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겨울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두꺼운 패딩에 몸을 숨겨도 얼음판에 살갗을 문대는 기분이랄까. 어그부츠를 신어도 신경을 마비시키는 감각을 아는가. 뭔 놈의 추위가 방한을 해도 당당히 뚫고 들어오냔 말이다. 지금도 콧물이 난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까닭에 휴지를 말아 코를 막았다. 말을 할 때마다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 웅엥웅. 어쨌거나 숨은 쉴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2월의 어느 잔잔한 오후였다. 정시 지원까지 마친 무직자는 방전된 로봇이 되어 흐느적거리는 것이 일상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미친 듯한 집중력을 뽐내고 있었다. 지저스, 온 우주의 기운이여 내게 오라. 거실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으로 향하는 세 사람의 시선. 그중 흥분에 이기지 못한 승관의 두 광대가 돋보이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 “야, 핸드폰 충전 백 퍼 맞아?”
- “도대체 몇 번을 물어봐?”
- “지원서 쓸 때 번호 제대로 적은 거 맞고? 멍청하게 옛날 거 쓴 거 아니지?”
- “네 얘기 좀 하지 마.”
허공에 숫자를 그리며 동그란 눈으로 추궁하듯 묻는 승관의 목소리는 예민한 신경을 박박 긁기에 충분했다. 경건한 두 손으로 세상의 기를 담고 싶은 친구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 거니. 시간이 갈수록 방방 뛰는 녀석 때문에 뿔이 솟는다. 님아, 지금 석가모니 자세 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 “자꾸 옆에서 쫑알대면 쫓아낸다.”
- “걱정해줘도 난리야 그지야.”
- “……그지? 야, 빨리 와 봐.”
- “응, 안 들림.”
승관은 한달음에 주방으로 달려가 피크닉 바구니로 가드를 올렸다. 공중에서 팔을 휘두르며 불을 뿜는 사자를 본 것이다. 바구니를 방패 삼아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녀석은 덤벼보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요상한 스텝까지 밟으며 촐랑거린다. 어리석은 자여, 힘이 들어가는 내 주먹을 보아라. 오랫동안 승관의 등짝을 스매싱한 역사를 보건대, 오늘은 기필코 손자국을 내줘야 하는 날이었다.
- “좋은 말 할 때 그냥 와.”
- “쫄리냐? 간도 어찌나 콩알이신지.”
- “콩알 탄 연속으로 백 대 맞고 울어 봤어?”
- “올해도 멀쩡히 돌아온 부승관 님이 김여주 님께 하트를 쏩니다.”
못생긴 김여주는 너 닮은 하트나 먹어라 하하하. 저런 미친 소리를 해대며 훌라 춤을 추는 상대방을 보는 순간, 겨우 유지하던 침착함은 결국 봉인 해제. 그러나 최단 스퍼트로 달려나가는 날 붙잡는 손이 있었다. 억지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붙임을 당했지. 모바일 게임에 빠져서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말야.
- “이지훈, 나 말리지 마.”
- “그만해. 초딩이야 뭐야.”
- “쟤랑 붙어야 속이 풀릴 것 같다고! 알지, 나 성격 급한 거!”
- “난 네가 조용히 앉아 있어야 속이 풀려.”
가만히 좀…… 아, 연속 두 번. 혹시 게임 캐릭터에게 말을 거는 건지 혼란스러운 이 시점, 아예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 허벅지에 다리까지 얹어 몸을 옭아맸다. 더불어 저만치 멀어진 승관을 향한 부드러운 손짓. 이리 와서 앉아 봐. 그는 자세를 고쳐 양옆 나와 승관의 어깨를 감싸고는 조곤조곤 말을 뱉었다. 흡사 참된 선생님의 말투였다.
- “너희 몇 살이야.”
- “미운 네 살.”
- “진짜 미움 한번 당해볼래요 당신?”
- “드디어 스무 살이 됐습니다.”
- “그래서. 우리 여기 왜 모였는데.”
같이 말해. 오늘 무슨 날인지.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으르렁거림도 잠시, 승관은 이마를 긁적거리다 곧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오늘은 말이지, 바로 A대 마지막 추합이…….
- “김여주 강제 재수행 KTX 타는 날.”
- “야, 진짜 뜨자.”
- “다음역은 재수, 재수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넥스트 스탑 이즈 재에- 쑤, 재에- 쑤.”
- “진짜 연을 끊어버릴까.”
- “이지훈이랑 나를 봐라. 최초 합이 얼마나 쉬운 줄 아냐?”
- “웃기고 있네. 발표 날 청심환 먹은 주제에.”
- “지는 안 먹은 것처럼 말하네. 누가 보면 그날 네 꺼 발표하는 줄.”
예상하다시피 지훈과 승관은 수시 1차 합격과 더불어 면접과 구술고사를 끝으로 당당히 A대에 입성했다. 세상 누구보다 평화적이고 안정된 삶을 사는 그들에게 나오는 여유란. 눈을 내리깔며 업신여기는 승관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찰나, 지훈은 녀석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인상을 구겼다. 눈치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승관은 곧 뾰로통한 표정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김여주, 사과한다.”
- “풋사과 안 받아.”
- “넌 서울행만 탈 거잖냐. 그것도 A대 특급 행으로.”
- “부승관 인격체 대단하다. 도대체 몇 개야?”
- “마흔 서른 오백 개 정도.”
개미만 한 목소리 뒤로 콧잔등을 찡긋거리던 승관은 어느새 킬킬거리며 자신의 센스를 칭찬했다. 나 참, 이건 또 무슨 탁월한 감각이래?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니까? 소파에 거의 녹다시피 한 승관이 문득 내 얼굴을 흘긴다. 이것은 불신의 눈빛인가, 역관광의 눈빛인가. 그 무엇이든 질 수 없어 상대방과 같이 눈을 구기면, 가운데에 있던 지훈이 슬쩍 내 앞을 가로막아 시야를 방해했다. 뭘 봐, 나한테 얘기해. 덤덤한 말투와는 달리 내 손을 그러쥐고 승관을 경계한다. 이런 것도 질투라면 백만 번이고 받고 싶은데 말이지.
- “이쥰, 내가 그동안 말은 안 했는데 김여주 가까이서 보면 진. 짜. 못생겼다?”
- “또 시작이네.”
- “매일 봐도 쟤는 상상 그 이상을 뛰어넘어.”
- “김여주 지금 바구니 들었어.”
- “너 지금 말 돌렸다? 부정할 수 없다 이거지?”
-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기도 쉽지 않은데.”
내 뉴런 다발을 툭툭 끊어 놓는 어택에 이성을 잃을 뻔했으나, 이지훈의 디펜스 덕분에 기적적으로 정신줄을 잡는다. 그래, 침착하자. 여긴 지훈이도 있잖아.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이니까 참을 수 있어. 거친 들숨 날숨 속 평온함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일단 바구니를 내려놓고 숨을 쉬자. 그래,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 “지훈이 때문에 운 좋은 줄 알아.”
- “잘 보이고 싶은 건 아니고?”
- “참나, 누가?”
- “김여주 너요.”
- “진심 해보자는 거지.”
- “지금 알아차리다니. 역시.”
보이지 않는 불꽃을 손으로 휘휘 꺼트리는 지훈이 옅게 한숨을 쉰다. 몇 시야 지금. 그의 말에 무심코 시계를 쳐다본 승관이 으아아-, 울부짖으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A대에서 2차가 오긴 해? 김여주 앞에서 끊기는 거 아니냐? 백팔 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초를 치고 앉아 있다. 지훈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쉬이-, 소리를 죽였다.
- “말이 씨가 돼.”
- “걱정돼서 하는 말이잖아. 쟤 표정 봐. 암울함의 끝이야.”
- “네가 말만 안 하면 저럴 일 없어.”
- “김여주 컵 떡볶이 시절부터 봤는데 쟨 맨날 저랬어.”
- “네가 떡볶이를 다 뺏어 먹으니까.”
- “오메야-, 어떻게 알았대? 귀신이여?”
멍하니 만담 꾼들을 보고 있던 무직자는 거실 바닥에 엎어져 발을 동동거리다 슬리퍼를 날렸다. 화장실 문에 처절하게 끼인 한 짝이 꼭 누구 같다. 얘들아 불쌍하지 않니. 마치 나 같지. 점점 미쳐가는 사람에게 보내는 그들의 동정의 눈빛이 달가울 리 없다. A대에 지원한 건 변함 없었지만 그들과 나는 달랐다. 오로지 수능 점수만 반영하는 ‘정시’에 도전한 이 구역의 미친 자가 바로 나였으니까. 공식 수능 성적은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성적표를 받음과 동시에 눈물샘이 터져 교탁을 잡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나 잊고 있었다. A대에 지원한 수두룩 빽빽한 후보자들을 말이다. A대는 역시 A대였다. 이지훈과 부승관 같은 애들이 방 문턱을 넘듯 가는 곳 말이다.
- “일 분 남았어.”
- “타이머 하지 마.”
- “오십 구, 오십 팔…….”
정확히 2시부터 2차 추가 합격 전화가 돈다는 A대의 공지사항이 있었다. 놀다가 받아도 되지 않느냐는 지훈의 말을 가볍게 넘기며 그의 입안에 젤리를 넣었다. 군것질은 하지 않는다던 그가 맛있게도 받아먹는다. 승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속을 게워내는 시늉을 했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반절을 넘겼다. 꼿꼿한 자세가 흐트러지고 이내 널브러지는 시각, 화장실 문에 끼인 슬리퍼 한 짝을 신고 유유히 창밖을 내다본다. 이제야 밀려오는 깊은 깨달음. 나는 왜 A대만 지원했을까. 망할.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 하지만 사실인걸. 이제부터 망여주라고 불러주지 않으련.
- “야야, 전화가 좀 밀렸을 수도 있잖냐.”
- “뭐, 그럴지도.”
- “혹시 입학처 사람들도 밀당을 좋아하나?”
- “솔직히 이건 대답할 가치가 없다.”
침묵만 지키는 휴대폰이 미워 여태 코를 막고 있던 휴지 뭉텅이를 쓰레기통에 던지듯 처박았다. 애들아, 그동안 즐거웠고 오늘부터 재수생이니까 앞으로 연락 끊어줬으면 좋겠다. 치킨 사와도 문 안 열어 줌. 꽉 막힌 콧물을 머금고 1리터 냉수를 단번에 들이켰다. 현실과 도피 사이에서 갈등하는 강제 재수생을 보는 그들의 눈빛을 애써 외면한 채 등을 돌렸다. 그리고…….
- “야! 이거 뭐야!”
- “잠만, 조용히.”
기다림의 연속, 짝을 잃은 슬리퍼, 그리고 3시 정각. 탁자를 흔드는 진동 소리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겹쳐진 세 사람의 손등이 반응한다. 침을 꼴깍 삼키며 두 눈을 깜빡일 때, 지훈이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승관은 다급히 내 팔을 붙들고 속삭였다.
- “내가 받는 게 낫지 않냐?”
- “굳이 왜?”
- “너 감기 걸렸는데 대답하다가 코 막혀서 기절하면 어떡해?”
- “뭐 어떻게, 너부터 기절시켜줘?”
- “사실은 내 목소리가 더 섹시하니까.”
- “승관아, 너는 좀 집에 갈래?”
토라진 승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던 지훈은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고는 입을 뗐다. ‘여보세요 빨리해.’ 벨이 끊길까 염려되는 목소리였다. 이내 버튼을 눌러 귓가에 대기까지, 마침내 낯선 이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음성은 한껏 떨림을 안았다.
- “……네, 김여주 입니다.”
2월의 어느 잔잔한 오후.
난 A 대학교 2차 추가모집 합격자가 되었다.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기회.
푸른 하늘 아래,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Oh My Rainbow
Kiss me hard in the pouring rain
Epilogue.
- “김여주 학생은 오늘도 지각…….”
- “아뇨 교수님! 저 여기요!”
101호 강의실 문을 젖혀 재빠르게 착석한 다람쥐 한 마리가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진다. 반절쯤 뜯은 메론 빵을 우물거리며 새 노트를 꺼낼 즈음, 어디선가 슬그머니 다가와 내 필통을 뒤적거리는 익숙한 손등이 보인다. 중앙에 앙증맞은 호빵맨 스티커도 붙였다. 나잇값을 못하시네요. 검지로 상대방의 스티커를 꾹꾹 누르며 시비를 걸자, 아무렇지 않은 듯 화답하는 내 소꿉친구가 있었다.
- “아니 이게 누구야? 지각이 좌우명이라는 김여주 아니야?”
- “닥쳐 부승관.”
- “여주야,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 “솔직히 교양은 원 큐로 패스하는 거야. 시험도 아니고 출석 때문에 총 맞고 싶냐?”
F 때리고 싶냐는 말을 저리 약 올리듯 말하는 거다. 승관은 교수의 시선을 피해 내 어깨에 총구를 겨누다 방아쇠를 당겼다. 그와 동시에 밤톨 같은 이마를 강타하는 딱 밤 한대. 맞은 곳을 부여잡고 끙끙대던 녀석은 왕 구슬 사이즈만한 눈으로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구라 안 까고 뒈지게 아파. 참으로 좋은 소식이구나. 갚아 줄 테니까 이마 좀. 공부 방해 하지 마. 귀찮은 먼지를 털어내듯,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내게 콧김을 뿜어낸다. 그러더니 내 코, 정 가운데에 호빵맨 스티커를 떡 하니 얹고는 대각선에 앉은 자신의 동기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 “김여주 봐라, 나잇값 못해.”
- “죽는다.”
- “겁먹지 마, 애정 표현이야.”
- “네가 뭔데 정의해.”
- “아, 맞다. 얘 좋다 하는 애도 성깔 장난 아니니까 조심해.”
‘인간 툰트라’라고 들어 봤냐? 승관의 속삭임에 동기는 멋쩍은 웃음을 짓다 등을 돌렸다. 문득 어색한 정적에 궁금한 눈짓을 보내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조용히 귀엣말을 건넸다. 쟤가 아까 너 소개해 달라고 그랬어. 번호 부탁하길래 쌩 깠고, 오늘 이지훈 팔아먹은 건 비밀. 김여주 널 지켰으니 머리 좀 쓰다듬어 달라 칭찬을 바라는 녀석에게 지금 할 수 있는 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 “승관아, 교수님이 너 보고 있어.”
- “알고 있다.”
- “근데 왜 계속 말해?”
- “지기 싫어서.”
맨 뒷줄 빠-마 머리 한 학생, 자네 이름이 뭔가. 교수의 호령에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소꿉친구는 누가 내 동무 아니랄까 봐 쓸데없는 오기가 넘쳐났다.
- “전 부승관이고요. 제 옆은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오늘 지각한 김여주입니다.”
- “야…….”
- “죄송합니다. 조용히 하겠습니다.”
애당초 이지훈만 팔아먹고 싶은 게 아니었다. 물고 늘어지는 건 나날이 늘어가는 녀석이었다.
- “어때, 죽이지 오빠.”
- “내가 다 창피하다.”
- “프린트 안 가져 왔는데 공유 좀.”
- “이미 알고 있어. 그래서 옆에 앉은 거잖아.”
나란히 같은 학교에 들어온 우리 셋. 학과는 다르지만 교양은 학과 구분이 없어 어쩌다 보니 승관과 같은 과목을 듣게 되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 속에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덕에 강제 아싸가 될 뻔했지만, 친화력 하나는 끝내주는 소꿉친구 덕분에 많은 사람을 알게 되고, 또 그 속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만 빼면 말이다.
- “너희 신환회 이번 주냐?”
* 신환회: ‘신입생 환영회’의 줄임말
- “응, 근데 아직 장소 안 정했대.”
- “걱정이다. 이지훈.”
- “왜, 무슨 일 있어?”
- “걔 눈웃음 작살이잖아.”
애들이 그 귀여운 놈을 가만히 놔두겠냐? 억지로 눈꼬리를 휘더니 꽃받침까지 만든다. 봐봐, 이지훈 같냐? 나도 눈웃음으로 조지고 싶은데. 강의실 창을 거울삼아 표정을 그리던 승관은 두볼을 감싸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올해를 강타할 최고의 충격을 교양 시간에 듣게 될 줄은 우리 집 어항 속 새끼 붕어도 몰랐을 거야.
- “하 씨, 갑자기 상상하니까 부끄러워.”
- “또 뭔데.”
- “이쥰 웃으면 애들 붙어서 막 난리 나겠지. 특히 여자 애…….”
- “뭐?! 여자?!”
- “……미친.”
약 이백여 개의 눈동자들이 날 향해 물음표를 던진다. 오늘 지각한 김여주 학생, 질문이라도 있나. 마이크에 침을 튀기며 열강을 하던 교수는 가까이 다가와 안경을 추어올렸다. 우물쭈물하는 모양새가 웃겼는지, 큭큭대던 승관이 손을 번쩍 들었다. 헛소리만 해봐라. 진짜 등에 손자국 내 줄 거야.
- “김여주 학생이 교수님의 ‘인류 문학’에 관심이 아주 많다는데요? 에세이도 한번 써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 “오, 그런가. 그럼 끝나고 내 연구실 한 번 들려주게. 지금은 수업 중이니 깊은 토론은 잠시만 참아주고.”
- “존경합니다. 교수님.”
여주야, 너는 참 좋겠다. 모범생 코스프레는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교수는 수업 시간을 정확히 채우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교수 뒤꽁무니를 따라 도주하려는 주동자의 뒷덜미를 잡아 기나긴 욕을 퍼붓자, 금세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불같은 시선을 피했다. 뭐라고요? 안 들리는데요?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유치한 장난이었다. 본관 건물 로비에서 ‘배고파 송’을 부르며 학식 메뉴를 확인하는 승관을 붙잡아 진지하게 되물었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법한, 누가 봐도 뻔한 장난인 걸 알면서도 확답을 받고 싶은 마음이란.
- “네가 보기에 이지훈이 얼마나 매력적…… 아니, 눈웃음이 그렇게 예뻐? 애들이 막 홀릴 만큼?”
- “볼에 뽀뽀하고 싶을 정도?”
- “야, 그건 나만 할 거거든.”
- “과연 이지훈은 영원히 너만의 것일까.”
- “넌 오늘 나한테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 “급히 고독을 씹고 싶으니 그만 물러가 주겠나.”
절대 자네 손바닥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닐세. 승관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을 확인하며 진중히 중얼거렸다. 이햐, 턱선 봐라. 이것이 바로 스무 살의 전유물. 멋져, 부승관.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이윽고 제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우물거리며 쿨한 안녕을 고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리문은 참 실용적이다. 내 후드 모자 안에 몰래 초콜릿 껍질을 집어넣고 전력 질주하는 소꿉친구의 헛짓거리를 이리 마음껏 볼 수 있으니까.
*
- [이지후뉴ㅠㅠ 어디야?]
- [지금 가는 중]
- [30초 주면 돼?]
- [25초]
- [알아또 10초 ㅠ^ㅠ]
- [근데 왜 자꾸 울어 ㅋㅋ]
- [ㅂ H 구ㅍ ㅏ]
- [거의 다 왔어]
새벽부터 젖어 든 하늘이 새파란 색을 띤다. 채 마르지 못한 빗방울은 건물에 매달려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물기를 머금은 노란 우산이 빙그르르 제자리를 돈다. 어깨에 걸려 풍차 마냥 돌아가는 것을 재미 삼아 바라보다, 저 멀리 뛰어오는 반가운 실루엣에 두 발을 굴렀다.
- “진짜 딱 10초 걸렸다.”
- “비 그쳤는데 우산은 왜.”
- “말리고 싶은데 아직도 젖어 있어.”
- “같이 써, 그럼.”
청명한 하늘에 노란 우산이 빙글거린다. 옅은 갈색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여전한 눈웃음까지.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그것은 교복이 아닌 단정한 사복 차림의 그가 있다는 것.
- “학교에서 사복 입으니까 좀 어색하다.”
- “나 오늘 별로야?”
- “아니, 예뻐.”
- “예뻐는 무슨 의미야?”
- “말 그대로 예쁘다고.”
- “사실 더 듣고 싶어서 일부러 물어봤어.”
습관처럼 자신의 겉옷 끄트머리를 잡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살며시 손을 움켜쥔다. 비 와서 길 미끄럽다. 조심히. 조금 더 가까워진 간격처럼 한 뼘 더 밀착된 마음. 캠퍼스를 걷는 이 순간이 즐겁다. 보고만 있어도 좋다는 말은 아마 그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 “지훈아, 오늘 바빠?”
- “내일부터.”
- “그럼 오늘은 나랑 같이 노는 거 콜?”
- “노는 거 말고 데이트 콜.”
- “그게 그거잖아.”
- “노는 건 친구랑 노는 거고, 데이트는 너랑만 하잖아.”
그가 다정히 맞잡은 손을 흔든다. 그렇게 쳐다보면 얼굴 터질 것 같은데. 상대방보다 먼저 시선을 돌려 아이스크림 가게 간판을 가리켰다. 샤베트 먹을까? 왜 다른 말로 돌려? 아니다, 밥부터 먹을래? 나랑 데이트하는 거 싫어? 쏙 패인 보조개와 예쁜 눈웃음에 우뚝 멈춰선 우산이 옅은 햇살을 받는다.
- “승관이가 아까 그러던데, 네가 웃으면 다른 애들이 되게 예뻐 한대.”
- “어디서 그런 이상한 것만 주워들었어.”
- “그래도 너는 나한테만 예뻐야 해.”
- “뭐가 이렇게 진지해.”
애매한 얼굴로 내 표정을 살피는 그에게 괜히 심술이 났다. 승관의 장난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으니 말이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시도 때도 없이 예쁜 아이에게 제한을 두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었다. 콩콩 심장이 뛴다. 그의 귓바퀴도 울긋불긋한 것을 보아, 뜬금없는 선전포고가 나름 먹힌 듯싶었다. 이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불씨를 지핀다. 맞잡은 손이 깍지가 되고 우산을 접는 타이밍은 이쯤이었다.
- “다른 사람 관심 없고 나는 너.”
……
- “너만 예뻐 해, 나.”
그가 내게 비스듬히 몸을 기댄다. 귀여움을 받고 싶은 고양이가 내 앞에 있다. 둥근 머리를 쓰다듬자 지그시 눈을 감는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젤리 많이 먹어도 좋으니까. 횡단보도 초록 불이 반짝이고 수많은 사람이 우리 곁을 스쳐 갈 때, 그가 우산을 핀 채 내게 진한 입맞춤을 했다.
이지훈.
지훈아.
계속 보고 있어도
계속 불러봐도
항상 그리운 지훈아.
- “나, 너 완전 방울 해.”
*
여주가 발간 볼을 톡톡 두드리며 앞장서서 걷는다. 부자연스러운 발걸음에 짧게 웃음 짓던 지훈도 여주를 닮은 불그스름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닿을 듯 말 듯 그녀를 따라 걷던 그가 멈춰 선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 까닭이었다.
- “바빠, 왜.”
- “뭐야? 누구야?”
- “무슨 말이야.”
- “건너편 오른쪽 봐봐.”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카페 파티오에 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리는 정한이었다. 지훈은 짧게 손을 흔들며 인사부터 전했다.
병원 잘렸네. 데이 오프야. 무단결근 같은데. 솔직히 그게 더 끌리긴 해. 바쁜 스케줄 덕에 연초 하지 못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그들이었다. 정한이 오렌지색 빨대를 잘근 깨물며 익살스럽게 웃는다. 흥미 있는 일을 발견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 “동생-, 지금 내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거든?”
- “관심 없어.”
- “주어 노란색 우산.”
- “……말해.”
시간을 끄는 정한과 달리 지훈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녀 때문이었다. 형, 나중에 통화 해. 지훈의 온 신경은 오로지 자신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여주였다. 크게 손을 흔드는 그를 따라 그녀가 웃는다. 정한의 레이더망이 좁혀지는 순간이었다.
- “그러니까 이것만 말해 봐. 옆에 누구였냐고.”
- “…….”
- “노란색 우산 든 여자 말이야. 멀리서 봐도 예쁘던데.”
봄날의 햇살이 부서진다. 지훈은 습관처럼 머리끝을 매만졌다.
정한이 짧은 대답을 끝으로 멀어지는 지훈의 뒷모습을 보며 밝게 웃는다.
- “여자친구. 내 꺼.”
열이 끓는 그녀를 업고 병원에 가던 날, 흐드러진 벚꽃 옆에서 스러지듯 눈을 감은 그녀에게 느낀 알 수 없던 감정이 있었다. 결국 그 마음이 지금 자신이 품은 것과 같음을 문득 깨달았을 때, 지훈은 말없이 그녀를 향해 두팔을 벌렸다.
단 하나, 자신의 무지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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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즈 본편과 같이 오려고 했으나 사정상 '시즌 1 에필로그'만 먼저 업로드 합니다. 빨리 올게요. 다정한 하루 보내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