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8 [호의]
“ 백현이 졸려잉. ”
“ 기대지말라고. 무겁다고.”
나와 같이 캠퍼스를 걷고있는 변백현은 쉴새없이 졸리단 말을 하며 자꾸 내게 엉겨댔다. 3월 중순. 봄이 다가오면서 몸도 같이 녹는지 나도 졸린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와 변백현은 다음 강의를 듣기전 2시간동안 도서관 멀티존에서 잠을 청하기로 결정했다. 멀티존 좌석표를 뽑고 소파에 앉아 바로 쿠션에 머리를 박았다. 변백현은 곧 코를 도롱도롱 골았고 난 목이 말라 지갑을 챙겨 잠시 휴게실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때 휴게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김준면이 눈에 들어왔다. 난 얼른 음료수 두개를 산 뒤 김준면에게 다가갔다.
“ 형. ”
“ 어? 경수야. ”
나를 보고 밝게 웃던 김준면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듯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다시 웃어보였다. 아마 나한테서 나는 향수냄새때문이겠지. 요즘엔 일부러 그 향수만 뿌리고 다닌다. 김준면에게 각인되기위해서. 이 아찔아찔한 외줄타기를 좀 더 짜릿하게 만들기 위해 김준면에게 일부러 흘리고 다니는 나만의 힌트랄까. 하지만 김준면은 내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는지 내게 대놓고 물어보진않았다. 그냥 혼자 속에서만 삭히는 모양이다.
“ 음료수 드세요.”
“ 마침 목 말랐었는데. 고마워, 경수야. 혼자 온거야? ”
“ 아뇨. 백현이는 멀티존에서 자고 있어요. 근데 왜 여기서 공부하세요? 조용한 열람실 있잖아요.”
“ 친구 기다리는 중이야. 그리고 열람실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답답하더라구. 여기가 편해.”
“ 아아, 그렇구나.”
난 캔 입구를 따며 김준면의 목덜미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밴드가 붙혀져있는걸보니 잘 지워지지않는 모양이다. 하긴. 내가 얼마나 정성들여만든 키스마크인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김준면이 손으로 밴드를 만지작거린다.
“ 자,잘 안 없어지더라.”
“ 처음이에요? ”
“ 뭐,뭐가? ”
“ 키스마크요.”
“ 어어, 그, 처,처음이지. ”
내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했는지 어쩔줄을 몰라한다. 존나 귀여운게 다시 김준면의 입술과 몸을 탐하고 싶어진다. 클럽이나 가자고 할까. 아마 이제 트라우마때문에 클럽이라면 까무러치겠지. 김준면이 너무 어쩔 줄 몰라하길래 선심쓰듯 대화주제를 바꿨다.
“ 저희 다다음주가 엠티맞죠? ”
“ 응. 다다음주 목금토. 1학년들 전공이 거의 다 목금에 몰려있다고 좋아하더라. 백현이는 엠티간다고 들었는데 경수도 엠티 가지?”
변백현이 가자고 졸라대서 가기로 했지만 난 잠시 머리를 굴린 뒤 '신청은 했는데 그냥 안 가려고요'하고 대답했다.
“ 안 간다고? 왜? 엠티 재밌는데….”
“ 조금… 불편해서요.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있는 것도 그렇고… 엠티조도 선배님들이랑 같이 섞여있잖아요. ”
“ 응. 후배랑 선배랑 거의 골고루 섞어놨지…. 경수, 그게 불편해서그래?”
“ 조금은요.”
“ 흐음…잠시만, 신청은 했다고 했지? ”
“ 네. ”
김준면이 가방에서 화일철을 꺼내더니 여러장의 종이를 꺼냈다. 종이 상단엔 < 학과 엠티 1조~10조 구성원 명단> 이란 문구가 큼지막한 매직으로 쓰여져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야. 김준면은 착해빠졌어. 어쩜 내가 원하는대로 저렇게 잘 따라줄까. 내 이름을 찾는듯이 종이를 뒤적거리던 김준면은 중간쯤에 있던 종이와 마지막에 있던 종이를 꺼냈다.
“ 경수가 6조고 나랑 백현이가 10조네. ”
다행히 나와 변백현은 떨어져있었다. 만약 같은 조에 있었다면 모르는 사람들이랑 있는 게 불편하다는 내 핑계가 물거품이 되버릴 뻔 했다. 김준면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 원래 권력남용이 진짜 안 좋은건데. ”
필통에서 매직을 꺼낸 김준면이 조 구성원을 바꾸기시작했다. 10조에 있던 신입생이 6조로 가게되었고 내가 10조로 가게 됐다.
“ 어때? 백현이도 있고 나도 있고. 이러면 마음이 좀 놓이지? 엠티 가는거다? ”
“ 안 그러셔도 되는데…”
“ 엠티는 가야지. 그래야 사람들이랑도 친해지고 그러는거야. 형이 도와줄게 너무 걱정하지마. 그리고 이건 비밀.”
김준면이 종이를 톡톡 치더니 가방 안에 다시 집어넣으며 싱긋 웃어보였다. 제 발로 내 늪에 빠지는 것도 모른채말이다.
“ 형. ”
“ 응, 왜? ”
“ 형은 참 착해요.”
가끔보면 멍청할 정도로.
“ 그래서 내가 참 좋아하죠, 형을.”
“ 나도 경수같은 착한 동생이 있어서 참 좋아. ”
“ 그래요? ”
흥, 조용히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편하게 등을 기댔다. 착하다고? 내가? 아마 니 주변에서 제일 못되먹은 애는 나일 것 같은데. 김준면은 여전히 엠티에 관한 얘기만 줄줄 늘어놓았다.
“ 아,참. 그리고 우리 장기자랑도 준비해야해.”
“ 장기자랑이요?”
“ 응. 각 조마다 장기자랑 하나씩.”
“ 재밌겠네요.”
“ 원래 재작년까지는 각 조에서 남자 한 명 뽑아서 여장대회를 했는데 없앴어. 너무 선정적이고 남자애들만 고생을 해서. 근데 웃긴건 작년에 엠티를 갔더니 여장 시키지도 않았는데 장기자랑에 다들 여장을 하고 나왔더라구.”
“ 그럼 이번에도 여장을 해야겠네요? ”
“ 모르지. 하는 애들도 있고, 아닌 애들도 있고. 아마 거의 하겠지? 상품이 달려있으니까. 아, 맞다. 상품이 뭐냐면,”
난 김준면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채 생각에 빠졌다.
또 한번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다.
*
잠시후
episode.9 [장기자랑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