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성운아, 나 갔다 올게."
"어디가?"
대학교 동문회라고 불러서 가봐야 돼. 저녁 먼저 먹고 있어. 성운은 그대로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주인의 얼굴을 멀건히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색의 원피스를 입었다. 코트라고는 하는데 저게 이 추운날에 따뜻하기는 하나. 무슨 원피스가 저렇게 짧아. 그녀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천천히 바라보던 성운은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해왔다. 오늘 날씨 춥대, 그렇게 입고 가다가 감기 걸려서 고생하지 말고 바지 입고 가. 감기보다는 예뻐 보이는 게 우선이야. 괜찮아. 부러 힘을 주듯 꺼내는 제 주인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귀여웠다. 아니, 옅게 한 화장부터 입술 위로 립밤을 챙겨바르는 것도 유독 오늘 너무 예뻤다. 예쁘다라는 생각이야 가끔씩 할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대학교 동문회라고 하는 자리에 나간다는 그녀는 오늘따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정말 마음에 안들게시리.
"거기 남자들도 있어?"
"응? 그건 왜?"
"얼른, 대답해 봐. 있어, 없어?"
"당연히 있지. 내가 여대 나온 것도 아닌데 없을리가 있겠어."
아씨, 이럴 줄 알았어. 하필 이 때에 다니엘의 말이 떠오를 건 또 뭐야. 주인 옆에 남자가 있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 금세 뺏기기 일수라고 했는데. 하기야 저는 반은 토끼요, 반은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평범한 인간들은 잘생기기도 잘생기고 꾸미기도 잘 꾸며댔다. 그러니 그녀가 오늘 나간 자리에서 별안간 남자가 생길 수도 있다는 가정을 없앨수가 없었다. 뭔데. 뭔데, 이렇게 불안한 거야. 오늘 안 나가면 안돼? 앞머리를 거칠게 쓸던 성운은 저를 올려다 보는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아챘다.
"뭐야. 왜 갑자기 가지말래. 간만에 친구들도 만나는 자리인데 어떻게 안 가."
"거기 남자 있다며."
"응."
"그래서 싫어, 불안해."
나중에 남자 빼고 여자들끼리 만나. 그러는 편이 너한테도 좋을 걸. 도무지 말도 안되는 것들로 이유를 대는 성운의 말투가 어설펐다. 남자가 있어서 안된다는 게 뭔 소리야. 혹시나 싶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설마 우리 성운이가 질투를 하는 건가, 하는 그러한 생각들이. 처음 성운을 제 품에 안고 들어왔을 때도, 뜬금없이 인간으로 변한 모습에 제가 질겁하고 놀래자 심드렁히 집 밖을 나서는 그를 말리고 같이 살자고 제안한 것도 모두 그녀가 먼저 나서서한 일이었다. 애정으로 따지면 주인의 입장인 자신이 성운을 조금 더 많이 좋아하는 듯해서 이따금씩 서러울 때가 있었는데 그런 그가 질투를 하다니. 생각만 해도 미치게 좋아죽을 것 같았다.
"네가 다른 남자들이랑 있는 거 보면 기분 안 좋아."
"헐."
"왜, 뭐."
세상에나. 천하의 하성운이 질투를 한다. 그것도 고고하기 짝이 없어 처음에 삐죽 나온 제 귀를 만지는 것도 함부로 못하게 한 그 까탈스러운 하성운이 남자들과 있는 자리에 가지 말라고 하다니. 오늘 무슨 날인가. 그녀는 도통 생각해도 믿겨지지 않는 일에 자동으로 벌어진 입을 가까스로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너 뭐야, 질투해? 질투하는 건가요. 하성운씨. 장난기가 가득 서린 말을 내뱉던 그녀는 성운의 코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쑥쓰러울 때면 빨개지는 귀를 보기 위함도 있었고 제 말에 어찌할 줄 모르는 성운의 얼굴도 보고 싶기도 했었으니까.
"응, 나 질투해."
그래, 너 질투…진짜? 반쯤 장난인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답을 해오는 그가 이상했다. 뭐, 그 뿐만 아니라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그녀의 두 볼을 잡아 당기며 콧잔등이 마주할 정도로 가깝게 다가오는 그의 행동에 오히려 놀리려고 했던 당사자인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는 것도 어딘가 이상했다.
"나 질투나서 소파 다 물어 뜯기 전에 가지 마."
"……."
"주인, 대답."
"으응. 아, 알았어."
오늘도 여전히 이 상황에서 승자는 성운의 몫인 듯했다. 숨결 하나까지 모조리 다 느낄 수 있는 거리에서 바라본 성운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원래 이목구비도, 얼굴형도, 피부도, 그냥 하성운 자체가 잘생기고 예쁘다고 생각한 그녀는 제가 키우는 토끼의 뜬금없는 행동을 반칙이라고 여겼다지. 이건 반칙이야. 너무 잘생겼잖아. 짜증나게. 결국 몇 시간을 공들여서 했던 화장은 아무짝에도 쓸 일이 없었고 전날에 고르고 골라서 입은 원피스는 다시 옷장으로 가야만 했었다. 이미 동문회비를 내어버린 채 가지 못하는 게 퍽이나 아쉽기는 했지만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 대신 성운과 맞춰 입은 후드집업과 운동화를 신고 단 둘이서 놀러나가는 게 더 좋았으니 이 정도면 자신이 밑 보는 장사는 아니겠지.
-애들아, 나 오늘 동문회 불참합니다.
-뭐야 왜 못 오는데?
띠링, 하고 울리는 문자 알람에 급하게 답을 쳐내려가던 그녀는 나갈거면 목도리랑 장갑 챙겨서 나와, 추워. 라고 말하는 성운의 말에 급하게 신발을 구겨 신고 있었다.
"장갑 대신 성운이가 손 잡아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너 또 귀찮아서 그러지."
"아니야. 내 진심을 무시하지 말아줄래"
어차피 자신의 말에 져줄거면서 툴툴대기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주머니에 넣던 성운의 귓가가 이 추운 날에도 참으로 붉었단다.
-남자친구가 질투쟁이라서 가지말래. 미안하다 친구들아.
What Does The Fox Say?
W.LIGHTER
"아빠, 그러니까 이게."
"너 남자친구 생겼어?"
"으응?"
만득씨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아까 전, 저기 저 멀대같은 놈이랑 제 딸이 입술을 부비고 있었다. ㅇㅇ가 자취를 한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지만 몇 년 전, 집에 올 때 봤던 황민현인가 하는 그 녀석이랑은 또 다른 얼굴이라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제 딸이 예쁘기도 예쁘고 어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까운 아이이긴 했어도 이렇게나 인기가 많을 줄이야. 자식은 낳아서 밖으로 내보내면 이젠 품을 떠날 때라고 하던데 이젠 정말 놓아줘야 하는 건지 붉게 물든 얼굴을 손으로 가리던 ㅇㅇ를 보던 만득씨의 한숨이 길어져만 갔다.
"황민현인가, 하는 걔랑 헤어지고 힘들다고 하더니 다행이네."
"아니, 아빠 그런 말은 좀…."
"아, 남자친구 앞에서 하기엔 좀 그렇겠구나. 미안해요, 나는 ㅇㅇ 아빠 ㅇ만득이라고 해요."
아저씨, 왜 저한테 존댓말 하세요? ㅇㅇ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다짜고짜 다니엘 앞에서 민현의 이름을 꺼내지 않나, 다니엘은 사람의 모습으로 처음 보는 제 아버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지를 않나. 무슨 외딴섬에서 홀로 고립된 기분 같았다. 저 기억 안나세요? 다니엘이 꽤나 기쁜 얼굴로 그의 두 손을 맞잡으며 크게 손을 흔들어댔다. 와, 이렇게 또 만날 줄이야. 너무 반가워요, 아저씨.
"저기, 날 알고 있나요? 나는 그 쪽 처음 보는데."
"저 예전에 사랑 동물원에서 자란 늑…"
"아니, 아빠 오늘 오느라 힘들었을텐데 무, 물이라도 줄까?"
급하게 다니엘의 입을 틀어막은 ㅇㅇ는 문득 뒷목으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너 아빠한테 늑대다 뭐다, 말 꺼내면 뭐 어떡할려고 그래? 반인반수라고 말이라도 하게? 다니엘의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이던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다니엘의 팔뚝을 잡아 이끌었다. 나 아빠가 준 반찬 정리하고 있을테니까 그동안 너는 우리 아빠랑 아예 말을 섞지마. 왜? 나도 말하고 싶어. 괜히 말 꺼냈다가 곤란한 상황 오면 어떡해. 그냥 말을 하지마, 절대. 식탁 끄트머리에서 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제 뜻을 말한 ㅇㅇ의 말에 다니엘의 금세라도 서운한 얼굴을 내비쳤다.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인데 말도 하지 말라니. ㅇㅇ야, 너무했어. 물론 세상에 제가 늑대와 인간의 모습이 섞여 있다는 걸 말한다면 흔쾌히 받아들여줄 사람이 몇 없다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지만 못내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ㅇㅇ랑 사귀는 사이에요?"
"네, 네?"
"이렇게 우리 딸이랑 같이 사는 거 보니까 오래 사귄 것 같은데."
결혼 생각은 있어요? 나는 다른 거 다 필요없고 우리 ㅇㅇ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수 있는 놈이면 그걸로 되는데. 분명 ㅇㅇ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 먼저 말씀을 꺼내신 건 아저씨란 말이야. 문득 다니엘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수 있다면 진지하게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는 만득씨의 말에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별안간 주먹을 꽉 쥐었다. 인간들이 말하는 결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저 같이 살을 부대끼고 산다는 식의 말만 들었을 뿐, 인터넷에서는 결혼을 한 걸 후회한다. 하지 말아라. 그런 서글픈 이유들을 들었다지만 다니엘은 그 심오한 사정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것보다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는 게 결혼에 대한 조건이라면 남들에게 비할데 없이 자신이 있었다.
"네. 저는 간이고 쓸개고 온 몸에 있는 장기들까지 ㅇㅇ한테 다 줄 수 있어요."
다니엘은 소파에 앉아 있는 만득씨 밑에서 무릎까지 꿇은 채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애초에 ㅇㅇ를 많이 사랑했다. 그녀가 없으면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데 이까짓 장기들이 있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인 ㅇ만득씨를 보는 그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기만 했다. 둘은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부엌에서 자꾸만 거실로 눈길을 두던 ㅇㅇ는 지금 저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반찬을 냉장고에 넣는지, 냉동실에 넣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아주 좋은 마음가짐을 가졌네."
만득씨는 처음 다니엘에게 결혼에 대해서 말을 꺼냈을 때는 농담식의 어조가 다분했었다. 자신의 딸의 나이가 점차 먹어감에 따라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의 수익도 좋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그녀와의 맞선을 기다리고 있는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제 딸의 나이와는 별개로 자신의 딸이 환갑이 다 되어가도 제 품에서 키울 수만 있다면 그러겠노라 다짐도 했었다. 괜히 이상한 놈 만나서 고생 하느니, 어여쁘기만 한 ㅇㅇ를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보게 된 남자는 제 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제 딸이 없으면 자신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나 꺼내고 있으니 그는 매우 당혹스러울 법도 했다. 그저 다른 놈들처럼 장난식으로 하는 것도 아닌 저 다부진 얼굴을 보면 장난치지 말라는 말도 건넬 수가 없었으니까.
"이름이 뭐라고 했지?"
"어, 음. 다,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그냥 다니엘인가? 성은 따로 없고?"
ㅇㅇ가 제게 성을 붙여준 적은 없었다. 다니엘, 다니엘. 이렇게 부르기는 했어도 인간들이 짓는 이름처럼 뚜렷하게 성을 가지고 있을리는 없었다. 지금의 다니엘이란 이름도 그저 그녀가 붙여준 하나의 애칭 같은 것이었으니까. 외국에 살다가 왔나 보구만. 이름도 썩 외국 이름 같은 걸 보면. 뭐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선 다니엘이 멀뚱멀뚱 바닥만 바라보고 있자 제 어깨를 잡아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외국에 살다 온 건 아닌데요…."
"아버지랑 어머니는 무얼 하시는데?"
"아버지랑 어머니는 현재 없습니다. 어렸을 때 헤어져서."
이걸 어쩌지. 다니엘은 아까 전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 미간만 가득 찌푸리고 있었다. 늑대는 무리에서 이탈되면 끝이었다. 가족이라고 챙겨주는 것조차 만무했기 때문에 동물원을 나온 기점으로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디에서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젠 성체의 늑대인 그가 스스로 무리를 생성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생사를 쫓아다니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본래 늑대는 그랬다. 당연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단순히 말을 하면 할수록 ㅇㅇ에게 혼날 것들만 걱정하고 있었는데 만득씨는 무엇 때문인지 아련한 얼굴로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이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도 없이 힘들게 살았나보네."
"아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원래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고생도 많이 했을텐데 이렇게 잘 커줘서 내가 다 고맙구만."
만득씨의 손이 다니엘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정작 때아닌 위로를 받고 있는 입장인 다니엘은 그녀의 아버지가 왜 자신을 이렇게나 슬프게 바라보는지, 저를 보고 자꾸만 대견하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제 어깨죽지를 쓰다듬어주는 손은 꼭 ㅇㅇ와 비슷해서 예전 제 턱 밑을 긁어주던 그 때의 손길처럼 세월이 지났어도 따뜻하기만 했다. 아, 그래. 그럼 강다니엘은 어떤가 그래. 다니엘이란 이름이랑 잘 어울리는 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니엘의 눈동자가 깜박, 깜박 하고 딱 세 번을 감았다 떴을 때 그에겐 이제 다른 인간들처럼 제법 사람다운 이름을 갖게 되었더랬다. ㅇㅇ가 다니엘, 제게 이름을 지어주더니 지금은 그녀의 아버지가 제게 성이란 것을 지어주었다. 본의 아니게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그가 한동안 온 사이트를 뒤져가며 찾던 이름은 이로써 완벽한 태를 갖추었다.
"너무 좋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강다니엘, 강다니엘. 같은 반인반수의 처지인 성운에게도 하씨라는 성이 있었는데 그동안 저는 그런 것을 가져보지도 못했다. 그래서일까, 별 것도 아닌 이름 네 글자를 만족스럽게 여러번 되뇌이던 다니엘은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그리고 한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ㅇㅇ가 얘기했던 무서운 세상 속에서 언제나 저를 감싸주고 돌봐주었던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인 만득씨가 있어서 꽤 괜찮았던 사랑 동물원에서의 생활처럼 지금의 자신도 여전히 그들로 인해 살아가는 이유를 배운 듯했다. 그리고 올라간 입꼬리를 따라 살풋 접힌 다니엘의 눈가를 바라보던 만득씨는 왠지 모르게 동물원을 운영했던 그 옛날의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 같았더랬지.
"아빠는 무슨 반찬을 저렇게 많이 갖고 왔어. 나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하는데."
"이제 혼자사는 것도 아니고 강서방까지 같이 사는데 꼬박꼬박 챙겨먹어."
"강서방? 강서방이 누군데?"
"누구긴 누구야. 다니엘이지. 너는 미리 네 남자친구 상황 좀 알았으면 아빠한테 말해주지."
내가 괜한 실수를 한 것 같잖니. 미안해요, 강서방. 사근사근한 말투로 다니엘에게 말을 하던 만득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 딸의 집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워낙 제 아내가 일에 치여서 바쁘게 살아가는지라 줄곧 살림은 신혼 때부터 지금의 30년이 흐르기까지 만득씨가 담당을 해왔었다. 그래서 몇 번 ㅇㅇ의 집에 올라올 때마다 집안을 치워주는 것도, 밥을 챙겨주는 것도, 다 그가 책임을 졌었는데 어느새 본 그녀의 집이 다른 때와 달리 깨끗하기만 했다. 집이 간만에 깨끗하네? 아빠 온다고 청소했어?
"아니, 다니엘이 매번 해줘서 그래."
"강서방이? 정말 보면 볼수록 진국이네 사람이."
"아, 정말 그만하고 이제 그만 가. 엄마가 기다리겠다."
맞다, 오늘 네 엄마가 간장게장 먹고 싶다고 했는데. 그제야 시계를 보던 만득씨는 부랴부랴 제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하고 있던 동물원을 쉬고 있다고 해도 여기저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 하느라 아버지는 항상 고생만 하고 살았다. ㅇㅇ가 그의 삶을 이해하기도 훨씬 전부터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제 하나 있는 딸을 걱정하고 사느라 그마저 남는 생도 온통 근심 뿐일 것이다. ㅇㅇ는 딸의 집에 올 때면 짐을 한꾸러미씩 싸갖고 오는 그의 손을 매만지다가 저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품에 코 끝이 찡한 것이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밥 잘 챙겨먹고 어디 아픈데 있으면 꼭 전화하고 알았지? 또 혼자서 맘고생하지 말고. 자주 보고 살면 좋을텐데 우리 예쁜 딸 아빠, 엄마 좀 보러 와줘. 웃는 만득씨의 눈가를 따라 접히는 주름이 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알았어, 이번에 설날 때 한 번 찾아갈게.
"그리고 우리 강서방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게나. 나중에 한 번 맛있는 밥 해줄게."
"아, 네!"
"아저씨가 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니까 설날에 ㅇㅇ랑 같이 놀러와요."
만득씨는 다니엘이 마음에 꼭 들었다. ㅇㅇ의 뒤에 서있던 다니엘까지 한 번 안아주는 행동도 그랬고 웬만해선 남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않는 그가 손수 밥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한 것만 해도 그랬다. 저번에 본 민현이라는 놈인가, 그 놈보다 훨씬 덩치도 남자다운 듯했다. 그러면서도 제 딸을 배려하는 태도들이나 아버지인 자신을 보는 눈빛이나 꽤 흡족했다. 무엇보다 차마 입으로 꺼낼 수는 없었지만 예전에 ㅇㅇ를 잘 따르고 저 또한 예뻐했던 늑대 한 마리가 생각나는 것이 이리보나, 저리보나 ㅇㅇ와 잘 어울리는 짝이 될 것만 같은 아주 좋은 예감이 들었더랬다. 그럼 난 이만 갈게요. 잘 지내, 강서방.
"너 그 이름은 뭐야? 강다니엘?"
"응, 아저씨가 지어주셨어. 네가 지어준 다니엘이란 이름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아버지가 나가고 나서 쾅, 하고 닫힌 현관문을 이번엔 잊지 않고 잠그던 ㅇㅇ의 어깨가 다니엘에게 고스란히 안겨 있었다. 괜히 우리 아빠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 다니엘이란 이름도 너가 바꾸고 싶으면 바꿔도 돼. 싫어. 신발장의 문턱을 넘어서 거실로 들어오는 내내 그녀의 뒤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다니엘은 칭얼거리는 말투로 ㅇㅇ의 어깨에 제 얼굴을 기대왔다. 나는 이 이름이 좋아. 안 바꿀거야. 이름이라는 건 신기한 것이었다. 그저 맹수 중 하나인 늑대로 태어난 그는 제게 ㅇㅇ가 이름을 붙여주던 때부터 그 자신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었다. 최소한 자신이 세상에 사라지는 날이 오면 그 이름을 그리워해줄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ㅇㅇ의 귓가에 입을 맞춰오던 그는 금세 제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다시금 파고들었다. ㅇㅇ야, 근데 있잖아.
"이참에 우리도 도어락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럼 굳이 우리가 열고 닫을 필요도 없는데. 제 주인에게 꽤나 현실적인 조언까지 덧붙여 가면서 말이다.
*
"ㅇ대리님은 안 나오셨나봐요?"
"아, 그게 요즘 몸이 좋지 않아서 오늘 먼저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민현은 거래처 얘기로 한경물산에서 회사를 방문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약간의 불편함과 설렘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시 만나자고 한 이래로 요근래 보지 못했던 터라 이렇게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도 했었다. 겨우 이렇게 일거리를 이용해야만 자신을 만나주는 ㅇㅇ가 밉기도 미웠고 이런 상황에 처한 우리들의 처지도 좋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 너를 보게 되면 내가 했던 말에 대해서 짧은 대답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했었는데. 그동안 연초부터 바쁘게 휘몰아치는 회사일로 인해 많은 곳을 다니고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 보고 싶은 건 그녀가 전부였던지라 민현의 낯이 어둡기만 했다.
"그러면 이렇게 거래를 한 의미가 없는데."
"네?"
"아,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ㅇㅇ는 많이 아픈가요?"
이맘때에 다 걸리는 감기라고 하던데. 테이블 위에 놓인 앞으로의 거래에 대한 서류들조차 훑어보지 않은 민현의 입에선 또다시 본래 의미와 다르게 그녀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이깟 거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민현이 대표라는 자리까지 기를 쓰고 올라온 이유도 ㅇㅇ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제법 난다, 긴다하는 기업 총수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식인 민현은 어디를 가나 낙하산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건 나이가 들어도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해도 결국 집안의 몫으로 돌아갔고 못할 때에도 그러면 그렇지, 라는 질책만 그를 따라다녔으니. 그래서 일에 치여서 하루가 고통스러워도 제 스스로 회사를 세우고 책임질 수 있는 지금에 와서야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겠다 했는데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이냐, 재수없게.
"ㅇ대리랑 많이 친하신가봐요?"
그러니 그녀의 안부를 묻는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는 것처럼 넌지시 물어오는 과장의 말의 의도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제가 이런 대답을 하는 건 합당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ㅇㅇ와 떨어진 시간 내내 오로지 그녀만을 원했고 그리워했다. 다시 만나자고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제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가는 지 그녀는 알아야 했다. 어느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으며 먼저 부탁을 한 적도 없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쉬운 것이라고는 그녀 하나밖에 없는 민현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느린 템포로 울리기 시작했다.
"친하다기 보다는 예전에 사귀었다가 헤어진 사이에요."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한 회의실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자연스레 턱을 매만지던 민현의 내리깔은 눈이 나긋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와 맞췄던 반지는 여전히 제 왼손 약지를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빼고 나면 허전하기만 했고 반지가 빠진 자리엔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흔적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ㅇㅇ야. 우리의 사랑도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고. 서로가 없어진 자리가 허전하고 그리워서 결국엔 우리 둘이 아니면 안되는, 그런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제가 다시 붙잡을려고 이 거래를 진행하는 거고요."
민현의 셔츠 위로 곱게 매어져 있던 넥타이가 순식간에 헝크러졌다.
"단 한순간도 저는 ㅇㅇ를 잊은 적이 없거든요."
What Does The Fox Say?
Episode 10, fin
미래의 장인어른을 뵙는 댕댕이 다니엘의 잔망스러운 모먼트라고나 할까...8^8
♥♥♥♥♥♥♥예쁜 댓글 달아주시는 우리 독자님들 오늘 강서방 꿈꾸길 바래요♥♥♥♥♥♥♥
#암호닉 신청은 최신화에서 해주세요#
암호닉 신청 모두 모두 감사해용 |
[레피], [참새랑], [감], [본싱어], [댕구르르], [폭스], [강캉캉], [강낭], [뷔밀병기], [222], [오호라], [루지], [버들], [오월], [달다리], [17], [마요], [밍찌], [사용불가], [킹갓], [메이], [후렌치후라이], [방귀대왕뿡뿡이], [어이엄슴], [페브리즈], [민트향], [₩침수₩], [뿜뿜이], [옹뀨], [동동], [미녀], [모찌], [37], [폴리], [마이옹], [알파고놉], [강심장], [달빛소리], [lia], [내독자], [정수기], [강낭콩], [이화], [폴리], [요정], [옹스더], [퓨어], [몽몽이], [엿기], [@불가사리], [센터], [거울기], [롱롱], [뀰], [아이사1210], [담소], [달린], [즈쿠로], [포도], [주인], [호랑], [소듕한피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