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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74 >
생각이 많아졌다. 그 날, 정국은 내게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그 대가는 그 사람의 목숨이었다고. 애초에 그 사람은 그렇게 사고로 죽을 운명이었다고 재차 강조했다. 항상 대가로 사람의 목숨을 가져 가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답했다. 그래도 악마와의 계약이잖아. 말 그대로 악마와 거래를 하는 건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때 그랬지. 나는 계약을 두 번이나 맺은 인간이라고. 우리가 전에 한 계약은 대체 뭐야. 기억이 없으니 더 두렵다. 우리는 과거에 어떤 사이였고 우리가 한 거래는 뭘까. 네가 날 짝사랑했다는 얘기는 또 뭐고. 정국이 들어온 순간부터 단순하게만 흘러가던 인생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잘 풀리던 실뭉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멋대로 꼬여서는 단단히 엉켜 다시 돌아오질 않는다.
물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 몇 번 물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만났고 무슨 사이인지. 우리가 맺은 계약은 무엇인지. 내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직접 기억해내야해. 그게 조건이야.”
조건, 대가, 거래, 계약. 전부 짜증난다. 진짜. 난 단순한걸 최고로 치는 사람인데. 샤프로 연습장에 마구 낙서를 했다. 외워야할 게 산더미인데 전정국 생각에 도통 집중이 되질 않는다. 이번 학기도 학점은 글렀나. 솔직히 악마를 만났는데 일상생활이 어떻게 되겠어. 그러기엔 내 주변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내 이 복잡한 내면을 빼고 내 인생의 지분을 차지하는 것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여전히 평화로웠다.
앞으로 봐야할 책 페이지를 가늠해보았다. 정떨어지게 생긴 두껍고 무거운 이 전공책은 나에게 빅엿을 선사해주셨다. 도서관에 앉은 지 세시간이 지났는데 거짓말 안하고 한 페이지도 줄어든 것 같지가 않다.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뭘 이렇게 많이도 배운 거야. 정작 머리에 든 건 하나도 없는데. 짜증이 나서 아무렇게나 선을 직직 그어대는데 샤프심이 부러졌다. 얘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주 부서 지냐. 온 우주가 내 공부를 막기 위해 힘쓰는 것 같다. 밤늦게까지 도서관의 공기인데도 숨을 막히게 하는 텁텁한 기체 덩이를 들이마시고 있으려니 몸도 안 좋은 것 같다. 피곤해. 샤프를 책상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대충 책에 형광펜을 그어둔 부분만 눈으로 살폈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눈을 감고 꾸벅꾸벅 몇 번을 졸던 끝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
도서관 밖으로 나와 맞는 밤공기는 나름대로 시원했다. 초여름 밤은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더운, 그냥 적당했다. 수학, 과학에만 관심을 쏟아 부어 공부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건 딱 이 정도다. 적당하다는 거. 길게 공기를 들이마신 다음 한 번에 토해냈다. 이제 좀 머리가 맑아졌으려나. 이대로 다시 공부하러 들어가기엔 좀 더 쉬고 싶은 마음에 공부한다고 꺼두었던 핸드폰을 켰다. 카톡 답장이나 좀 하고 다시 들어가야지. 핸드폰에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문자 알림 소리가 요란히도 울렸다. 기분 탓인지 날카롭게 들리는 알림음에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무슨 문자가 이렇게나 많이 와. 부재중 전화도 몇 통씩이나 와 있었다. 해킹이라도 당했나? 스팸?
어디야.
어디냐고.
미쳤어? 시간이 몇 시인데.
당장 집으로 와.
뭐해 대체.
어디 있어.
답해.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아?
빨리 와.
어디 있는 건데.
무슨 일이야.
답장 좀 해.
전화도 안 받고.
미친. 석진 오빠의 번호로 온 문자들이었지만 딱 봐도 전정국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전정국이잖아. 이렇게 늦도록 집에 안 들어간 적이 없어서 보낸 모양이었다. 얘는 걱정이 되면 걱정된다고 할 것이지 이건 뭐 싸움 거는 말투라고 봐도 위화감이 전혀 없다. 덕분에 석진 오빠가 아니라 전정국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집에 들어오기만 해봐. 묶어버릴 거야.
지금 날아온 이 문자는 좀 많이 무섭네. 묶긴 뭘 묶어둬. 악마라서 이해는 했다만 그걸 떠나서 전정국은 확실히 정신적으로 아픈 게 맞다. 병원 보내야해. 악마한테도 치료나 약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마는.
어디 있냐고.
휴대폰 너머에서 녀석의 신경질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음성지원도 되네. 신기해.
피하는 거야?
내가 아직도 무서워?
자기가 무서워서 집에 안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나. 돌이켜보면 내가 녀석에게 전처럼 살갑게 대하기 어려워 대화를 나누어도 짧게 끝냈고 요 며칠 간 먼저 말을 거는 건 녀석이었다. 정국의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막상 그를 마주하면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게 힘들기 때문이었다. 집에 좀 늦게 들어간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그래도 내가 좀 심했나.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생각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김석진. 그러니까 전정국이 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음에도 정국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하더니 막상 받으니까 아무 말도 없는 건 무슨 의미야.
“전정국?”
정국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말이 없기에 혹시 내가 받자마자 전화가 끊겼나 싶어 귀에서 핸드폰을 떼려는데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딱 들어도 몹시 화가 난 음성이었다.
- 미쳤어?
“응?”
-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까지 안 들어와.
“미안.”
- 무슨 일 생겼어?
“그냥, 공부한다고.”
- 전화를 하면 좀 받던가. 그게 아니면 문자 답장이라도 하던가.
정국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화를 삭이려는 듯 말을 마친 후 무거운 호흡을 뱉어내는 소리도 들렸다.
- 내가 무서워서 안 들어오는 거야?
“아냐. 공부하느라 그랬어. 지금 가.
- 빨리 들어와. 짜증나.
녀석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공부하다가 늦게 들어가는 건데 이건 뭐 술 마시다가 늦게 들어가서 엄마한테 혼나는 기분이다. 전정국은 엄마라기보다는... 음, 얘는 나한테 뭘까. 우리는 뭐지. 정국을 정의내릴 수 있는 단어가 없다. 남자친구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하다못해 옆집 이웃도 아니고. 동거를 한 다기엔 우리가 활동하는 시간은 철저히 다르다. 나는 낮, 정국은 밤. 그렇다고 집에서 마주치는 시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복잡하다. 실타래는 풀리기는 커녕 더 꼬이기만 한다.
***
정국이 빨리 오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집에 가는 골목에 있는 편의점 한 번 들린다고 해서 한 시간이 더 걸리는 것도 아니고 고작 몇 분인데. 솔직하게 나는 참새로서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면서 배는 엄청 고팠다. 내 장기들 중에 가장 열일하시는 분이 바로 위다. 허기짐을 못 이긴 나는 과자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음료수도 좀 사고. 집에 계신 짜증만 내시는 분은 또 인간들 음식이라면서 안 먹으려나. 취향을 알 수 없으니 내 입맛대로 사서 계산을 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뭐든 새벽에 먹는 음식이 최고지.
과자를 먹을 생각에 들떠서 과자를 담은 봉투를 앞뒤로 흔들면서 걸었다. 실은 고작 몇 분이긴 하지만 기다릴 전정국이 조금, 아주 조금 무섭기도 해서 빨리 걷다가 뛰다가 막 그랬다. 녀석에게 무섭다는 느낌을 받는 게 자존심 상하긴 했지만 걔는 악마잖아. 인간이 악마한테 무서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거다. 오늘도 자기합리화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집으로 향하는데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그림자가 없는. 전정국이었다.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은 멀리서 봐도 자신이 화가 났음을 여기저기에 표출하고 있었다. 날 바라보는 것보다는 노려보는 것에 가까웠고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몸을 풀고 있었다. 저 미친놈이 몸을 왜 풀어. 녀석에게서 나는 뼈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환청이겠지. 괜히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 와중에 흐릿하게 빛을 내던 가로등이 점멸하더니 이내 아주 꺼져버려 무서움이 더해졌다.
원래 늦은 시각, 어두운 길을 걸어도 무서움 하나 못 느끼는 나였는데 녀석의 존재는 그것보다 더한 모양이었다. 저만치에 있는 녀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 내가 녀석의 눈치를 보는 걸 알아챈 듯 녀석이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주 빠르게. 망했어. 좀 전까지만 해도 멀었던 우리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져 정국이 바로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정국이 내게 오는 순간 자동반사적으로 두 손을 모으며 내가 말했다.
“잘못했어!”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내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내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인해. 그러니까, 녀석이 나를 덥석 끌어안은 것이었다. 정국이 자신의 품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힘을 써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녀석은 더 세게 날 끌어당겼다. 내 손에 들린 봉지는 언제 들고 간 건지 정국의 손에 들려 있었다.
“눈치가 없는 거야. 바보인 거야.”
녀석이 내 머리 위에서 낮게 말했다. 정국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자신의 앞에 시선을 둔 채로 정국은 내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간이 얼마나 크면 이 시간에 가로등도 다 꺼진 길을 겁도 없이 신명나게 뛰어와.”
아까 내가 과자봉지를 들고 신나서 뛰었던 걸 말하나 보다. 너가 빨리 오래서 그런 거잖아.
“내가 앞에서 기다렸잖아.”
녀석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안았던 팔에 힘을 살짝 풀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를 보던 정국이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이제 녀석에게서 짜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서웠던 느낌 역시 사라졌다. 이상하게 따뜻했다. 따뜻하고 편안한. 그런 느낌. 지금까지 정국에게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따스함이 전해졌다.
“내가 기다리고 있을 때는.”
이상하다. 뭐지.
“천천히 와도 괜찮아.”
그가 다시 나를 품에 안았다. 이번에는 나도 그를 꽉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아~!!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