이 들어왔다.

 


" 변호사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

 


손님이라는 말에, 명수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성열을 마주보았다. 성열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음에 보자고 짧게 인사를 건넸다. 그에 명수는 누가 봐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락할 테니 꼭 전화 받으라고 입모양으로 말해왔다. 그 모습에 성열은 하여간, 김명수 철 좀 들어야 할 텐데 말이지. 하며 알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 바람이 자신의 몸을 에워싸는 듯 한기가 느껴졌다. 성열이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날씨 한 번 더럽게 좋네.

 

 


* * *

 

 


한편, 우현은 성규를 만난 그 이후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늘 가던 그 Bar에도 더 이상 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에만 잠겨있었다. 그런 우현을 보는 성종과 호원의 마음 또한 초조하고 불안했다. 지금까지 저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때 Bar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것이었을까?

결국엔 참지 못한 호원이 여전히 무언가를 열심히 고민하는 듯한 우현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온기에 놀란 우현이 고개를 들어 호원을 마주했다.

 


" 남우현. 너 요새 왜 그래? 뭘 그렇게 불안해하는 건데. 너 그때 Bar에서 무슨 일 있던 거지? 응? 그런 거지. "
" 무슨 일은. 그런 거 없어, 인마. "

 


걱정이 되는 듯 물어오는 호원에게, 우현이 늘 그렇듯 미소를 지으며 아니라고, 걱정 말라고 다독였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괜한 걱정만 하겠지. 안 그래도 자신이 부탁한 일들 때문에 한참 정신이 없을 아이들인데 성규와의 만남을 이야기 했다간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우현은 웃어 보이며 호원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실, 불안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들킨 것이라면 분명 불안해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이상하게도 불안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남자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한시도 그 남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밥을 먹어도 그 남자가 떠올랐고, 씻고 잠드는 그 순간까지도 온통 그 남자의 웃는 얼굴 뿐, 다른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꼭 내가 자신에게 반드시 연락을 할 것 마냥 웃고 있었다. 정말 기분 나쁜 남자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이기도 했다.

우현은 이내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펴 보이며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남자의 명함을 꺼내어 들고는 손가락으로 그의 이름이 적혀있는 곳을 한 번 쓸어보았다.

김성규. 김성규라…. 우현은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실없는 웃음을 한 번 흘렸다. 그리고 이내   명함을 다시 한 번 손에 움켜쥐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성규라는 남자가 궁금해졌어.

도저히 못 견딜 만큼….

 

 

 

 

 

 


시티헌터(City Hunter)

 

 

 


" 사, 살려줘! "

 


성규는 자신의 아래에서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는 남자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늘 이런 식이다. 자기들이 미움 받을 짓을 했으면서 막상 죽을 위기에 처하면 이런 식으로 목숨을 구걸하지. 성규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살려달라고 비는 남자에게 조금의 연민도 느끼지 못했다. 중소기업 MBT의 대표이사 한창훈. 언론에서는 모두 그를 자선계의 대표주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성규는 얼마 전 자신에게 어두운 표정으로 찾아와 한창훈이란 남자를 죽여 달라며 사정사정한 의뢰인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괴롭다고, 이렇게 살 바엔 정말 죽어버리고 싶다고 무릎을 꿇고 사정했었다. 내 손으로는 그를 죽일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제발 그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던 남자의 모습이 성규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한창훈이 여러 단체에 가서 봉사를 하는 것은 모두 가식이라고 말을 전해왔다. 사실은 여러 작은 회사들을 협박해서 돈을 갈취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척, 위선을 떨고 있는 것뿐이라고. 자신도 회사를 위해 여러 번 그에게 돈을 갖다 바쳤지만 그럴수록 한창훈 그 사람은 조금씩 더 큰 돈을 요구해왔다고 한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생각한 그가 결국엔 한창훈을 죽여 달라며 성규를 찾아온 것이었다. 성규는 조심스레 다시 눈을 떠 보이며 한창훈을 바라봤다. 그리곤 재킷 안주머니에서 그때와 마찬가지로 은색의 리볼버를 꺼내들어 그에게 겨누었다. 총을 겨누고 있는 그의 표정은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결국 총까지 꺼내든 성규의 모습에 기겁한 그는 이를 달달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심하다. 목숨을 구걸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로 한심해 죽겠다. 성규가 다시 총을 고쳐 쥐며 아주 천천히…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 제발 살려줘! 나에게는 가족이! 나에게도 가족이 있단 말이다! 청년에게도 가족이 있을 것 아닌가? 응? 그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될 걸세!! "
" …가족? 푸흡. "
가족 운운하며 동정을 사려는 남자의 행동에 성규가 결국엔 웃음을 터뜨렸다. 가족? 가족이라…. 나에게도 가족이 있었던가? 함께하는 친구들은 있어도 내게 가족 따위는…
" 없어. 그딴 거, 없다고…! "

 


가족 얘기에 살짝 흥분해버린 성규가 소리를 지르며 방아쇠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소음기를 장착한 탓에 탕- 하는 경쾌한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총알은 정확히 남자의 이마 정중앙에 박혔다. 남자의 피가 성규의 얼굴에 사정없이 흩뿌려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상했다. 늘 사람을 죽이기 전까지만 해도 죄책감 따위는 느낄 수도 없었는데… 죽은 사람들의 피가 얼굴에 튄 다음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죄책감이 물 밀 듯 몰려왔다. 성규가 인상을 찡그렸다. 오랜 시간 동안 이 일을 해왔지만 남의 피가 튀는 것은 좀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남자를 보며 씁쓸히 미소 짓던 성규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을 때, 그의 바지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짜증난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거칠게 핸드폰을 꺼내들어 번호를 확인한 성규의 눈이 놀람으로 인해 크게 떠졌다. 이 번호는…

 


" 남우현…. "

 


그때 봤던 Bar에서 좀 만나자는 문자였다. 반드시 연락이 올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연락이 올 줄이야…. 성규는 아까의 그 찝찝함 따위는 잊은 듯 어느새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그의 문자에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곧 새로운 동료가 생길 거라는 생각에 그러는 것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성규가 이내 몸을 돌려 발걸음을 급히 했다. 입가엔, 여전히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 * *

 

 

 

호원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강남의 한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한참 달콤한 잠에 빠져있는 와중에 전화벨이 울려 받았더니 사건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얼른 강남의 모 클럽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호원은 자신의 휴식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해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으나 자신을 부른 것이면 꽤나 큰 사건일거라고 생각하며 급히 연락 받은 장소로 차를 몰고 달려왔다. 그곳엔 창선을 비롯한 여러 동료들도 함께 모여 있었다. 한창 사람이 몰려들 시간인지라 클럽 안은 북적거리고 정신이 없었다. 귀를 찌를 듯한 음악 소리에 호원이 낮게 욕을 읊조렸다. 그리곤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는 창선에게 다가가 물었다.

 


" 뭐야? 무슨 일인데? "
" 어? 왔냐? "

 


자신의 어깨를 붙드는 손길에 창선이 고개를 들어 그 장본인을 마주했다. 사건정황도 말해주지 않고 급히 연락을 했던 터라 호원의 표정엔 궁금함이 어려 있었다. 그의 집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꽤 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밟은 것인지 30분 만에 도착해준 그에게 창선은 왠지 모를 고마움이 느껴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굳히며 사건정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이호원, 너 Sangue라고 들어봤냐? "
" 요새 뉴스에 나오는 흉악범들만 모인 조직 아니야? "
" 어, 맞아. 장기매매와 성매매는 그냥 기본이고 사람 하나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조직이지. 걔들이 요새 거액을 받고 마약 밀거래를 한다나봐. 그래서 끈질기게 조사해서 알아봤더니 곧 놈들이 이곳에서 또 거래를 할 것 같아서. 팀장님께서 너도 함께 놈들을 검거하라고 지시하셔서 부른 거다. "
" 아씨, 팀장님은 진짜…. "

 


단순히 마약 밀거래를 거래하는 것에 자신을 부른 것이 불만인지 호원이 양 미간을 찌푸렸다. 어린애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투정하는 호원의 모습에, 창선이 혀를 차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여간, 스물일곱 살이나 먹은 게 언제 철이 들 런지, 원. 창선이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원은 스테이지 쪽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옆에 있는 창선을 팔꿈치로 쿡쿡 찔러대며 야, 여기 물 좋다. 안 그래? 하며 방정을 떠는 것도 잊지 않고. 창선은 그런 호원의 뒤통수를 휘갈기며 정신 차려, 새끼야! 지금 너 일하러 온 거거든?! 하고 소리쳤다.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린 호원이 차렷 자세를 취하며 옙! 형님! 하고 미소 지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창선도 결국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들이 한참 장난을 치며 웃고 있을 때, 출구 쪽에서 감시하고 있던 동료 한 명이 급하게 뛰어와 말했다.

 


" 온다. 다들 대기해. "

 


동료의 말에, 장난을 치던 것을 멈춘 창선과 호원이 진지하게 임무에 임했다. 각자 흩어져 클럽을 즐기러 온 사람마냥 움직였다. 이윽고 Sangue의 조직원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더니 이내 술자리를 즐기며 마구 떠들기 시작했다. 이 시끄러운 음악소리에도 그들이  떠드는 소리는 묻히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자기들끼리 떠들고 놀던 이들이 어느덧 조용해지더니 눈길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캐치해낸 호원과 창선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Sangue의 조직원 세 명이 일어나 저들끼리 속닥거리며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호원은 나머지 동료들에게는 너희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라 말하고는 창선과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화장실 쪽으로 다가가 벽에 몸을 기대고 선 두 사람이 이내 서로를 마주보더니 하나, 둘, 셋을 외침과 동시에 화장실 문을 열고 뛰쳐 들어갔다. 그곳엔 역시나 마약거래가 한창이었는지 하얀 가루들이 검은색의 가방 안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호원은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분명 중요한 거래를 하고 있을 때 자신들이 뛰쳐 들어오면 놀랄 법도 할 텐데 이들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오히려 여유롭게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을 함과 동시에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Sangue의 조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세 명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호원은 당했다는 생각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6 대 2라는 숫자는 당연히 호원과 창선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러한 고민을 할 틈도 없이 여섯 명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달려드는 남자들을 힘겹게 상대했다. 전투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자신들보다 덩치도 한참 컸고 인원수도 상대적으로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무조건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 하나로 두 사람은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 호원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남자의 팔을 잡아 꺾고는 무릎으로 등을 찍어내려 남자를 주저앉게 만들곤 그를 사정없이 밟아 뭉갰다.

 


" 새끼야, 까불지 말고 쫌 누워있어라! 응?! "
" 이호원! 조심해!! "
" 네가 안 그래도 나는 늘 조심…! "

 


호원이 한 명만을 사정없이 밟고 있을 때, 창선에게서 조심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호원이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네가 안 그래도 나는 늘 조심하거든 새끼야?! 하고 외치려던 찰나, 그는 자신의 옆구리 쪽에서 알싸한 고통이 오는 것을 느꼈다. 앞을 바라보니 Sangue의 조직원 한 명이 칼을 들고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단도에서 새빨간 피가 뭉글뭉글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호원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는 느껴지는 고통보다도 저런 놈한테 자신이 당했다는 것이 더 분하고 억울한 듯 싶었다. 양 미간을 찌푸린 호원이 거칠게 욕을 내뱉으며 남자의 팔을 걷어차 칼을 날려버리고는 그대로 남자의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이 좌우로 돌아갔지만 호원은 아랑곳 하지 않고 분이 풀릴 때 까지 주먹질을 해댔다. 그런 호원을 간신히 멈추게 한 것은 창선이었다.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그가 다시 한 번 주먹을 치켜 올렸을 때 그의 팔목을 잡아채며 창선이 한마디 내뱉었다.

 


" 그만해, 이호원! 이새끼 정신 잃은 거 안보여?! " 

 


한 번 흥분하면 미친개처럼 날뛰는 호원 덕에 창선은 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자신이 겨우 말린 탓에 저 정신을 잃은 남자가 살 수 있었던 거다. 자신이 말리지 않았으면 아마도 호원은 자신의 분이 풀릴 때 까지 저 남자를 때리고 또 때렸겠지. 호원이 후아, 하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남자의 위에서 내려와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아까는 몰랐는데 꽤나 깊게 베인 듯, 피가 서서히 호원의 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창선이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병원에나 가자고 호원을 잡아 이끌었지만 호원은 장난스레 웃어 보이며 창선의 손길을 거부했다.

 


" 너는 쟤네 검거해서 얼른 데리고 가. 보고할 사람 너밖에 없어. "

 


이제 서야 뛰쳐 들어오는 동료들과 부하직원들을 보며 호원이 말했다. 그래도 이곳에선 자신과 창선이 가장 윗사람이었으니 당연히 보고를 해야 하는 사람도 자신이거나 창선 중 한 명이어야 했다. 그렇지만 현재 자신은 그럴만한 상황이 되질 못하니 당연히 그 몫은 창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했다. 호원의 말에 창선이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 그럼 한 명 붙여 줄 테니까 같이 병원 가. "
" 됐다. 나 차 끌고 왔잖아. "
" 이호원, 너 또 그렇게 혼자 가면 병원 안 갈 거잖아! "
" 우리 집엔 만능 해결사 이성종군이 있잖냐. 얼른 가봐 이창선. "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호원의 모습에 창선이 화가 난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휙, 뒤돌아서 나가버렸다. 다른 동료들과 부하들도 쓰러져있는 Sangue의 조직원들을 검거해 그를 뒤따라 나갔다. 홀로 남겨진 호원이 끙끙대며 옆구리를 부여잡은 손에 힘을 주곤 천천히 일어나 자신도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무언가 허스키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호원씨?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호원은 처음 보는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단정하게 수트를 차려 입고 있었고, 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뭐랄까, 사람을 홀리는 듯한 여우상이랄까. 하지만 이러한 의문도 잠시, 호원은 어째서 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을 했다. 웬만해선 한 번 본 얼굴은 잊지 않는 편인데 분명 이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호원이 자신을 궁금해 한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남자가 여전히 미소를 매단 얼굴로 빙글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살인청부업자 김성규라고 하면…. 아시려나? "
" ……!!! "

 


살인청부업자 김성규? 호원은 자신이 살인청부업자 김성규라고 밝혀오는 남자의 말에 넋을 놓고 말았다.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깔끔히 처리한다는 그 김성규가, 국정원 인원을 아무리 풀어도 잡지 못한 그 김성규가… 지금 내 앞에 있다고?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호원은 여전히 쿡쿡 쑤셔오는 옆구리의 상처를 열심히 지혈하며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앞에 있는 성규를 쏘아보며 입을 떼었다.

 


" 그 유명하신 김성규가 나한텐 무슨 볼일이지? 혹, 누가 나를 죽여 달라고 의뢰라도 한 건가? "
" 아뇨. 제가 이호원씨를 감히 어떻게 죽이겠어요? 총을 꺼내기도 전에 그 발이 절 먼저 공격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아아- 당신의 전투실력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어요. "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고…? 호원은 성규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자신이 국정원의 요원이라는 것은 아주 친한 지인들 이외엔 전혀 알지 못할 텐데 어째서…. 그런 호원의 심경변화를 읽은 것인지 성규가 웃으며 말했다.

 


" 정보력의 승리… 라고나 할까요? "
" 대단한 해커라도 두고 있나보군. "
" 음… 뭐.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 …뭐? "
" 이성종. 대단한 해커라면 그쪽도 이성종이라는 사람을 두고 있잖아요? "

 


성종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성규 때문에 호원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 길래 자신과 성종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혹시… 남우현의 존재도 알고  있는 건가…? 호원은 그것만은 안 된다며 좌우로 고개를 휘저었다.

 


" …너 뭐야. "
"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김성… "
" 날 찾아온 용건이 뭐냐고! 하윽…. "

 


계속 자신을 김성규라고만 답해오는 그 때문에, 다혈질의 성격을 이기지 못한 호원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다친 부위가 벌어진 것인지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고통이 밀려와 호원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런 그의 옆구리 상처를 발견한 성규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이런. 길게 끌면 안 되겠네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
" ………. "
" 남우현. 이 사람을 모른다고 잡아떼진 않겠죠. "
" ……!! "

 


제기랄. 그 이름만은 모르길 바랐는데. 성규의 입에서 우현의 이름이 나오자 호원이 숨을 크게 들이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더 많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슬슬 정신이 혼미해지려 하자, 호원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 걱정 마세요. 당신이 우려하는 일 따위…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
" ………. "
" 사실, 나는 남우현씨를 이미 만난 사이거든요. "
" …뭐라고? "
성규의 말에 호원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 그리고 또한… 지금 방금도 남우현씨를 만나고 오는 길이구요. "
" …그게 무슨! 너는 대체!! "
" 지금 호원씨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길게 얘기 하지 않을게요. 저는 일단 남우현씨와는 모든 이야기를 다 끝냈어요. 이제 남우현씨가 당신과 이성종군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겠죠. 저는 단지… 남우현을 끔찍이 생각해 서류조작에까지 손을 댄, 그 친구가 궁금해져서 와본 것뿐이에요. 남우현씨를 이용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
" ………. "
" 그럼 저는 이만. 얼른 병원 가보세요. 더 이상 지체하다간…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요. "

 


그렇게 성규는 호원의 상태를 고려하여 짧게 이야기를 끝내곤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호원은 서서히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 남우현, 남우현… 남우현!! "
우현에 대한 배신감도 느껴졌다. 호원은 옆구리의 고통 따위 이젠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난 호원이 뒤돌아서 가려고 할 때, 하필 누군가와 부딪혀 그는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잠시 느껴지지 않던 고통이 누군가와 부딪힘으로 인해 다시 그를 압박해왔다.

 


" 하으윽…. "
" 괘, 괜찮아요!? "

 


남성의 목소리였다. 호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과 부딪힌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남자 또한 옆구리에서 피를 잔뜩 쏟아내고 있는 호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두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놀람으로 인해 굳어버렸다.

 


" 당신은… "

 


저번에 스쿼시센터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였다. 자신이 의사라며 변명하듯이 마구 손사래를 쳤던 장동우라는 그 얼빵한 남자. 먼저 입을 연 쪽은 동우 쪽이었다. 호원이 짜증난다는 듯이 그의 손을 뿌리쳐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얼마 안 가 동우의 손에 잡혀버렸다. 뭐냐는 듯이 동우를 짜증스럽게 쏘아봤지만 그는 저번의 그 얼빵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옆구리의 상처 부위를 지혈했다. 순간적인 아픔에 움찔한 호원이었지만 정말로 피가 서서히 멎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 지혈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무작정 그렇게 손으로 부여잡고만 있으면 상처가 더 심해져요. "
" 비켜. "
" 같이 병원가요. 내가 데려다 줄… "
" 안 비켜!? "

 


같이 병원을 가자고 자신의 손을 이끄는 동우를 뿌리쳐버린 호원이 이내 그의 어깨를 세게 쳐버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동우가 곧 다시 그를 따라와 손에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 병원 가면서 꼭 지혈해요. 그거 정말 큰일 나요. 꽤나 깊게 베인 상처 같은데…. "
" 신경 끄… "
" 나 의사에요! 내 앞에서 사람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매몰차요!? "
" ………. "

 


호원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동우의 모습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세히 본 그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이 되어있고 그곳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호원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어주는 이유도, 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지도. 자신의 손에 쥐어진 손수건을 가만히 내려다만 보던 호원은, 이것마저 거부하면 왠지 저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아 별 말 하지 않은 채 한숨을 푹- 내쉬며 한 손에 손수건을 쥐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발걸음을 급히 하여 클럽을 빠져나온 호원이 삐빅. 하고 차 문을 열고 그 안에 거칠게 올라탔다. 아직도 분이 가시질 않았다.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야, 남우현. 어째서 너는 그렇게도 혼자…! 호원은 결국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 그리곤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급히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 * *

 

 


" 성열아. “
" 응? 동우 형 화장실 잘 갔다 왔… 형 왜 그래! 울었어? "

 


성열에게 억지로 끌려 온 클럽이었다. 억지로 끌려 온 탓에 별로 즐기지도 못하고 세수나 할까 해서 화장실로 향한 것이었는데, 저번에 보았던 그 남자가 피를 뚝뚝 흘리며 서있는 모습에 순간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꺼내어 남자의 상처를 지혈했고, 남자를 이끌고 급한 대로 자신의 집에라도 가서 치료를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남자는 너무나도 차가운 사람이었다. 짜증난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과, 그렇게나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 때문에 순간 울컥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마냥 속상했다. 남자에게 첫 눈에 반한 것이 처음이어서 일까? 이상하게 모든 신경이 그에게로 쏠렸다. 다친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고,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너무나도 속이 상했다. 그래서 남자가 떠난 후 바보같이 엉엉 울어버렸다. 분명 성열이 뭐라고 할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어두운 복도에서 홀로 목 놓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동우는 자신에게 울었냐고 물어오는 성열의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며 입을 열었다.

 


" 성열아, 나 기분 별로다. 우리 그냥 집에 가자. 응? "
" 어어? 아…. 으응. 그래…. "

 


간만의 클럽인지라 잔뜩 놀 생각이었던 성열은 화장실을 간다던 동우가 퉁퉁 부은 눈을 하며 가자고 하자, 별다른 방도가 없어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그를 이끌고 클럽 밖으로 나왔다. 동우에게 차키를 받아 들곤 차를 향해 버튼을 누르려 할 때, 성열의 눈에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 성규…형? "

 


아니, 낮에 의뢰 받고 일 갔다는 사람이 클럽엔 왜 있어? 성열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부르자, 자신의 차에 기대 서 있던 성규가 고개를 들어 보이며 성열과 동우를 마주했다. 동우 또한 이곳에 있는 성규의 모습에 의아한 듯 싶었다. 이곳에 있는 이유를 말해달라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성규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곤 한참동안이나 말을 아끼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 성열아, 동우 형. "
" 응? "
" 응, 성규야. "

 


성규의 부름에, 각자 다르게 대답을 해오는 성열과 동우였다. 그들의 반응이 웃긴 것인지 성규가 푸흡, 하고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다시 무언가 아프고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이제… 시작이야. "

 


이제 시작이라는 말에 여전히 성열과 동우는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의 정적 후에 성규가 입을 떼었다.

 


" 이제 모두가 모였어.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

 


싸늘한 밤바람이 차분히 가라앉아있는 성규의 머리칼을 흩트려놓고  갔다. 마치, 이 순간 가장 복잡하고도 가슴 아플 성규의 감정을 헤집어 놓는 것 마냥.

 

 

 

 

 


시티헌터(City Hunter)

 

 


호원이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 버튼을 거칠게 꾹꾹- 눌렀다. 피는 어느 정도 멈췄지만 그 고통까지 멈춘 것은 아니어서 호원은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도어락을 해제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리번거리며 우현을 찾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호원이 들어서자,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성종이 약간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호원을 반기다가 이내 하얗게 질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놀라 한걸음에 달려갔다.

 


" 형! 왜 그래? 어디 아파!? "
" 남우현 어디 있어. "
" 우현이 형은 방에… 아니 그나저나 어디 아프… 형! 다쳤어?! " 

 


그제 서야 호원의 옆구리 쪽이 피로 물든 것을 본 성종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성종을 뒤로 한 채 힘겹게 우현의 방으로 향하는 호원이었다. 그의 방으로 향하는 이 얼마 안 되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우현의 방 앞까지 간 호원이, 노크도 없이 문을 쾅- 열고 들어갔다. 우현은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호원이 자신의 방문을 세게 열고 들어온 것에도 놀랐지만 그의 창백한 얼굴 때문에 더더욱 놀란 듯 싶었다.

 


" 이호원, 너 왜 그래? "
" 남우현. "

 


눈이 커다래진 우현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호원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호원은 그런 우현의 모습을 보며 이름을 한 번 읊조렸다. 남우현…. 왜 그랬어. 도대체 왜…? 우리가 그렇게도 못 미더웠던 거야? 우리가 너한테 그 정도밖에 안 됐어?

또 다시 우현에 대한 분노가 차오른 호원은 이내 인상을 찡그리더니 주먹을 꽉 쥐어 그대로 우현의 얼굴을 가격했다. 미처 막지 못한 우현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졌고 호원은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이 그의 위에 올라타려고 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주먹질에 놀란 성종이 형! 왜 그래!! 하며 그를 재빨리 붙잡았다. 때문에 현재 아무런 힘도 없는 그는 더 이상 우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마지막 남아있던 힘까지 모두 짜내어  그를 때린 것이었기에 호원은 서있는 것조차도 버거운 상태였다. 우현은 갑작스레 자신이 맞은 것에 대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우현에게 호원이 약간은 붉어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 남우현. "
" ………. "
" 나랑 성종이는 너한테 도대체 뭔데. "
" …무슨 소리야? "
" 모르는 척 좀 하지 마, 새끼야!! 하아…. "
" 이호원. "

 


호원이 이렇게까지 우현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낸 것은 자신의 가족이 모두 살해당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순간에 가족을 잃어버린 우현은 정말 말 그대로 미친놈처럼 방황을 했다. 마약도 하려고 해봤고, 하루 종일 집에 쳐 박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했다. 그럴 때 딱 한 번 호원이 자신을 이렇게 때린 적이 있었다. 자신의 위에 올라타 마구 주먹질을 해대며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똑똑하고 현명했던 내 친구 남우현으로 돌아와 달라고. 그 때 그의 눈물을 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우현은 잠시 동안 과거회상을 하며 호원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비슷한 표정이다. 자신에게 매우 화가 나있는 것도, 그와 동시에 너무나도 슬퍼 보이는 저 눈동자 까지도. 우현은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했으나 자신의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자신을 노려보던 호원이 이내 바닥에 쿵- 하고 쓰러진 것.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성종은 갑자기 자신의 형이 쓰러지자 재빨리 다가가 그를 살폈다.

 


" 형! 호원이 형!! "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제 서야 정신이 든 우현이 호원을 안아들어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그의 셔츠를 걷어 올려 상처를 확인한 성종과 우현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칼에 꽤나 깊게 찔린 상처였다. 이 상처를 달고 와서 자신에게 주먹질까지 하다니…. 상황에 맞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이호원답다. 라고 생각이 되어 쓴 미소를 지었다. 성종이 다급히 거실로 나가 구급상자를 들고 와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호원이 이런 부상을 달고 오는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국정원의 일 때문도 그렇지만, 굳이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다혈질이란 성격 때문에 늘 이렇게 상처를 매달고 오는 그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성종은 간단한 응급처치 자격증을 따놓았었다. 그랬기에 호원의 상처치료는 대부분 성종의 몫이었다. 성종이 인상을 찡그린 채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며 우현은 천천히 거실로 나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울리고, 이윽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김성규씨, 당신입니까? "

 


우현은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성규는 침착하게 대답해왔다. 전화상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그의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ㅡ 네. 저에요.
" 왜 그랬습니까. 제가 어련히 알아서 잘 말했을 텐데요? "
ㅡ 저는 단지 이호원씨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이호원씨의 얘기를 평소에도 많이 들어왔었거든요. 그런 사람이 이제 우리 팀원이 된다니 그저 궁금해서 찾아갔을 뿐입니다.
" ………. "
ㅡ 상처는 괜찮던가요? 아까 보니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던데.
" 지금 성종이가 치료하고 있습니다. "
ㅡ 아… 그렇군요. 저기, 남우현씨.
" 네. "
ㅡ 호원씨의 상처가 조금 아문 뒤, 바로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요. 
" 어디로 가면 됩니까. "
ㅡ 문자로 저희 집 주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호원씨와 성종씨도 데리고 와주세요.
" …그러죠. "
ㅡ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굉장히 사무적인 대화였지만 우현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김성규라는 남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매력을 가졌다. 허스키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목소리. 우현이 눈 꼬리를 휘어 보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오는 성종의 모습이 보였다. 우현이 그에게 다가가 어떠냐는 듯이 쳐다보자 성종이 여전히 걱정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 일단 치료를 하긴 했어요. 그나마 지혈을 잘 한 것 같던데…. 형은 그런 거 잘 몰라서 그냥 손으로 부여잡기만 했을 텐데 도대체 피가 어떻게 멈춰 있던 건지…. "
" 심한 건 아니야? "
" 뭐, 푹 쉬면 금방 나을 것 같아요. 우리 형, 누구보다 강철체력이잖아요. "

 


살짝 웃으며 말하는 성종의 모습에 우현도 미소 지으며 그래, 이호원이 우리 중에 제일 강하긴 하지. 하며 성종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성종은 잠시 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는 우현에게 조심스레 물어왔다.

 


" 형. 우리한테 뭐 숨기는 게 있는 거예요? "
" …어? "
" 호원이 형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좀 걸려서요. "
" 아…. 숨기는 건 아니야. 곧 말해주려고 했었어. 호원이 의식이 돌아오면 말해줄게. "
" …심각한 거예요? "
" 글쎄…? "

 


심각한 거려나…. 우현은 자기 자신도 지금 이 일이 심각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살짝 풀이 죽어있는 성종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어주며 나쁜 일은 아니니 걱정 말라고 당부했다. 그에 성종은 조금이나마 안심이 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현이 시선을 돌려 호원이 잠들어있는 자신의 방 쪽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들은 너희들의 반응은 어떨까. 찬성 쪽일까, 반대 쪽 일까? 우현이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서 호원이 눈을 떠야할 텐데….

 

 


* * *

 

 


" 으음… “
" 정신이 좀 들어? "

 


성종과 우현은 그가 잠든 방 안에서 호원이 눈을 뜰 때 까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몇 시간 쯤 지나서 호원이 신음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찡그리자, 우현이 그에게 다가가 정신이 좀 드냐고 물어왔다. 호원은 우현의 목소리에 살짝 눈을 뜨고는 주위를 살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까의 일이 모두 기억 난 것인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다시 감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자. "
" 이호원. 내가 다 말할게. "
" 아니,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 "

 


다 말하겠다는 우현의 말에 호원이 작게 고개를 젓자, 우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성종은 호원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왜 자신만 모르고 이 두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일까. 우현이 형이 꺼낼 말이라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이내 잠시 동안의 정적을 가르고 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남우현, 우리는 말이다. "
" ………. "
" 너를 가족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어. 이게 무슨 말인 줄 알아? "
" ………. "
" 성종이와 나는 너와 너희 가족들에게 아주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린 널 위해서… 죽어줄 수도 있어. "
" …이호원. "
" 우린, 널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
" ………. "
" 그런데… 그런데 또 그렇게 혼자 짐을 짊어지려고 해? 이게 짐인지 아닌지는, 그래. 아직은 잘 몰라. 그렇지만 중요한 일인 건 틀림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우리한테 한마디도 안하고 혼자 끌어안고 있을 수가 있어? 지금 네가 어떤 상황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잖아! 그 사람이 누군 줄 알아? 우리나라 최고 살인청부업자야! 국가가 그 사람 잡으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있는 줄 알면서 그런 위험한 사람이랑 지금…! "
" 형 진정해. 상처가 벌어져! "

 


점점 호원이 흥분하는 기색이 보이자 성종이 걱정된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에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호원이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우현 쪽으로 눈을 돌려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 남우현. "
" …어. "
" 너희 부모님이 나한테 당부하셨어. 네가 위험하고 힘들 때 마다 너를 지켜주고 힘이 되어주라고. 나는 그 약속, 꼭 지켜야해. 그래서 난 네가 그런 위험한 사람과 혼자 만났다는 거에 화가 났어. 실망도 했고. 혹시나 그 사람이 너한테 나쁜 감정이 있었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어떡하려고 했는데. "
" …미안하다. "
" 남우현. "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우현의 모습에, 호원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를 불렀다. 그에 우현이 고개를 들어 호원을 마주보았다. 호원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이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 나는 네가… 늘 불안하고 그래. "
" ………. "
"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고, 어디로 가버릴 것만 같아. 나에게 너는 어느 순간부터 내 눈 앞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어. "
" ………. "
" 그러니까 제발 성종이랑 나, 불안하지 않게 좀 해주라. "

 


진심어린 호원의 말에 우현이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꽉 물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이 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었나….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나약하게 굴었으면 두 사람이 이렇게나 불안해할까. 우현은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강해지면 되는 거다. 더 이상 호원과 성종이 불안해하지 않게 내가 잘하면 되는 거다. 성종은 살짝 가라앉은 듯한 이 분위기를 띄워보려 웃으며 우현이 형! 하고 불렀다. 그에 우현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성종이 여전히 귀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 아까 그 얘기! 해준다면서요. 얼른 해줘요. 우리도 알고 대처를 해야 할 거 아니에요? "

 


성종의 말에 호원은 자신도 어서 들어야겠다는 눈으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에 우현이 푸스스 웃으며 그 둘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우현이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을 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줘야할까. 어차피 곧 그들을 만나러 갈 테니 간단하게만 말해도 되는 거겠지? 잠시 동안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우현이, 이내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 김성규.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다는 살인청부업자인 그 사람이 어느 날 나한테 와서 거래를 하지 않겠냐고 물어왔어. 내가 꼭 필요하다고. "

 


자신의 말에 호원과 성종이 몰입하는 것을 보고 뜬금없지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렇게 주먹질하고 다그칠 때는 언제고 궁금한 건 못 참는 저놈의 성격 또 나왔구만. 처음 한마디만 내뱉은 채 더 이상 말을 안 하고 뜸을 들이는 우현의 모습에, 호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얼른 말해, 새끼야! 하며 그를 다그쳤다. 그에 성종이 아씨, 형은 좀 조용히 해! 하며 면박을 주었다. 우현은 문득 이 두 사람이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이 너무 믿음직스럽고 좋았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 성규는 어째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한 것일까…. 저번에 만나서 물어본다는 것을 타이밍을 놓쳐 물어보지 못했다. 우현은 어차피 곧 만나게 될 테니 그때 물어보지 뭐. 하고 생각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 현재 김성규씨와 함께 있는 사람이 두 명이 더 있대. 한 명은 능력이 아주 뛰어난 해커. 그 실력으로 우리의 신상정보도 모두 파헤친 건가봐. "
" 해…커? "

 


호원은 문득 성규가 자신에게 와서 '정보력의 승리라고나 할까요?' 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게 그 뜻이었나. 호원은 그 사람이 정말 자신의 편이 되어준다면 국정원을 뚫는 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종이 혼자서는 역시 너무 무리일 테니까.

 


"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의사래. 현재 병원에서 근무 하지는 않지만 실력이 아주 뛰어난. 그 사람의 집에 거의 모든 의료기구들이 준비되어 있나봐. 이런 상황을 미리 준비한 건지 뭔지는 몰라도 우리가 다치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웬만한 상처는 치료 할 수 있댔어. "

 


의사…? 의사라는 말에 또 다시 그때 클럽에서 봤던 장동우라는 사람이 생각났다. 하, 바보같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그렇게 순하고 착한 사람이 그 팀에 있을 리가 없잖아. 호원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우가 준 손수건을 꺼냈다. 이걸… 어떻게 돌려줘야하지. 그 사람 연락처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데.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 복잡해졌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다시 우현의 말에 집중하는 호원이었다.

 


" 나도 아직 자세하게 들은 건 없어. 단지 나 또한 그 사람과 손을 잡겠다고 말했을 뿐이야. 너희들도 알지? 내가 사람 하나는 잘 꿰뚫어 보는 거. 절대로 거짓말을 하는 얼굴은 아니었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확실히 나만큼… 국가에 적개심을 품고 있었어. "
" …그래? "

 


우현의 이야기가 끝나자 성종은 두 말 할 것 없이 그 사람들과 손을 잡자고 말했고, 호원은 잠시 동안 말을 않고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그 사람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속는 거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의심을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들이 자신들을 노리는 거였으면 저번에 자신을 만났을 때 끝내버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성규의 실력은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으니까.

호원 역시 그들을 믿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우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우현은 꽤나 긍정적인 두 사람의 반응에 다행이라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이호원, 네 상처 아무는 대로 만나기로 했어. "
" 아물 때 까지 못 기다려! 내 성격 알잖아. "
" 뭐…? "
" 내일 당장 만나러 가자고. 몸이 근질근질 거려서 도저히 못 참겠다, 야. "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미소 짓는 호원의 모습에 우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쟤는 도대체 뭘 먹고 저리도 강철체력인건지. 우현은 고개를 돌려 성종을 보자마자 또 다시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성종 또한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호원을 바라보며 괴물이다, 저건. 하는 경악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현은 아까 성규에게서 받은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당장 내일 가겠다고 문자를 보내두었다.

뭔가…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게 꽤나 오랜만이기도 해서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이상하게 걱정 따위는 되지 않았다. 자신이 봤을 때 김성규 그 사람은 확실히 배신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함께 복수를 하자던 그의 얼굴에서 그대로 분노가 표출이 되는 것을 보았다. 대체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리도 국가에 적개심을 가지는 것일까….

문득 얼른 내일이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루 빨리 나의 가족을 죽인 국가에게 복수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 우와, 여기야? "
" 응. 문자로 보내준 주소로는 여기가 맞는데? "
" 헐. 야, 엄청 잘 사나보다. 뭔 놈의 집이 이렇게 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어서 그 집으로 가자는 호원의 말에   거의 억지로 끌려온 우현과 성종은 아직도 비몽사몽이었다. 아니 얘는  칼에 찔린 애가 어째 우리보다 멀쩡한 건데? 우현은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호원을 보며 역시나 이호원은 괴물이었어. 하고 생각했다.

문자에 적힌 주소로 집을 찾아오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굉장히 큰 2층 집이었다. 성종은 어린애처럼 방방 뛰며 호들갑을 떠는 호원의 등짝을 세게 한 대 때리며 조용히 해, 쫌! 형이 애냐! 하고 면박을 주었다. 오늘도 역시나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우현이 작게 웃고는 대문 쪽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른지 몇 초 안되어 누구냐고 물어오는 소리도 없이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세 사람은 놀란 듯 눈이 커졌지만 이내 재미있다는 듯이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푸르고 넓은 정원을 지나 현관문 앞에 서자, 거짓말처럼 문이 또 다시 철커덕, 하고 열렸다. 호원이 또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서는 성규가 웃으며 그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 왔어요? 그쪽이 이성종씨? 반가워요, 김성규라고 합니다. "

 


성규는 일단 우현과 호원에게 인사를 하고는 처음 보는 성종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종이 얼떨떨하게 그의 손을 맞잡은 채 조용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오…. 하고 인사를 했다. 성규는 멀뚱히 서있는 세 사람에게 편하게 앉아요. 하며 소파로 그들을 이끌었다. 성규의 말에 조심스레 소파에 앉은 세 사람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집을 둘러보았다. 겉에서 봤을 때도 정말 크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그 크기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세 사람의 집 구경은 성규가 소파에 앉음으로 인해 끝이 났다.

 


" 안녕하세요. 제 소개를 다시 할게요. 제 이름은 김성규. 나이는 우현씨, 호원씨와 같은 스물일곱 살. 직업은, 뭐…. 다들 아시다시피 살인청부업자. 거기다 하나 플러스로 말하자면 무기브로커라고나 할까요? 총기류 같은 거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무기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 무기…브로커요? "
" 네. "

 


살인청부업자 외에 또 다른 직업이 무기브로커라니…. 우현과 호원, 성종은 성규가 정말 미스테리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규는 그 세 사람의 생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생글생글 웃으며 다른 친구들도 소개시켜드릴게요. 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 이성열! 동우 형! "

 


성규의 부름에 누가 온지도 모르고 있던 두 사람이 방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왔다. 아무래도 그들 또한 우현와 성종이 호원에게 끌려왔듯이 성규로 인해 일찍 일어나게 된 모양이었다. 성열은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동우 또한 여전히 감은 눈을 하고는 어슬렁 걸어 나와 성열의 옆에 앉았다. 잠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호원은 놀라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저 사람은…!

 


" 장동우씨…? "

 


동우는 갑작스레 낯선 이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우자, 놀란 듯 감고 있던 눈을 크게 떠보였다. 눈을 떠 상대방을 확인 한 동우는 호원과 마찬가지로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아니… 저, 저 사람이 여기에 어떻게! 서로를 아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다른 이들이 의아하다는 듯 그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무거운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동우 쪽이었다.

 


" 상처는 괜찮은 거예요? "

 


동우의 말에 호원이 아…. 하는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어제 자신이 너무 못되게 굴었던 게 생각이 났다. 의사로써 걱정이 되서 살펴준 것인데 오히려 자신은 그에게 모질게 말하며 비키라 하였으니 얼마나 재수가 없었을까. 하지만 동우는 그런 것은 벌써 잊었다는 듯이 호원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 사람은 기분도 안 나쁜가? 내가 그렇게 재수 없게 굴었는데….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호원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잘 썼어요. 고마웠어요, 어제는. 호원의 말에 동우가 조심스레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집에 가서 바로 빤 것인지 좋은 냄새가 나는 듯 했다. 둘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성열이 수상하다는 듯이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
" 아, 그냥 오다가다 만난 그런…. "

 


성열의 물음에 동우가 머뭇머뭇 거리며 대답을 했다. 성열은 여전히 수상하다는 듯이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곧 옆에서 들려오는 성규의 목소리에 그의 시선은 다시 정면을 향했다.

 


" 방금 호원씨랑 얘기를 나눴던 사람은 스물여덟 살, 장동우라고 해요. 직업은 의사고요. "
" 안녕하세요. 장동우라고 합니다. "

 


성규의 소개에 동우가 살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가만히 있을 때는 꽤나 무서운 인상이었는데 웃으니 완전 딴판이다. 눈 꼬리가 예쁘게 휘어지는 게 여간 순해 보이는 게 아니다. 성규는 곧 이어 옆에 있는 성열을 소개했다.

 


" 얘는 이성열이고 직업이라고 할 것 까진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해커라고나 할까요? "
" 아씨, 형! 해커도 직업이거든!! "
" 맞아요! 직업이거든요! "

 


성규의 무시 발언에 발끈한 성열이 해커도 직업이라고 소리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성종도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 모습이 웃긴지 성규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도 모르게 성열과 같이 소리 쳐버린 성종이 헙- 하고 자신의 입을 틀어막자 모두가 푸하핫!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당하게 소리쳐놓고 뒤늦게 입을 막는 건 뭐래? 성종은 민망함에 얼굴을 푹 숙였다.

 


" 성열이는 자기가 직접 조사를 했으니 이미 그쪽 정보를 알고 있고, 동우 형한테는 제가 이름부터 나이까지 이미 말해뒀어요. 자, 소개는 이쯤으로 해두고… 우리 일단 편하게 하는 것부터 하죠? "
" …편하게요? "

 


편하게 하자는 성규의 말에 우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말이냐는 듯이 물어왔다.

 


" 말 놓자고요. 언제까지 이렇게 존칭 쓰고 지내요? "
" 아…. "

 


성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될 날이 꽤나 될 텐데 그때마다 존칭을 쓰기엔 너무 불편하겠지. 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에 성규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 내가 오늘 너희들을 부른 건… 우린 아직 두 사람이 더 필요해서 불렀어. "
" …두 사람? "

 


두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모두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떠 보이며 성규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다 모인 줄 알았는데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국정원직원, 국정원 前팀장, 해커 둘, 살인청부업자&무기브로커, 의사까지 모였으면 된 거 아닌가? 하지만 성규는 그러한 의혹들을 모두 잠재울 수 있을만한 말을 꺼냈다.

 


" 일단, 행동파로 나눌 수 있는 쪽은 나와 우현이 호원이 뿐이야. 하지만 우리의 상대는 국가인데 과연 세 명으로 될까? 일단 행동파로 낄 수 있는 사람 한 명이 더 필요해. 싸움을 잘하는 쪽으로. "
"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
" 변호사. "
" …어? "
" 우리가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건데 안 잡힌다는 보장이 있어? 우리가 잡히고 난 뒤 과연 우리를 변호해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상대는 국가야. 만만하게 보면 안 돼. 그래서 우린 완전한 우리 편인 변호사가 필요해. 우리만을 변호해줄 고문 변호사가. "

 


성규의 말에 모두가 고민에 빠졌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 한 명이랑 변호사 한 명이라니…. 싸움을 잘하고 변호사 한 명을 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믿을만한 사람이냐는 것이 관건이었다. 지금 현재 모인 여섯 명은 모두 서로의 목표가 있어서 모인 것이지만… 새로 영입하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니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성열의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 한 명… 있어. "
" …뭐? 누구? 변호사? 아니면 행동파로 낄 사람? "

 


한 명 있다는 성열의 말에 흥분한 호원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에 성열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 그 둘 다야. "

 


성열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변호사이면서도 전투력이 수준급인 그런 사람… "

 

 

전직 형사였으면서도 지금 현재는 변호사를 하고 있는……

 

 


……김명수.

 

 

 

 


시티헌터(City Hunter)

 

 

" 어떻게, 상처는 정말 괜찮은 거예요? 하루밖에 안됐는데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될 텐데…. "
" 아, 뭐… 전 원래 강철체력이라서요. 그런데 왜 말 높이세요? 놓으세요. 제가 그쪽보다 한살 어려요. "
" 아아. 그럼 그럴까? "

 


거실에서의 할 얘기는 거의 끝났고 앞으로 같이 살게 될 집이니 구경이라도 하라며 성규가 각자 짝을 지어 집 구경을 시켜주었다. 호원은 그나마 안면이 있는 동우와, 성종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 많은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는 성열과, 역시나 성규는 우현과. 그리하여 먼저 호원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한 동우였다.

정말 이 집은 상상하는 그 이상의 크기를 자랑하고 있어 여섯 사람이 한꺼번에 구경을 한다 해도 거의 마주칠 일은 없을 듯 했다. 동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아까 사람들이 있을 때 묻지 못했던 호원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어제 보니까 꽤나 많이 다친 것 같던데 정말 괜찮은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러한 동우의 걱정과는 달리 호원은 정말로 멀쩡해보였고, 넓고도 넓은 그의 방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훑어보며 주변을 빙글 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방에 딸린 두개의 문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으로 척 하니 문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 저기 저 문들은 뭐에요? "
" 아아… 하나는 화장실이고 또 하나는…. "
" 하나는? "
" …궁금해? "

 


동우가 눈을 찡긋- 하며 웃었다. 그에 호원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고는 살짝 끄덕였다. 하, 거참…. 웃는 얼굴이, 무표정일 때랑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동우가 호원의 손목을 잡아 이끌어 문 앞으로 다가가서는 문을 살짝 열었다. 호원은 자신의 손목을 대뜸 잡고 이끈 동우에게도 놀랐지만 그보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더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 이건…

 


" 우, 우와아!! "
" 어때? 영화 같지? "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정말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장면이었다. 푸르른 빛이 온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은 흔히 말하자면 수술실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우현이 말했던 그 의료시설이 갖춰진 곳이 이곳이라는 건가. 정말 웬만한 병원 수술실 뺨칠 만큼. 아니, 혹은 그것보다 더 좋아 보이는 곳이었다. 의료시설들도 모두 다 최첨단 기계들인 것 같았다.

 


" 여기는 의사 장동우 전용공간이야. 웬만한 병원보다도 좋은 시설들이 많이 갖춰져 있어. 성규가 나를 위해서 만들어준 공간이지. "
" 진짜… 대단하네요…. "

 


김성규 쟤는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보고 또 봐도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장소가 실제인지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집 안에 갖춰진 의료시설들이라니. 살인청부업자면 이렇게 돈을 많이 버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한 번 해 볼만…

 


" 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
" 응? "
" 아, 아니에요. 하핫- "

 


호원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한 생각이 매우 바보 같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이렇게나 돈을 많이 번 성규가 문득 대단하다고 느끼긴 했다. 사람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던데 도대체 왜 살인청부업자란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우현만큼이나 국가에 적개심을 품고 있다면 그도 무언가 사정이 있는 거겠지. 호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영화 같은 이곳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신기하다는 듯이 이것저것 구경하는 호원을 보던 동우가 살짝 웃으며 그의 손목을 또 다시 잡아챘다. 호원이 놀라 동우를 바라보았지만 동우는 호원 쪽을 바라보지 않고 그곳 의자에 그를 앉히고 여러 가지 약품들을 들고 다가왔다.

 


" 제대로 치료 못했지? 분명히 병원도 안 갔을 거야. 그치? "
" …네? 아, 네. "
" 제대로 소독하고 꿰매야지. 나중에 진짜 큰일 나. "
" 지, 지금요? "
" 응. 그럼 언제 해? "

 


지금 당장 치료해야 한다고 단호히 말하는 동우의 태도에 호원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알았어요, 그럼. 하며 재킷을 벗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 둘 풀어내었다. 그러자 그의 셔츠 안, 다부진 몸이 동우의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오랫동안 몸으로 부딪히는 일을 해서인지 그의 몸에는 단단한 근육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우는 자신이 먼저 치료하자고 말을 꺼냈으면서 막상 그의 상체가 적나라하게 보이자 급속도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셔츠의 단추를 풀고 상처를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미동도 없는 동우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호원이,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뭐해요? 치료 안 해요? 하고 묻자 어, 어? 아아… 해, 해야지! 그래… 해야지, 치료…. 하며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어벙하게 대답하는 동우였다.

동우가 심호흡을 크게 한 뒤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따끔따끔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호원에게 이런 고통쯤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려 참을만했다. 호원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떠 보이며 치료에 열중하고 있는 동우의 얼굴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집중을 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입을 헤- 벌리고 집중하고 있는 동우의 얼굴이 마냥 웃겼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뭔가 앙증맞고 귀여워보였다. 푸흐, 정말 스물여덟 살 맞아? 왜 이렇게 귀엽지?

열심히 호원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동우가 문득 위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살며시 눈을 치켜 올려 그 눈을 마주했다. 엄마야… 지, 지금 저 사람이 날 보고 있는 거야? 흐어… 어, 어떡해. 심장 떨려어…. 동우는 쿵쿵 뛰어대는 심장과, 점점 더 갈수록 열이 오르는 얼굴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엔 허겁지겁 치료를 마치고는 잠시 쭈그려 앉아있던 자세를 바로 해 이번엔 앉아있는 호원을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 저리 시선을 돌리는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우 쪽이었다. 아아… 어색해. 어쩌지? 호원은 전혀 어색해보이지 않는데 동우 혼자 어색함에 어찌 할 줄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 뭐해요, 지금? "
" 어, 어? "
" 혼자서 발 동동 구르고 뭐하냐구요. 뭐 마려워요, 형? "

 


뭐 마렵냐는 호원의 말에 동우가 일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뭐 마렵냐니… 뭐 마렵냐니! 부끄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호원에겐 그렇게 비춰졌단 말인가? 동우는 호원의 말에 금세 또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뭐야아… 나만 또 좋아하고 설렌 건가? 호원이는 관심도 없는데…. 동우는 청승맞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한데 그게 왜 이리도 서운하게만 느껴지는 건지. 후우-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자 호원이 왜 그러냐는 듯이 동우를 쳐다봤다. 그에 동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이며 먼저 방 안을 빠져나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귀여운 모습을 잔뜩 보여주더니 왜 저러는 거지? 자리에서 일어난 호원은 거즈가 붙여진 자신의 옆구리 쪽을 바라보았다. 동우가 정성스럽게 치료를 해주던 모습이 생각나자 호원이 풉, 하고 웃었다. 아 정말 죽겠다. 진짜……

 

귀여워도 너무 귀엽잖아, 저 형.

 

 


* * *

 

 


" 우와아… 역시 부자는 달라. "

 


성종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최고급 컴퓨터들이 몇 십대들이나 놓여있는 방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나는 꿈도 꾸지 못한 것들이 이렇게나 많이! 꼭 좋아하는 이성을 보고 반한 것처럼 들뜬 마음을 안고 컴퓨터들을 보물 다루 듯 조심스레 만져보는 성종이었다. 그런 성종의 모습을 보며 성열이 풉, 하고 웃었다. 쟤 꽤나 귀엽네. 스물다섯이라고 했던가? 나보다 동생이구나. 성열은 여전히 구경에 여념 없는 성종을 돌려세우며 말했다.

 


" 말…놔도 되지? "
" 네? 아, 네! "
" 너도 편하게 해. 난 누가 나한테 존댓말 쓰고 그런 거 못 봐.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끼쳐. "
" 응. 알았어, 성열이 형! "

 


성열은 귀엽게 웃으며 대답하는 성종의 머리를 부스스하게 헤집었다. 귀여운 막내 동생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이 큰 집에 세 명뿐이라 적막하고도 쓸쓸했는데 이제 식구가 는 만큼 시끌벅적해지겠지. 조용한 분위기를 매우 싫어하는 성열로써는 이 집이 그다지 편한 곳은 아니었다. 특히나 성규와 단 둘이 있을 때만큼은 더 그랬다. 성규가 불편한 건 아닌데, 뭐랄까… 그 형은 너무 심심하달까? 여하튼, 김성규 그 형은 너무 재미가 없다. 매일 싱글싱글 웃기만 하고.

성규 형이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는데. 뭐, 그렇다고 평범했다는 것도 아니다. 지금 모습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정말 어둡고 말이 없던 사람이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 어찌 보면 그건 상처를 가리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 수도.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성규 형은.

성규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성열은 성규가 그렇게 웃을 때 마다 괜히 꽁해지곤 했다. 꼭 그렇게 상처를 꽁꽁 숨겨야만 하나? 동우 형하고 나하고 함께 지내온 게 얼만데. 하지만 성열은 곧 그런 우울한 생각들을 싹 다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구경할 것이 뭐가 그리 많은지 이리저리 쏘다니는 성종 때문이었다. 컴퓨터가 사람도 아닌데 무슨 사람 대하는 것 마냥 저기, 계세요…? 하며 컴퓨터를 콕콕- 찔러보는 그의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아아, 역시 해커라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그냥 우와- 하고 말았을 텐데 역시 직업이 이쪽이어서인지 성종은 눈에 하트를 뿅뿅 매단 채 컴퓨터 앞에 자판을 쳐보기도 하고 감격스럽다는 듯이 모니터를 쓸어보기도 하고 뽀뽀를 해보기도 하고 정신없이 마구 돌아다녔다. 흐윽, 감동이야. 나에게도 이제 동지가 생긴 건가?

 


" 성종아! "
" 으응? "

 


성열은 자신의 부름에 바로 고개를 돌려 답해오는 성종을 보며 눈에 눈물을 머금었다. 흐어… 이게 얼마만이야. 김명수 이외에 나를 이렇게 바로 봐주는 사람이 생기다니. 그동안 성규와 동우에게 무시당했던 것이 그리도 서러웠었는지 성열은 작은 것에도 굉장한 감동을 받은 듯 했다. 그리고 이내 그가 눈을 반짝이며 성종에게 물었다.

 


" 해커도 직업이지!? 그렇지! "
" 아이 참, 형은…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당연히 직업이지!! "

 


아아…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성열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포즈를 취하며 눈을 질끈 감고 감격에 젖었다. 나에게도 드디어 말 상대가 생기는 것인가! 이 조용하고 재미없는 집에 드디어 나를 상대해주는 사람이!! 성열은 활짝 웃은 채로 눈을 떠 보이며 성종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며 환히 웃고 있는 작고 귀여운 아이가 보였다. 아아… 이건 정말……


신세계야….

 

 


* * *

 

 


" 여기는 내가 관리하는 무기창고야. 뭐… 무기라고 해봤자 거의 다 총기류 뿐들이긴 하지만. "
" 아아…. "

 


성규는 우현을 데리고 무기창고로 발걸음을 했다. 성규는 들어가자마자 이곳이 무기창고라는 것을 알려주고는 붉은 빛을 띠며 빛나고 있는 여러 개의 금고들 중 하나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어 지문인식으로 문을 열고는 그 안에 가득 들어차있는 총기류들을 보여주었다. 무기브로커여서 무기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그럼… 이 많은 금고 안에 들어차 있는 게 모두 무기라는 말인가? 우현은 새삼 성규의 직업에 또 다시 놀라움을 느꼈다. 살인청부업자인 것도 참 특이한 케이스인데 무기브로커라니. 도대체 이 남자는 정체가 뭐지…. 우현은 금고 안에서 은색의 작은 총을 꺼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총은…

 


" 맞아. 너를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정확히… 너의 이마에 겨누었던 그 총이야. 구하기도 쉽다는 그 리볼버. "
" ………. "

 


성규는 은색의 리볼버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한 번 부드럽게 쓸어내리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금고 안에 넣어두었다. 우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 남자는 뭐하는 남자일까. 정말 미치도록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남자다. 우현은 문득 그동안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기회가 없어 묻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곤 조용히 금고문을 닫는 성규의 등에 대고 물었다.

 


" 사실, 너무 궁금한 게 있어. "
" 궁금한 거? "
" 어째서 나였어? "
" 어? "
" 나를 선택한 이유 말이야. "

 


우현의 물음에 성규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남우현을 선택한 이유…? 흐음… 글쎄, 뭘까? 잠시 동안 말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있던 성규가 이내 늘 그래왔듯 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너의 스펙 때문이랄까? "
" 뭐…? "
" 정말 모르겠어? 내가 널 왜 택한 건지. "
" ………. "
" 국정원의 괴물, 남우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거든. "

 


국정원의 괴물이라…. 꽤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옛 별명에 우현이 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땐 그렇게 불렸었지. 하지만 괴물이란 말은 좀 어감이 그렇단 말이지. 이미지가 멋있지가 않잖아. 푸흐, 웃음기 섞인 그의 말에 성규도 그를 따라 소리 내어 웃었다.

 


" 스물여섯 살에 국가안보팀의 팀장이 되었다는 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지. 입사한지 2년 만에 팀장이 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넌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괴물이었어. "
" …그런가. 난 그저 열심히 해왔을 뿐인데. "
" 그래. 그 열정이 너를 그 자리까지 끌어올려준 거지. 남우현 너는 전투실력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천재적인 두뇌. 그것이 아마도 너를 팀장이란 자리에 올려주지 않았을까. "
" ………. "
" 그거야. 내가 너를 택한 이유는. 천재적인 두뇌와… "
" ………. "
" 국가에게 배신당한 그 아픔. 그거면 우리와 함께 해도 되겠다 싶었거든. 너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어. "
" 배신… 배신이라…. "

 


또 다시 떠오르는 1년 전의 악몽에 우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떠올리기 싫어. 그때의 그 아픔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크나 큰 암흑 그 자체였으니까.

성규는 여전히 눈을 꽉 감고 있는 우현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너도 나만큼이나 아팠겠지.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아팠을 거다. 성규는 이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는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이것은… 나의 가면이니까.

눈을 떠 보인 우현의 눈이, 웃고 있는 성규의 눈과 마주쳤다. 웃을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웃고 있는 그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저 웃음이 진짜 웃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아챘으니까. 하지만 아직도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특히나…

 


" 김성규. 너는 어째서… 국가에게 복수를 하려는 거지? "
" 흐응… 나는 뭐… 국가라기보다는, 어떤 한 사람한테 복수를 하려는 거랄까? "
" 한…사람? "
" 응. "

 


성규는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우현은 그에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더 물어본다고 한 들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늘 저렇게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숨겨져 있는 김성규의 본 모습을 보고 싶다. 그 가면을 벗어 던진 너의 진짜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미치도록 슬픈 얼굴? 아님… 이미 살인에 중독되어버린 무서운 얼굴? 어느 쪽이 진짜 너의 모습일까.

어쩌면 네가 나보다 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렇지 않아 보일 그 상처도… 막상 자신이 직접 겪을 때 느끼는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니까.
우현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는 성규를 바라보며 쓴 미소를 지었다. 어서 너의 그 가면을 벗겨보고 싶다.

김성규의 진짜 얼굴이,

 


……미치도록 궁금하다.

 

 

* * *

 

 

성열은 명수의 변호사 사무실 건물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자고 거기서 명수 얘기를 해가지고. 명수한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다짜고짜 나와 함께 모험을 해보지 않겠냐고? 아니아니, 그렇게 뜬금없이 말하는 게 어디 있어. 아씨, 뭐라고 해야 하나?

성열이 인상을 마구 찡그리며 자신의 머리를 있는 대로 쥐어뜯었다. 지금 이렇게 명수에게 큰 부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게 느껴졌다. 하지만 성열은 이대로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모두들 기대를 품은 눈으로 자신과 명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행동파 한 명은 굳이 구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믿을만한 고문변호사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로써 명수는 정말로 적합한 인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후아- 그래. 눈 딱 감고 부탁해보자. 거절하면… 에라이, 까짓 거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져보지 뭐!  크게 심호흡을 한 성열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조금 기다리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성열은 그 안에 몸을 싣고 눈을 감은 채 기도했다.


명수야, 제발………

 

우리를 도와줘.

 

 

 

 

 

시티헌터(City Hunter)

 

 

" 우와, 이쁜아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성열을 보며 명수가 하던 일을 멈추고 환히 웃어보였다. 바쁘던 참이었지만 성열이 찾아 온 것이라면 무조건 하던 일을 멈추고 보는 명수였다.
열심히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자신이 들어오자 환하게 웃어주는 명수의 모습에 성열의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정말 너를 이 위험한 일에 뛰어들게 해도 되는 걸까? 나… 그럴 자격 있는 걸까, 명수야?

이쁜이 드립에 꼭 한 번씩은 열을 내며 그만하라고 늘 소리치던 성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저 힘없이 웃어 보이기만 하는 그 모습에, 명수는 왠지 오늘은 성열이 하소연이나 하려고 찾아 온 것이 아니구나. 하고 짐작했다.

명수가 성열의 손을 잡아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소파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성열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그에게 조금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신중에 신중을 더하기 위함이었고, 명수는 성열이 무언가 심각한 말을 할 것 같았기에 마음의 준비가 다 될 때 까지 기다려주기로 한 것이다. 그것을 눈치 챈 성열은 더더욱 명수에게 미안해서 죽을 맛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너는 언제나 날 이렇게 기다려주었던 것 같다. 성열은 침으로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한 번 축였다. 그래. 명수라면… 명수라면 날 이해해줄거야. 김명수니까. 그동안 나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었던 명수니까….

 


" 이제 말 할 준비가 다 된 거야? "
" …응. "
" 궁금하다. 얼른 말해봐. 뭔데 그래? "

 


여전히 싱긋 웃으며 말하는 명수의 모습에 성열 또한 옅게 미소 지었다. 너에게 우리와 함께 하자고 말을 하려면, 일단은 내 직업부터 너에게 말을 해줘야 하는 게 맞는 거겠지?

 


" 명수야, 너는 내 직업이 뭔 줄 알아? "
" 응? 네 직업? "

 


성열의 질문에 명수는 한참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성열의 직업을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말하고 싶지 않은가보다 해서 기다렸었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오니 살짝 난감했다. 명수는 성열을 바라보며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힘없이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그에 성열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하며 목이 타는 듯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 난 컴퓨터가 너무 좋아, 명수야. "
" …어? "
" 컴퓨터가 너무 좋아서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와 함께 살았어. 남들이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 놀 때 나는 컴퓨터와 시간을 함께 보냈어. 그렇다고 게임중독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 그런데 변호사인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우습다. 내가 내 입으로 나 죄를 저지르고 있어요. 하는 꼴이니 말이야. "
" 성열아, 그게 무슨…? "
" 내 직업은, "
" ………. "
" 해커야. 남들의 신상정보를 파헤치는 해커. "
" 뭐…라고? "

 


성열의 폭탄발언에 싱글싱글 웃고만 있던 명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 해…커라니? 성열이 네가? 그래서 나한테 말을 하지 않은 거였어?

성열에게 약간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에게 모두 진실만을 보여주었는데. 어떤 것을 숨긴다거나 거짓말을 쳐본 적도 없는데 막상 이렇게 성열의 직업을 알게 되니 서운한 감정이 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명수를 눈치 챈 것인지 성열이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보았다.

 


" 그동안 말하지 않은 거 미안해. 그렇지만… 난 절대로 내 직업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안 돼.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 명수야. "
" ………. "
" 그래서 지금은 그 이유를… 너에게 말 하려고 온 거고. "
" ………. "
" 자세한건 나중에 말해줄게. 명수야 나는 지금… 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
" …뭐? "

 


도움이라니…. 도대체 자신의 도움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명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왠지 성열이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왔던 이가 아닌 것만 같았다. 느껴지는 이질감에 명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성열은 처음 보는 명수의 모습에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 내가 고아원 출신인건 알고 있을 거야. 그치? "
" …응. "
" 사실, 나 거기서 알게 된 형이 두 명이 있어. 한 명은 김성규, 또 한 명은 장동우라는 사람이야. "
" ………. "

 


갑자기 자신의 가족사를 이야기 하는 성열의 모습에 명수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족 이야기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명수는 너무나도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일단은 성열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기로 했다.

 


" 그 중 성규 형이 이 모든 일의 핵심인물이야. "
" 그게 무슨 소리야? "
" 우리는… 국가와 싸우려고 해, 명수야. "
" 뭐라고…? "
" 그리고 훗날을 대비해 우리를 변호해줄 변호사가 필요해. 유능한 변호사가.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국가와 싸운다니…. 자신의 귀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이 사실에 명수는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성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자신의 장난을 마냥 받아주던 그 귀여운 성열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런 모습은 정말…

처음이다.


" 웃기지? 어이가 없지? 그래, 나도 잘 알아. 지금 네가 많이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그치만 우리는 절대로 이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어. 성규 형을 위해… 나는 꼭 이 일을 성공 시키고 말 거야. "
"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 한 사람은 국가에게 뼈아픈 배신을 당했고… "
" ………. "
" 다른 한 사람은… 어떤 누군가로 인해 인생이 망가져버렸어. 진심으로 웃지를 못 해. 억지로 웃고 있는 게 보이는데, 힘들고 지친게 다 보이는데도 그걸 웃는 얼굴로 가리고 있어. 마치 영원히 벗지 않을 가면인 냥. "
" …성열아. "

 


성열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 방울씩 뚝, 뚝 떨어지던 눈물은 기어코 그의 얼굴 전체를 적셔가고 있었다. 성열의 가녀린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명수는 당장이라도 그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 괜찮다고, 울지 말라고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바로 이어서 말을 잇는 성열로 인해 그럴 수 없었다.

 


" 그 형의 진짜 얼굴을 찾아주고 싶어. 명수야, 나 그 형을 처음 봤을 때… 되게 무서웠다? 아무 표정도 없고 세상을 다 잃은 것 마냥 그렇게 혼자서 지내는 거야. 그래서 되게 무서웠어. 다가가기도 힘들었어. 그런데… 그런데 있잖아. "
" ………. "
" 이젠 차라리 그 얼굴이 보고 싶어. 지금처럼 억지로 웃는 얼굴 말고, 그냥… 그냥 전혀 안 웃어도 좋으니까… 그 형의 진짜 얼굴이 보고 싶어. 그때는 적어도 그런 답답한 가면을 쓴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

 


말을 마친 성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정적이 계속 되었다. 힘들어하는 성열을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명수는 제 나름대로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복잡해서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답답하다.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다. 이런 분위기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데…. 명수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 거니, 성열아.

 


" 지금 당장 대답해달라고 말 안할게. "
" ………. "
" 굳이 너의 이 평온한 일상을 제치고 나한테 와달라고 떼쓰지도 않을 거야. 명수야, 우리는 너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네가 싫다면 굳이 너에게 억지 부리지 않을 생각이야. "
" ………. "
" 무엇보다 너의 결정이 가장 중요한 거니까. "
" …성열아. "
" 결정이 되면 연락 줘. 네가 우리에게 오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너와 좋은 사이로 지내고 싶으니까. "

 


그렇게 말한 성열은 자리에서 일어나 씨익, 웃어보였다. 평소 그의 모습과는 달리 매우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미소였지만 명수에겐 그 모습마저도 예뻐 보였다. 이만 가보겠다는 말에 명수가 배웅을 하려 일어났지만 그럴 필요 없다며 그의 행동을 저지한 성열은 또 다시 빙그레 웃어 보이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명수가 힘없이 소파에 털썩, 하고 앉았다. 항상 밝은 모습만 봐와서 그런지… 어깨를 떨어가며 우는 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도와줄게. 라고 외칠 뻔 했다. 너는 내게 그런 존재야 성열아. 하지만 그만큼 나의 인생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건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앞으로 나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의 심각한 문제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지금의 일상도 그다지 좋지는 않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야.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일이 아니니까.

명수는 갑작스레 불어 닥친 폭풍으로 인해 급 피곤해져 옴을 느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퇴근을 해야겠다.

 


" 수연씨,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나도 곧 퇴근할 테니까. "

 


인터폰을 통해 수연에게 퇴근하라고 말한 명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단정히 걸어두었던 정장 재킷을 걸쳤다.

한 명은 국가에게 뼈아픈 배신을 당했고, 한 명은 누군가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다라…. 이 상황에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천하의 김명수가 심각해질 때도 있다니. 아무리 내 자신이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푸흐, 명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모든 파일들을 정리하고, 불을 끈 뒤 건물 밖으로 나왔다. 3월이지만 아직까지는 봄바람이 서늘하기만 했다. 살갗을 에는 추위에 명수가 잠시 동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아, 추워. 아까 성열이 굉장히 얇게 입고 왔던데 괜찮으려나…. 이런 상황에서까지 성열을 걱정하는 자신이 매우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명수에게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일이었으니.


김명수에게 이성열은,

 


…이미 버릴 수 없는 습관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 * *

 

 

" 이제 곧 출발하셔야 합니다. "
" 아… 알았네. "

 


한 중년의 남자의 비서로 보이는 듯한 사내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해왔다. 그에 중년의 남자는 하고 있던 일을 마저 정리하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젊은 비서는 나가서 차를 대기시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남자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이미 자글자글해진 주름이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영원, 불멸한 존재가 아니다. 젊고 행복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자신이 벌써 60이란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남자가 지갑을 열어 사진 한 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곳엔 매우 행복하게 웃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어느새 남자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 되고 이내 그곳엔 투명한 눈물이 고이고야 말았다.

내 어찌 너희들을 잊을 수 있을까. 내 어찌… 너를 잊고 살겠니. 과연 살아있을까? 지금이라도 나는 너희에게 무릎을 꿇고 지난날의 용서를 빌고 싶은데. 이미 늦어버린 일이겠지.

 


" 미안…하구나. "

 


미안해. 그 말을 하며 남자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내 그 눈물이 흘러 그의 자글자글한 주름까지 모두 적셔갔다. 이럴 시간이 없다. 옛 추억은 추억일 뿐.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남자는 눈물을 대충 닦아내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남자의 지갑엔 여전히 빛바랜 사진이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눈을 질끈 감고는 입을 앙 다물었다. 이내 그 입술에 몽글몽글 피가 맺혔다. 잊으려 해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 과거의 잘못이다. 남자가 깊은 의미가 담긴 숨을 내뱉었다.

미안하구나.

 

내 아들아….

 

 

 

 

 

시티헌터(City Hunter)

 

 


언젠가 한 번 어머니께 여쭤본 적이 있다. 어머니, 행복하세요? 라고. 그 물음에 어머니는 나의 두 손을 잡으며 웃으셨다. 어머니는 이미 눈으로 내게 말을 하고 계셨다. 응. 너무 행복해, 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웃어보였다. 어머니, 그렇다면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나는 차마 소리 내어 하지 못할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하시는 어머니께 나의 근심까지 얹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아니, 저는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나는 차마 다른 사람에게 묻지 못한 그 질문을 언제나 나 스스로에서 물어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에 대한 답을 얻은 적은 없다.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걸까. 사람들은 어떠한 감정이 들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아아, 이건 정의하기가 조금 힘든가? 그렇다면 말을 바꿔서, 불행의 기준은 무엇인걸까?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불행하다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내 두 손을 꼭 잡은 채 머리를 쓸어 넘겨주시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과거의 어머니는 이제 없다. 현재 나의 앞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여인만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점점 더 꽃이 피고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나는…

점점 시들어만 가는 것일까.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그 순간 울컥, 하고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한 들, 그것은 핑계로 밖에 들리지 않겠지. 바보같이, 정말 바보 같게도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갑작스런 나의 눈물에 당황하신 어머니가 왜 그러니 아가…. 하며 나를 따스히 품어주셨다.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어머니에게 안겨 이렇게 우는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에 안겨 위로를 받고 또 받았지만 나의 가슴에 얹힌 하나의 돌덩어리의 무게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을 더 짓누르고 밟아 뭉갰다. 이것이 그 대가겠지요. 어머니가 행복해지는 대신 내가 받아야만 하는 고통. 그렇다면 제가 다 감수 할게요,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아 있어 주세요. 모든 짐은 제가 짊어지고 갈게요. 저는 그 누구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저는… 저라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의 죄인입니다.

 

 

* * *

 

 

" 후아- 힘들다! "

 


성열이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으며 소리쳤다. 내 짐도 아닌데 도대체 내가 왜 짐을 날라야 하는 거지? 입을 삐쭉 내밀면서도 곧 자신을 무섭지 않게 쏘아보는 성규를 보며 예, 예, 알았다고요-. 하며 다시 짐을 옮기기 시작하는 성열이었다.

오늘은 중요하고도 중요한 날이다. 바로 우현, 호원, 성종이 성규의 집으로 이사를 오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쳇, 명수 짐이면 나도 들어줄 수 있는데 내가 어째서 저 눈꼴 시린 사람들 짐 셔틀이나 되어야 하는 건데! 성열은 옆에서 히히덕거리며 알콩달콩 손장난을 치는 호원과 동우 쪽을 쏘아봤다. 도대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건지 이젠 둘이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성열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나 나는 왕따구나. 성종은 첫 날 그렇게 자신을 떠받들 땐 언제고 이제는 아주 대놓고 무시한다. 은근슬쩍 자기 짐을 들어달라고 시키기까지 하니 원. 그래, 착한 이성열 네가 참아야지. 안 그래?

 


" 성열이 형! 여기 좀 와보세요! "
이거 봐라, 나 부려먹는 거.
" 예, 예… 갑니다. 가요. "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성열이 표정을 확 구기며 어슬렁어슬렁 그쪽으로 사라졌다. 성종의 부름에 사라진 성열 덕분에 그 많은 짐 정리는 다시 호원과 동우에게로 몰리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많은 짐들 때문에 호원과 동우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호원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으으, 역시 정리는 싫어. 하고 진저리를 치자 동우가 푸흐, 웃었다.

 


" 정리가 그렇게도 싫어? "
" 네. 저는 세상에서 청소가 제일 싫습니다. "
" 그럼 저기 앉아서 쉬어.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
" 에에? 그건 안 되죠. 그건 제 양심이 가만있지 못해요. 그리고… "
" 응? 그리고? "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오는 동우에게 호원이 살며시 누군가를 눈짓으로 가리키곤 눈을 감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호원의 시선을 따라 가보니 그곳엔 성규가 우현과 간간히 대화를 하며 똑같이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성규? 성규 때문에 그러는 거야? 동우의 물음에 호원이 짐을 푸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어휴, 저 자식은 동갑인데 도저히 친해지지를 못하겠어요. 남우현은 쟤랑 어떻게 얘기하나 몰라.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 "
" 음… 성규가 좀 그렇긴 하지. 그래도 속마음은 누구보다 착한 애야. "
" 쳇, 그러는 형이 더 착해 보이는구만, 뭐. "
" …어? "
" 아니에요, 아무것도. "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동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아, 일단 저것부터 옮겨야겠다. 방 한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커다한 짐 가방을 보며 동우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팔을 걷어 부치고 짐 가방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

 


" 어어…? "
" 줘요. 제가 할게요. "
" 아, 아니 안 그래도 되는… "
" 이거 엄청 무거워요. 이거 들다가 형 허리 나갈지도 몰라요. "

 


그리고는 동우가 잡고 있던 손잡이 부분을 홱 낚아채 가는 호원이었다. 사실 드는 그 순간 너무 무거워서 다시 놓칠 뻔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저와는 달리 전혀 무겁지 않다는 듯이 번쩍 들어 올린 호원이, 원래 갖다 놓아야 할 위치에 잘 내려놓고 오는 것을 보자마자 동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손바닥을 탁탁 털어 보이며 자, 이제 됐죠? 하고 웃어 보이는 호원에 동우가 어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헤- 하고 맑게 웃었다.

청소가 제일 싫다더니 군말 없이 뚝딱 처리해내는 호원의 모습에 동우의 눈에 하트가 뿅뿅 생겼다. 게다가 무거운 것들은 죄다 자신 대신 들어 옮겨주니 반하지 않을 레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무거운 것을 옮긴 탓에 지친 호원이 헥헥 대며 자리에 주저앉자 동우가 그곳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는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 마냥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 아이고, 잘했어요, 호원이. "
" 에, 에엑? "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해오는 동우의 모습에, 당황한 호원이 이상한 소리를 내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우현은 대충 상황파악이 된 것인지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성종과 성열은 무슨 일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규는 그저 우현이 웃는 옆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문득 우현의 웃는 모습이 굉장히 친근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저리도 예쁘고 귀여운 미소를 잃고 살아왔다니. 성규는 몰려오는 씁쓸함에 바짝 마른 입술을 침으로 한 번 축이고는 다시 하던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옆에서 우현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김명수 그 사람만 오면 끝이겠네. "

 


우현의 말에 성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의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응. 그 사람만 오면 모든 것이 시작되겠지. 성규의 말에 우현이 그래… 그렇구나. 하며 미소 지었다. 왠지 모르게 그 웃음이 마음에 걸린다.

 


" 두려워? "

 


성규의 물음에 우현이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두렵냐고? 나는… 두려워하는 걸까? 나도 모르겠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 것인지.

마냥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왠지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우현은 성규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바라만 보았다. 성규 또한 우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석고상처럼 서로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을 돌려준 것은 띵동- 하고 울린 초인종 소리였다. 초인종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성열이 고개를 갸웃하며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하지만 인터폰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성열은 뭐야. 왜 아무 대답도 안 해? 하며 입을 삐쭉거렸다. 그때 성열의 바지 주머니 안에서 작은 진동이 일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자 문자 한통이 와있었다. 발신자, 김……

 


" 명수…? 명수? 며, 명수!? "

 


문자를 확인한 성열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다시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래도 여전히 헛것을 보고 있는 기분인지 이젠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명수의 문자였다. 게다가 그 내용은…

[춥다. 문 안 열어줄 거야?]

" 어, 엄마야… 며, 명수가… "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못하는 성열이었다. 잘한다, 잘해. 성규가 혀를 쯧쯧 차며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살짝 열려진 현관문을 열고 명수가 들어섰다. 평소와 같은 수트 차림이었는데 왠지 평소보다 더 멋있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선 명수가 모두와 눈을 맞추며 웃어보이자, 성규가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 안녕하세요. 김성규입니다. "

 


그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돌려 성규를 바라보았다. 아…. 이 사람이구나. 성열이가 말했던 그 사람이. 명수는 얼굴을 보자마자 성열이 말한 사람이 성규라는 것을 알아챘다. 확실히 웃고 있는 얼굴이…

 


" 안녕하세요. 김명수입니다. "

 


자연스럽다. 굉장히 자연스럽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의 웃음이랄까.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하지만 명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성규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는 모두를 훑어보였다. 이 사람들인가. 앞으로 내가 목숨 걸고 지켜야할 사람들이. 모두들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명수는 한 명 한 명을 훑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열을 바라보았다. 명수가 자신을 쳐다보자 성열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후두둑. 하고 맑은 액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에 명수가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성열의 바로 앞에 가 섰다. 명수가 다가가자 성열은 들고 있던 고개를 푹 숙이고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명수가 그런 성열의 새하얗고 보드라운 얼굴을 두 손으로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 왜 울어. "
" 으… 명수야아…. "
" 완전 울보네. "

 


아이처럼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린 채 울고 있는 성열을 보며 명수가 푸스스 웃었다. 귀엽다. 너무 귀엽다. 그리고… 예쁘다. 너는 너무 예쁘다 성열아. 

성열과 명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둘의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다. 명수가 여전히 울고 있는 성열의 눈물을 다정스레 닦아주며 말했다.

 


" 성열아. "

 


그 부름에 성열이 드디어 고개를 들어 명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얘는 정말 언제 봐도 잘생긴 얼굴이다. 게다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것에 더더욱 명수가 멋있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명수의 눈빛은 한없이 따스했다. 한참을 그렇게 성열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명수가 씨익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 나… 왔어. "
" 명수야…. "
" 성열아, 이 사람들은 너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맞는 거지? "

 


명수의 물음에 성열이 모두를 한 번 훑어보더니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됐다, 그럼. 너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면 된 거다.

 

" 성열아. "
" ………. "
"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면,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들이 될 거야. "
" ………. "
" 너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또한 나에게도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는 거야. "
" 명수야. "
" 너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면 됐어. "

 


성열은 명수가 하는 말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성열이 너무 귀여웠던 것인지 그의 머리를 헤집으며 명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 내가 이 사람들을 지킬게. "
" 김…명수. "

 


눈물이 좀 그쳤나 싶더니 또 다시 성열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그 눈물은 다음으로 이어진 명수의 말로 인해 금방 그의 얼굴을 적셨다.

 


" 성열아, 너를 지켜주러 왔어. "

 


김명수. 너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나는 그걸 이제 서야 깨달은 것 같아. 성열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행복해. 네가 나를 믿고 와줘서…

 

나 너무 행복해 명수야.

 

 


* * *

 

 

" 푸하핫! 명수 형 완전 재밌다! "
"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

 


명수와 아이들은 금세 친해졌다. 명수는 꼭 이 사람들을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굉장히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말재주를 이용하여 경계의 벽을 허물어갔다. 어색해하던 아이들도 서서히 명수의 말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고 그에 명수는 더더욱 신이 나 마구 떠들었다. 으이구, 하여간 김명수 못 말려. 하지만 내심 뿌듯한 건 사실이다. 처음이라 어색할 텐데 먼저 다가가 주기도 하고. 명수에겐 정말 늘 빚을 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기는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잘해주면 되니까. 그 순간 호원이 뉴스나 좀 볼까? 하며 리모컨을 들어 TV의 전원을 켰다. 전원을 키자마자 화면 가득 아나운서가 들어찼다. 시간을 맞춰 튼 터라 뉴스가 하고 있던 모양이다. 스피커를 통해 아나운서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김상철 의원은 이번 기부를 통하여 앞으로 아이들 복지에 더더욱 힘을 쓰겠다며…… ]

" 그, 그거 꺼! 얼른!! "
"…뭐? "

 


아니, 쟤는 잘 보고 있는데 왜 끄래? 갑자기 TV를 끄라는 성열의 외침에 호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성열은 호원이 원하는 답도 해주지 않고 리모컨을 빼앗아 얼른 TV를 꺼버렸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모두가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오직 동우와 성열만이 입술을 꽉 깨물며 조심스레 성규의 눈치를 봤다.

 


" 김성규, 어디 가? "

 


역시나. 성규가 인상을 팍 찡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디 가냐는 우현의 물음에도 성규는 답하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에 성열이 발을 동동 구르며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 아, 안되는데…! 성규 형 저렇게 보내면 안 되는데…!! "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
" 아씨, 미치겠다! "
" 그게 무슨 말이냐고! "

 


우현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성열과 동우는 불안함에 몸을 떨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참다못한 우현이 겉옷을 챙겨들고 곧바로 성규를 따라 나섰다. 왠지 이대로 그를 보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아까 보았던 그 표정… 예사롭지가 않았는데. 우현이 미친 듯이 달리며 그를 찾았다.

 


" 하아, 김성규 어디 있는 거야…! "

 


우현이 모퉁이를 돌아 더욱 속력을 붙이려고 하려는 그 찰나.

 


" 김… 성규? "
" 후으, 흐윽…. "

 


모퉁이 쪽에서 고통스런 표정을 지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성규의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왜? 멀쩡했던 애가 도대체 왜…. 우현은 이해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수많은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일단은 괴로워하는 성규가 우선이었기에 재빨리 다가가 그를 살폈다. 성규는 가슴을 부여잡고 헉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 김성규! 너 왜 그래? "
" 후윽…. "
" 숨… 숨이 안 쉬어져? "

 


우현의 물음에도 성규는 여전히 거친 숨을 내뱉으며 상체를 더욱 더 굽혔다. 아무래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우현은 다급히 성규의 등을 탁, 탁 하는 소리가 나게끔 두드렸다. 숨 좀 쉬어! 숨 좀 뱉으라고 김성규!!

 


" 하으윽… 푸하, 후으…. "

 


우현이 간절한 마음으로 두드려서인지 성규가 드디어 내뱉지 못하고 있던 숨을 푸하, 하고 내뱉었다. 그 모습에 우현이 그를 그대로 품에 가두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현은 여전히 성규의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마치 안심하라는 듯이. 아파하지 말라는 듯이. 우현의 토닥임에 성규의 숨소리도 점차 안정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성규는 여전히 우현의 품 안에 있었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다는 듯이 조용히 눈을 감아보였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늘 이런 식이다. 그 얼굴만 보면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호흡곤란이 온다. 고쳐야 하는데. 고쳐야만… 이 버릇을 고쳐야 만이…

그를 죽일 수가 있는데.

 

잠시 감았던 눈을 떠보였다. 그러자, 여전히 자신의 등을 다정스레 쓸어내려주는 그가 있었다. 너무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성규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눈물이란 약한 자들이 흘리는 과분한 사치라고 생각하니까. 성규는 우현의 따뜻하고 편안한 품에 안겨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김상철.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또 다시 숨이 턱턱, 막혀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치지도 않는지 여전히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우현으로 인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순간적인 아픔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트라우마는 도대체 언제쯤에나 사라질까. 괴롭고 또 괴로웠다. 잊으려 해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과거가 자신을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우현은 성규가 이제 좀 진정이 된 듯 싶어 조심스레 그를 품 안에서 떼어냈다. 우현이 성규와 얼굴을 마주봤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 너, 입술…"
" …아. "

 


입술 전체가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괜찮아. 하고 자신의 피를 혀로 닦으려는 그를 우현이 제지하고는 손을 들어 올려 조심스레 성규의 입술에 맺힌 피를 닦아주었다. 아주 소중하다는 듯이 다정하게 피를 닦아주는 우현을 보며 성규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성규의 입술에 몽글몽글 맺혀있던 피를 다 닦은 것인지 우현이 손을 내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성규를 마주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사이엔 그 어떠한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오직 서로만을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의 정적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우현이었다.

 


"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
" ………. "
" 그게 네 버릇이구나. 이제야 알겠다. "

 


우현의 말에 성규는 여전히 아무런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우현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새하얀 성규의 얼굴에 손을 올려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우현은 놀라며 금방 손을 떼버렸고, 성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정면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자신이 어째서 성규의 얼굴에 손을 올려 쓰다듬은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심장이 세차게 뛰어댔다. 쿵쿵, 뛰는 소리가 성규에게까지 들릴 것 같아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이만 들어가자. 애들 걱정하겠다. "
" …그래. "

 


그렇게 말하고는 우현이 먼저 몸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성규는 서서히 멀어져가는 우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세차게 헤집고 지나갔다. 천천히 눈꺼풀을 내려 눈을 감았다. 온 세상이 어둡고 깜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넓고도 어두운 공간의 한 가운데에 9살의 어린 성규 자신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다시 턱, 하고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그 순간 김성규! 안 오고 뭐해! 하는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막혀왔던 숨이 탁 트이는 것이 느껴졌다.

 


" 푸흐… "

 


웃겼다. 그냥 이 상황이 너무나도 웃길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강한 트라우마로 인해 호흡곤란이 자주 오곤 했다. 성열과 동우가 아무리 애를 써도 숨이 막히는 건 여전했고, 심하면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도 많았는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저 아이로 인해 그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하나 둘 생겨나는 것일까. 재밌다. 흥미롭다.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며 손짓을 하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가 또 한 번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우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로 가는 이 거리가 매우 짧게 느껴졌다. 발걸음 또한 너무도 가벼웠다. 성규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최악으로 치닫던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우현이 닦아주었던 입술을 혀로 한 번 쓰윽, 핥았다. 약간이나마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재밌겠다. 너와 앞으로 함께 할 날들이 너무나 기대돼서 미칠 것만 같다.

성규의 얼굴엔 미소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만은, 정말로 이것만은…… 오랜만에 내보이는

 

가면이 아닌 자신의 진짜 얼굴이었다.

 

 

 

 

 

 

 

 


시티헌터(City Hunter)

 

 


" 하아, 흐으… "

 

오늘도 어김없이 악몽을 꾸며 일어난 우현이 잔뜩 미간을 찡그린 채 팔을 뻗어 두통약을 찾기 시작했다. 역시나 어디서든 악몽은 늘 따라오는구나.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약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아채는 것이 느껴졌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그 사람은…

 


" 김성규…? "

 


그는 바로 성규였다. 성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서랍에서 두통약을 꺼내어 그대로 휴지통에 갖다버렸다. 그걸 본 우현이 지금 뭐하는 것이냐고 소리치려는 찰나, 성규가 땀으로 젖어있는 우현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 이런 거 먹지 마. "
" …뭐? "
" 언제까지 이렇게 고통에 허우적거릴 건데. "
" ………. "
" 대체 언제쯤이면 벗어날래?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 건데. "

 


자신과 똑같이 표정을 잔뜩 구긴 채 말하는 성규의 모습에, 우현이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글쎄, 언제일까. 내가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은. 나도 궁금하다. 언제쯤이면… 대체 얼마나 더 아파하면… 가족들이 날 놓아줄까. 아니, 사실은 내 자신이 날 괴롭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이 죽던 그 날부터 나는 줄곧 그 일이 내 탓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내 스스로 나를 옭아매고 서서히 목을 졸랐던 것 같다. 주위 사람에게 피해 주기 싫어 복용했던 약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냥 피실피실 웃음만 나왔다. 여전히 그 아픔을 지워내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나 스스로를 놔주지 않는 것일지도.

 


" 김성규, 너는 그런 감정 알아? "
" ………. "

 


뜬금없는 우현의 질문에 성규가 아무런 말없이 우현 쪽을 바라보았다.

 


" 죄책감이 너무 심해서… 나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감정. "
" ………. "
" 그 아픔을 어떻게 잊어. 어떻게 지우라는 거야? 내 앞에 놓여진 세 구의 시체가 아직도 눈에 선해. 그게 바로 내 가족들이었어. 아침만 해도 일 때문에 바쁜 나를 두고 셋이서만 놀러가게 되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웃어주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서 돌아와. 어떻게… 어떻…게…. "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우현이다. 그 모습에 성규는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해져 옴을 느꼈다. 이 끔찍한 고통을 겪기 전 너의 모습은 어땠을까. 분명히 모든 일에 의욕적이고 늘 생글생글 웃고 다녔겠지. 우리가 만나서 함께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우현 네가… 웃어줬으면 좋겠어.

 


" 잊으라는 게 아냐. "
" ………. "
" 지우라는 것도 아냐. "
" ………. "
" 그저… 잠시만. 아주 잠시만 너의 가슴 속에 가족들을 묻어두라는 것뿐이야. "
" ………. "
" 남우현, 나는 네가… "


" 형들! 아침 먹으래요! "


성규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우현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성열이 들어왔다. 그 덕에 성규의 목소리는 그대로 공중에 흩어지고 말았다. 성규가 작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잘됐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소리를 꺼낸 것인지. 고개를 좌우로 저어보이며 방을 나서는 성규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우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김성규는 자기 목소리가 나에게 안 들렸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분명히 들렸다. 그가 말하는 것을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말은…

남우현, 나는 네가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나도 그래, 김성규. 나도 네가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 어? 호원아, 어디가? "
" 아, 일이 있어서요. "
" 국정원 일이야? "
" 네. 동료가 저번에 국과수에 뭘 좀 의뢰 했었는데 자기 시간이 안 된다고 저보고 대신 좀 가달라네요. 중요한 거라고 꼭 제가 들어야 한대요. "
" 국과수? 아… 나도 가면 안 돼? "
" …네? 형도 간다고요? "
" 응! 방해 안할게! 거기에 아는 선배도 있고, 또…아는 선배도 있고, 으음… "
" 푸흡- "

 


그냥 혼자 있기 싫다고 하지 뭘 그렇게 둘러대요, 형은? 작게 웃으며 말하는 호원의 모습에 동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아 역시…. 나는 거짓말은 안 된다니까…. 성열과 명수는 장 본다고 나가버렸고, 우현과 성규는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그나마 편한 게 호원인데 그마저 나가버리면 정말 할 것이 없는 동우였다. 그런 동우의 마음을 헤아린 호원이 자켓을 걸치며 말했다.

 


" 얼른 옷 입고 나와요. 나도 혼자 가긴 심심하니까. "
" 어, 어? 정말!? "
" 네. "

 


호원의 말에 동우가 맑게 웃으며 옷장에서 대충 아무거나 골라 걸쳤다. 그리곤 어서 가자며 호원을 이끌었다. 하지만 뒤돌아 있던 호원은 동우의 모습을 보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동우의 옷장으로 터벅터벅 다가갔다. 그리고는 꽤나 두툼한 옷을 꺼내며 동우에게 내밀었다.

 


" 밖에 추워요. 그렇게 입고 나갔다간 감기 걸리기 십상이에요. "

 


그리곤 동우가 입고 있는 자켓을 벗기고 호원 자신이 직접 옷을 입혀주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동우가 일순간 얼음이 된 듯 굳어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지퍼까지 단단히 올려준 호원이 그제 서야 만족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가요 이제. 하며 앞서 나갔다. 그에 동우가 아까보다 더 밝게 웃으며 응! 하고 대답해왔다. 호원이 눈 꼬리까지 휘어가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물론, 호원의 등을 보고 있는 동우는 그 미소를 보지 못했지만.

 

 


* * *

 

 

동우는 아까부터 안절부절,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분명 국과수 올 때 까지만 해도… 아니아니, 와서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아까부터 호원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뭔가 불만인 듯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엔 대답해주지도 않았다. 그 이유를 모르는 동우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호원이 저렇게 인상 굳히고 있으면 되게 무서운데…. 결국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동우가 호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저기, 호원아… 뭐, 화난 거 있어? "
" …아뇨. "
" 그런데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
" 제 표정이 어디가 어때서요? "
" 아니이… 뭔가에 화가 난 것 같아서…. "
" 그런 거 없어요. "

 


또 다시 끊긴 대화. 동우가 우울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따라오겠다고 했나…. 길고도 조용한 복도엔 호원과 동우의 발소리만 고요하게 울릴 뿐이었다. 호원은 여전히 뭔가 뾰로통한 표정이었고 동우는 풀이 죽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닥만 보고 가던 동우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앞서 가던 호원이 말도 없이 그대로 멈춰 선 것. 그 덕에 호원의 등에 얼굴을 박아버린 동우가 아야야…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치만 호원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동우가 왜 그래 호원아? 하며 묻자 드디어 호원이 뒤를 돌아 동우와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아까 그 사람 정말 선배 맞아요? "
" …어? “
" 아까 형이랑 포옹하고 엄청 반갑게 인사 나눴던 사람 말이에요. "
" 아아… 선배 맞는데…? "
" 형은 선배랑 막 포옹하고 그렇게 다정하게 얘기해요? 형 그런 사람이었어요? "
" …엑? "
" 아씨, 내가 지금 뭐래? 아아, 제가 한 말은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잠시 미쳤… "
" 푸흐… "
" 왜, 왜 웃어요!? "

 


자신은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옆에서 동우가 웃기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자, 당황한 호원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물었다. 그에 동우가 여전히 풉, 푸흐, 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간간히 말을 이어나갔다.

 


" 지금 질투하는 거야? "
" …네? "
" 아니, 왜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아니면 말… "
" 아씨, 아니거든요! 제가 무슨 지, 질투를 한다고! 형 진짜 웃긴다! "
" 어어? 호, 호원아! "

 


동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는 혼자 있는 대로 성질을 막 부리더니만 홱- 돌아서 먼저 앞서 나가는 호원이다. 쿵쿵 거리는 발소리 하며, 긴장한 듯한 걸음걸이 하며, 귀까지 새빨갛게 무르익은 호원의 모습에 동우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 어떡해, 호원아… "

나……


네가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아.

 

 


* * *

 

 

" 바보. "
" 그래. "
" 멍청이. "
" 응. "
" 해삼, 말미잘, 멍게!! "
" 고마워. "
" 아씨, 김명수! "
" 응? 왜, 성열아? "

 


얄밉다. 저거 진짜 얄미워 죽겠다. 생글생글 웃는 저 볼따구를 잡고 마구 늘어뜨리고 싶다. 네가 뭔데, 김명수 네가, 네가 감히… 네가 뭔데…!

 


" 과자를 못 사게 하는 건데에…!! "
" 말했잖아. 몸에 안 좋다고. "

 


명수의 말에 성열이 코웃음 쳤다. 성열이 손을 허리에 짚은 채 앞서 걸어가고 있는 명수의 등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무거운 짐을 다 들어주는 거? 그래, 좋다. 고맙다 이거야!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과자를 못 사게 하냐는 말이야! 몸에 안 좋아? 과자가 몸에 안 좋아아? 그래서 나한테 과자를 못 사게 한 거라고? 웃기시네, 김명수! 그럼 도대체, 도대체!

 


" 네 손에 들려있는 그 과자는 뭐냐고오! "
" 아, 이거? 내 건강식품. "

 

명수의 심드렁한 반응에 더더욱 열이 받은 듯 성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성열에겐 몸에 안 좋다는 이유로 과자를 사지 못하게 해놓고는 명수의 한 손엔 짐이 한 가득, 다른 한 손엔 과자봉지가 들린 채였다. 콧노래까지 흥얼흥얼대며 과자를 열심히 집어먹고 있는 명수가 얄미워 죽을 것만 같았다. 짱아… 짱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 짱아가… 저 악마 김명수에게 먹히고 있다니.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거다. 성열은 이미 한참이나 멀어져가는 명수를 노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입고 있는 티셔츠의 팔을 걷어 올리고는 운동화 끈도 단단히 졸라맸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뒤, 명수에게로 다다다- 질주하는 성열이었다.

 


" 이야아아아! 김명수! 내 과자 내놔!! "

 


성열이 발에 모터라도 단 것처럼 명수에게 달려가 그대로 그의 손에 들린 과자를 잽싸게 빼앗아왔다. 갑작스레 자신의 손이 허전해지자 놀란 명수가 눈을 커다랗게 떠 보이며 성열을 바라보았다. 성열은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이 헤헤- 웃으며 열심히 과자를 집어먹고 있었다. 그에 명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 허, 이성열 과자가 그렇게도 먹고 싶었어? "
" 야! 당연하지! 내가 짱아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너 솔직히 말해봐. 내가 짱아 좋아하는 거 알고 일부러 이거 고른 거지? "
" 엇, 어떻게 알았냐? "
" 너 고등학교 때도 자주 그랬잖아! 맨날 돈 없는 나 약 올리면서 짱아 사와서는 자기 혼자 야금야금! 네가 그때 얼마나 얄미웠는지 알아? "
" 푸흐… 맞다. 내가 자주 그랬었지. 근데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 "
" 어? 이유도 있었어? 그냥 나 약 올리려고 한 게 아니었어? "
" 아닌데? 네 앞에서 짱아를 혼자서 막 먹으면 네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 줄 알아? 너 그 장화신은 고양이에서 고양이가 눈물 흘릴 것 같은 눈으로 애절하게 바라보는 장면 알지? 네 눈이 완전 그랬다니까? 얼마나 귀여웠는데! 내가 그 표정 보려고 맨날 없는 돈 털어가면서 짱아… "
" 야, 이 변태새끼야! 이거 완전 순 변태 아냐? "

 


명수의 말에 발끈한 성열이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히며 명수의 등을 주먹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애절한 표정을 보기 위해 그런 짓을 했다니. 이건 정말 변태다. 김명수는 정말 변태다. 명수를 신나게 패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씩씩대는 성열이었다.

 


" 아야야… 이성열 너 손 완전 맵다. "
" 아프냐? 아파!? 하, 김명수 진짜 너 때문에 내가 못산다, 못살아. "
" 왜?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 "
" 뭐어? 네가 아직 덜 맞았…! "
" 나는 네 그 표정이 제일 좋았어. "
" …뭐? "
" 그 표정이 제일 귀엽고 예뻤다고. 진짜 갖고 싶을 만큼. "
" 기, 김명수… "
" 정말로 아직도 내 마음이 어떤지 몰라? 내가 이렇게나 표현을 많이 했는데도? "
" 야, 야아… "
"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르는 척 하는 거야? "
" ………. "

 


갑작스레 진지하게 나오는 명수의 태도에 적지 않게 당황한 성열이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명수는 정말 진심이라는 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에 성열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고? 네가…? 김명수 네가? 그동안 한 게… 장난이 아니었던 거야?

 


" 알았는데 모르는 척 했던 거라면 별 수 없지만… "
" ………. "
" 몰랐던 거라면 확실하게 말할게. "
" ………. "
" 이성열, 나 너 좋아해. 너한테 첫눈에 반했었어. "
" ………. "
" 네가 환하게 웃는 모습에 반했었어. 하얀 얼굴에 큰 눈동자. 웃을 때 휘어지는 눈 꼬리까지  모든 게 너무 예뻐 보였어. 물론 지금도. 그래서 너랑 연락이 끊겼을 때 나 엄청 힘들었어. 연인은 아니었어도 친구라는 그 명분으로 네 옆에 있을 수 있던 시간이 나한테는 너무나도 값졌으니까.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다시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연락 해보고 싶어서 네 번호 수소문해서 찾아냈어. 그렇게 다시 만났는데… "
" 명수야. "


이성열 넌,
여전히 예쁘더라.


명수의 고백에 조금씩, 아주 천천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떨려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좋았다. 물론 당당하게 그와 눈을 맞출 수는 없었지만 마냥 좋았다. 두근두근. 일정하게, 또는 불규칙적이게 심장이 뛰어댔다. 나 지금 되게 행복하다 명수야. 처음엔 되게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너무 편안하고 속이 되게 시원해. 내가 말하지 못한 것을 네가 말해준 것 같아서 너무… 후련해. 너무 익숙해서… 그래서 내 마음을 깨닫지 못했었나봐. 바보 같게도 그랬었나봐. 명수는 아무 말도 없는 성열의 모습에서 그의 대답이 거절이라고 생각했는지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 굳이 지금 대답해주지 않아도 돼. 네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할게. 그러니까… "
" 아니, 아니야 명수야. "
" …어? "

 


성열이 환하게 웃었다. 명수를 처음 만났던 그 날 보다 더 환하게, 진짜로 행복하다는 듯이 밝게 미소 지었다.

 


" 나도 좋아. "
" 성…열아. "
" 나도… 네가 좋아, 명수야. "

용기 내줘서 고마워 명수야.

앞으로… 내가 더 잘 할게. 그동안 네가 마음고생 했던 거 내가 다 갚아줄게. 앞으로는 내가 더 널…

 

사랑해줄게, 명수야.

 

 


* * *

 

 

" 당분간 형들한테는 비밀로 하자. "
" 왜? "
" 아, 그냥! 좀… 쑥스럽잖아…. "
" 푸핫! 알았어. "

 


다정하게 손 꼭 잡고 집까지 잘 걸어와 놓고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는 성열의 모습에, 명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귀여워 죽겠다 이성열. 집 안으로 들어서니 거실에 모두가 모여 있었다. 성규와 우현은 뭘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하는지 감히 얘기도 못 붙일 정도였고, 그리고 그 옆으로는 뭔가에 뾰로통한 호원과 그를 풀어주려 애를 쓰는 듯한 동우의 모습이 보였다. 성종은 온 종일 컴퓨터만 하는 것인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어? 왔어요? 뭐 사왔어요?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느새 성종이 거실로 나와 명수와 성열이 사온 장거리들을 열심히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이 먹을 만한 것이 없었는지 금세 흥미를 잃고 소파로 가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리모컨을 들어 TV의 전원을 켰다. TV에서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뉴스가 하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대검 중수부가 지난해 6월 20일 경기 수원의 자동차부품업체 C사에서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함께 6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새나라당 박명성 의원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검찰은 박 의원이 2010년 11월과 12월 한 자동차부품업체 회장 조아무개씨에게서 특별세무조사에서 나온 20억여 원의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청탁과 함께 2차례에 걸쳐 6000만원을 받았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 의원은 "절친한 친구에게 돈을 받았지만 죄가 되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검찰은……]


" 에이, 재미 없… "
" 잠깐. 돌리지 말아봐. "

 


 뉴스가 재미없다며 채널을 돌리려던 성종을 제지한 건 성규였다. 모두가 성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무 말 없이 뉴스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성규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 재밌겠네. "
" 뭐가? "

 


성규의 말에, 궁금하다는 듯이 물은 것은 우현이었다. 하지만 성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부엌에서 사온 장거리들을 정리하고 있는 성열과 명수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하던 일을 멈추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는 두 사람이었다. 성규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상태였다. 모두가 성규가 어서 말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재미있겠다는 것일까.

 


" 지금 우리가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
" …뭐? "
" 무작정 국정원으로 쳐들어가 정보 빼오기? 아니면… 내가 죽여야만 하는 그 사람을 찾아서 목숨을 끊어놓는 거? 우린 지금 뭘 해야 할까? "
" 대체 무슨 소리야? 제대로 좀 말해 봐. "

 


역시나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호원이 성규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시끄러웠던 집 안이 금세 고요해졌다. 성규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 그냥…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몸이나 좀 풀어보는 게 어떨까 해서 말이야. "
" 몸을… 풀어? "
" 국가의 목을 아주 조금씩 졸라가는 거야. 즉, 우리의 존재를 서서히… 알려가는 거지. "
" ………. "
" 국가를 위협하는 시티헌터. 어때, 재밌을 거 같지 않아? "

일명……

 


국가자극 프로젝트라고나 할까?

 

 

 

 

 

 


시티헌터 (City Hunter)

 

 

" 그래, 그럼 한 달 후에 보자고. "
" 감사합니다. "

 


팀장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호원이 팀장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들과 일을 해야 하니 국정원은 잠시 쉬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달의 휴가를 허가 받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호원이었다. 그 때, 벌써 소식을 들은 것인지 창선이 호원을 뒤따라 나오며 말했다.

 


" 뭐냐, 이호원? 갑자기 웬 휴가야? 어디 안 좋아? "
" 아니. 이 강철체력 이호원이 어디 아플 리가 있겠냐? "
" 그럼 갑자기 왜 휴가를 신청한 건데? "
" 궁금해? "
" 그래 임마! "
" 귀 좀 대봐. "
" 뭐? "
" 궁금하다며. 이거 기밀사항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귀 좀 대보라고. "

 


호원의 말에 창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호원에게 귀를 갖다 대었다. 그에 호원이 재밌다는 듯이 큭큭 거리며 창선에게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말해주었다.

 


" 놀.고.싶.어.서. "
" 이,이호원 이 개자식아!!! "
" 푸하핫! 아 이창선 진짜 멍청해! 어떻게 귀를 대란다고 그걸 또 대고 앉아있냐? 역시 넌 놀리는 맛이 있어. 푸흡. "

 


호원의 장난에 놀아난 창선이 얼굴을 붉히며 씩씩댔다. 자신은 이렇게나 화가 나 죽겠는데 이호원 저 자식은 웃기다며 배를 잡고 끅끅대기 바쁘다. 하여튼, 누가 초딩 아니랄까봐 진짜. 창선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여전히 얄미운 건 어쩔 수가 없어 호원을 째리며 입을 여는 창선이었다.

 


" 근데 네가 왜 쉬는데? 쉬려거든 내가 쉬어야지! 네놈은 지금껏 실컷 놀았잖아! "
" 불만이면 너도 휴가 달라고 하던가. "

 


호원의 말에 창선의 입이 앙 다물어졌다. 확실히 지금껏 호원보다 창선이 꼬박꼬박 출근도 잘해왔고 일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호원이 그동안 쌓아왔던 실적에 비하면 자신은 형편없는 일개 요원일 뿐이었다. 호원은 일이 많이 없는 대신에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주로 맡아왔다. 게다가 거의 99% 성공률을 자랑하기까지 하며. 그랬기에 팀장이 흔쾌히 휴가를 준 것일 수도…. 이호원이 뛰어난 것은 국정원 직원이라면 누구든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데 마음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창선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호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너를 뛰어 넘으리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저 너와 동등한 위치에라도 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것인데 나는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이고 너는 내게서 멀어져만 간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푸욱- 내쉬며 쓴 미소를 지었다. 그 때, 잠자코 서있던 호원이 말을 걸어왔다.

 


" 이창선. 넌 내가 좋냐? "
" …뭐? "
" 나 이호원이가 좋으냐고, 인마. "
" 뜬금없이 뭔 소리냐? "
" …나는 말이다. "

 


호원이 허공을 응시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왠지 그 미소는 평소 호원 특유의 장난스런 미소와는 거리가 먼 아릿한 미소였다. 호원은 먼저 말을 꺼내놓고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창선은 그가 입을 열 때 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이윽고 호원이 크게 숨을 내뱉더니 본래의 장난스런 미소를 씨익- 지으며 말했다.

 


" 네가 좋다. "
" ………. "
" 내 친구 이창선. 나는 그 말이 너무 좋아. 친구라는 건… 정말 소중한 거잖냐. "
" 새끼. 갑자기 감상에 푹 젖어서는. "

 


하지만 창선도 싫은 눈치는 아닌 듯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자판기 쪽으로 다가가 동전을 여러 개 넣더니 음료수를 두 개 뽑아 하나는 호원에게도 던져주고, 하나는 자신이 마셨다. 호원은 창선이 던져준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지 않고 그저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차가운 캔 위로 수증기가 몽글몽글 맺혀있는 것이 시원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호원은 음료수를 마시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창선을 보며 아까와 같은 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있잖냐, 창선아. 네가 너무 좋은 건 사실인데 말이야. 내게는… 남우현이라는 친구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어. 그래서 나는 잠시 동안, 아니… 어쩌면 평생을 이창선 친구가 아닌, 남우현의 친구로 있어야 할 것 같아. 이런 나를…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나에게서 배신감도 느낄 거야.

 


" 잘 다녀와라 휴가. "
" …그래. "

 


창선이 멍하니 서있는 호원의 등을 장난스레 툭, 하고 치며 말했다.

 


" 한 달 지나면 내가 너 붙잡아두고 일만 주구장창 시킬 거니까 알아서 해, 새끼야. "
" 큭- 알았어, 알았어. "
" 그만 가봐. 조만간 술이나 한 번 사주던가. "
" 오케이. 내가 거하게 한 번 쏜다. "

 


그렇게 창선은 일이 있어 가보겠다며 호원의 어깨를 두어 번 치고는 본사 안으로 들어갔다. 호원 또한 그런 창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바삐 했다. 남우현이 오늘 작전회의를 한다고 했었지. 얼른 가야겠다. 본사로 향하는 창선과 집으로 향하는 호원의 거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마치 이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마냥.

 

나는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훗날, 너와 내가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며 울부짖게 될 줄은. 그 끔찍한 진실 앞에, 너와 내가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는… 나는 정말로 몰랐다.

 

 

 


* * *

 

 


" 왔어? 빨리 앉아. 휴가 신청하러 간다고 한 애가 왜 이제 서야 와? "

 


우현의 말에 호원이 멋쩍게 웃으며 소파로 가 앉았다. 그에 동우가 호원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분명히 나갈 때만 해도 싱글벙글 하던 애가 왜 저렇게 울상이 되어 돌아온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동우만은 호원의 복잡한 마음을 알아챈 듯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을 물어볼 상황도 아니어서 잠자코 있기로 한 동우였다. 이윽고 일곱 명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우현이 입을 열어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이번에 성규와 내가 세운 작전은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아. 아니, 오히려 쉽다고도 할 수 있지. 일단은 이번에 이 일에 참여할 인원 중에는 특별히 동우 형도 포함되어 있어. "
" 어? 내가? "

 


생각치도 못한 우현의 말에 동우가 놀란 듯 물어왔다. 호원 또한 행동파가 아닌 동우가 이번 일에 낀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우현을 바라보았다.

 


" 아, 그다지 위험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성종이가 해킹한 정보에 의하면 17일 오후 3시에 박명성 의원이 구미시에서 사적인 만남을 가질 예정이야. 그리고 그 만남을 가진 후에 다시 서울로 복귀할 예정이고. 박명성 의원은 국회의원이라는 직위를 방패막 삼아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간단한 조사에도 응하지 않고 있어. 이번 그 구미시에서 가지는 사적인 만남은 저번에 뉴스에 보았던 뇌물을 준 사람과의 만남일 거야. 성열이와 성종이의 정보력은 알아주니까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을 테고. 이젠 우리 그 사람을 어떤 방법으로 검찰에 넘기느냐 인데. 일단은 성규가 그간 박명성 의원의 통장 거래내역을 빼왔거든? 그것이 검찰에게 내밀 첫 번째 증거이고, 두 번째 증거는 아직 확실히 얻을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박명성 의원이 구미시에 가는 이유가 뇌물을 받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두 번째 증거를 확보하게 되는 거야. "
" …그렇겠네. 직접 받은 그 뇌물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을 테니까. "

 


우현의 말에 호원이 동의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수로 그와 그가 받은 뇌물들을 검찰로 넘긴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들은 바가 없어 모두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에 우현이 살짝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 우리는 구미시에서 뇌물을 받고 서울로 복귀하는 박명성 의원의 차에 따라 붙을 거야. "

 


우현의 말에 모두가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것인가?

 


" 우리에겐 그들을 움직일 권력도, 인력도 없어. 우리 스스로가 움직여야만 해. 일단은 두 대의 차로 움직일 생각이야. 앞의 차에는 나와 성규, 호원이가 탑승 할 거야. 박명성 의원이 사적으로 움직일 때 대동하는 차는 총 두 대. 자신과 운전수가 탄 차 한 대와 경호원 두 세 명이 타있는 차 한 대. 일단은 우리 차가 그들의 차에 따라 붙어 작은 접촉사고를 낼 생각이야. 그러면 차 두 대는 자연스레 멈출 테고, 박 의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차 밖으로 나오겠지. 우리가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시간을 끄는 동안 뒤 따라오던 명수와 동우 형이 차에서 내려 그대로 박 의원이 타고 있는 차에 탑승해 일단은 한적한 도로로 몰고가줘. 우리는 경호원들을 처리한 즉시 바로 따라갈 테니까. "
" 그럼 동우 형이랑 나는 박 의원만 데리고 사람들 눈을 피할 곳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
" 응. 그렇지. 나머지는 우리가 뒤따라가서 알아서 할 거니까. "
" 그치만… 경호원들도 만만치 않을 텐데. 실패하면? "

 


성종의 질문에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 입을 연 쪽은 우현이 아닌 성규 쪽이었다.

 


" 그래, 알지. 그들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거. 일단은 육탄전으로 갈 생각인데…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으면 총격전으로 갈 생각이야. 모두들 알다시피 내 직업이 직업인만큼, 총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어. 함께 그들을 대적할 남우현, 이호원 또한 총을 잘 다루지. 그들 역시 임무를 할 때엔 총격전이 거의 필수였을 테니까. "

 


성규의 말에 우현과 호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 서야 모든 이야기가 이해 갔는지 동우, 성열, 성종이 수긍하는 눈치를 보였다. 성열이 고개를 돌려 달력을 확인했다. 15일이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이틀 뒤에 첫 번째 작전을 수행한다니. 성열은 무언가 초조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눈치 챈 것인지 명수가 조심스레 성열의 어깨를 다정스레 감싸주었다.

 


" 걱정 하지 마. "
" …응. "
" 다들 무사히 돌아올 거야. "
" ………. "
" 우리 잘하고 올게 성열아. "

 


명수의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된 것인지 성열이 명수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명수 또한 성열을 다정스레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각기 다른 일곱 명의 공통된 목표. 그 첫 단추가 드디어 끼워졌다.

 

 

 

* * *

 

 


아침부터 일곱 사람이 분주히 움직였다. 이건 챙겼어? 저건? 무기는 챙긴 거야? 아니아니! 바보야, 이걸 안 챙기면 어떡해! 이른 시각이어서 그런지 모두가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작전대로 수행 하려면 박 의원이 만남을 가지는 그 장소로 미리 가있어야 했다. 그래야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갈 수가 있으니. 한참 뒤에야 모든 준비를 마친 다섯 명이 차에 탑승했다. 성열과 성종은 걱정은 됐지만 이 사람들이라면 잘 하고 올 거라고 확신하며 애써 웃어보였다. 성종이 열린 창문 틈 사이로 호원을 툭툭, 건드렸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호원이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성종을 바라보았다.

 


" 또 나대다가 다치지 말고. 알았어? "
" 야, 이성종. 형 좀 이제 그만 무시하지? 내가 너보다 형이야, 임마. "
" 아이고, 형답게 해야 형으로 봐주죠. 어쨌든! 다치지 말고 오라고! "
" 그래그래. 알았다, 동생. "

 


남들이 볼 때엔 틱틱 대는 정 없는 대화 같았지만 호원과 성종의 사이엔 끈끈한 가족의 정이 오가고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호원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성종이나, 그런 성종의 마음을 알아주는 호원이나. 그런 두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동우가 싱긋- 웃고는 뒷차에 탑승했다.

 


" 다치지 마. 작은 상처 하나라도 달고 오면 알아서 해! "
" 응. 알았어. 금방 올 테니까 아침에 못잔 잠 한 숨 푹- 자고 있어. "

 


성열과의 대화를 마친 명수 또한 차에 탑승했다. 모두가 차에 탄 것을 확인한 성규가 이만 출발하자는 신호를 보내자 호원이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석엔 호원이, 뒷좌석엔 성규와 우현이 타고 있었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만 앞으로 남은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모두가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듯 싶었다. 우현이 품 안에 있는 글록을 조심스레 꺼내어 손으로 쓸어보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우현은 지금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마구 섞여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눈치 챈 성규가 말을 걸어왔다.

 


" 긴장 돼? "
" 아… 뭐. 처음이니까 잘 해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 정도…? "
" 잘 할 수 있어. "

 


성규의 짧은 한마디에 우현은 큰 힘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무척이나 맑았다. 옅은 하늘색의 하늘에 뭉글뭉글 자기들끼리 뭉쳐있는 흰 구름들이 어우러진 것이 아름답고 예뻐 보였다. 우현은 잠시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성규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너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어? "
" 모두는 아니고… 그저 정부의 손에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아. "
" 이야기 해줄까? "
" …뭐? "

 


우현의 말에 놀란 것은 성규 뿐 만이 아니었다. 운전을 하고 있던 호원 또한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현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규는 우현이 걱정 되어 애쓸 필요 없으니 나중에라도 말을 해달라고 말을 꺼냈지만 우현의 생각은 변함이 없는 듯 눈에 결의가 차있었다.

 


" 네 말대로 언제까지 끌어안고 살 수는 없는 거잖아. 안 그래? "
" 남우현…. "
" 그러니까 아주 잠시만… 잠시만 내려놓으려고. "

 


우현의 말에 성규와 호원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 하니 왼쪽 손목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른쪽 손으로 상처 쪽을 한 번 쓸어내린 우현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우현의 입이 열렸다.

 


" 그날은 아주아주 맑고 화창한 날이었어. 마치 오늘처럼…. "

 

 

 

 

 

시티헌터 (City Hunter)

(우현과거Ⅰ)

 


" 1급… 기밀 임무요…? "
" 그래. 자네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더군. 그동안 수차례 어려운 임무들을 쉽게 해결 해오지 않았나? 이번 임무도 그렇게 해결해 주기만 하면 돼. "

 


그때 당시, 우현은 국정원 국장의 부름을 받고 불려갔었다. 국장이 우현에게 부탁한 임무는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국가 1급 기밀 임무였다. 우현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부르자마자 예고도 없이 바로 1급 임무라니. 그동안 힘들고 어려운 임무를 많이 수행 해왔기는 했어도 1급 임무는 처음이었기에 우현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임무를 실패하는 날엔… 분명 국가에 크나 큰 손실이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우현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자신에게 내려진 임무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마다 않고 해왔지만 이번 경우는 확실히 달랐고, 또한… 위험했다. 그랬기 때문에 우현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의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장의 끊임없는 설득에 우현이 결국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대답을 해보였다.

 


" 팀원들은… 어떻게 되죠? "
" 자네를 포함한 여섯 명이 한 팀이 될 거라네. 이병헌, 박서준, 신수현, 이준수, 강찬석 이렇게 다섯 사람이 자네의 팀원이네. "
" 이호원 요원은… 이번 임무에 끼지 않는 건가요? "
" 아, 호원 군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지. 하지만 알아보니 호원군은 현재 1급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중요한 임무를 맡아 실행하고 있는 중이더군. 그래서 차마 이 팀에 합류시킬 수가 없었네. "

 


국장의 말에 우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요 며칠 호원을 본 지도 오래 된 것 같았다. 그게 임무 때문이었구나. 아무리 같은 국정원 요원이어도 한 팀이 되어 하는 일이 아니면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해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 규칙이니까 자신이 몰랐을 만도 하다. 하지만 내심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호원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여서 웬만한 동료들보다 팀워크는 최고였으니까. 우현이 조심스레 의자에서 일어나 국장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우현의 모습을 국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우현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런 국장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국장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국장의 낮고도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반드시, 성공해야하네. "
" ………. "
" 실패하면…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 하지 못해. "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우현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고 나온 우현은 몇 걸음 가지 않아 그대로 벽에 몸을 기대어 서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

 


불안했다. 혹시나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모든 책임은 팀장인 자신에게 돌아올 텐데. 하지만 우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쁜 생각들을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안 좋게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했어. 우현이 씨익- 입 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그래,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나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행운도 내 편에 서주겠지. 우현이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국장실로 향할 때만 해도 이렇게 불길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생각치도 못했던 임무를 받아서인가 마음이 싱숭생숭 하면서도 지금 자신의 본부로 향하고 있는 이 발걸음이 매우 무겁고 피곤했다. 우현이 자신의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겼다. 뭐, 알아서 되겠지. 우현의 걸음이 점점 국장실에서 멀어져 갔다. 조용하고 어두운 복도에서는 우현의 구두 굽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일은, 거기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 * *

 

 


" 하아, 팀장님! 처, 서준이와 준수가! "

 


병헌이 급히 몸을 숨기며 우현에게 무전을 해왔다. 귀에 꽂혀있는 작은 인이어 사이로 병헌의 다급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건지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바닥은 온통 피범벅이었고, 인이어를 통해 들려오는 동료들의 목소리 또한 거친 숨소리들이었다. 우현은 몸을 숨긴 상자들에서 살짝 몇 걸음 옆으로 움직여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지금 현재 부상자가 두 명이나 된다. 병헌의 말에 의하면 서준은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 생명에는 그다지 지장이 없음. 하지만 지금 가장 심각한 사람은 준수였다. 우현의 사인을 잘못 알아듣고 나간 준수가 상대방의 총알에 그대로 왼쪽 어깨를 관통 당한 것. 현재 준수의 출혈 상태도 너무 심했고 또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서준으로 인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젠장,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이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고!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동료들이 눈앞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우현은 무전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을 애타게 불러오는 수현과 병헌, 찬석의 목소리를 최대한 귀에 담았다. 동료냐, 임무냐. 임무를 이대로 포기하고 동료를 챙겨 철수할 것이냐, 아니면 동료들이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를 바라며 네 명이서라도 무모한 싸움을 할 것이냐.

 


" 하아… 남우현. 침착해. 냉정하게 생각을 하라고. "

 


우현이 잠시 시끄러운 무전을 끄고 생각에 잠겼다. 이 임무를 포기하고 이대로 돌아간다면 분명 여섯 명 모두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임무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성공 한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다. 여섯 명이서 해도 모자란 이 임무를 도대체 어떻게 세 명이서 버티란 말인가. 우현이 머리 아픈 고민을 하며 자신의 입술을 마구 괴롭혔다. 혀끝으로 비릿한 피 맛이 베어 나왔다. 국가와 동료. 이런 잔인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팀장이라는 자리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우현은 곧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보이고는 꺼놨던 무전을 다시 켰다. 인이어 통해 여전히 다급한 병헌과 수현의 눈물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팀장님! 준수가… 준수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하윽… 제발 어떠한 조치라도…! "
" 우현 팀장님! 서준이의 출혈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제발 빨리…! "

 


이미 결정은 내려졌지만 차마 그 결정을 입 밖으로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우현은 한참동안을 아무런 말없이 입을 벙끗거리기만 했다. 살려야한다. 나는, 국가보다 동료가 더 소중해. 내 후배들이… 후배들이 죽어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긴장감에 말라붙은 입술을 침으로 한 번 축이고는 우현이 드디어 목소리를 내었다.

 


" 14일 새벽 2시 17분 임무 실패. 우리는 부상당한 동료들을 챙겨 철수한다. "
" 팀장님…. "
" 알겠습니다, 팀장님. "
" 철수는 어떻게… "

 


차례대로 병헌, 수현, 찬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이 눈을 부릅뜨며 쥐고 있는 총을 고쳐 잡았다. 상대편 쪽에서는 이미 우리가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생각한 것인지 몇 몇은 이미 자신들의 기지로 돌아간 듯 싶었고, 몇 몇만 이곳을 지키고 서있었다. 우현이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의 목울대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현이 결심한 듯 다시 한 번 무전을 통해 명령했다.

 


" 수현이는 서준이를, 병헌이는 준수를 챙겨 밖으로 빠져나간다. "
" 알았습니다. "
" 엄호는, 나 남우현과 강찬석이 한다. 서둘러 움직여! "

 


우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현은 자신의 옆에 주저앉아 있는 서준을, 병헌은 정신을 잃은 준수를 들쳐 업은 채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습을 보이자 잠잠했던 상대편에서 마구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귀를 찌를 듯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우현은 지금 이 선택이 자신에겐 최선이었다고, 잘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한 이 선택이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 뭐… 실패 했다고…? "
" 죄송합니… "
" 지금 제정신이야!? "

 


화간 난 국장이 손을 들어 올려 그대로 우현의 얼굴을 내리쳤다. 덕분에 우현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돌아갔고, 얼굴엔 생채기까지 나 피가 흘렀다. 우현이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고개를 숙여보였다. 자신의 잘못이다.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 한 팀장의 잘못.

 


" 하, 자네를 믿었건만…. "
" 죄송합니다. 다 제 탓입니다. "
" 지금 이게 죄송하단 말로 끝날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이제 우리나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을 걸세. 상상도 하지 못 할 그런 손해를 입을 거라고! 이제 어떡할 건가? 자네가 책임질 거야!? "

 


국장이 다시 한 번 우현의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 아까보다 더욱 세게 맞은 탓에 입 안이 터진 것인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우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정자세로 서있었다. 그 모습에 국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더니 이내 소리쳤다.

 


" 당장 나가! 자네가 실패한 이번 임무의 대가는 어마어마할 걸세.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

 


우현은 국장의 말에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느낌을 받았지만 별 거 아니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고 몸을 돌리자마자, 눈앞에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 이호원. "
" 된통 깨졌구만? 남우현 팀.장.님. "
" 비꼬냐? "
" 그럴리가요? 남우현 팀.장.님. "
" 이 새끼가 진짜… "
" 풉- 얼굴은. 괜찮냐? "
" 아, 몰라. 손은 완전 두꺼비마냥 두툼해가지고는…. 힘도 장난 아니더라. "
" 너 지금 이빨도 완전 빨개. 알어? "
" 웃지 마라? "

 


된통 깨지고 나온 우현의 앞에 나타난 이는 호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자신을 믿고 함께해준 고마운 친구. 호원은 고등학교 때 부모님 모두가 돌아가셨다. 그런 그들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들이 우현과 우현의 가족들이었다. 우현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호원과 성종을 자신의 자식인 냥, 동생인 냥 받아주었고 그로 인해 호원과 성종도 빠르게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 우현의 가족들은 호원과 성종의 가족과도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자신들을 이리도 따뜻하게 품어줘서일까, 호원의 머릿속에는 어느샌가 부터 자신이 우현과 그 가족들을 지켜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들이다. 너무나도 큰 은혜를 베풀어준 고마운 사람들.

 


" 야, 엄마가 오늘 나랑 성종이보고 저녁 먹으로 오랬어. 같이 퇴근하자. "
" 허, 야 이호원. 너 완전 너네 엄마인 것처럼 말 한다? "
" 왜. 우리 엄마보고 엄마라고 하는데. "
" 야! 우리 엄마거든! "
" 하이고, 유치하기는…. 스물여섯 먹고 그러고 싶냐? "
" 야! 이호원!! "

 


호원의 도발에 넘어간 우현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호원은 얄밉게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려 앞서 걸었다. 그 모습에 우현 또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 후로 둘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엔 왠지 모를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폭풍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 * *

 

 


" 천천히 먹어라, 호원아. "
" 아, 네! 엄마. "
" 엄마! 저는요? 저한테는 왜 천천히 먹으라고 안 해주세요? "
" 야, 이성종. 엄마는 내가 더 좋으시다잖아. 넌 절로 좀 가지? "
" 아씨! 아니거든! 형 같은 단순무식을 엄마가 왜 좋아해! "
" 야! 내가 왜 단순무식이야! 나 이래봬도 특채로 입사한…! "
" 이호원, 이성종. 그만 좀 하지? "

 


결국엔 보다 못한 부현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그 둘을 제지했다. 부현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열심히 째리기 바빴다. 그에 우현의 부모님이 귀엽다는 듯 그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 우와!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구만! "
" 왔어? 얼른 먹어. "

 


그제 서야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온 우현이 구수한 된장냄새에 기뻐하며 재빨리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숟가락을 들어 찌개를 한 번 맛보더니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 아아, 역시 우리 엄마 된장찌개가 짱이라니까? "
" 녀석… 아부는. "

 


지금 이 식탁에 앉아서 밥을 함께 먹고 있는 사람들은 누가 봐도 화목한 가족이었다. 웃고 떠들고, 서로를 걱정해주는 사이좋은 가족. 호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동생 이성종,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 남우현, 친형 같이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남부현, 정말로 동정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들을 대해주시는 우현의 부모님까지. 호원은 밥을 먹으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애써 참고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그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우현은 또 그런 호원을 눈치 챈 것인지 말없이, 티 나지 않게 호원의 어깨를 따스히 잡아주었다. 너의 곁엔 우리가 있으니 절대로 기죽지 말라는 듯이….

식사를 다 마치고 후식까지 든든히 먹은 호원과 성종이 이만 집에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우현의 가족 모두가 조심히 가라며 그들을 배웅했다. 호원과 성종이 밝게 웃으며 다음에 또 오겠다고, 또 맛있는 거 얻어먹으러 오겠다고 장난스레 말하며 현관을 나서려는데 우현의 어머니가 홀로 따라 나와 호원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 또 놀러와. 언제든지. 응? "
" 네 엄마. "
" 성종이도 자주 전화하고. 성종이 같은 막내아들 있어서 엄마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
" 알았어요, 엄마! "
" 그런데 호원아… "
" 네? "
" 우리 우현이… 또 무슨 일 있었던 거니? "
" …네? "
" 애 얼굴이 왜 저렇게 된 거야… 응? "

 


우현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호원에게 물었다. 그에 호원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일 하다가 다친 거죠, 뭐. 하고 대충 넘겼다. 우현과 자신이 국정원 요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어머니께 차마 임무에 실패해서 상사한테 맞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우현의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 아주 잘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호원의 말에 그래? 일 하다가 다친 거구나…. 하며 조금은 안심된 표정을 지었다. 우현의 어머니는 그들이 형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잡고 있는 호원의 손을 부드럽게 만져주며 말했다.

 


" 우리 우현이… 잘 좀 부탁해. 알지? "
" 그럼요. 제가 잘 챙길게요. "
" 그래… 엄마는 우리 호원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같은 곳에 다니니까 좀 마음이 놓인다. "

 


그녀의 말에 호원과 성종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조심히 가라는 그녀의 말에 인사를 하고는 빌라를 빠져나왔다. 빌라를 나온 호원이 고개를 들어 올려 우현의 집이 있는 층을 바라보았다. 정말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 꼭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이 사는 곳…. 호원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앞서 걷고 있던 성종이 왜 안 오냐고 소리를 치자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린 호원이 활짝 웃으며 성종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지켜줄게요, 엄마. 제 친구 남우현… 제가 꼭 지킬게요.

 

 

 

 

* * *

 

 

 

" 아들, 우리끼리만 놀러가서 미안해. "
" 됐거든? 재밌게 놀다 오셔. "
" 그래. 일 열심히 하고, 다치지 말고. 알았지? "
" 알았습니다! "

 


이른 아침, 우현이 집 앞에서 가족들을 배웅했다. 원래 가족 모두가 놀러가기로 한 것인데 급하게 호출을 받는 바람에 우현만 빠지게 됐다. 그에 가족들은 그럼 이번에 가지 말고 다음번에 다 같이 가자고 했지만 우현이 됐다며 셋이서 재밌게 놀다오라고 억지로 떠밀었다. 가족들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저 고집을 어떻게 꺾어.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현은 가족들이 차에 올라타고 그 차가 출발하는 모습까지 지켜보고는 국정원으로 가려고 차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좋아 차를 타고 가기는 싫었다. 마음을 바꾼 우현이 차키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그대로 버스 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파란 하늘에 하나도 때 타지 않은 새하얀 구름들이 떠다니고 있고, 새들은 자기들끼리 무리지어 이동을 하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맑고 싱싱한 초록색의 나뭇잎들을 이리저리 흔들고…. 그동안 하도 바빠서 자가용만 이용 하느라 이런 자연들을 느끼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거리를 걸으니 정말 기분이 상쾌해졌다. 지금 이 기분대로라면 국정원에 가서 깨지고 일이 산더미처럼 있어도 마냥 좋을 것 같았다. 우현이 입 꼬리를 살짝 올린 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상쾌하다. 기분이 좋은 듯 우현이 싱글싱글 웃으며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국정원에 들어선 우현은 바로 팀장실로 향하지 않고 직원 휴게실로 들어섰다. 사실 오후 늦게 출근해도 되는 거였는데 가족들을 배웅하고 바로 오느라 몇 시간이나 빨리 오게 된 셈이었다. 어차피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릴 거 잠이나 좀 자야겠다 싶어 휴게실로 향한 우현이 여러 개 놓여져 있는 침대 중 한 곳으로 올라가 털썩- 몸을 뉘였다. 창문 틈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따스하고 밝은 햇살 덕분에 잠이 솔솔 몰려왔다. 우현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곧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 으음… "

 


밖이 너무 소란스럽다. 남자 요원들 여자 요원들의 말이 오고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 흐억! 미쳤어!! "

 


5시 30분이었다. 적어도 네 시 까지는 들어가 있어야 하는 건데 그 시간을 초과해도 너무 많이 초과해버렸다. 다급히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한 우현이 핸드폰을 챙겨들고 휴게실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얼핏 부재중 전화가 엄청 많이 와있던 것 같은데…. 뭐, 조금 이따 확인해도 되겠지. 우현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자신의 부서로 향했다. 지문 인식을 하자 자동문이 열리고 부서 직원들의 시선이 우현에게 쏠렸다. 우현은 평소처럼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려고 하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에 웃음을 거두었다. 평소 같았으면 환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인사를 했을 직원들의 눈빛이 전혀 밝지가 않았다. 초상이라도 난 듯한 매우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에 불안한 느낌을 받은 우현이 옆에 있는 한 직원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 무슨 일이야. "
" 티, 팀장님…. "

 


우현의 물음에 남자 직원은 그저 자신을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부를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우현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뜨였다. 남자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님을 느낀 우현이 남자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 대체 무슨 일이냐고! "
" 으…으흑…. 벼, 병헌이가… 병헌이가… "
" 병헌이? 이병헌? 병헌이가 왜! "
" 하으…우으윽…. "
" 이병헌이 뭐!! "

 


우현은 그 다음으로 이어진 남자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힘  없이 내렸다. 온 몸에 힘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 병헌이가… 주,죽었대요…. 어젯밤에… 총에 심장이 관통된 채로 발견… 됐데요… 흐윽…. "
"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

 


우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이 사실을 나보고 믿으라고? 분명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던 내 후배가… 직속 후배가… 죽었다고? 그것도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한 채로 발견이 돼…? 아니다. 말도 안 된다. 병헌이 녀석은 그렇게 쉽게 당할 녀석이 아니다. 순간 우현의 머릿속으로 병헌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누구보다 밝고 성실했던 그 아이가… 저번 그 임무에서도 준수가 죽어간다며 눈물을 머금던 그 여린 애가… 죽었다고…? 우현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지그시 눈을 감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여직원들을 포함한 다른 직원들까지 서서히 눈물로 얼굴을 적셔가기 시작했다. 이병헌. 이제 겨우 스물네 살밖에 안 된 막내인데.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뛰어난 실력으로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은 녀석이었다. 제 2의 이호원이 될 거라고 크게 떵떵거리던 녀석이… 죽다니. 우현의 눈이 붉게 충혈 되어 갔다. 이내 곧 그 붉은 눈망울에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우현이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려던 그 찰나, 바지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세차게 울렸다. 마치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무언의 메세지를 전하는 것만 같았다. 우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쿵쿵- 불안정한 소리였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왠지 이 전화를 받으면 아주 크나 큰 슬픔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붙잡고 핸드폰을 꺼내어 통화 버튼을 조심스레 누르고는 귀에 가져다 댄 우현이었다. 핸드폰을 귀에 댔지만 상대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냐고 물으려던 우현의 입이 닫힌 것은 그 순간이었다.

 


" 하윽… 우현이 형…. "
" 성종이…? "

 


전화를 건 사람은 성종이었다. 성종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는 한참동안이나 끅끅대며 울기 바빴다. 그에 우현이 더 불안해져 무슨 일이냐며 다그쳤다. 옆에서 간간히 호원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우현이 호원이 좀 바꿔봐. 라고 하자 성종이 호원에게 전화기를 넘긴 모양인지 이어 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호원 대체 무… "
" 남우현. 내 말 똑바로 들어. "
" …뭐? "
" 난, 나는… 하아…. 나도 지금 뭐가 뭔지… 모, 르겠 거든…? 지금, 지금… "
" 도대체 왜 그러는데! "
" 너 당장 한국 대 병원으로 와라. 최대한 빨리. "
" 병…원은 왜…. "
" 씨발,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오라고, 빨리! "

 


호원의 고함에 우현이 한동안 벙쪄있더니 이내 핸드폰을 닫고 미친 듯이 달렸다. 불안하다. 이 미칠 것만 같은 불안감. 왜 이 순간에 아침에 보았던 가족들의 밝은 미소가 생각이 나는 걸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결말 따위. 아닐 거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엄마? 엄마가 나 두고… 그렇게 갈 리가 없잖아.

나 혼자 버려두고… 가지 마, 제발…….

 

 

 

 

 


시티헌터 (City Hunter)

(우현과거Ⅱ)

 

 


거짓말. 이 모든 것은 날 놀리기 위한 너희들의 거짓말이다. 지금 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내가 아는 이들이 아니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고 있는 성종이도, 피가 베여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고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이호원도, 거짓말이다. 모든 게 꿈이다.

 


" …남우현. "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왜 나를 그렇게 미치도록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건데. 어째서 네가 그렇게도 아픈 눈을 하고 있는 건데?

 


" 아줌마, 아저씨가… 부현이 형이… 으…우윽…. "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호원이 결국엔 신음소리와 함께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지금 우현의 귀에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세 사람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온 몸을 덮고 있는 새하얀 천만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한 발짝, 두 발짝. 그곳으로 가는 이 거리가 왜 이리도 길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우현이 떨리는 발걸음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새하얀 천을 조용히 그러모아 쥐었다. 천을 잡은 손이 미친 듯이 파르르, 떨려왔다. 조심스레,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하얀 천을 잡아 걷어내었다.

 


" 남우현! "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이건 아니잖아. 어째서… 어째서 나에게…?

 


" 거…짓말. 말도… 안 돼. 이, 이호원… 왜…왜… 엄마 아빠가, 형이… 저기 왜…대체…왜… "

 


우현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바르르 떨렸다. 이호원, 왜 이렇게 춥지? 이제 여름이잖아…. 절대로 추운 날씨가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추운거야? 내 몸이 왜 이렇게 미친 듯이 떨리는 거야…? 어째서 네가 나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거야? 아무 것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안보여.

모든 것이, 이건 모두……
그냥 단지 나를 놀리려고 하는…

 

 


너희들의 새빨간 거짓말이다.

 

 

 


* * *

 

 

" 형, 우현이 형 도대체 며칠 째 자는 거야? 이거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
" 기다려봐. 의사는 이상 없댔잖아. 잠시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런 거라고. "
" 하지만… "

 


너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무서웠다.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랬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면 너희들이 웃으며 다 거짓말이었어! 하고 말해주길 바랬는데…. 모든 게 현실인가보다. 내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끔찍한 현실. 그런데 어쩌냐? 나… 눈을 뜨기가 싫어. 인정하기가 싫다, 호원아. 내가 눈을 뜨면 모든 걸 인정해버리는 것 같아서… 그냥 이대로 눈 감고 싶어. 살기가… 싫어. 가슴이 아팠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아파. 아프다 엄마.

나…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 남우현, 너 정신 든 거지. "
" ………. "
" 우현이 형! 정신이 들어요? “

 


너희들이 날 불렀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호원 이 눈치 빠른 자식은 이미 내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안 것인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해왔다.

 


" 눈 떠. "
" ………. "
" 눈 떠, 남우현! "
" 형! 왜 그래!! "
" 넌 가만히 있어, 이성종. 남우현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

 


다급한 호원의 목소리에 우현이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병실 안의 밝은 빛이 강하게 각막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적응이 되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호원과 성종의 모습이 온전히 보였다. 성종은 며칠 내내 계속 울어댄 것인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고 호원 역시 몹시 지쳐보였다. 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병실 안의 창문을 열어놨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호원은 너무나도 아파보이는 우현의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베여 나왔다. 잠시 동안 이 사실을 지금 말해주어야 할 지 나중에 말해주어야 할 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런 호원의 생각을 읽은 듯 우현이 조용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 무슨 일인데. "

 


우현의 말에 호원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 되어갔다. 지금 우현의 모습이 너무 아파 보여서. 남들은 큰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가 일어나면 아니라고, 현실을 부정하는데 우현은 달랐다.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듯 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왔다. 너 왜 그렇게 담담한 모습이야? 꼭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유리처럼… 왜 이렇게 위태로운 건데. 호원의 눈을 비집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우현이 볼 새라 금방 다시 눈물을 닦아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너도 알아야겠지. 아니, 알아야겠지가 아니라 넌 알아야만 한다.

 


" 남우현.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야. "
" ………. "
" 지금 내 말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 넌 꼭 들어야만 해. "
" …이호원. "
" 응. "
" 정말… 죽은 거지…? "
" ………. "
"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형… 죽은…거지? "

 


우현의 아픈 목소리에 기어코 성종의 눈물샘이 또 다시 터져버렸다. 처음엔 조용히 눈물만 흘리던 그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중얼거리며 빠르게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성종의 모습을 보며 호원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 또한 성종과 같이 우현 앞에서 눈물을 보일 것만 같아서. 미안하다 우현아. 지금은 이렇게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

 


" 응. 돌아가셨…어. "
" ………. "
" 근데 우현아. "
" ………. "
" 그만큼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 "

 


호원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우현이 얼굴을 들어 호원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느낌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쿵쾅쿵쾅 뛰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호원이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 이병헌, 신수현, 이준수, 박서준, 강찬석. "
" ………. "
" 모두가… "
"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이호원. "
" 들어야 돼. 네가 꼭 들어야 한다고! "
" 왜! 도대체 내가 왜 들어야 하는데! "
" 너도 타깃이었으니까!! 시발, 네 차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그 차 탔으면 너도 죽었다고 새끼야!! "
" …뭐? "

 


우현은 믿을 수 없는 호원의 말에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보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우현은 순간, 가족들을 보내고 나서 차에 타려다가 날씨가 너무 좋아 그냥 걸어가기로 했던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 너 일주일동안 누워있었어. 알아? 내가 그동안 하도 이상해서, 모든 사람들의 죽음이 너무 수상쩍어서 조사 했었다고! 그런데… 그런데…… "
" ………. "
" 엄마, 아빠 차에도 설치되어 있었더라. 일정시간이 되면 폭탄이 터져버리게. 하지만 폭탄은 그다지 화력이 강한 건 아니었어. 그치만… 충분히 차를 전복시킬만한 위력은 가지고 있는 폭탄이었지. "
" 도대체… 무슨… "
" 하지만 네 차에 설치되어 있는 폭탄은 달랐어. 사람을 한 순간에 잿덩이로 만들어버릴 만큼 큰 화력을 가지고 있는 폭탄이었어. "

 


호원의 말을 들은 우현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벌벌- 떨렸다. 그저 사고사라고… 그렇게 생각 했는데 대체 누가… 대체…

 


" 정말… 모르겠냐? 누가 그런 건지. "
" ………. "
" 아니, 넌 믿고 싶지 않은 거겠지. 범인은… 네가 그렇게도 충성을 바쳐 일해 왔던 국가니까. "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임무라고 해도 그렇지. 그깟 임무 하나 실패 했다고 사람 목숨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휘두를 수 있다니…. 우현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생각치도 못했던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배신. 그것이 이렇게도 차갑고 무서울 줄은 몰랐다.

우현이 떨리는 몸을 안고 호원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호원의 얼굴은 자신보다 더 초췌하고 얄상해져 있었다. 너도 많이 힘들었겠지. 그래… 특히나 병헌이는 나보다 네가 더 아꼈던 후배잖아. 네가 친동생처럼 아꼈던 동생. 성도 같은 이씨라고 의형제까지 맺었었잖아, 너. 하지만 호원아 어쩌냐… 나 지금 너까지 챙겨줄 그런 상태가 못 된다. 지금 나 하나 지탱하고 있는 것도 너무 벅차고 아파서… 너까지 챙겨주지는 못하겠어.

 


" 우현아. "
" 응…. "
" 나는 널 살려야만 했어. "
" ………. "
" 그래서 나는… "

 


뜬금없이 자신을 살려야만 했다고 말해오는 호원에게, 우현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호원의 볼을 타고 슬프디 슬픈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그래서 나는… 너를 죽였어, 우현아. "
" …뭐? "
" 어쩔 수가 없었다. 네가 살아있는 걸 알게 되면 국가는 끝까지 널 쫓아 없애버리고 말테니까. "
" 이호원, 그게 무슨 소리야? "
" 국가에게 살해당한 모든 요원들이 국과수로 옮겨져 갔어. 거기서의 부검도 이미 다 마친 상태고. 이미 윗사람들에게 보고도 마친 상태겠지. 그리고 그 명단에는… 너도 포함되어 있어. "

 


우현은 대체 호원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는 여기 멀쩡히 살아 있는데… 내가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다고…?

 


" 내가 다 조작했어. 시체랑 사망자 명단과 그 정보들까지 필사적으로 모두 조작하고, 빼돌렸어. 널 살리고 싶어서…. 그래서 현재 넌 지금 국가에게 살해당한 명단에 올려져 있고, 사망신고도 이미 되어 있는 상태야. "
" …하. "
" 미안…하다. 이 방법 밖에는 없었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넌 분명히 살해당했을 테니까… 내가, 나라도… 너를… 하아…. "

 


호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손이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꽈악- 쥐고 입술을 또 한 번 깨물며 울고 있었다. 입술이 다 터져버려 피가 흐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 괜찮아. 미안해할 게 뭐 있냐…. "
" ………. "
" 미안하다 호원아. "
" 남…우현. "
" 나 존나 못된 새끼야. "
" 그게…무슨…. "

 


우현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호원에게 쓴 웃음만 지어보였다. 차마 소리 내어 너에게 말을 하지는 못하겠어. 날 위해 고생해준 너에게 상처 입히는 말이 될 것 같아서. 호원아, 미안해. 나 말이다…

 


" 남우현,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

나를 살려준 네가…
하나도, 전혀,

" 남우현! "


고맙지 않아.

미안하다. 이런 못난 친구라서….


미안해 정말로….

 

 

 


* * *

 

 


" 형, 제발 이것 좀 먹어봐요. 네? "
" 미안, 성종아. 나 입맛이 너무 없어. 너도 알잖아 나 먹으면 바로 게워내는 거…. "
" 그래도 사람이 먹고 살아야죠! 안 먹고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요!! "
" 어차피 살고 싶은 마음 같은 것도 없어. "
" 형!! "

 


우현의 말에, 성종이 들고 있던 죽 그릇과 수저를 내려놓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엔 한참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꽤나 긴 시간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쪽은 성종이었다.

 


" 이러지 말아요, 제발. "
" …성종아. "
" 형 힘든 거 알아요. 아는데… 이러면, 형을 위해 한숨도 못자고 발 벗고 뛰고 있는 우리 형은 뭐가 돼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있어요. 하루에 두 시간도 잘까 말까에요. 형 살리고 싶어서 그렇게 노력하는 호원이 형은… 어떡하라고요…! "

 


결국엔 눈물 많은 성종의 울음보가 터지고야 말았다. 우현이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아 성종아. 나 때문에 이호원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나도 잘 알아. 저번엔 쓰러져서 병원에서 링거까지 맞고 와놓고 내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장난까지 쳤다는 것도.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거 아는데… 나도 아는데…

살고 싶지 않은 걸… 어떡하니.

 


" 미안해요, 소리 쳐서…. 제가 한 말은 그냥 잊어주세요. 누구보다 형이 가장 힘들 거 알면서 제가… 잠시 미쳤나 봐요. 조금 이따 호원이 형 올 거예요. 전 집에 들렀다가 나중에 올게요. 저거 죽… 꼭 챙겨먹고요. 알았죠? "
" …그래. "

 


저렇게 대답은 해도 하나도 비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식어있을 죽이 뻔히 보여 성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핸드폰과 차키를 챙겨 우현의 집을 빠르게 벗어났다. 사실 지금 성종 자신도 힘들어 미칠 지경이었다. 한 순간에 부모님 같은 분들을 잃었다. 친한 친구처럼 지냈던 병헌이도 잃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자신과 호원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가족… 우현은 매 순간을 살기 싫다며 발버둥을 치고 있다.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하지만 성종은 애써 입 꼬리를 말아 올려 웃어보였다. 자신이 지치면 안 된다. 지금 누구보다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형 호원도 있는데… 자신이 여기서 지쳐버리면 호원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한다. 성종의 눈은 슬프게 눈물을 떨구었지만 입은 억지로 웃고 있었다. 그것은 참 아이러니한 광경이었지만 미치도록 슬픈 것이기도 했다. 성종은 닫힌 우현의 집 현관을 바라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들게 떼어 빌라를 벗어났다.

 

 

 

 

* * *

 

 


호원은 일을 마친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우현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사든 채 그의 집을 찾았다. 성종인 눈 좀 붙이고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는 자신이 우현과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은 것이었다. 오는 동안 잠이 고파 미칠 것만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을 친구 남우현을 위해. 호원이 도어락 번호를 누르기 전,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입 꼬리를 올려보였다. 우현이 앞에선 최대한 밝게 웃자. 힘든 티 내지 말자 이호원.

하지만 번호를 누르고 밝게 웃으며 들어간 호원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지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다 내팽개치고는 침대에 앉아 무언가를 들고 있는 우현에게 재빨리 다가가 얼른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우현은 호원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벙쪄있었다. 호원은 우현에게서 뺏어 든 물건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내지었다.

 


" 남우현, 너… 지금… "
" ………. "
" 네가 진짜 미쳤구나. 네가 지금… 하아…. "

 


호원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지 그저 분노에 찬 숨소리만 내뱉었다. 호원이 이렇게나 화를 내는데도 우현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왜 말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호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 더 화가 난 호원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왜, 이거 네 팔에 쑤셔 넣기라도 하려고? 이거 종류는 뭐냐? 헤로인? 암페타민? 이게 대체 뭔데 새끼야!! "
" …이호원. "
" 개새끼. 미친놈. 네가 어떻게… 어떻게 마약에까지 손을 대…! "
" ………. "
" 그렇게 사람 미치는 꼴이 보고 싶어? 그래, 그렇게 보고 싶으면 내가 보여줄게, 이 개새끼야! "


……!!!!


우현은 호원이 다음으로 취하는 행동에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인지 눈을 크게 떠 보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서있는 호원에게도 재빨리 달려갔다. 호원이 팔을 걷고 우현에게서 뺏은 마약주사를 자신의 혈관에 투입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간발의 차로 주사를 호원에게서 빼앗은 우현이 그것을 던져버렸다.

 


" 이호원 너 미쳤…!! "


퍽-

호원에게 소리치던 우현이 꽤나 강한 주먹에 맞고 바닥으로 쓰러진 건 순간이었다. 호원이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우현의 위로 올라타 그를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 미친 건 너겠지. 제정신이면 너 우리한테 못 그래. 네가 나랑 성종이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는데! 남우현 네가 어떻게!! "
" ………. "
" 나 말릴 정신은 있는 새끼가 그렇게 네 몸에 마약을 투여하려고 했어? 도대체 왜 네 자신을 그렇게도 망가뜨리는 건데! 왜 이렇게 널 못 괴롭혀서 난리냐고, 병신새끼야!! "

 


그 순간, 위에서 울부짖는 호원의 눈물이 우현의 얼굴 위로 떨어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호원의 매서운 주먹이 우현의 얼굴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우현의 얼굴이 사정없이 망가져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맞고만 있었다.

지금 현재 맞고 있는 자신보다,

때리고 있는 호원의 얼굴이 더 아파보여서.

 

"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 너무 힘들다 우현아… 나 너무 힘들어 죽겠다고…! "
" 이…호원……. "

 


우현을 흠씬 두들겨 팬 뒤 그의 위에서 내려온 호원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안쓰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와 십 수 년을 함께 해왔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아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우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그만 좀 해…. 나, 숨을 못 쉬겠어. 너 때문에…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그 어떠한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
" ………. "
" 부탁… 받았단…말야. 널 지켜주기로, 꼭 살리기로! 엄마한테 부탁 받았다고…!! 흐윽… 그런데 넌, 왜 노력을 안 하는 건데. 진짜로 엄마, 아빠, 형 곁으로 가고 싶은 거야? 그런 거냐고! "

 


호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울었다. 내가 뭐라고 네가 이렇게까지 울어주는 거야…. 도대체 남우현이 뭔데 이호원하고 이성종이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건데…? 호원아 나는 정말로 모르겠어.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건지, 죽어야 하는 게 맞는 건지. 난 죄도 없는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인이잖아.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잖아. 그런데 내가 살아도 되는 걸까? 이런 내가 눈 뜨고 당당하게 살아가도 되는 거야…? 나는… 자신이 없어. 어떻게 그렇게 살아. 내 가족들을 죽이고…!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어….

 


" 제발… 남우현…. "

     호원아, 나는…

" 현명했던 내 친구 남우현으로, 마냥 밝았던 내 친구 남우현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되는  거냐…? "

그럴 수가 없어. 내 가족들을 하늘로 떠나보낸 채, 나 혼자 먹고, 웃고, 울고… 그렇게 인간처럼 살아갈 자신이… 도저히 없어.

 

호원은 그렇게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서 눈물을 흘리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그리고는 차마 자신이 때린 우현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한마디 내뱉었다.

 


“ 때린 건 미안하다. 내가 차마 치료까지 해주고 갈 수는 없겠다. 조금 이따 성종이가 또 올 테니까 꼭 약 바르고, 밥도 좀 먹고. 난 이만 갈게. "

 


호원은 그렇게 뒤돌아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등에 대고 우현이 한마디 작게 내뱉었다. 호원은 절대로 듣지 못할 만큼의 목소리로.

 


" 미안해. 미안해… 호원아. 미안해 너무…. "

 


현관문이 닫히고, 호원이 나갔다. 우현은 쓴 미소를 지으며 서랍에서 커터칼을 꺼내어 손에 쥐고는 화장실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전등 스위치를 켜자, 그 어두웠던 집 안에서 오직 그곳만 환하게 빛이 났다. 우현은 밝은 빛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콸콸콸, 물은 그렇게 빠르게 채워져 갔다. 우현은 그대로 욕조 안으로 몸을 들여놨다. 따뜻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 기분이 좋았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커터칼을 조심스레 왼쪽 손목에 갖다 대었다. 날카롭고 서늘한 칼 심이 그대로 손목에 느껴졌다.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을 위해 고생해주었던 호원과 성종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죽어도 나는 너희들에게 고개를 들어 보일 수 없을 것이고, 산다 해도 너희들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을 거야. 그 순간, 우현이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따뜻한 김이 폴폴 올라오던 투명한 물은 점점 아름답고도 잔인한 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우현은 서서히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눈이 감겨져왔다. 컴컴한 암흑 속에서 가족들이 자신을 보며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 엄마… 아빠, 형…. "

 


우현이 환하게 웃으며 가족들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하지만 자신이 다가서자 오히려 가족들은 한 발짝 물러났다. 당황한 우현이 왜 그러냐는 듯이 묻자, 가족들은 아무런 말없이 그저 손짓만 해보였다. 우현이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발짝 내딛자, 가족들은 또 다시 물러나기 바빴다. 우현은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가족들을 자세히 주시했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보고 있던 우현은 이내 온 몸에 힘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 뭐야… 오라고 손짓 하는 게 아니라… 가라고… 여긴 오면 안 된다고… 그런 거였어? 나보고, 오지 말라고…? '

 


  허탈함에 헛웃음만 나왔다. 용기 내서 따라가려고 했건만… 가족들은 자신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 이제 그만 투정 부릴게. 더 이상 죽으려고 하지도 않을게. 엄마가 그리도 아껴줬던 호원이랑 성종이… 그만 힘들게 할게요. 우현이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가족들이 우현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주며 뒤를 돌아 서서히 멀어져갔다. 우현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들을 잡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너는 여기 있어야만 해. 하고 누군가 붙잡는 것처럼.

알았어. 안 따라가면 되잖아. 안 갈게. 이호원 이성종 옆에 꼭 붙어 있을게. 그러니까… 그렇게 아프게 웃지 마, 엄마. 그럼 나 정말 아프니까. 못 견딜지도 모르니까… 웃어줘. 거기서 아빠, 형이랑 행복하게 웃어줘. 우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이 걸어왔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더 이상 숨이 막혀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에겐 내가 차마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이런 나를… 너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줄까. 마구 때리며 욕을 할까? 그래. 그렇겠지. 나 너무 멍청한 짓을 해버린 거니까. 우현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미안해…. 이호원, 이성종.

 

 

 

 


* * *

 

 

 


" 남우현! "
" 우, 우현이 형!! "

 


우현의 눈이 떠지자,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호원과 성종의 급히 우현을 부르며 몸을 밀착했다. 여기서 또 보게 되는 구나 너희들을. 아직 몸에 힘이 없었지만 최대한 힘을 짜내어 상체를 일으켰다. 우현은 미안한 마음에 그들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이미 한 대 맞을 각오도 한 상태였다. 나를 위해 그렇게 울어준 너희들을 등지고… 나 굉장히 멍청한 선택을 한 거였잖아.

한 대 맞을 거라는 예상을 한 우현이 눈을 감아보였지만, 그가 느낀 것은 아픔이 아닌 자신을 감싸는 따뜻한 체온이었다. 놀라 눈을 떠보니 호원이 자신을 안고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 개새끼… 하으… 나쁜 새끼야. 네가… 네가 그렇게, 흐윽… 가버리면, 나랑… 성, 종이는 어떻게… 으흑, 살아가라고…! "
" 호원아…. "
" 미…안해. 내가…잘, 못 했어…. 널 그렇게 혼자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우윽…. "
" 형… 형, 미안해요… 흑… 내가, 내가 조금 더 형을 잘 살폈어야 하는 건데… 흐윽…. 미안해요. 미안해요 너무…. "

 


예상과는 다르게 호원과 성종은 자신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려주었다.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네가 없이 우리는 절대 살 수 없을 거라고…. 그 말 하나에 우현의 눈을 비집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가족들이 죽었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이제 서야 상처투성이 벽을 뚫고 터져버렸다.

 


" 하으… 왜…나야. 어째서…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나였어…? 흐윽… 어째서 내가, 내가 희생자여야만 했어?…왜 내 가족들이 죽어야만 했는데…? 응? 호원아, 성종아… 대답 좀 해줘. 말도 안 되잖아 이건…! 왜 나야.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우흑…. "
" 울어. 마음껏 울어 남우현. 속에 담아두지 말고… 울어. 더 이상 혼자 아파하지마라 제발…. "

 


그렇게 우현은 한참동안이나 성종과 호원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간 혼자 앓아왔던 그 끔찍한 고통을 조금씩, 조금씩 덜어내고 있었다. 호원은 아무런 말없이 우현을 꽈악- 안아주었고, 성종 또한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안심하라고 위로해주었다. 자신의 옷깃을 잡고 있는 우현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아팠어. 우리에게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그 끔찍한 아픔을 어떻게 혼자 견뎌내려고 했어. 우현이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약한 아이가 아니었는데… 누구보다 밝고 행복한 아이었는데 어째서 너에게 이런 불행이 닥쳐버린 걸까. 왜 네가 이런 끔찍한 지옥에 갇혀야만 했던 걸까.

 


" 울어.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나 붙잡고 실컷 울어라 우현아. "

 


고마워. 고마워 이호원….


우현의 울음소리가 더 짙은 슬픔으로 가라앉아갔다.

 

 

 

 

* * *

 

 

 


" 혼자 여행 좀 다녀올게. "
" …뭐? "
" 걱정하지 마. 다신 그런 짓 안 해. "

 


대뜸 혼자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우현의 말에 호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에 우현이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호원의 어깨를 두어 번 쳤다. 호원은 많이 걱정되는 눈치긴 했지만 자신이 가지 말라고 해도 가고야 말 우현임을 알기에 이왕 보내주는 거 기분 좋게 보내주자며 푸스스, 웃으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원의 허락을 받고 우현이 내려온 곳은 자신의 부모님과 부현을 뿌린 어느 지방의 강가였다. 자신과 부현이 결혼을 하면 꼭 이곳에 와서 저들 부부끼리 오순도순 조용하게 살 거라며 말하곤 했었는데…. 이젠 그것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아들 장가가는 것도 못보고 가고… 우리 엄마, 아빠 속상해서 어떡해?

 


" 엄마, 아빠, 형. 나 왔어. 남우현…. "

 


목이 메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냈지만 역시나 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크게 한 번 숨을 내뱉어 간신히 참은 우현이 살짝 미소 지어보였다.

 


" 나 이제 나쁜 생각 안 할 거야. 다시는 엄마, 아빠, 형 따라간다고 안 할 거야. 많이 힘들겠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이겨낼게. "

 


우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대답이라도 해오는 것 마냥 바람이 우현의 머리칼을 한 번 휘감고 지나갔다. 따스한 햇살 아래 푸르른 식물들, 그리고 자신을 편안하게 감싸주는 바람까지. 우현은 실로 오랜만에 가족의 품에 안긴 느낌이었다.

엄마, 거기 있는 거야? 나 왠지 엄마가 거기 있는 것 같아. 내 옆에 앉아서, 우리 우현이 많이 힘들었지? 이제 그만 아파하렴. 이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 엄마가 손을 들어 내 아픈 왼쪽 손목을 다정스레 만져주고 있는 것 같아. 푸흐… 나 미쳤나보다. 그치, 엄마?

 


" 복수… 해줄게. "

 


순간, 눈 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웃고 있던 우현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이거까지는 말리지 마. 이건 엄마가 말려도 소용없으니까. 호원이와 성종이도 도와준댔어. 과연 우리 셋이서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들에게 복수하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해낼 거야. 절대로 이렇게 그냥은 못 넘어가. 나는 나의 국가 대한민국에 늘 충성을 다하며 살았어. 그런데… 나에게 돌아온 건…….

우현은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였다. 조금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시 한 번 숨을 막히게 했다. 가슴을 부여잡고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그렇게 힘겨워하던 우현이 곧 안정을 찾은 건지 크게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넓고도 넓은 강을 눈으로 한 번 쭈욱 훑었다. 자주 오지는 못 할 것 같아. 그래도 기념일마다 한 번 씩은 꼭… 올 테니까, 너무 외로워하지 마. 막내아들 보고 싶다고 울지도 말고. 알았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우리 가족 복수는 하고 죽을 거니까…. 그때까지는 죽으라고 해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니까…. 지켜봐줘요.

그리고 우현은 미련 없이 뒤돌아 걸어갔다. 분명 가족들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복수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너무 착한 사람들이니까. 원체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르는 너무나도 착한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더 복수를 해야만 했다. 누구는 이렇게 한 순간에 이 세상과 이별을 해야만 했고, 누군가는 또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과연 우리들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과연 고통에 허덕일까? 죄책감에 시달려 매일을 악몽으로 보낼까?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분명 평소처럼 맛있는 음식, 비싼 옷,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잘 살겠지. 우리의 행복을 짓밟은 것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아마 자신들이 그랬다는 걸 기억하지도 못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분노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우현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주먹을 꽈악- 쥐며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았다.


정말 슬프게도,
햇빛이 쨍쨍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끔찍한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그 날처럼.

 

 

 

 


(우현과거Fin.)

 

 

 

 

 

 

 


시티헌터 (City Hunter)

 

 

 

 


' 지금 우리가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무작정 국정원으로 쳐들어가 정보 빼오기? 아니면… 내가 죽여야만 하는 사람을 찾아서 목숨을 끊어놓는 거? 우린 지금 뭘 해야 할까? '
' 대체 무슨 소리야? 제대로 좀 말해 봐.'
역시나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호원이 성규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시끄러웠던 집 안이 금세 고요해졌다. 성규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 그냥…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몸이나 좀 풀어보는 게 어떨까 해서 말이야.'
' 몸을… 풀어? '
' 국가의 목을 아주 조금씩 졸라가는 거야. 즉… 우리의 존재를 서서히… 알려가는 거지.'
' ……… '
' 국가를 위협하는 시티헌터. 어때, 재밌을 거 같지 않아? '

일명……


국가자극 프로젝트라고나 할까?

 

 

 

 


* * *

 

 

 

 

초반 박 의원의 차를 따라잡는 것 까지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박 의원이 그 누군가와 만남을 가지는 약속장소로 미리 가 대기를 타고 있다가 그가 나와 차에 타는 것을 보고 조용히 그의 뒤를 밟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가 고급스런 한식집에서 수상한 검은 가방을 여러 개 들고 나오는 것을 본 호원, 성규, 우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증거까지 이렇게 갖다 받쳐주니 그들에겐 더 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그의 차가 출발하자마자 호원이 부드럽게 차를 움직였다. 차 안은 긴장감으로 인해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성규는 아까부터 하얀색의 밴드가 끼워진 우현의 왼쪽 팔목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있었다. 가려진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현도 싫지 않은, 아니 오히려 좋은 기분에 딱히 성규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 아팠지. "

 

 

정적뿐이던 차 안에, 나긋한 성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의 손은 여전히 우현의 팔목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호원은 아무런 말없이 앞만 보며 운전에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한 것은 사실이었다. 1년 전 남우현의 모습은 정말 상상도 하기가 싫었다. 이렇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기 까지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하지만 호원은 지금 둘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자고 생각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성규의 말에 우현은 창  밖을 응시하며 입 꼬리를 작게 말아 올렸다.

 


" 괜찮아, 이제는. "
" ………. "
" 아니… 괜찮을 거야 이제는. "

…김성규 네가 있잖아.

 


우현은 차마 꺼내지 못할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성규는 여전히 창밖만 응시하고 있는 우현의 동그란 뒷통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에겐 그런 아픈 과거가 있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이렇게 바르고 곧게 살아가고 있네. 그에 비해 나는….

성규가 쓴 웃음을 짓고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나 하고 있어. 정말 더럽게도 말이야. 성규가 우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 일었다. 아침에 먹었던 것들을 다 게워내고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리고 쿡쿡- 쑤셔왔다. 성규가 헛구역질을 한 번 하자, 놀란 우현이 성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오는 우현에게 성규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우현에게는 그 미소가 마냥 아파보이고 억지로 짓는 것 같은 느낌이었기에 그를 이대로 둘 수가 없었다. 우현은 여전히 자신의 팔목에 얹혀있는 성규의 손을 바라보며 자신의 오른손으로 그 얇고 예쁜 손을 덮었다. 두 손으로 성규의 손을 감싸 쥔 우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우리는 네가 그렇게 괴로워하면서까지 과거의 기억을 꺼내주길 원하지 않아. "
" ………. "
" 힘들면… 천천히 하자, 성규야.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기다릴게. 그리고… "
" ………. "
" 네 자신을 자꾸 가두려고 하지 마. 스스로를 채찍질 해가며 아프게 하지 마. "

 


성규는 우현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쓰게 미소 지었다. 왜 이렇게 아플까. 왜 이렇게 슬픈 것일까. 여기서 우현이 조금만 더 따뜻한 말을 해주었다면 아마도 이들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많이 무뎌졌다고…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역시 과거의 아픔은 잊혀 지지가 않는 건가봐. 잊었다고 생각하면 잠시 잊혀 질 뿐…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는 아픈 기억이 잠재워져 있어. 너도, 호원이도, 동우 형도, 명수도, 성열이도, 성종이도 모두가 아픈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겠지. 단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말야. 그제 서야 성규가 아프게 짓던 미소를 지우고는 제대로 된 웃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조용히 운전을 하고 있던 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로맨스는 그 쯤 하지? "

 


호원의 목소리에 우현이 픽, 웃었다. 하지만 호원은 지금 장난칠 상황이 아니라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우현에게 말했다.

 


" 뒤에 동우 형이랑 명수 잘 따라오고 있지? "
" 어. 그럴 거야. 왜? "
" 지금 당장 연락해. 차 뒤에 바로 따라붙을 거니까 준비하라고. "
" 벌써? "
" 눈치 챈 거 같아서 말야. 우리를 도발하잖아 새끼들이. "
" 뭐? "

 


호원의 말에 성규와 우현이 정면을 응시했다. 정말로 자신들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인지 두 대의 차 중 한 대가 이리저리 차선을 침범하며 도발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달리고 있는 도로는 차선도 딱 두 개 뿐인 한적한 곳이라 저렇게 난폭하게 운전을 해도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현은 어이가 없어 웃음만 흘러나왔다. 자신들을 깔보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순간, 호원이 엑셀을 세게 밟으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저것들이 감히 우릴 도발해? 낮게 욕을 읊조리며 급하게 반대편 차선으로 옮겨 자신을 도발했던 차에게 한 번 쾅, 하고 부딪혔다.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약간의 충격이 전해졌다. 갑작스레 박아오는 것에 놀랐는지 아까와 같은 장난은 치지 않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차를 세워야했기 때문에 호원이 다시 한 번 쾅, 하고 차를 들이박았다. 그제 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 챈 남자들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두 대의 차가 모두 서자 호원도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 곧 이어 뒤에서 오고 있던 동우와 명수의 차도 멈춰 섰다. 한 대의 차에는 경호원 한 명과 박 의원이 타고 있었고 다른 차에는 경호원 네 명이 타고 있었다. 경호원들이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자 호원과 성규, 우현도 차에서 내렸다.

 


" 준비해. "

 


무전기를 통해 명수에게 말을 전한 우현이 비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역시나 선두는 호원이었다. 지금 여기서 바로 싸워서는 안 된다. 호원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경호원들에게 다가섰다. 그와 더불어 우현과 성규도 그들에게 몸을 밀착했다. 호원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당황한 경호원 한 명이 팔을 들어 올려 호원의 얼굴을 가격하려 했지만 본능적으로 그 팔을 막아낸 호원이 장난스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그러지 말고 평화적으로, 응? 좋게좋게 해결하지? "
" 너희들은 뭐냐. 왜 의원님의 차에 따라붙은 거지? "
" 우리? 글쎄- 우리가 왜 당신네들을 따라온 걸까? "

 


호원이 말꼬리를 늘이며 자신들을 도발하자 화가 난 경호원 네 명이 우루루 호원과 성규, 우현을 두고 포위하듯 감쌌다. 그에 성규가 됐다는 듯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호원은 계속해서 뛰어난 말 재주로 경호원들의 시선을 이쪽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성규가 살짝 시선을 돌려 동우와 명수가 타고 있는 검은색의 세단을 바라봤다. 자신들에게 시선이 쏠리지 않게 최대한 문을 조용히 열고 나와 박 의원의 차 쪽으로 달려가는 두 사람이 보였다. 박 의원이 타고 있는 차 문을 열자 당황한 경호원 한 명이 소리를 치며 급히 차에서 내리려 했다. 그에 명수가 재빨리 그의 배를 힘껏 발로 차 쓰러뜨리고는 동우를 운전석에 태우고 뒷좌석에 몸을 실으려했다. 하지만 쓰러진 경호원이 급하게 품에서 총을 꺼내어 명수에게 조준하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명수의 오른쪽 허벅지 옆으로 탄알이 스쳐 지나갔다. 명수가 아픈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확-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한 것을 간신히 힘을 주어 버텨낸 명수는 자신 때문에 계획이 무산되게 할 수는 없다며 뒷좌석에 재빨리 올라탔다. 총소리 때문에 나머지 경호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고, 당황한 그들이 급히 그곳으로 뛰어가려고 하자 세 사람이 눈빛을 싹- 바꾸며 말했다.

 


" 어이 거기. 그쪽들 상대는 여기거든? "
" 뭐…? "

 


경호원들은 아까까지만 해도 밝게 생글생글 웃던 호원의 표정이 굳은 것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벙쪄있었다. 호원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보나마나 다 초짜들이구만. 국회의원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을 경호하는데 초짜를 붙여놓다니 허술하기 짝이 없어. 성규, 우현, 호원이 슬슬 몸을 풀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얼른 끝내고 명수와 동우에게 달려가야 했다. 명수가 부상을 입을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한 탓에 세 사람은 내심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저대로 두면 출혈이 심해져 위험할 텐데…. 그나마 의사인 동우와 함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호원은 지금 동우도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 명수까지 다쳤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호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먹을 다부지게 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가자. 알지? 자칫하면 명수와 동우 형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거. "
" 새끼들, 다 죽었어! "
" 동우 형, 출발해. "

 


첫 번째 목소리는 우현, 두 번째는 호원, 세 번째는 성규의 것이었다. 성규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가 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그 장면을 본 세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하나는 처리한 거 같고…. 앞의 경호원들을 바라보니 다들 얼굴이 굳어져있었다. 아마도 자신들을 깔보고 장난을 쳤다고 생각한 것인지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자신들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경호원 네 명을 상대하기는 아무래도 버거울 것이었다. 하지만 해내야만 했다. 그 순간, 한 경호원의 목소리로 인해 전투를 시작하려고 하던 세 사람의 행동이 멈추었다.

 


" 의원님 핸드폰 당장 추적해. 이상한 놈들 두 명이 의원님을 납치했어. 서둘러 움직여! "

 


동료 경호원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제기랄, 저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그냥 몸을 풀 생각으로 싸움에 임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자신들이 싸움을 끝내기도 전에 동우와 명수 쪽으로 사람이 몰린다면… 이번 임무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일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전투에 임하는 우현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성규 또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현재 가장 여유로운 사람은 아마도 호원인 듯 싶었다. 그가 여유롭게 입 꼬리를 씨익- 올려 보이며 목소리를 내었다.

 


" 자, 얼른 시작하자고? 이 덩치 산만한 아저씨들아. "

 

세 사람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 * *

 

 

 


상황은 다행히도 좋게 흐르는 듯 했다. 동우가 위험해질 거라는 생각에 호원이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며 빠른 속도로 남자를 때려 눕혔다. 이미 한 사람을 눕힌 호원이 주춤주춤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먼저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당황한 틈을 타 호원이 먼저 남자의 팔을 잡고 돌려 꺾은 뒤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남자가 맥을 못 추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호원이 쓰러진 남자의 뒷목을 세게 내리치자 남자가 으윽, 하는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성규는 호원과 우현에 비해서는 힘이 약했기 때문에 최대한 체력을 아끼기 위해 남자의 급소를 노렸다. 상대가 경호원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에 비해 성규 저 자신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성규가 표정을 굳히며 남자의 다리를 한 번 걷어찼다. 그리고 그가 주춤하는 사이 그의 귀 뒤쪽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남자가 고통에 겨워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우현은 1년이나 일을 쉬었지만 역시나 베테랑 실력이 어디 가진 않은 것인지 남자의 복부를 발로 한 번 걷어차더니 이내 코를 세게 내리쳤다. 코뼈가 내려앉은 듯 남자가 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를 부여잡았다. 우현이 그 틈을 타 남자를 다리를 걷어 차 눕히려고 했으나, 역시 이쪽도 경호원이라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잠깐의 아픔을 뒤로 하고 남자는 주먹을 뻗어 우현의 턱을 가격했다. 그 무지막지한 힘에 우현은 순간 초점을 잃고 비틀거렸다. 남자는 이때다 싶어 그대로 우현에게 달려가 명치를 가격하려고 했으나 정신을 차린 우현에 의해 제지당했다. 정신을 다시 바로 잡은 우현이 고개를 두어 번 흔들며 남자의 무릎을 있는 힘껏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남자가 무릎을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우현이 입 안에 고인 피를 퉤, 하고 바닥에 뱉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우현이 그대로 남자의 명치를 발로 세게 꾸욱- 밟았다.

 


" 으윽…. "

 


남자의 고통 섞인 신음에 우현이 발에 더 힘을 주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듯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이쯤해도 금방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우현이 그에게서 발을 거두고는 호원과 성규의 눈을 한 번씩 맞추고는 급히 차에 올라탔다. 차에 타자마자 호원이 급하게 엑셀을 밟고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제발… 제발 무사해줘 동우 형, 명수야….

 

 

 


* * *

 

 

 

" 며, 명수야! 괜찮아? "
" 으으… 괜,찮아요. "

 


명수의 다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빨간 피에 경악한 동우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앞을 보며 운전하랴, 백미러를 통해 명수의 상태를 확인하랴 동우는 지금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생전 처음 이런 일에 뛰어든 동우인지라 이 모든 상황들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문득 호원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명수는 오른손으로는 허벅지를 눌러 출혈을 최대한으로 막으면서도 왼손으로는 박 의원의 목을 휘감고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하느라 체력적으로 소모가 컸다. 아무리 다 늙은 노인네라 하더라도 몸부림치는 남자를 한 손으로 결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하아… 동우 형, 우리 어디까지 가서 차 세워야 해요? "
" 아아, 조, 조금 남았어! 이제 곧 갓길에 차 세우면 될 거야. "
" 하으… "
" 명수야, 조금만 참아! "

 


명수가 고통에 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탄알이 스친 허벅지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생경한 아픔에 명수의 턱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형사로 일하면서도 배에 탄알이 박힌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혼수상태에 빠져 오랜 기간 눈을 뜨지 못했었고 그렇게도 좋아하던 형사라는 직업을 관둘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라는 일을 하면서 명예와 부는 얻을 수 있었지만 정작 저 자신의 행복까지 얻을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늘 이런 상황이 그리웠다. 다치고 힘들고 아프더라도 직접 몸으로 뛰고 부딪히는 이런 일. 그리고 그 일이 성공했을 때 맛볼 수 있는 짜릿한 희열. 명수는 지금 현재 다친 부위가 욱신욱신 쑤셔오는 것보다도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오는 듯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명수가 점점 힘이 빠져가는 왼팔에 힘을 주어 다시 남자의 목을 옥죄었다.

 


" 자네들은 대체 누구인가! "

 


박 의원이 겁에 질린 듯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그에 명수가 식은땀으로 범벅 된 얼굴로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 우리? 당신네들 같은 쓰레기 처리해줄 사람들. "

 


명수의 말에 박 의원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동우가 드디어 다왔다는 듯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갓길에 차를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차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색 정장의 사내 여럿에 동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명수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아직 상황을 모르는 듯 했다. 동우가 거의 울듯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었다.

 


" 대, 대체 어떻게 된… "
" 네? 형, 왜 그… 하아. "

 


울먹이는 동우의 목소리에, 무슨 일이냐며 묻던 명수 또한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새까만 정장을 입고 서있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 여섯. 그리고 그 사내들이 서서히 자신들의 차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동우가 재빨리 차 문을 철컥- 잠궜다. 남자가 문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동우가 안에서 잠근 터라 열리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자켓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 손잡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고 소리가 나고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잡이를 다시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직 열리지 않은 것인지 문을 여전히 잠겨있었다. 남자가 다시 총을 들어 올려 손잡이를 향해 조준했다.

 


" 명수야, 어떡해…? "
" 하아… 제기랄!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안 좋게만 흘러가는 건지…! "

 


동우가 어떡하냐는 듯이 물었지만 명수 또한 좋은 방법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두 사람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성열이한테 절대로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 했는데… 어쩌면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죽어서 돌아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명수였다. 동우는 현재 자신보다 상처를 입은 명수가 걱정이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너무 겁이 났다. 호원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동우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다. 어떡해… 어떡하지 호원아? 나 이제… 이제 어떡하면 좋아…? 동우의 볼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찌르는 듯한 총소리와 함께 믿을 수 없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대체 얼마나 밟은 것인지 금방 도착해버린 성규, 우현, 호원이었다. 동우와 명수가 타고 있는 차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남자를 쏜 것은 성규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은색의 리볼버를 꺼내어 든 성규가 방아쇠를 당기자 남자가 심장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덕분에 그 피가 운전석 창문 쪽에 어지럽게 튀었다. 동우가 몸을 흠칫 떨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엔 약간의 상처를 매달고 있었지만 멀쩡한 모습의 호원이 씨익- 웃으며 서있었다. 이제 자신이 왔으니 안심하라는 듯한 따뜻한 미소였다. 그에 동우의 감정이 폭발한 것인지 그의 얼굴이 눈물로 적셔졌다. 호원이 그런 동우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 동우 형, 늦게 와서 미안해요.'

 


그에 동우의 눈물이 더 봇물 터지 듯 흘러넘쳤다. 동우가 어깨까지 들썩여가며 엉엉 울었다. 명수가 그런 동우의 다독이며 자신도 자켓 안에서 총을 꺼내어 장전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지금이 이 순간이 진짜 희열을 맛 볼 시간이었다.

 

 

 

 

 

 

 

 

 

시티헌터 (City Hunter)

 

 

 

명수가 총을 장전하고는 최대한 출혈을 막아보려 허벅지를 꽈악- 눌렀다. 그리고는 앞좌석에 앉아 여전히 불안함에 떨고 있는 동우를 한 번 쳐다봤다. 성규, 호원, 우현과 자신에겐 이런 일이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동우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두려워할 만한 일임이 분명했다. 명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우 혼자서 의원을 잡고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우의 힘이 빠진 사이에 공격이라도 한다면? 아무리 나이가 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늙은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만 방심을 하면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명수가 입술 꽉- 깨물었다. 그리고 그 때, 가만히 앉아있던 동우가 명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명수야, 저 곳엔 네가 필요해. "

 


그 말에 명수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하지만 형, 제가 가면… "
" 괜찮아. 나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나도… "
" ………. "
" 남자잖아. "
" ………. "
" 적어도 호원이하고 너희들한테 피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고는 싶지 않아. "
" 형은 피해를 끼치는 사람 아니…! "
" 어서 가봐. 애들 힘들어 보인다. 다리… 조심하고. "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해오는 동우에, 명수가 살짝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형, 그럼… 부탁할게요. 금방 돌아올게요. 정말로 금방 돌아올 테니까…. 응,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말을 마친 동우는 앞좌석 쪽에서 뒷좌석으로 넘어와 박 의원이 움직이지 못하게 힘을 주어 잡았다. 그에 명수가 조심스레 힘을 풀고는 문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왔다. 명수가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동우를 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정말로 금방 올게요, 형. 그때까지 호원이 형 멋지게 싸우는 거 보고 있어요. 그럼 금방 끝나있을 테니까.

동우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지고, 명수는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려 세 사람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친 다리에서 피가 계속 나오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명수가 절뚝거리며 걸어오자 성규와 우현, 호원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중 가장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호원이었다.

 


" 너… 왜 나왔어? "
" 저도 도우려고요. "
" 야, 김명수! 넌 다리도 다친 애가 무슨…! "
" 형들끼리 여섯 명을 어떻게 처리해요? 다리 다친 나라도 하나 있으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
" 하아…. 동우 형은? "
" 걱정 마세요. 동우 형 한 번 믿어 봐요 우리. "

 


호원은 굉장히 걱정된다는 눈빛이었지만 명수의 말에 한숨을 푸욱- 내쉬며 다시 적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까보다는 더 뛰어난 실력자들 같았다. 그냥 육탄전으로 가기엔 이쪽이 너무 불리했다. 현재 이미 육탄전을 벌이고 온 자신들도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고 명수는 다리를 다친 덕분에 민첩하게 공격을 피하지 못 할 테니.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호원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 준비됐어? "
" 그래. "
" 오랜만이라 떨리네, 이거? "
"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이거… 꽤나 아프네요. "

 


첫 번째 대답은 성규, 두 번째 대답은 우현, 세 번째로 장난스런 대답을 해온 사람은 명수였다. 명수의 말에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걸쳐졌다. 그리고 다들 자켓 안에서 총을 꺼내어 들었다. 성규가 굳어있던 얼굴을 풀어 보이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 시작해볼까? "

 


넓고도 한적한 도로 한복판에서 한 발의 총성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 * *

 

 

 


성규가 하늘을 향해 은색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기자 경호원들도 서둘러 총을 꺼내 들었다. 그 중 한 남자가 총을 든 채로 성규 쪽으로 뛰어갔다. 그런 그를 성규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정확하게 남자의 허벅지에 총알을 박아 넣고는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숙여 차 옆으로 숨었다. 성규가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호원과 우현이 재빨리 뛰어나왔다. 호원이 다리에 총을 맞고 주저앉은 남자의 목 뒤를 잠시 기절할 정도로만 힘을 주어 내리쳤다. 그에 남자가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으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한 명을 쓰러뜨림과 동시에 성규와 호원의 움직임이 다시 빨라졌다. 우현은 자신에게로 총을 겨누는 남자의 모습을 보곤 재빨리 차 뒤로 몸을 숨기고는 차 문을 열어, 창문 틈 사이로 남자를 향해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하는 귀를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 틈을 노린 우현이 빠르게 달려와 남자의 복부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그리고는 잠시 주춤하는 남자의 머리를 그대로 총구로 내리쳐 기절시켰다.  아직 두 명을 처리한 것뿐인데도 몸으로 부딪힌 호원과 우현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호원이 잠시 눈을 돌려 동우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동우가 창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에 호원이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이려던 찰나,

 


" 이호원! 뒤에!! "

 


성규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뒤를 돌아본 호원은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시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들려왔다. 놀란 호원이 눈을 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그곳엔 명수가 힘겹게 차에 기댄 채 멋들어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 거봐요. 이런 나라도 있으면 도움 될 거랬죠? "
" 그래. 고맙다 짜식아. "
" 고마우면 또 형한테 달려드는 저 자식 좀 어떻게 해보던가요. "
" 나도 알고 있어!  "

 


그 말과 함께 호원이 잠시 내려놓았던 총을 집어 들며 그대로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어깨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아마도 저 경호원은 다시는 총을 들 수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씁쓸해져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 사람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데 이렇게 상처를 입히게 되었으니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한 들 뭐하겠는가. 이미 국가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 이상, 죄도 없이 피해를 입는 사람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호원의 상념을 깬 것은 성규였다. 타앙- 하는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의 남자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역시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움직이기는 힘들게 잘 조준했다. 성규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호원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 지금 그런 쓸 데 없는 생각할 상황이야? 이호원, 정신 차려. "

 


성규의 말에, 호원이 푸스스-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후에 일어날 일들은 그 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호원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바뀌어버렸다. 이제 남은 사람은 딱 한 명. 홀로 남은 경호원은 자신의 동료들이 모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에 지레 겁을 먹은 듯 했다. 아마도 경력이 별로 되지 않은 사람인 듯 했다. 얼굴도 굉장히 앳되어 보이고. 하지만 성규의 말대로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에 잠겨있을 틈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경직된 얼굴로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들을 제대로 맞출 리가 없었다. 호원이 한숨을 푹- 내쉬며 남자의 어깨를 조준하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탄알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정확히 남자의 어깨로 가 박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현이 남자의 허벅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가 피를 흘리며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로써 여섯 명의 남자가 모두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성규가 성공했다는 기쁨에 젖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고 있는 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우현은 성규의 웃음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묘하게 섹시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성규의 가늘고 긴 눈 꼬리가 밑으로 쳐지며 웃는 모습은 가히 섹시하고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우현의 생각을 눈치 채지 못한 성규는 웃던 얼굴을 금방 다시 굳히고는 차에 올라타라고 재촉했다.

 


" 빨리 차에 타. 아무리 한적한 시골 도로라고 해도 총 소리가 들렸을 확률이 커. 경찰들 오기 전에 얼른 여길 떠야 돼. "

 


성규의 말에 다들 차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 때 들려오는 성규의 목소리로 인해 모두가 차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봤다.

 


" 우현이는 나와 따로 가. 박 의원은 우리가 처리할게. 박 의원의 통장거래 내역, 그리고 오늘 받은 뇌물까지. 우리가 모두 검찰에 잘 전달할 거야. 그리고 박 의원은… "

 


박 의원은? 호원의 물음에 성규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눈을 감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의외로 힘들었던 첫 번째 임무가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성규가 잠시 감았던 눈을 떠 보이며 말했다.

 


"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우현아, 가자. "

 


성규는 모두가 궁금해 하는 점을 알려주지 않은 채, 박 의원이 타고 있는 차로 향했다. 하지만 차 뒷문을 연 성규와 우현은 놀란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박 의원이 아주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성규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는 듯이 동우를 바라보자, 동우가 머쓱하게 웃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아, 사실… 제대로 잡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미리 챙겨왔던 마취제로… "
" 뭐? 마취제? 그런 건 또 언제 챙겨왔어? "
" 혹시나 필요할까 싶어서 챙겨왔지. 웬만하면 주사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 몸부림이 심한 거야! 그래서 그만…. 나 혹시 잘못했어? "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동우를 보며 모두가 한동안 벙쪄있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핫! 아 동우 형 완전 웃겨요! 호원이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웃자, 동우는 왜 웃냐는 듯이 호원을 밉지 않게 쏘아보았다. 성규와 우현도 재밌다는 듯이 웃음 지었고, 명수는 무언가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 형도 참!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 썼어야죠! 저만 괜히 힘 뺐잖아요! "

 


명수의 말에, 다시 한 번 크게 웃음이 일었다. 한참을 웃으며 즐거워하던 그들은 서로 차를 나누어 탔다. 성규와 우현은 박 의원이 타고 있는 차로, 호원과 동우, 명수는 원래 타고 왔던 차로 옮겨 탔다. 성규와 우현의 차가 먼저 출발하고 그 뒤를 이어 세 사람이 타고 있는 차도 시원하게 미끄러져갔다. 어느 정도 달렸을까, 명수의 상태가 궁금했던 동우가 뒷좌석을 바라보니 명수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도 출혈은 이미 멈춘 듯 새빨간 피가 명수의 검은 바지에 말라붙어 있었다. 그를 보는 동우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첫 임무부터 이렇게 다쳐버렸으니…. 게다가 명수가 이 모양 이 꼴로 돌아가면 분명히 성열이가 많이 속상해할 텐데. 명수와 성열이 말은 하지 않았어도 이미 모든 이들은 그 둘이 사귄다는 것을 얼핏 눈치 채고 있었다. 밝히지 않을 거면 티를 내지 말던가. 동우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호원 또한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 한 숨 푹 자요. "
" 너 운전하고 있는데 나 혼자 어떻게 자. "
" 나 괜찮으니까 얼른 자요. 형 피곤해 보여요. "
" 됐거든? 지금 더 피곤해할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남이 운전할 때 옆에서 자면 운전하는 사람도 같이 졸리댔어. "
" 하여간 고집은. "

 


호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싫지 않은 듯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운전에 임했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의외로 금방 도착해버린 집이었다. 동우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고, 호원도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 명수를 깨웠다. 역시나 피를 많이 흘리고 무리해서인지 명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런 그를 보는 두 사람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호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명수에게 등을 내보였다.

 


" 업혀. "
" …네? "
" 그 다리로 더 걷지 말라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정확하게 모르는데 더 이상 무리하지 마라. "
" 코앞이 집인데 업히기까지 할 거 뭐 있어요. "
" 잔 말 말고 업히라고! 의사 선생님도 그걸 바라는 거 같으니까. “
호원의 말에 명수가 동우를 바라보자, 동우 또한 옅게 웃으며 명수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쌌다.
" 그래 명수야. 업혀서 들어가. 더 이상 다리 쓰면 안 돼. "

 


동우까지 그렇게 말을 해오자 명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호원에게 업혔다. 자신이 업히자마자 얘 왜 이렇게 무거워! 아이고 내 허리야아…. 하며 꿍시렁 대는 호원을 보며 작게 웃었다. 명수가 이렇게 업혀서 들어가기 싫었던 이유는 성열이 걱정할 것이 눈에 훤히 보여서였다.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 하고 왔는데 이렇게 업혀서 들어가면 부축 당한 채 들어가는 것 보다 더 많이 다친 것 같지 않겠는가. 동우가 벨을 누르자, 안에서 다급한 성열과 성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역시나 명수의 예상대로 성열은 명수를 보자마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떠 보이더니 이윽고 그 예쁘고 큰 눈망울에 눈물을 한 가득 담았다. 호원이 조심스레 명수를 소파에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털썩- 앉았다. 동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여러 가지 치료도구를 가져와 명수의 앞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오자마자 호원에게 업혀 들어온 명수를 본 성열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너무 무섭고 가슴이 아파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도 묻지 못했다. 그런 성열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인지 동우가 명수의 다리에 부분마취제를 주사하고는 치료해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박 의원 경호원들과 싸우다가 명수가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어. 근데도 어쩔 수 없이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어서 더 무리할 수밖에 없었고. "
" 마, 많이 다친 거야…? "
" 그건 아닌 거 같아. 그냥 소독하고 꿰맨 다음에 한동안 무리하지만 않으면 멀쩡하게 나을 거야. "

 


동우의 말에 성열이 조용히 눈을 감아보였다. 명수는 그런 성열의 눈치를 보느라 죽을 맛이었다. 상처는 동우가 마취제를 투여해준 탓에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성열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저 투명한 액체들이 비수가 되어 자신의 마음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명수가 입술을 꽈악-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성열에게 미안해 고개를 들어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성열은 조용히 눈물을 툭- 떨굴 뿐 흐느끼지는 않았다. 그렇게 넓고도 넓은 거실에 한참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치료를 다 끝낸 동우가 명수에게 다 됐다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부축을 해주라고 호원에게 말 할 참이었는데,

 


" 어라? "

 


호원이 소파에서 불편한 자세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래 호원이 너도 많이 피곤했겠지. 아무래도 가장 많이 뛰어다닌 사람은 호원이었으니 제일 피곤할 법도 했다. 동우는 성열에게 명수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성종에게는 호원을 방까지 옮기는 건 무리니 담요라도 덮어주라고 말을 하고는 자신은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향했다.

성열이 명수의 팔을 조심스레 자신의 목에 걸치게 하며 그의 방까지 부축했다. 동우가 약을 조금만 투여한 탓에 그새 마취가 풀린 것인지 걸을 때 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는 명수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애써 눈물을 꾹- 참은 성열이 조금 더 명수는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그의 방까지 걸어와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눕자마자 명수가 끄응- 소리를 내며 아파했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몸을 썼으니 허벅지뿐만 아니라 온 몸이 쑤실 것이었다. 하지만 명수는 침대에 계속 누워있지 않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에 성열이 뾰로통한 얼굴로 왜 일어나냐고 묻자 명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

 


" 미안. "
" ………. "
" 미안해 성열아. 절대로 다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바보같이 다쳐버려서…. "

 


명수의 말에, 가까스로 참고 있던 눈물이 폭발한 듯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맑고 투명한 눈물이 침대시트 위로 뚝, 뚝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가녀린 어깨가 파르르 떨려왔다. 성종과 동우의 앞이라 참았던 눈물이 명수의 앞에서는 숨김없이 다 드러났다.

 


" 흐으… 나빠. 이 나쁜 놈아…! "
" …성열아. "
" 하윽… 내가 얼마나, 얼마나 기도했는데…! 제발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우흑… 제발 우리 명수 상처 하나도 달고 오지 않게 해달라고 내가 얼마나…! "
" …울지 마 바보야. 예쁜 얼굴 다 망가져. "

 


안쓰럽게 떨며 울고 있는 성열을 명수가 그대로 한 품에 안았다. 명수의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성열에게까지 전해졌다. 명수는 자신의 어깨가 성열의 눈물로 인해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다치고 싶어서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성열에게 너무 미안했다. 자신이 멀쩡하게 오기만을 간절히 바래왔을 이 아이가 눈에 훤히 보여서. 분명 집에 있으면서도 성종이와 함께 안절부절해 하며 가만히 있지 못했을 거다. 어쩌면 집에서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자신들이 많이 밉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열아, 절대로 그런 마음 갖지 마.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고, 나는 내 나름대로의 일이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자책하지 마.

 


" 내가 다 미안해, 이쁜아. "
" 흐윽… 진짜 나, 네가 호원이 형한테 업혀서 들어오는 순간 숨이 턱- 막혔어. 흡… 다시는, 다시는 다치지 마 명수야. 응? "
" 알았어. 미안해. 다시는 안 다칠게. 약속해. "

 


아이처럼 손가락을 걸고 약속 하자는 명수의 모습에, 성열이 작게 웃음 지었다. 명수의 품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현재 명수가 푹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따뜻한 품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성열이 아이처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부비적거렸다. 명수는 그런 성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부드럽게 그의 머리칼을 매만져주었다. 성열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명수와 눈을 맞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참동안이나 허공에서 부딪혔다.

 


" 사랑해 명수야. "
" 나도. 나도 사랑해. "
" 푸흐… 내가 더. "
" 까불지 마, 이성열. 넌 내 마음에 비하면 아직 새발의 피야. "

 


명수의 말에, 성열이 맑게 웃으며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대었다. 바로 코앞에서 명수의 숨결이 느껴졌다. 성열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명수의 입술에 촉- 하고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기습뽀뽀에 놀란 명수가 눈을 커다랗게 떠보이자, 성열이 재밌다는 듯 그의 어깨를 팡팡- 때리며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명수가 그대로 성열의 붉고 얇은 입술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성열은 당황스러움에 명수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명수가 그런 성열의 손을 잡으며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명수가 최대한 성열이 겁먹지 않도록 부드럽게 그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에 성열의 입술이 자연스레 열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명수가 성열의 혀를 강하게 옭아매며 농염하게 헤집었다.

성열은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을 부드럽게 이끌어주는 명수에게 더욱 더 몸을 기대며 목에 감은 팔에 더 힘을 주어 한 가득 그를 끌어안았다. 한참동안이나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자, 성열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명수는 그런 성열을 눈치 채고는 그가 조금이라도 덜 창피하게 다시 한 번 그를 꽈악- 껴안았다. 자신의 품에 안긴 채 부비적거리는 그가 아기 같고 마냥 좋았다. 성열을 오랫동안 짝사랑 해왔던 명수로써는 지금 이 상황이 그저 꿈만 같았다. 김명수와 이성열이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고,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키스를 하고. 너무 행복했다. 이곳으로 오기를 정말 잘 한 것 같다. 명수는 어느새 총상의 고통도 잊은 듯 지금까지 지었던 미소 중 가장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성열을 더욱 더 세게 끌어안았다.

 


사랑해, 이성열.

 

 

 

 

 

* * *

 

 

 

" 후회 하지 않아? "
" 뭘? "
" 박 의원 곁에 그렇게 쪽지를 남겨두고 온 거 말야. "
" 그걸 왜 후회해? "
"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고…. "
" 언젠가는 탄로 날 정체잖아. "

 


성규와 우현은 모든 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마도 오늘 저녁쯤이나 내일 이른 아침이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박 의원의 통장거래 내역과 그가 받은 뇌물들을 모두 들키지 않게 검찰로 잘 전달을 했고, 잠들어 있는 박 의원의 옷을 속옷만 남기고는 모조리 다 벗겨 청 테이프로 입을 막고 팔, 다리를 묶어 서울과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 길가에 버려두고 왔다. 아마도 박 의원이 죄를 저질렀다는 그 증거를 본 경찰들은 그를 찾아 조사할 것이고 박 의원은 이제 국회의원으로써의 인생이 끝날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죄 없는 시민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했다. 그랬기 때문에 어쩌면 심할 수도 있는 이 짓을 행한 것이다. 다시는 이런 나쁜 일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게끔 따끔히 벌을 주기 위해서.

사실 그를 버려두고 오면서 우현이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은 자그마한 쪽지 한 장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커다한 쪽지이기도 했다. 성규는 우현에게 그 쪽지를 남긴 것을 후회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우현은 웃으면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해왔다. 어차피 언젠가는 자기들 스스로 정체를 밝혀야만 했고 지금은 재미삼아 그들에게 힌트를 하나 던져준 것뿐이다. 그 쪽지 하나로 자신들의 정체를 벌써부터 알아챌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려주고 싶었다. 자신들이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던 것인지. 우현은 마음 한 켠이 답답하면서도 일 하나를 끝냈다는 생각에 노곤함이 밀려왔다.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는데도 극구 말리는 성규를 이기지 못한 우현은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성규의 길고 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도 자신의 손목을 저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줬었지. 우현은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왔다. 문득 자신과 성규의 첫 만남이 생각나서였다. 은색 리볼버를 들고 자신의 이마를 겨누던 그를 생각하면 여전히 아찔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은 처음부터 성규에게 끌렸던 것 같기도 하다. 어딘지 모르게 섹시한 그 모습에. 성규는 계속해서 자기 혼자서 실없이 웃는 우현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많이 웃는 우현도 참 보기 힘드니 가만히 구경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성규 자신 또한 푸스스- 바람 빠진 듯한 웃음이 나왔다. 우현은 핸들에 한 손을 올려놓고 나머지 한 손은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은 성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갑작스런 온기에 놀란 성규가 눈을 크게 떠 보이며 우현을 쳐다봤지만 우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띠우며 창 밖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에 성규가 피식, 웃으며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우현의 손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럴수록 우현의 손이 더 성규의 손을 부드럽고 따스하게 잡아왔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너와 함께여서 참 행복해.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성규야.

 


슬슬 해가 지려고 했다. 붉은 노을이 성규와 우현이 꽈악- 맞잡은 손을 더욱 더 따스하게 밝혀주며 그들의 모습을 닮아 붉게 타올랐다.

 

 

 

 

 

 

* * *

 

 

 

" 하, 대체 한 나라의 국회의원을 이런 식으로 바닥까지 끌어내린 간 큰 놈들이 누구야! "
" 김 반장님! 여기… 이상한 쪽지 하나가 떨어져 있는데요! "
" 뭐? 쪽지? "

 


박 의원이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를 받고 곧장 박 의원을 찾으러 수색에 들어간 경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시골 한 도로에 벌거벗은 채로 버려져있는 박 의원을 발견했다. 경찰은 그를 발견한 즉시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보내고 그 주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하던 와중에 부하 형사가 웬 이상한 쪽지가 있다며 이 사건 담당의 반장에게 꾸깃꾸깃한 쪽지를 건네었다. 그 쪽지를 받아 든 반장과 형사들의 눈빛이 차게 식어갔다.

 


[ 곧, 나를 죽이고 우리를 썩게 만든 당신들을 찾아가겠습니다. - CITY HUNTER- ]


대체…

 

 


누구야, 이놈들은…….

 

 

 

 

 

 

 

시티헌터 (City Hunter)

 

 

 

첫 번째 임무가 끝나고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휴식시간을 갖게 되었다. 바로 두 번째 임무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명수의 부상 때문이었다. 이제는 부축 없이도 제법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뛰거나 다리를 많이 쓰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명수가 다 완전히 나을 때 까지는 잠시 동안 휴식을 갖기로 하였다.

우현은 성열이 깎아온 과일들을 열심히 먹으며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었고, 성규는 무슨 일인지 무기 창고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TV를 틀려던 찰나, 바지주머니에서 진동이 지잉- 하고 울렸다. 이 시간에 문자가 올 리가 없는데? 우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꺼내어 열자, 발신자에 성규가 찍혀있었다.


[ 우현아, 잠깐만 창고로 내려와 ]


창고로? 갑자기 날 창고로 왜 부르는 거지? 우현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려오라는 성규의 말에 일단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창고로 향했다. 창고로 내려가는 계단에 한 걸음 내딛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몸을 감싸고돌았다. 하지만 지하 창고라고 해서 어둡고 습하고 먼지가 쌓여있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성규가 소중하게 여기는 무기들이 모여 있는 만큼, 이곳은 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다. 그만큼 보안 또한 철저했고.

우현이 최첨단으로 되어있는 지문인식기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자, 잠시만 기다리라는 음성이 들리더니 곧 문이 자동으로 스르륵- 열렀다. 우현이 씨익- 웃으며 많고 많은 문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문 앞에 섰다. 이곳이 성규가 자주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우현은 무언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규와 알고 지낸지 얼마 안됐지만 그래도 그와 꽤나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기창고는 그동안 같이 살았던 성열과 동우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는데 어느 날 성규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오더니 다짜고짜 자신의 지문을 등록 시키고는 살짝 웃으며 '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무기가 있으면 써도 돼. 너한테만 주는 내 선물이랄까? ' 라고 말했었다. 그때의 감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고 설렜었다. 우현이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채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성규가 뒷모습을 보인 채 서있었다. 우현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것인지 성규는 여전히 허리를 약간 굽힌 채 뭘 그렇게 찾는지 금고 안으로 손을 넣어 이것저것 꺼내보며 살폈다.
 
우현은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채 성규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평소 밖에 나갈 때는 늘 수트를 고집하는 그였지만 집에 있을 때는 편한 니트를 자주 입곤 했다. 성규는 오늘도 역시나 새하얀 니트를 입고 있었다. 살짝 늘어난 니트는 성규의 새하얀 어깨를 드러내며 그의 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우현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살짝 드러난 성규의 어깨가 너무 섹시해 보이기도 했고 또 늘어난 소매는 성규의 예쁜 손을 살짝 덮고 있어 왠지 모를 귀여움까지 더했다. 애써 열이 오르는 자신을 부정하며 우현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자 성규가 그제 서야 뒤를 돌아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 왔어? "
" 어? 아, 어… "

 


우현은 활짝 웃어 보이는 성규의 모습에 또 한 번 정신이 멍해졌다. 아, 오늘따라 정말 왜 이러지…. 우현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미간을 찌푸리자, 성규는 그가 어디 아프기라도 한 줄 알았는지 놀란 음성으로 물어왔다.

 


" 어디 아파? "
" 어? 아냐, 아무것도. "

 


우현의 말에 안심한 듯 성규가 놀란 표정을 거두고는 작게 미소 지으며 금고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이내 그것을 우현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성규의 손에 들려진 것을 본 우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건……

 


" 선물이야. "
" 이걸… 왜 나한테…? 저번에 네가 준 것도 있는데…. "
" 그건 급해서 그냥 아무거나 준 거 같아서 말이야. 이건 특별히 너를 위해서 내가 준비한 선물. "

 


우현이 성규에게서 조심스레 물건을 받아들었다. 성규가 우현에게 준 것은 다름 아닌 총이었다. 우현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블랙의 심플한 총. 우현은 성규에게서 받은 총을 손으로 살짝 쓸어내려 보기도 하고 직접 쥐어보기도 했다. 그래.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이 총은….

 


" Jericho941이야. "
" 하아, 김성규…. "
" 너한텐 이게 익숙하고 편할 거 같아서 말이야. 경찰 특공대원들이나 국정원 요원들은 이 총을 쓰잖아. 그래서 비록 1년 전이긴 하지만 주로 썼었던 총을 쓰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해서 특별히 준비해봤어. "

 


성규의 말에도 우현은 한참동안이나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총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어쩐지 생긴 것도 익숙하고 그립감도 좋더라니…. 이 총은 총기 소유률 1위라는 미국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터. 우현은 다시 한 번 성규의 배려심에 감탄한 듯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성규를 한참동안이나 응시하더니 이내 작고 가녀린 그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당황한 듯, 성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물론 우현에게 안겨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 전해져오는 우현의 따뜻한 체온에, 성규가 천천히 눈꺼풀을 내려 눈을 감았다.

 


" 고마워. 진짜 너무 큰 선물을 받았어. 나는… 늘 너에게 받기만 하는 것 같아. 그래서 미안해. "
" 앞으로 천천히 돌려주면 되는 거야. 난 너한테 바라는 거 딱히 없어. 그저 모든 일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웃는 얼굴로 마치는 것. 그거 하나면 돼. "

 


성규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우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현이 팔에 힘을 주어 성규를 더욱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에 성규도 살짝 웃으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우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신의 허리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우현이 눈을 감고는 성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성규에게서는 늘 달콤하면서도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향기가 나곤 했다. 오늘도 역시나 성규에게서 그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니 그 향이 우현의 후각을 더욱 더 자극했다. 취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취해서 잠들고만 싶었다.

김성규 너의 목소리와 향기에,

내가 취해버릴 것만 같아.

 

 

 

 

 

* * *

 

 

 


" 먹여줘. "
" 뭐? "
" 먹여줘 이쁜아. 아아- "
" 웃기고 있네, 김명수! "

 


성열은 명수에게 손수 끓인 죽을 갖다 바쳤지만 명수의 입에서 나오는 어이없는 말에,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치며 명수의 등짝을 세게 한 번 내려쳤다. 그에 명수가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온 몸을 베베 꼬았다. 하지만 성열은 그런 명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얼른 먹으라며 명수의 손에 수저를 쥐어주었다. 그에 명수가 서운하다는 듯 성열을 밉지 않게 쏘아보며 말했다.

 


" 아, 이성열! 네 손 맵다고 몇 번이나 말해! "
" 흥, 그러게 누가 어이없는 말하래!? "
" 아픈 애인 죽 좀 떠먹여 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
" 김명수 네가 손을 다쳤어, 팔을 다쳤어? 배에 총을 맞았어? 다리잖아, 다리! 그것이 이제 거의 다 나아가는! 이게 어디서 엄살이야? "
" 하, 이성열… 너 변했어. "
" …뭐? "
" 변했어어… 내 사랑이 변했어… 우리 사랑이 변했어…. "
" 야, 야… 김명수. "

 


자신의 말에 또 당황해서는 말까지 더듬는 성열을 보며 명수가 고개를 숙인 채 씨익- 미소 지었다. 하여간, 이성열. 순진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명수는 성열 모르게 큭큭 웃고는 다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성열을 쳐다봤다. 그런 명수의 눈빛에 마음이 약해진 성열이 움찔, 몸을 떨었다. 금방 또 속아 넘어가는 성열의 모습에 명수가 승리에 가득 찬 미소를 지어보였다.

 


" 아, 알았어! 먹여주면 되잖아! "
" 정말? "
" 그래! 자, 아- 해! "
" 아아- "

 


성열은 헤헤 웃으며 입을 벌리는 명수가 그저 귀여워 보였고, 명수는 아직 뜨거운 죽은 호호 불며 떠먹여주는 성열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간 성열은 이렇게 틱틱 대면서도 다친 명수를 위해 이것저것 엄마처럼 챙겨주었다. 그로 인해 명수는 다치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라는 걸 느꼈다. 물론, 명수의 이런 생각을 성열이 안다면 길길이 날뛰며 분노했을 테지만. 명수에게 죽을 다 먹여준 성열이 쟁반을 들고 일어나려 하자, 명수가 그의 팔을 잡아  당기며 다시 침대에 앉혔다.

 


" 네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다. "
" 치, 됐거든? 얼른 이 손이나 놔. "
" 아, 왜! 조금만 더 있다 치우면 안 돼? "
" 설거지는 먹자마자 바로 해야 되는 거야. 그리고 우현이 형 과일 먹고 또 접시 안 치웠을 거야. "
" 조금만 있다 가. 응? "
" 야, 김명…! "

 


여전히 성질을 부리는 성열을 명수가 그대로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성열은 놀란 듯 했지만 이내 자신도 좋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명수의 등을 따뜻하게 쓸어내려 주었다. 정말 이만한 게 다행이다. 만약에 의식을 찾지도 못 할 만큼 다쳤다면 아마 자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지. 명수는 한참동안이나 성열을 끌어안고 있더니 이내 품 안에서 그를 떼어내고는 온전히 자신의 눈 안에 성열만을 담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 하얀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남들이 보면 닭살이라고 오글거린다고 난리를 쳐댈지도 모르겠지만 명수는 그 정도로 성열을 사랑하고 있었다. 명수가 조심스레 성열에게 다가가자, 성열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조심스레 눈을 감아보였다. 명수가 성열의 이마에 촉- 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오똑한 코에도 한 번, 마지막으로 도착한 예쁘고 앙증맞은 입술에서는 조금 길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예쁜 입술을 좀 열어달라는 듯 명수가 뜨거운 혀로 성열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물고 핥았다. 성열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명수의 손이 그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명수는 성열의 새하얀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아까와 같은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 으아아악!! "
" 내 이럴 줄 알았어, 김명수! 가, 감히 지금 어디다 손을 집어넣어! "
" 서, 성열아 잘못했어! "
" 하, 됐고! 김명수 너 내가 요새 오냐오냐 했더니 정신을 놨구나? 오늘 한 번 죽어봐 이 변태새끼야!! "

 


아까까지만 해도 달달하고 사랑이 넘치던 그 방에서는 명수의 애절(?)하고도 고통스런 비명만 울려대었다.

 

 

 

 


* * *

 

 

 


" 형들! 성종아! 나와서 밥 먹어! "

 


성열이 매고 있던 앞치마 끈을 푸르며 다 된 저녁식탁을 바라보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제일 먼저 기어(?) 나온 명수가 입을 뿌우- 내밀며 성열에게 쏘아댔다.

 


" 이성열! 나는 왜 안 부르는 건데? "
" 지금처럼 알아서 나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 아씨, 너 진짜 그럴 거냐! 아까 네가 때린 곳이 아직도 아프… "
" 김명수 너 자꾸 그러면 네가 한 짓 형들한테 확 말해버린다!? "
" 잘 먹겠습니다. "

 


성열의 무서운 협박에 명수는 잠자코 밥그릇에 얼굴을 묻다시피 하며 밥을 먹었다. 뒤늦게 나온 성규와 우현, 성종도 의자에 앉으며 밥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호원과 동우가 없다는 것을 안 성규가 그 둘은 어디 갔냐고 물었다. 그에 성종이 입을 삐쭉 내밀며 대답했다.

 


" 둘이서만 맛있는 거 먹으러 갔지 뭐. 말로는 창선이 형이랑 술 약속이 있어서 간다는데 동우 형도 같이 간 거 보면 뻔한 거 아니겠어요? "
" 아, 그래? "

 


우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게 먹는 네 사람을 바라보며 성열이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자신도 수저를 들고 밥을 한 술 뜨려고 하려던 그 때, 성규의 벨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모두의 시선이 성규에게 집중 되었고, 성규 자신도 진동이 풀린 것에 놀라 정신없이 전화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아든 성규는 곧 표정을 굳히고는 네, 네. 알겠습니다. 곧 갈게요. 하는 사무적인 말투를 쓰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곧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에 성열은 알겠다는 듯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우현과 명수, 성종은 성규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놀란 듯 했다. 멍해진 정신을 바로 잡은 우현이 성열에게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 성규 왜 갑자기 방으로 들어간 거야? "
" 왜겠어요. 그 일 때문이지. "
" 그 일? "
" 아, 왜… 그거 있잖아요. 성규 형 진짜 직업. 원래 직업. 그 일 하러 가는 거겠죠. "

 


성열의 말에 우현의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우현이 다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성규의 방으로 향하려고 하려던 찰나, 금방 준비를 마친 성규가 방에서 나왔다. 제발 아니기 만을 바랬던 우현은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성규가 늘 그래왔듯 잘빠진 수트를 입고 있었다. 성규는 일부러 우현과 눈을 맞추지 않고 그저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잡을 새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런 그를 그대로 놓칠 우현이 아니었다. 우현은 비가 내려 바람이 많이 불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겉옷 하나도 걸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 어어!? 우현이 형! 우산 안 챙… 에씨, 벌써 나가버렸네… 비 많이 오는데…. "

 


성종이 우산을 챙겨가라며 다급하게 외쳤지만 우현의 귀에는 그 어떠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서 성규를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까지 치는 궂은 날씨였다. 그 날씨에도 우현은 그 비를 다 맞으며 두리번거렸다. 금방 나갔는데도 성규가 보이지 않았다. 우현이 발걸음을 더 빨리해 대문 밖까지 나오자, 이제 막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려는 성규가 보였다. 우현이 이를 악 물고는 뛰어가 성규의 어깨를 잡아챘다.

 


" 남…우현? "
" 하아, 김성규. "

 


성규는 비에 쫄딱 젖어 거친 숨을 내뱉고 있는 우현의 모습에 놀란 듯, 자신이 들고 있던 우산을 급히 우현에게 씌워주었다. 우현의 몸은 이미 다 젖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게 해주려는 성규의 배려였다. 그 배려에 우현은 더 마음이 아파왔다. 너는 이렇게나 따뜻한 사람인데… 어째서 그런 끔찍한 일을 하러 가는 거야? 내가 납득을 할 수 있게끔 대답을 해봐, 김성규. 우현은 차마 성규에게 전하지 못할 그 말을 속으로 삼켜내었다.

 


" 왜 나온 거야? 비도 많이 오는데…! "
" 가지마. "
" …어? "
" 가지 마. 가지 마, 김성규. 너 거기 가지 마. 가면 안 돼. "
" …우현아. "

 


우현의 말에, 성규가 난감한 듯 입술을 잘근 씹었다. 무언가 곤란한 상황이 닥치면 취하곤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것을 본 우현이 얼른 손을 들어 올려 성규의 입술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러자 성규가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으며 입을 앙 다물었다. 하지만 우현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기에 성규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 미안. 나는 가야 돼. "
" 왜? 어째서? 너 그런 사람 아니잖아. 과거엔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라도 손 씻고 살면 되는 거잖아! "
" 너는… 몰라, 우현아. "
" 김성규…. "
" 너는 아직 나에 대해서 잘 몰라. "
" 성규야, 제발…! "
" 남들에게 의뢰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일. 물론 지옥이야. 남들이 보기에도 끔찍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감옥이고 나를 옥죄여오는 쇠사슬과 같은 존재야. "
" 그런데 왜… "
" 끔찍한 지옥임과 동시에, 이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해. 우현아, 나는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이 일을 시작했어. 이젠 이게 내 삶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어. "
" ………. "
" 이해 못 할 거야.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이 일을 끝내고 와서… 나의 모든 이야기를 해줄게. 그러니까 우현아. "
" 안 돼. 그래도 안 돼. 나 거기 너 못 보내. 너 못 간다고! "
" 네가 가지 말라고 해도 난 가야 돼. "
" 김성규!! "
" 비 많이 와. 이거 쓰고 들어가. 감기 걸리겠다. "

 


성규는 슬프게 잠긴 우현의 목소리를 외면하고는 그의 손에 우산을 쥐어준 채 그대로 차에 올라타 그곳을 벗어났다. 부드럽게, 혹은 약간 거칠게 도망치듯 미끄러져 가는 성규의 차를 보며 우현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도대체 그게 뭔데. 그 일이 너한테 뭔데 김성규…! 우현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 되어갔다.

 


" 하아… 김성규…. "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섭게 쏟아져 내려오는 비가 눈을 아프게 자극했다. 그 고통에 우현이 눈을 스르륵, 감아 보이며 아프게 미소 지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품에 너를 안았던 것이 아직도 꿈만 같고 행복한데… 현재 네가 나를 두고 가버린 이 거지같은 현실에, 나는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아직 내 품에 남아있던 너의 온기가… 이 차디 찬 빗물들로 인해 천천히 식어간다.

김성규 네가…

 


나에게서 씻겨져 내려가는 것 같아.

 

 

 

 

 

 

 

 

시티헌터 (City Hunter)

 

 


모두가 집에서 한가롭게 여가를 즐길 때 호원은 창선을 만나러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역시나 동우 혼자 집에 두고 오기는 뭐했던지라 창선에게 소개나 시켜줄 겸 함께 데리고 나온 호원이었다. 호원이 인사하는 소리에,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창선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리고는 그 옆에 쭈뼛쭈뼛 서있는 동우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이쪽은…? ”
“ 아, 인사해요, 형. 얘는 같은 국정원에서 일하는 제 동료. 그리고 이쪽은, 내 친한 형.”
“ 안녕하세요, 이창선입니다.”
“ 반가워요. 장동우에요.”

 


서로에게 인사를 한 창선과 동우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마냥 웃긴지, 호원이 밝게 웃으며 이제 그만 자리에 앉으라고 그들을 부추겼다. 호원의 성화에, 아직 어색한 분위기를 끌어안고 자리에 착석한 두 사람이었다. 호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먹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호원의 모습에,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리는 창선이었다.

 


“ 배고팠냐? ”
“ 어. 죽을 뻔 했다. 어차피 내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 먹어도 되는 거잖아. 그치? ”
“ 뭐, 그건 그렇지.”
“ 동우 형, 형도 얼른 먹어요. 오늘 내가 쏘는 거니까.”

 


호원의 말에, 동우가 살짝 웃으며 잘 차려진 음식을 집어 먹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술자리. 저번 국정원에 휴가를 내면서 창선에게 한 턱 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자리를 잡은 호원이었다. 창선 특유의 서글서글함과, 호원의 장난기 덕분에 동우는 어색함이 조금 가셨는지 곧잘 말도 편하게 하고 웃기도 잘 웃었다. 아, 그래서 그게 말이에요! 창선의 재치 있는 말투에, 동우는 술이 조금 들어가서인지 발그레해진 얼굴로 재미있다며 자신의 허벅지를 팡팡, 쳐대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런 동우를 보는 호원 또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한 번 술잔을 짠, 하고 부딪히는 창선과 동우의 모습에 호원이 짐짓 얼굴을 굳히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이창선.”
“ 어? ”
“ 요새 국정원에 무슨 일은 없고? ”
“ 야, 일이 없긴 개뿔. 넌 뉴스도 안 보냐? 요새 그 시티헌턴가 뭔가 하는 녀석들 때문에 국정원 전체가 비상이 걸렸…! 아….”

 


잔뜩 흥분에 말하던 창선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동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 어떤 것도 아닌 국정원에 관련된 일인지라 일반인인 동우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에 호원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해왔다.

 


“ 동우 형은 괜찮아. 그래서? 국정원에서는 어떻게 대처를 하겠다는데? ”
“ 어떻게 대처를 하긴 뭘. 어차피 그 놈들은 다시 찾아올 거잖아. 그러니까 그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지. 그 쪽지 외에는 어떠한 단서도 남기지 않은 치밀한 놈들이니까.”

 


창선을 말을 마치고는 앞에 있는 땅콩을 여러 개 집어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에 호원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고, 동우는 어째서 호원이 이렇게나 위험한 발언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불규칙 적으로 뛰어댔고, 불안했다. 그런 동우를 눈치 챈 것인지 호원이 조심스레 테이블 밑으로 동우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그에 놀란 동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호원은 그 모습이 또 웃겼던 것인지 홀로 큭큭 대며 웃기 바빴다.

 


“ 새끼, 넌 또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는데? 국정원은 비상이 걸렸는데 너 혼자 쉬어서 좋냐? 못돼 쳐 먹은 놈.”
“ 아씨, 그런 거 아니거든!? ”

 


웃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창선에게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은 것 같아, 호원은 억울해져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런 호원이 귀여운 것인지 동우가 작게 미소 지었다. 어쩔 땐 정말 자기보다 형 같고 남자다운 것이 보이면서도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 애다. 동우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소주가 채워져 있는 잔을 들어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입 안이 썼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기분 좋은 씁쓸함이랄까.

 


“ 근데 넌 왜 안마시냐? ”
“ 아, 난 운전해야 되니까.”

 


그렇게 말하는 호원은 정말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앞에 놓여져 있는 음식만 계속해서 집어 먹고 있었다. 동우는 혹, 자신 때문인가 해서 순간 뜨끔했지만 이내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매달았다. 호원이 자신을 이만큼이나 배려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흡족했다. 분명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호원은 찬바람이 쌩쌩 불었었는데. 그랬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자신을 배려해주고 따뜻하게 보듬어준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과 있는 것 같았다.

 


“ 동우 형, 그만 마셔요. 속 버려요.”
“ 아, 그럴까? ”

 


호원의 말에 금방 수긍하며, 소주잔을 내려놓는 동우였다. 창선이 그런 둘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훑었다. 대체 뭐지, 저 두 사람? 창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누군가를 저렇게도 다정하게 바라보는 호원은 처음 본다. 창선이 얼굴을 굳히며 계속해서 두 사람을 주시하자, 그의 시선을 알아 챈 호원이 얼른 동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동우 또한 헛기침을 하며 괜히 죄 없는 수저만 만지작거렸다. 순식간에 어색해져버린 분위기에, 호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 하하, 우리 마실 만큼 마시고,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이제 그만 일어날까? ”
“ 뭐? 벌써? ”
“ 어. 나 피곤하다, 야.”
“ 하, 이호원 그런 게 어디 있…”
“ 야, 시간이야 언제든지 있잖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그리고는 멍하니 앉아있는 동우를 챙겨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가는 호원이었다. 카운터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 하고는 해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호원의 모습에, 창선이 어이없다는 냥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두 사람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커보였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는데. 나쁜 새끼.

 


“ 아이고. 이호원 너한테 뭘 바라겠냐, 내가.”

 


창선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신도 곧, 그 곳을 벗어났다.

 

 

 

 


* * *

 

 

 

“ 아이고, 죽는 줄 알았네! ”
“ 나도. 심장이 다 쪼그라드는 줄 알았어.”
“ 풉, 형은 표현이 그게 뭐에요. 애 같아.”
“ 이, 이게 왜 애 같은데! ”
“ 몰라요. 그냥 귀엽네? ”

 


장난스레 씨익- 웃는 호원의 모습에, 동우가 또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부끄럼을 탔다. 그런 동우가 귀여운 호원은 옆 좌석에 앉아 있는 동우의 손을 꽈악- 잡았다. 동우도 그 감촉이 좋은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호원의 손을 마주잡았다.

 


“ 동우 형, 형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 ……… ”
“ 난 그런 동우 형이 너무 좋아요.”

 


갑작스런 호원의 고백에, 화들짝 놀란 동우가 감고 있던 눈을 크게 뜨며 호원을 바라보았다. 동우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지만 호원의 동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진심이니까 믿어달라는 것 마냥. 동우는 호원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호원도 그것을 알아챈 것인지 더욱 더 힘을 주어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바보 같이. 떨긴 왜 떨어요? 형도 나 좋아하잖아요. 아니에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오는 호원의 태도에, 동우가 할 말을 잃은 듯 어버버거렸다.

 


“ 아, 아니… 그, 나, 나는! ”
“ 싫어요? ”
“ …어? ”
“ 나, 싫어요? ”
“ 아니! 내가 널 싫어하다니 말도 안 되는…! ”
“ 그럼 됐네, 뭐.”
“ …엑? ”
“ 그럼 우리 사귀면 되는 거네. 아니에요? ”

 


아무렇지도 않게 해오는 고백이었지만, 현재 동우는 자신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호원 또한 태연한 척 했지만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이 차 안이 매우 답답하고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막힌 숨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만큼 간절하고, 갖고 싶었다. 장동우를 가지고 싶었다.

 


“ 잘해줄게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만큼. 나는 명수가 성열이한테 했던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 같은 건 못해요. 형도 제 성격 알잖아요. 나서는 거 좋아하고 되게 다혈질인 거. 그래서 나는 형 되게 많이 속상하게 할지도 몰라요. 게다가 형은 의사라 형이 직접 나를 치료해야 하니까 더 마음 아플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래도…”
“ ……… ”
“ 나는 형이 너무 좋고, 형 웃게 해줄 자신 있어요.”
“ 호원아….”
“ 그러니까 형, 나랑…”

연애, 할래요?
응. 하자, 그거. 연애.

호원의 물음에, 동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이었고, 자신이 먼저 하려고 했던 말이기도 했다. 거절당하더라도 꼭,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렇게나 원하던 말을 들었는데 어찌 망설일 수 있을까. 자신이 이 달콤한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벙쪄있는 호원의 품에 먼저 안긴 것은 동우였다. 동우가 아이처럼 호원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듬직했다. 호원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듬직한 남자였다. 자신의 품에서 꼼지락대는 동우의 모습에, 호원이 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꽈악- 안아주었다. 편안했다.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동우는 술기운에 축 늘어진 몸을 호원에게 편안히 기대었다.

나 정말 형 되게 많이 아프게 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아요?
응. 나 괜찮아. 너 다치면 내가 치료해주면 돼. 많이 아프긴 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동우의 대답에, 호원은 무언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는, 정말 나중에는, 우리가 모두 행복해지면 그 때……

 


“ 마음 편하게 사랑해요. 같이 살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 ……… ”
“ 꼭, 올 거예요. 그런 날.”

 


호원의 말에, 동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응. 그럴 거야. 네 말대로 그런 날, 꼭… 올 거야. 믿어. 너 믿고, 우리 애들 믿어. 우리 그때 가서 더 행복하게 웃자.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우리는 꼭 행복을 되찾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될 거니까. 하나도 불안하지 않아. 나쁜 마음 안 먹을 거야. 동우가 호원의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호원이 그런 동우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 * *

 

 

 


한편, 성규를 그렇게 보내버린 우현은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성규를 기다리며 홀로 부엌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잔에 채워진 예쁜 보라색의 와인이 성규를 닮은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성규를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워,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우현이었다. 붙잡아도 뿌리치고 가버린 김성규 뭐가 예쁘다고 그 아이를 생각하는 것인지. 밉다. 미워 죽겠다. 그런 마음이 듦과 동시에,

보고 싶었다.

아주 많이.

 

“ 하, 병신 같이.”

 


자신의 손을 차갑게 쳐내고 가버린 성규였지만 그 아프고 쓸쓸한 눈동자가 마음에 걸려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이 늦은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홀로 와인을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에 그렇게도 좋아하는 술이었지만, 웬일인지 지금은 이 술마저 김성규처럼 쓰고 아팠다. 쓰고 맛이 없었지만 계속해서 마셨다. 김성규를 닮았으니까. 품에 안으면 안으려고 할수록 달아나는 너를 닮았기 때문에. 그래서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파도, 차마 너를 놓을 수가 없다. 이런 내 마음을 너는 알아줄까.

너는, 알고 있어?

 

 

“ 김…성규.”

 


조용히 성규의 이름을 읊조리며 다시 한 번 잔에 와인을 채우려던 우현의 행동이 멈춘 것은 그 때였다. 오늘 만큼은 죽어도 울리지 않을 것 같던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놀란 우현이 현관으로 발걸음을 했다. 역시나 그였다. 지독히도 아픈 모습을 하고 있는 그였다. 김성규, 너였다.

 


“ 아직… 안 잤네? ”
“ 김성규.”

 


너는 뭘 잘했다고 그렇게 웃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렇게도 아프고 쓰라린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웃으면, 내가 네 가면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았어? 다른 사람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안 그래. 나는 못 속인다, 김성규.

 


“ 왜 아직 안 잤어. 피곤하지 않…”
“ 너, 다쳤어? ”

 


성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현이 다급히 성규의 왼쪽 팔을 잡아챘다. 그러자 동시에 성규가 인상을 찡그리며 아픈 신음을 내뱉었다. 숨기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흐르고 있는 피는 자신의 팔을 타고, 손바닥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성규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우현에게서 팔을 빼내었다. 그에 우현의 팔이 힘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 가벼운 부상이야. 동우 형한테 치료 받으면 괜찮을 거야.”
“ 동우 형 지금 자.”
“ 그럼 내가 간단한 응급처치라도 해놓…”
“ 김성규! ”

 


갑작스런 우현의 고함에 놀란 듯, 성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여나 잠들어 있는 이들이 깰까봐 신경이 쓰였다. 성규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우현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고 했지만, 우현의 손에 다시 잡혀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다치지 않은 성규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이끄는 우현이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우현이 성규를 침대에 앉히고는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찾아 꺼냈다. 성규는 그런 그의 행동을 멀끔히 바라보기만 했다. 우현이 스탠드 불을 켜자, 어두운 방 안에 두 사람을 밝힐 정도의 불이 비춰졌다. 우현은 아무런 말없이 성규의 자켓을 벗겨내고는 와이셔츠를 걷어 올려 다친 부위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가볍게 총알이 스친 부상이었다. 성규는 자신을 치료해주는 우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우현의 표정은 꼭, 자신이 다친 것 마냥 아파보였다. 성규가 그런 우현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 왜, 그런 표정이야? ”
“ …뭐? ”
“ 어째서… 나보다 더 아픈 표정을 하고 있어? 왜? ”

 


성규의 질문에, 우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마저 하던 것을 끝냈다. 붕대까지 꼼꼼하게 감아준 우현이 그제 서야 다 됐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며 성규를 올려다봤다. 성규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우현이 성규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김성규, 지금 네가 나한테 그런 질문을 던질 때가 아니잖아. 그러는 너는,

 


“ 왜 그렇게… 아픈 얼굴인 건데? ”
“ …내가? ”

 


우현의 질문에 성규는 전혀 몰랐다는 얼굴을 해보이며 헛웃음을 내비쳤다.

 


“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 표정이 어떻다고… 그러는 거야, 지금? ”
“ 너 지금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울어버릴 거 같거든.”

 


아닌데. 그런 거… 아닌데. 그럴 리가 없어. 성규는 누구에게 하는 지도 모를 중얼거림을 계속 반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반복하면 할수록, 점점 더 무너지는 자신을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현은 말없이 성규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이윽고, 우현의 품 안에서 성규의 어깨가 파르르, 떨려왔다.

 


“ 울어. 울고 싶으면 울어. 그게 뭐 그리 쪽팔린 거라고 눈이 아플 정도로 참아.”
“ 우…으윽….”

 


다정하고도 따뜻한 우현의 목소리를 견디지 못한 성규가 결국 눈물을 쏟아내었다. 우현의 어깨가 성규의 눈물로 흠뻑 적셔져갔지만, 그럴수록 우현은 더더욱 성규를 힘주어 안아줄 뿐이었다. 성규가 우현의 품 안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런 성규의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다. 아마도, 성열과 동우도 이런 성규의 모습은 본 적이 없을 테지. 성규는 거의 탈진할 정도로 우현의 품에서 울어댔다. 우현은 그런 성규를 말없이 다독여줄 뿐, 그 이상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서럽게 울어대던 성규가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 무…서워. 무서워 우현아.”
“ ……… ”
“ 나, 나… 너무 무서워. 하으… 무서워. 무서워 죽을 것 같아. 내가, 내가… 내가…! ”
“ ……… ”
“ 내가… 무서워. 나 자신이, 후윽… 무서워 죽을 것 같아. 지쳤어…. 이젠 그 공포에 떠는 것도, 너무 지…쳤어. 나 이제 어떡해? 나, 나…! 어떡하면 좋아? ”

 


처음으로 내비친 성규의 진심이었다. 우현은 그저 조용히 성규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 성규야. 라는 말만 반복했다. 늘 강한 척 하는 성규였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여리고 약한 사람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 그와 동시에… 너무나도 가엾은 사람. 성규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얼굴은 너무 핼쑥하고 창백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사람마냥. 우현이 얼른 성규를 진정시키고 재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품 안에서 떼어내려던 그 순간, 성규의 입이 열렸다.

 


“ 아름다웠어 우리 엄마는.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웠어. 예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됐을 거야. 그냥… 나에게는 신 같은 존재였어, 우리 엄마는.”

 


그의 이야기. 너무나도 듣고 싶었고, 궁금했지만 이 얘기를 함으로써 아플 그를 생각해 굳이 캐묻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 드디어 스스로 입을 열었다. 성규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고 있었다.

 


“ 우리 가족은… 너무 행복했어. 부족한 게 없었어. 재력과 권력. 모두를 가지고 있었지.”
“ …성규야.”
“ 하지만… 하지만, 내 지옥이 열린 건… 그 사람 때문이었어. ”

 


성규의 몸이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렸다. 우현은 자신이 다가가 그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겁이 나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안아버리면, 저 가녀린 몸을 안아버리면… 금방이라도 가루로 변해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만큼 성규는 너무 위태롭고, 눈물겨웠다.

 


“ 내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더럽고, 치욕적인 그 이름.”

아버지.


성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우현이라면, 남우현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될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성규가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 나의 지옥을 열어준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어. 너무나도 상냥하고 인자하셨던 내 아버지. 하지만… 너무나 잔인하기도 했던, 그 사람.”

아버지.


성규의 아픈 이야기가, 우현에게 그대로 날아와 상처를 입혔다. 너무 아프다. 이 이야기는, 이미 시작도 전부터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의 아픔이 모든 산소를 갉아먹는 것 마냥. 이것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그것이 바로, 성규가 이제껏 짊어지고 살아왔던,

지옥이었다.

 

 

 

 

 

 


시티헌터 (City Hunter)

 

 

 

‘ 아가야, 미안하다. 아가. 내 아가….’

 


당장 일어나세요. 그 새까만 눈동자로 날 똑바로 바라보세요. 18년 전처럼 날 혐오스럽게 바라보시라고요. 18년 전에는 그랬잖아요. 엄마와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서 내쫓고, 우리 엄마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지금 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계세요? 왜 그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건데요? 당신이 자초했잖아. 이 지랄 같은 상황! 당신이… 만들었잖아.

내 인생. 당신이, 망쳤잖아.

이제 그만 끝내버려요. 당신을 죽이기 위해 바친 내 10년. 당신 목숨으로 보상 받을 거야. 우리 이제 그만… 썩은 내가 진동하는 이 관계.

 

 

죽여요.

 

 

 

 


* * *

 

 

 


“ 아빠! ”
“ 아이고, 우리 멋쟁이 아드님. 아빠 없는 동안 잘 놀았어? 오늘은 뭐 하고 놀았나? ”
“ 친구들이랑 축구하고, 엄마한테 피아노도 배웠어! 엄마 피아노 대따대따 잘 친다? ”
“ 당연하지- 내가 네 엄마 피아노 치는 거 보고 반해서 쫓아 다녔는걸? ”
“ 우와, 진짜? ”
“ 그럼! 엄마 피아노 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 하, 당신도 참.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이제 겨우 9살이 된 자그마한 꼬마아이를 안고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중년의 한 남성. 그리고 그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 아름다운 한 여성. 그 세 사람은 누가 봐도 정말 화목한 가족이었다. 성규의 아버지 상철은 자신의 아내를 끔찍히도 아끼고 그 아들은 더더욱 사랑하는 1등 남편, 1등 아빠였다. 성규의 어머니 미연 또한 결혼해서 아홉 살 난 아들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어리고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씨까지 고운 여자였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성규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밝게 자랐다. 성규의 아버지 직업이 정치인이었던 탓에, 모자란 것 없이 풍족하게 자란 성규는 이 세상에는 행복만 가득할 줄 알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 끔찍하게 변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리도 다정했던 성규의 아버지가 변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늘 가족이 보고 싶어 하던 일을 빨리 끝내버리고는 집으로 일찍 귀가하던 상철의 귀가가 차츰차츰 늦어지기 시작한 것은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 마악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성규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 잠에 들기 일쑤였고, 그의 아내 또한 점점 변하는 남편을 느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다정했던 사람이, 너무 냉정하고 무책임하게 변해버렸다.

 


“ 당신, 요새 왜 이렇게 늦어요? ”
“ 말했잖아. 일이 늦게 끝났다고.”
“ 내일이 우리 성규 생일인 건 알아요? 당신 요새… 예전 같지 않아요.”
“ 성규 생일은 알아. 그리고 예전 같지 않다니? 나는 뭐 매일 당신하고 성규에게 웃기만 하는 사람이어야 하나? 내가 삐에로야? 광대냐고! ”
“ 여보….”
“ 지긋지긋하다, 이 집 구석. 답답해. 스트레스 받는다고! ”
상철은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자켓을 걸치고 밖으로 박차고 나갔다. 그에 미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침대에 털썩- 힘없이 주저앉았다. 쓰디 쓴 눈물이 시리고 아픈 눈을 비집고 나왔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리도 차갑게 변해버린 것일까. 미연이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릴 때,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어린 성규가 베개를 꼬옥 안고 들어왔다.

 


“ 엄마아…. 방금 누구 나갔어? 아빠 아직 안 온 거야…? ”

 


미연은 성규를 보자마자, 급하게 눈물을 닦아내며 아프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성규야. 아빠가 일이 바쁘셔서 늦게 오시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성규, 이제 그만 꿈나라로 가자. 미연의 말에 성규는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차피 상철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 자신의 침대에서 재워도 되겠다는 생각에, 미연 또한 성규의 옆에 누워 조그마한 자신의 아들을 토닥이며 재우려고 애를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미연은 또 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쏟아내었다. 내 아이… 우리 불쌍한 성규…. 어떡하니, 성규야. 엄마 어떻게 해야 돼? 응? 아가야…. 엄마는 답을 모르겠어. 그이가 없으면 나는 정말 안 되는데…. 그 사람이 없으면,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어. 성규야… 엄마는, 네 아빠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려. 그래서 엄마 지금, 너무 아프다.

그 사람에게서 버려질까봐

너무 무섭다, 아들.

 

 

 

 

 

* * *

 

 

 

 

‘ 이혼해. 얼른 짐 싸서 나가줬으면 좋겠어.’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한없이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그에게는 다른 여자가 생겨버렸고, 그로 인해 그 화목하고 행복했던 가정은 순식간에 파탄이 나버렸다. 위자료를 받긴 했지만 집을 구하고, 성규까지 뒷바라지하기엔 그것은 너무나도 적은 돈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작은 방 한 칸을 구해 생활하게 된 성규와 미연이었다. 그 큰 집에서 생활을 하다가 이런 자그마한 방을 쓰려니 성규와 미연 둘 다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미연은 씩씩했다. 자신의 예쁜 아들을 보며, 살아야겠다고 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미연의 희망을 싹둑, 잘라버린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성규야 왔… 김성규! 너, 너 얼굴이 왜 그래!? ”
“ 헤헤, 바보 같이 넘어져버렸어. 나 되게 멍청하다. 그치, 엄마? ”
“ 누구야! 누가 내 아들 얼굴을 이렇게…! 이게 넘어진 상처야? 엄마 속일 생각 하지 마. 누구한테 맞은 상처잖아, 이거! ”

 


화를 내며 소리치는 미연의 모습에, 성규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숙인 성규에게서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애들이 놀려. 엄마랑 내가 아빠한테서 버림 받았다고, 이제 너는 이 학교에 다닐 자격도 없다고…. 선생님도, 애들도 모두 나를 싫어해, 엄마….”

 


자신의 옷깃을 꽈악- 붙잡고 우는 성규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미연은 피가 베여 나올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자신마저 울고 약해지면… 도대체 이 아이는 어쩌란 말인가. 미연은 성규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등을 쓸어주었다. 울지 마. 울지 마라, 아가. 너는 내가 지켜줄 거야. 엄마가 지켜줄게. 우리 성규 대신 엄마가 울고 아파할게. 그러니 성규 너는, 울면 안 돼. 아파하는 것도 안 돼. 강해져야 해.

내 아들은, 강해져야 돼.

절대로, 약해져서는 안 돼.

 

 

 

 


* * *

 

 

 

미연이 학교에 전화를 걸어 어찌 된 일이냐고 묻자, 성규의 담임은 꼭 만나 뵈어서 드릴 말씀이 있다며 학교에서 보기를 원했다. 미연은 울다 지쳐 잠든 성규를 쓸쓸한 눈빛으로 한 번 바라보고는 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그녀가 교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미연은 숨고만 싶었다. 정치인의 아내로 살았던 것이, 이리도 끔찍한 일이었던가.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는 성규의 담임 앞으로 가 앉는 미연이었다. 성규의 담임은 한참동안이나 말을 아끼더니 이내 결심했다는 듯이 미연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어머님, 성규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켜보는 건… 어떨까요.”
“ …네? 그게 대체 무슨.”
“ 다른 학부모님들의 항의가 좀 심해서요.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이 학교는 거의 정치인의 자식들이나 정말 상류층의 아이들만 다니는 곳인데, 성규가 이곳에서 계속 다니는 건 성규도 힘들고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
“ 도대체 좋지 않을 거란 게 뭔가요. 우리 성규 지금까지 이 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사교성이 좋아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불과 몇 달 전에 전화로 칭찬해주셨던 분이 선생님 아니신가요? ”
“ 그건….”

 


눈물이 나왔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들에게 우리 성규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돼. 그 어린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주먹을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화가 났다. 그리고 가슴이 미칠 듯 아려왔다.

김상철. 그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뭘 잘못했어요. 당신한테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우리가,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돼! 성규의 담임은 눈물을 흘리는 미연의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한 것 같았다. 자신의 손을 붙잡는 담임의 손을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내뱉는 미연이었다.

 


“ 댁들이 원하시는 대로 아이는 일반학교로 전학시키도록 하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빠져나온 미연이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던 자신에게 다가와 많은 사랑을 주었던 남자 김상철. 그를 믿고 스물셋이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스물다섯 살에 성규를 낳았다. 자신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셋이었다. 그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남자와 성규를 지켜줄 수 있는 힘. 엄마로써의 자존심을 잃었다. 그리고…

한 여자로써의 자존심도,
무너졌다.

미연이 가방을 뒤적거려 지갑을 꺼냈다. 그 지갑을 여니, 활짝 웃고 있는 자신의 아들 성규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엔 그런 성규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상철도 보였다. 미연은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렇게나 행복했었다. 우리 이렇게나 행복했었네, 성규야?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들 자신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갔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팠다. 아파 죽겠다. 상철씨, 나 너무 아파요. 당신이 떠난 이 자리가 이렇게나 클 줄 몰랐어. 온 세상이 깜깜해요. 당신 없이도 우리 성규, 내가 보란 듯이 멋지게 키울 거라고… 그렇게 희망 잃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자신이 없다. 지금 나 하나 지탱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서… 성규까지 보듬어줄 자신이 없어요…. 나 어떡해요. 어떡해, 상철씨….

이 무섭고 어두운 곳에서,
나 좀 구해줘요.

 

 

 

 


* * *

 

 

 


시간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엄마가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는 것은 아닐지 불안함에 떨던 그 시간은 단거리 달리기를 하듯 금방 지나갔다. 벌써 8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나는 열일곱 살이 되어 있었다. 한없이 아프기만 하던 그 시간들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서서히 가슴 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김 상철. 그 원망스런 이름 석 자를 제외 하고는. 나의 어머니는 8년 전처럼 여전히 아름다우셨고, 마음씨 또한 고왔다. 지난 8년을 나를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사신 어머니에게 보답하는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나는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꼭, 보답해드리고 싶었다. 그 아픔을… 치유해드리고 싶었다.

그 끔직한 8년을, 어머니와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다른 이들에게 독한 년, 놈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살기 위해,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 나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10년만 더 기다려 달라고. 10년 뒤에 보란 듯이 성공해서 꼭 보답하겠노라고. 그럴 때 마다 어머니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주시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8년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일 거다. 한없이 밝고 어렸던 김성규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열일곱의 김성규는 오직 자신의 엄마 앞에서만 말이 많아지고 웃는 소년이었다. 오직 미연에게만.

 


“ 야, 성규야. 오늘 시간 되냐? 놀러가자.”
“ 나 일찍 가봐야 돼. 니들끼리 놀아라.”

 


8월 17일. 그 날은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학교 마치고 바로 오라는 어머니의 말을 잊지 않은 나는 엊그제 미리 사두었던 생일선물과, 방금 베이커리에서 계산한 눈처럼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까지 가는 이 길이 평소보다 더 짧게 느껴졌다. 이제 이 가파른 언덕만 오르면 집이 보인다. 작고 초라하지만 나에겐 그 무엇보다 따뜻하고 행복한 우리 집. 엄마, 나는 엄마만 있으면 돼. 크고 으리으리한 집, 나를 학교까지 바래다 줄 차와 운전기사. 그런 거 이제 필요 없어. 엄마만. 엄마만 그렇게 웃어주면, 나는 정말 그걸로 돼. 그것으로 행복해, 나는.

아직 절반밖에 올라오지 않았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때, 이 동네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검은색의 고급세단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차 뒷좌석에 타고 있는 중년의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그 차는 나를 지나쳐 언덕을 내려 가버렸으니까. 빠르게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리고 이미 지나가 버린 그 차를 뒤늦게 눈으로 쫓았다. 그 차는 이미 언덕을 지나 커브길을 돌아 사라지고 말았다.

 


“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이내 흑갈색의 생머리를 탈탈, 털며 내 착각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멈춰있던 발을 움직여 다시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벼웠던 발걸음이 신발에 돌이라도 묶은 것 마냥 무거워졌다. 그리고 드는 꺼림칙한 이 느낌. 언덕을 다 올라왔다. 나의 집이 보였다. 근데 왜일까. 어째서… 저 곳으로 가기가 싫은 것일까. 아닐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오늘은 어머니의 생일이잖아. 그렇게 나는,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을 애써 들어 올려 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묻고 싶었다.

어째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야 할 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것이냐고.

어쨰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나의 생명을,
앗아가신 것이냐고.


신은 정말, 불공평 했다.

 

 

 

 

 

 

시티헌터 (City Hunter)

 

 

 

불길한 예감을 안고 집 안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맛있는 냄새가 폴폴 풍겨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집 안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커튼까지 모두 쳐놓은 상태로. 쿵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어댔다.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나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어 엄마를 불렀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아무 것도 없었고, 그에 더 불안해진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누르자 익숙한 컬러링이 들려왔다. 하지만 절망적이게도, 그 벨소리는 엄마의 어두운 방 쪽에서 들려왔다. 핸드폰이 툭, 하고 떨어졌다. 핸드폰을 주우려 몸을 숙이려던 그 순간, 화장실 쪽에서 미세한 물소리와 함께 노란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 엄…마? ”

 


화장실로 향하는 도중에도 엄마가 제발 그곳에 없기를, 있더라도 멀쩡한 모습으로 환히 웃고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지만, 신은… 나의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살짝 열려있는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그러자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름한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문은 열었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이곳에 있다는 걸. 내가 좋아했던 우리 엄마의 편안한 향기, 그리고… 그것과 함께 섞여 나오는 비릿한 피의 냄새까지. 모든 게 두려웠다. 나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확인하기가 무서웠다. 싫어. 이런 거 싫어, 엄마. 싫어. 싫다고!

 


“ 성,규…. 내, 아가… ”

 


엄마의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위태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있었다.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내 눈앞에서 벌어진 그 끔찍한 장면에,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눈에 한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아니잖아, 엄마. 이거… 아니잖아. 다 꿈이잖아. 오늘 우리 엄마 생일인데, 내 생일보다도 더 즐거워야 하는 우리 엄마 생일인데. 어째서, 어째서…!

 


“ 아, 아아…. ”
“ 성,규야….”

 


어째서. 어째서야, 엄마. 왜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어? 우리 잘 살고 있었잖아. 행복하게, 웃으면서 잘 살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이 기쁜 날, 이런 끔찍한 선택을 해야만 했어? 응?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왜…!

내가 본 장면은 너무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작년에 선물해준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따뜻한 물이 담겨져 있는 욕조에 들어가 있는 채였다. 그리고 그 물은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바닥엔 작은 핏방울과 함께 커터칼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무서웠다. 저건 우리 엄마가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안 그래도 하얗던 엄마의 피부가 마네킹 마냥 더 하얘보였고, 눈 밑과 입술의 색깔이 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엄마. 이건 내가 원했던 게 아냐. 그 누구도, 나를 이렇게 슬프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엄마가 왜 그런 모습으로 있어. 그렇게 죽어가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김상철 그 사람인데! 엄마가 대체 왜!

 


“ 성규야….”
“ 아니야. 거짓말. 자, 장난치지 마…. 나 이런 거에 안속아. 나, 이, 이런 장난 안 좋아해.”
“ 미안, 해…. 흐윽… 엄마가, 너무, 너무 미안해 아들….”
“ 도대체 왜. 왜! ”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렇게 내가 우는 모습을, 엄마는 너무나도 아프게 바라봤다. 점점 힘이 빠지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안고, 아픔에 몸부림치는 나의 모습을 자신의 눈에 아프게 담아내셨다. 엄마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번복했다. 그리고 그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사랑한다고. 우리 아들, 엄마가 너무 사랑한다고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끊겼다. 거짓말처럼 모든 소리가 차단이 되었다. 차디 찬 몸뚱아리와는 달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내던 그 애달픈 목소리도, 거칠게 몰아쉬던 그 숨소리도. 모든 게 멈췄다. 내 앞에서, 멈췄다. 이 모든 게 내 앞에서 사라졌다.

 


“ 으, 으으… 아아아악!!!  ”

 


누가 나의 가슴을 칼로 갈기갈기 찢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딱, 그만큼 아팠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딱 그만큼 아팠고, 슬펐다. 내 삶의 휴식처, 낙원이 사라져버렸다. 나의 천국이 사라져 버린 나의 삶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나에겐 지옥밖에 남지 않았다.

모든 걸 잃어버렸고,
모든 걸 앗아가셨다.

내게 남은 건, 지독한 외로움과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복수심.

그 두 가지가 전부였다.

 

 

 

 

 


* * *

 

 

 


장례식은 정말 조용하게 치러졌다. 엄마에겐 가족이 없었다. 부모님은 어렸을 적 모두 돌아가셨다고 들었고, 형제 또한 없었다. 평범한 집에서 자란 아주 평범한 외동딸이었다. 가족이 없었으니 장례식에 찾아오는 친척 또한 적었으며, 나는 그 친척들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모르는 얼굴이었다. 정말 고요했다. 우리 엄마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이는 나를 제외하고는 한 명도.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의무적으로 장례식으로 찾아와 조문을 하고 밥을 먹고. 그게 다였다. 우리 엄마 되게 외롭겠다. 걱정하지 마, 엄마. 내가 울어주잖아. 차마 겉으로 티내며 울지는 못해도… 내가 엄마를 위해, 마음으로 울부짖어주잖아. 그러니까 우리 엄마 외롭다고 울면 안 된다? 아들이 엄마 곁 지켜주잖아. 엄마 곁에서 울어주잖아.

 


“ 네가 김성규니? ”

 


늦은 시각이라 더 이상은 조문객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들려오는 하이톤의 여자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려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마주봤다. 그녀를 보자마자 저절로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이 사람은… 그래. 그 날, 나에게 불길한 느낌을 심어주었던 여자였다. 고급 승용차를 차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갔던 사람. 기억났다. 누구인지. 어째서 내가, 이 여자를 보고 그 오르막길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는지. 김상철의 새부인. 늘 그 사람의 옆에 꼭 붙어 있었던 젊고 예쁜 여비서가, 이제는 김상철의 어엿한 부인이 되어 있었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꽈악- 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여긴 무슨 일로…!

 


“ 결국엔, 죽어버렸구나? ”
“ ……… ”
“ 정말 멍청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네. 정말 내 말 때문에 죽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
“ ……!! ”

 


말…? 말이라니. 대체 무슨…! 궁금해 하는 내 모습을 알아 챈 것인지 여자가 빙그레,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궁금해? 내가 그 날, 너희 집에 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너희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서워서.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 너무 두려워,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더 무섭게 웃으며 내 귀에 그 새빨간 입술을 가까이 갖다 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 죽어버려. 너 같은 건 죽어버려. 너는 이제 예전의 풍족한 정치인의 아내도, 아름다운 여성도 아니잖아? 너는 별 볼 것 없는 초라한 여성일 뿐이야. 그러니까, ”

죽어버려
죽어버려




려.

여자는 말을 마치고 벙 져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다. 이런… 딱해서 어떡해. 완전 겁먹어 버렸잖아? 그녀는 나를 조롱하듯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 여자를 때릴 힘도, 노려볼 힘도 없었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결국엔 저 여자가 원인이었다. 나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우리 엄마를 다시금 괴롭게 만든 건 당신이었다. 그 아픈 과거의 기억을 또 다시 끄집어 낸 게 당신이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우리 엄마를,

한낱 초라한 여성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다.

여자는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나를 비웃더니 이내 유유히 장례식을 빠져나갔다. 억울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가엾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내 자신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도 결국 김상철 그 사람은 우리 엄마의 장례식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그 여자가 가지 말라고 언질을 했던, 자기 의지로 안 왔던, 그 사람은 철저하게 내 마음에서 배제되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그것마저, 모두 버려버리게 만들었다.

……복수. 그것만이 날 일으켜 세웠다.


그랬던 나에게,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그 남자는 잘 빠진 양복차림을 하고, 엄마의 장례식을 찾았다. 아홉 살 그 시절의 기억에 확실히 각인되어 있는 사람.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어린 마음에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그 사람.

 


-

행복했던 아홉 살 무렵, 그 사람은 아빠가 집으로 데리고 온 첫 손님이기도 했다. 나는 무언가 심각해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결국엔 모든 얘기를 마치고 2층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자그마한 손으로 꽈악- 붙잡았었다. 나는 그 남자가 2층으로 올라가기 전 분명 보았다. 그의 자켓 안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 검은색의 총을.


‘ 아저씨. 아저씨는 뭐하시는 분이에요? ’
‘ …어? ’
‘ 저, 봤어요. 아저씨 그 겉옷 안에 있는 멋진 총.’


나의 말에, 당신은 분명 크게 당황했었다. 하지만 당신은 곧 나를 어린 아홉 살의 순진한 꼬맹이일 뿐이라고 단정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해왔었다.


‘ 나쁜 사람을… 처리하는 일이랄까? ’
‘ 우와! 그럼 경찰, 형사 그런 거예요? ’
‘ 뭐… 비슷한 거라고 해두자.’


잡아야했다. 방금 내게 고개를 작게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간 그 남자를, 잡아야했다. 나는 그대로 장례식장을 박차고 나와 미친 듯이 달렸다. 3일 내내 먹은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금방 숨이 차오르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나는 달려야만 했다. 그 남자를 놓치는 것과 동시에, 내 인생도 함께 무너지는 거라 생각했다. 그 습하고 답답한 지하의 장례식장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 올라 밖으로 나오자, 거짓말처럼 숨이 트였고,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자신의 차에 오르려 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죽기 살기로 뛰어 명품시계가 채워져 있는 그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남자는 장례식장에 있어야 할 내가 자신을 따라 나온 것에 놀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남자에게 먼저 말을 꺼낸 건, 바로 나였다.

 


“ 아저씨, 나쁜 사람은… 사라져야 하는 게 맞는 거죠?”
“ …뭐? ”
“ 그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거잖아요. 그렇죠?”
“ 얘야, 너 무슨… ”
“ 저도 하게 해주세요.”
“ ……… ”
“ 저도, 할 수 있어요. 사람… ”
.
.
.
.
.
.
.


죽이는 거.

 

내 말에 놀란 듯, 남자의 미간이 곱지 않게 찌푸려졌다. 순진했던 아홉 살의 나는, 그저 그를 멋진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동경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이미 알 거 다 아는 열일곱 살의 김성규였고, 복수심에 허덕이는 그런 남자일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남자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남자의 정장바지를 붙들고 간절하게 외쳤다.

 


“ 하게 해주세요. 저도 할 수 있어요. 꼭, 해야만 해요…! ”
“ …성규야.”
“ 아저씨. 아저씨마저 절 버리시면, 전 정말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저한테 이젠, 아무 것도 없다고요.”

…복수심 외엔, 그 아무 것도, 없어요.

간절하게 외치는 나의 진심이 통했던 걸까, 남자는 뜨거운 햇볕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쓰러지겠다며 걱정스러운 어투로 일단 차에 타라고 타일렀다. 나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들어 강렬하게 빛을 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나왔다. 그래. 그건 절대 무서워서도 아니고, 슬퍼서도 아니었다. 그저 눈이 부셔서, 강렬한 햇빛이 내 눈을 아프게 해서 그런 것뿐이었다.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앞날이 보장되어 있던 전교 1등의 김성규도,
오직 엄마 앞에서만 웃던 상처 가득한 김성규도,
열일곱. 딱 그 나이답게 꿈 많던 소년도.
그리고, 마냥 행복했던 아홉 살의 그 꼬마아이도.
모두가 그냥 꿈일 뿐이었다.
애초부터 김성규에게는, 행복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열일곱의 김성규는 그렇게,


죽어버렸다.

 

 

 


성규과거 Fin.

 

 

 

 

 

* * *

 

 

 

 

“ 끝. 나 스스로를 가둬버린 김성규의 이야기는 여기서 디-엔드.”

 


듣지 말 걸. 차라리 너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듣지 말 걸 그랬나보다. 김성규 너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우현은 아픈 눈물을 흘리며 가녀린 성규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성규에겐 그것마저 독이 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우현은 그저 쓰디 쓴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그와 함께 울어주었다. 자신의 품에 안긴 성규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하기 전에 서럽게 엉엉 울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너무나도 침착했다. 오히려 그것이 더 불안할 만큼.

 


“ 성규야.”
“ 우현아.”
“ 응, 성규야.”
“ 그 사람도 그 사람이지만, 나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아무도, 그 누구도 나를 용서해주지 않을 거고, 나를 증오할 거야.”
“ 성규야.”
“ 무서워. 나 무서워, 우현아. 춥다. 너무 춥다. 추워 죽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한 성규는, 그대로 우현의 품에 숨어버렸다. 그에 품에 숨고 나서도 바르르 떨리는 성규의 몸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너무 안쓰러워 숨이 막힐 정도로 성규를 꽈악- 안아주는 우현이었다. 무서워하지 마. 나 여기 있잖아, 성규야. 다른 그 무엇도 상상하지 말고, 보지도 마. 나 여기 있어. 남우현 여기 있어, 나만 보면 돼, 성규야. 우현의 따스한 품과 다정한 음성에, 성규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이윽고, 성규가 우현의 품에서 살짝 빠져 나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에 온전히 김성규 자기 자신이 담겨 있었다. 남우현 너의 눈에는, 그 누구도 아닌, 나 김성규만 담겨져 있어.

우현이 다시 성규의 이름을 부르려던 그 찰나, 성규가 그대로 우현의 입술에 자신의 뜨거운 입술을 갖다 대었다. 당황한 우현이 성규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아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대신 아파주고 싶을 만큼, 그가 너무 작고 여려보였다. 우현은 파르르 떨려오는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감고는 그의 입술에 좀 더 깊게 파고들었다. 성규가 우현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우현이 성규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가며 물고 핥자, 성규가 작은 신음소릴 내며 입을 열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우현이 그대로 뜨거운 혀를 집어넣어 그의 입 안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악몽으로 괴로워하는 나에게 성규 너는 그런 말을 한 적 있었어. 잊으라는 것도 아니고, 지우라는 것도 아니라고. 그저 잠시만, 아주 잠시만 그 아픔을 묻어두면 되는 거라고. 성규야, 너는 그 작고 상처 가득한 가슴에 날 묻어줘. 복수심으로만 가득 차있는 너의 마음의 자리를 나에게도 조금만 내어줘. 너는 그 아픔을 묻지 말고, 나를 묻어줘. 다시는 꺼내어 볼 아픔조차 없도록. 두 번 다시는 그 끔찍한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도록.

남우현을, 김성규에게 심어줘.

이미 황무지가 되어버린 너의 가슴 속에서 웃음, 기쁨, 행복만 자랄 수 있게. 평생 너의 것이 될 수 있게,

나를 가져, 성규야.


영원히.

 

 

Love is the big booming beat which covers up the noise of hate. 
사랑은 증오의 소음을 덮어버리는 쿵쾅대는 큰 북소리다. 

- 마가릿 조 -

 

 

 

 

 

 


시티헌터 1, 2부 End

 

 

 

 

 

 

 

 

 

 

 

 

 

 

 

 

 

 

 

예전에 글잡에서 3부를 연재했었는데 1부 2부를 보지 못하셨다고 하는 분들이 꽤나 많이 계셔서 이렇게 조심스럽게.. 올려봅니다.

1, 2부는 공유 가능한 텍파이며, 3부는 작년 연재가 끊긴 곳부터 다시 연재 시작될 예정입니다.

우리 그럼 3부 25편에서 보아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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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아, 작가님 지금 처음봤는데, 흡입력이 진짜..후덜덜하네요. 얼른 3부보러가야겠어요
10년 전
독자2
와ㄷㄷ... 1 2부를 합쳐놓아서 그런지 분량이 어마어마하네요 그래서 감상평을 무어라 적어야할지.. 너무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그런데 텍본은 초록창에서 구할 수 있나요? 소장하고 싶어요ㅠ.ㅠ
10년 전
독자3
헐...1,2부 합쳐놓으니까 진짜 분량이 어마어마...어서 3부보러가야겠어요..어휴..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4
계속 기다렸는데 드디어 나왔군요!!!!!
완전 재밌어요
3부도 빨리 다 봐야지ㅋㅋㅋ완결되면 꼭 소장하......ㅎㅎㅎㅎ

10년 전
독자5
8시부터 10시까지 정주행 완료!!
10년 전
독자6
설화에요!!!1,2부는 읽었지만 재밌는건 또읽어야죠♥♥
선댓글!!!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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