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민] rainbow sherbet #4
w. 조이
한 여인이 친한 친구 몇몇 그리고 항상 친동생처럼 친했던 이웃동생과 함께 산장으로 여름여행을 떠난다. 산장 옆 작은 계곡에서 놀던 중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깊은 곳까지 내려와 버리고 만다. 소리도 치지 못한 채 겨우 허우적대고 있는데, 그런 그녀 앞에 어떤 남자가 나타난다. 정신을 잃은 그녀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곡을 횡단해 물속에서 건져내고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 산장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여자는 잠시 스쳐보았던 남자를 잊지 못한다. 결국 산장 주인인 친구에게 부탁해 남자를 찾게 되는데 그는 뱀파이어였다.
그녀는 그를 향해 산을 내려와 세상으로 나가자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젓는다. 오래전 사랑하는 여인을 아프게 한 슬픔과 또 다시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며칠 동안이나 소식이 없는 여자에 이웃동생이 그녀를 찾게 되고 결국 산장에 있는 여자를 찾아와 말한다. 위험한 뱀파이어를 사랑하느니 너를 십년 넘게 사랑해 온 나를 보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뱀파이어 또한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위협을 해보지만 여자는 그의 마음을 감싸고 어루만져 결국 둘은 사랑하게 된다는.
뭐.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지만 결국은 다 사랑얘기였다. 뱀파이어와 인간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는 지난 몇 년 간 수도 없이 작품으로 다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기가 좋았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말이다.
스토리 중 민석이 맡게 된 역할은 여주인공을 사랑한 옆집동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에서야 그 역할에 대해 무언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얻게 된 이 역할이 저의 연기경력과 현재 인지도에 비해 턱도 없이 과분한 자리라는 것이었다. 민석은 계속해서 밀려오는 그 찝찝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려고 다분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집중이 되지가 않았다. 결국 그는 첫 리딩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그제서야 민석은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다. 제 앞에 세워진 루한은 아까부터 계속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는 꼴도 보기 싫다더니.”
루한이 이죽거리며 복도 벽에 기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석은 일단 제 할 말부터 꺼내놓았다.
“그쪽이 한 거죠?”
“뭔 말이래. 알아듣게 얘기해야지.”
루한이 눈을 이리저리 허공으로 굴려댔다. 민석은 그런 루한을 보며 그를 향해 쏘아 붙이듯이 말했다. 이거 캐스팅, 다 그쪽이 꾸민 짓 아니냐구요. 글쎄.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루한은 급기야 손톱 끝을 문지르다가 그것을 후후 불며 말했다. 아무리 추궁을 해도 나오지 않는 답에 민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다. 민석은 그게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뒷받침할 근거는 있었다. 그것은 저번에 루한이 저를 향해 했던 그 싸가지 없는 말 한마디였다.
“언젠 토크쇼든 드라마든 다 꽂아주겠다면서요?”
“응 그랬지.”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말에 민석은 한번 들어보자는 듯 팔짱을 꼈다.
“근데 내가 영화판에는 연고가 없어서 말이지. 이것 봐 나 신인배우야. 어디 신인이 캐스팅을 손대? 그리고 나 아까 엄청 깨지는 거 못 봤냐?”
루한이 양팔을 벌려보였다.
참 오래살고 볼 일이지. 이 루한이 머리를 다 조아리고 말이야.
그 말에 민석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믿기 싫었지만 현재 루한이 하고 있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일인 연극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나치게 과장된 표정과 격앙된 말투에 감독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것을 알아챈 작가가 쉬는 시간 루한에게 다가가 살짝 조언을 해보았지만 다음에 나온 것은 평소 그의 건방지고 무신경한 말투였다. 물론 끝에 가서는 조금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엉망인 실력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심지어 데뷔 7개월 차인 신인 여배우의 얼토당토 않은 대본리딩을 굉장한 실력자의 것으로 느끼게 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말 다 한 것이었다.
‘좀 그렇긴 하더라. 내가 뱀파이어하고 몇 번 촬영해 봤는데 말야. 아무리 처음이라도 다들 저 정돈 아니었어.’
민석이 작게 속삭이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여주인공의 동기친구로 배역을 맡게 된 어느 조연 남배우의 목소리였다. 작은 소리로 떠들던 그는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오는 루한을 보며 뜨끔 놀라 입을 다물어 버렸었다. 가만히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배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남자 배우들이 그랬다.
그때 루한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민석은 그가 방금까지 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를 다 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곧 사람들을 향해 화사하게 웃던 그 입술이 아주 약간 비대칭으로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왜 루한이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다르게 유독 연기를 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루한의 주위 사람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갖고 싶은 것 모두 가져버리고. 그런 자가 남의 비위를 맞춘다든가 누군가의 앞에서 연기를 해본 적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루한 형! 루한이 형!”
순간 어떤 목소리가 복도를 온통 메웠다. 올려다 본 루한은 언제부턴가 제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아. 나 오늘 또 인터뷰가 있어서 말이야. 그만 가봐야..”
“이 자식 또 어디 간 거야!”
뭐? 이 자식?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던 루한이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지은 그가 복도 코너 너머를 향해 소리쳤다.
“니 자식 여기 있다! 월급인상은 개뿔!”
헉. 형! 어디에요 어디서 다 들은 거야. 아니 내가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고. 아니 그나저나 우리 늦었어요! 빨리 가야..!
“흥. 뭐 아무튼 이만 갈게.”
루한이 코트 깃을 탁 세우더니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아참. 그러더니 갑자기 민석의 머리 위로 툭 손바닥을 올렸다. 민석은 루한의 손길에 그를 쳐다보다가 곧 눈을 세모꼴로 치켜뜰 수 밖에 없었다.
“괜한 사람 의심하지 마. 꼬맹아.”
민석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자 루한은 피식 한번 웃으며 그의 머리를 이리저리 흐트렸다. 자기는 약속도 지켰고 그런 비겁한 짓 따위 안 한다며 그는 게다가 정말로 이게 내가 한 짓이라면.
“너 나랑 만날 거야?”
“네?”
“어 형! 여기 있었어요? 지금 늦었어요. 빨리빨리!”
복도 끝 코너에서 어떤 남자가 나타나 발을 동동 굴려댔다.
민석은 미간을 확 찌푸리고 있었다. 루한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속으로 작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맞겠지. 난 정말 연락 안 했으니까. 그날 민석의 집 앞에 갔던 이후로 정말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루한이었다. 물론 손이 근질거려서 몇 번이고 폰을 들었다 놓긴 했었다. 그럴 때마다 괜히 옆에 있던 얘꿎은 매니저의 뒤통수만 한 번씩 불이 났었다.
“그런 거 아니면 생사람 잡지 말라고.”
루한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기며 매니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주체하지 못한 웃음이 살짝 루한의 얼굴 위로 드러났다. 형 빨리요. 지금 전화 오고 막 난린데..! 쯧 호들갑은. 아야! 루한이 이번엔 그의 머리에 주먹을 쥐어박았다.
“그래서 어디 인터뷴데?”
“아씨.. 그게 에스매거진이라고.”
매니저가 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잡으며 말했다. 루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들어 목 뒤로 깍지를 꼈다.
“아 그럼 천천히 가지 뭐. 거기 편집장 나 엄청 좋아하잖냐.”
참 나. 다 늙어빠진 아줌마가.
루한이 어깨를 한번 들썩이며 말했다. 난 젊은 애들 밖에 취급 안하는데. 향 좋은 애면 더 좋고.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사선으로 약간 돌렸다. 코너 너머로 짧게 민석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졌다. 민석은 아랫입술이 삐쭉 튀어나온 채 고개를 앞으로 숙여 제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마 제가 원하는 답을 못 얻어서 그렇겠지. 머리를 앞으로 쓸어내리던 모습이 꼭 세수하는 햄스터 같아 루한은 피식 조금 웃어버렸다. 귀엽네.
‘향도 좋고.’
루한이 민석에게서 흘러나오던 향을 떠올렸다. 달콤하면서도 싱그럽던 향. 아직도 열이 좀 남았는지 체온을 탄 그 향기가 참 짙게도 느껴졌다. 대본리딩을 하는 내내 방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물론 민석의 집 앞에서 때보다야 훨씬 나았지만 말이다.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재촉하는 매니저에 루한은 은근히 발을 더 빠르게 놀리며 생각했다. 어째 조심성이 하나도 없다고. 게다가 너무나도 순진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까칠한 게 딱 생긴 대로 논다고 말이다.
보드랍고 작은 새끼고양이. 딸랑이로 유혹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작은 쥐돌이 인형을 선물해 주는 게 좋을까. 그러다 루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을 고쳐 잡았다. 아니. 일단은 그를 제 앞으로 유인해내는 게 우선이었다.
*
하얀 입김이 눈앞에서 부서졌다. 그것은 채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뿌옇게 차오르고 있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고 숨이 차올라 민석은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왔다. 잠시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다시 들어 올려 진 눈꺼풀 아래로 주위 풍경이 다시 어렴풋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뭐해!”
갑자기 몸이 홱 앞으로 쏠려 상체가 앞으로 쏟아지려 했다. 민석은 발을 움직여 다시 균형을 잡았다. 누군가 자신의 팔을 꽉 붙들어 매고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민석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자각할 수 있었다.
“저기 저기다!”
“아씨.”
시끄러운 함성소리 밑으로 루한의 목소리가 깔렸다. 순간 다시 민석의 팔이 쑥 잡아당겨졌고 그는 그 손에 이끌려 또 길거리를 이리저리 내달리기 시작했다. 건물 틈 사이로 숨는다는 게 그만 어떤 여자의 눈에 딱 띠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민석이 잠시 꾸물거리던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민석은 길을 달리면서 멍하니 앞의 갈색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고개를 뒤로 돌리며 자신을 확인하는 루한의 얼굴에 민석은 어째서 자신이 루한과 함께 이런 한낮의 추격전을 벌이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냈다. 모든 것은 오늘 아침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루한씨 대본 연습 좀 도와줘요. 그때 봤죠? 너무 엉망이라서 이러다 영화 완전히 말아먹겠어. 연기수업도 극구 마다하고. 하아 민석씨 나 살려주는 셈치고. 응 해 줄 거죠?’
그것은 이번에 촬영하기로 한 영화의 작가에게서 직접 걸려온 거였다.
오늘은 스케줄도 없으니 혼자 캐릭터 분석이라도 할까 생각했던 민석은 순간 당황하여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제가 그렇게 경력이 많지 않아서요.
하지만 거절은 불가능했다.
‘첫날 보니까 둘이 아는 사이 같던데. 아 물론 대화내용은 못 들었어. 잠시 지나가다가 봤거든요.’
반말과 높임말이 이리저리 뒤섞인 말은 이미 부탁을 넘어선 무언의 지시였다. 민석은 할 수 없이 알겠다는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절망적인 기분 속에서 그는 이마를 몇 번 손바닥으로 쓸었다. 전화를 끊고 폰을 다시 책상에 놓으려는데 순간 액정 위로 작은 메세지 창이 떠올랐다.
- 들었지?
민석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었다. 굳이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어떤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루한 오빠!!”
귀가 째질 듯한 음성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루한은 또 다시 저를 이끌고 작은 골목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어 오빠! 날카로운 목소리가 시내를 온통 메워 심지어 저 높은 공기까지 울려대고 있었다.
이러면 이렇다고 말을 해 주던가! 민석은 속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일단은 루한과 단둘이 만나야 한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집으로 오라던 루한의 말에 질색을 하며 잡았던 약속장소가 이런 사태를 낳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카페 한구석에 앉아 잠깐 상대만 해주고 끝내려 했던 그의 계획은 그렇게 한순간에 완전히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시내 한복판이 완전히 어지럽혀 있었고 그는 루한과 함께 그 안을 이리저리 들쑤셨다. 그럴수록 더 많은 인파가 그들 주위를 둘러싸 이제는 사방이 루한을 노리는 팬들과 구경꾼들도 가득 차 있었다.
“김민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민석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손을 놓은 루한이 또 다른 골목 입구 앞에서 그를 향해 빠르게 손짓했다. 민석은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뒤에서 큰 발걸음 소리들이 저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들어간 골목은 매우 좁았다. 그리고 길지 않았다. 루한은 이미 골목을 지나 반대편으로 완전히 빠져나간 듯 싶었다. 골목을 반쯤 지나가던 민석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많은 사람들이 미처 저를 보지 못한 채 계속해서 큰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저기다!”
민석은 급하게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눈들이 저를 향해 돌아봤고 순간 다리가 풀려 잠시 휘청였지만 그래도 그는 다시 힘주어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다. 여러 명의 여자들이 좁은 골목을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민석이 마침내 골목 끝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환한 빛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들었다. 겨울 한낮의 햇살이 그의 시야를 순간 하얗게 만들었다. 민석은 눈을 찔끔 감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띵 해진 머리에 잠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쳐졌다. 그때 차가운 손길이 옆에서 나타나 민석의 허리를 휘감았다. 민석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훅 딸려나가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읍!”
비명을 지르려던 입술이 완전히 가로막혔다. 숨이 튀어나오다가 다시 뜨거운 입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민석은 발버둥을 치려다 이내 몸을 굳혔다. 눈앞을 가득 채운 어두운 천막 밖으로 둔탁한 발걸음 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씨. 어디 간 거야!”
“분명 여기로 나갔는데..”
쉬잇.
코끝이 시려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간지럽게 내려앉았다. 민석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전히 차가운 손아귀가 그의 붉어진 입가를 틀어막고 있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거칠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상당부분 숨소리도 함께 섞여 나왔다. 그러나 민석은 그게 루한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귀 끝을 스치던 그 숨이 언젠가처럼 뜨겁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항상 거칠기만 한 언실 속에 어딘가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히는 특유의 음색은 그대로 남아있던 탓이었다.
민석은 침을 한번 목 뒤로 삼켰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고 등 뒤로 맞닿은 루한의 감촉에만 온통 신경이 가있었다. 말도 안 되지만 그는 어쩐지 심장 소리가 들은 것 같았다. 민석은 자신도 모르는 새 큰 눈을 굴리며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 저기 아냐?”
“어디!”
“왜 저기 왼쪽 끝에 저 빨간 간판 지나서!”
어 진짜! 루한 오빠!! 잠시만요 저기 저..
또 다시 구두 군단의 발소리가 바닥을 시끄럽게 울렸다. 천막 뒤의 시끄럽던 고함소리들도 점점 멀어져 갔다. 그제야 민석은 눈꺼풀을 내려 감았다. 눈을 감는 것조차 잊어버린 시간이었다. 둥그렇게 떠져있던 눈은 어느샌가 뻑뻑하게 메말라 있었다. 다시 눈을 뜨는 순간 등 뒤의 인기척이 훅 떨어져 나갔다. 입을 가로막던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민석은 그제야 온몸을 바닥 위로 축 늘어뜨렸다. 차가운 돌바닥 위로 무릎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
“하아... 아씨 힘들어 죽겠네.”
등 위로 루한의 한숨 섞인 말투가 들려왔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민석은 그런 루한을 돌아다 보았다. 그도 저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몸을 맡긴 채 가슴을 오르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조용해진 주위로 검은 천막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가득 들어찼다.
민석이 무슨 말을 하려다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숨이 자꾸 목구멍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이내 그는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뭐예요?”
뭘 말이야? 루한이 여전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아까 그 여자들 말이에요.”
“아 몰라. 꼭 여기만 오면 그래.”
이래서 잘 안 오는데. 민석은 인상을 한번 찌푸렸다. 연예인은 저쪽이 아닌데. 왠지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럼 이렇다고 말을 하던 가요!”
“니가 먼저 끊었거든? 그럼 전화라도 받던가!”
“아 깜박하고 놔두고 나왔다구요!”
루한의 성화에 민석이 질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둘은 오늘 아침의 통화내용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제 그 두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마주보고 앉았다.
“하참. 왜 맨날 나보고 뭐라 해. 애초에 우리 집에 왔으면 이럴 일도 없잖아.”
그건 절대 싫거든요? 민석의 말에 루한이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민석의 입장에선 당연한 거였다. 그 치욕스러운 순간을 같은 장소 같은 인물과 함께 있으라니. 민석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루한이 미간에 잔뜩 주름을 지으며 말했다.
“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고 연락도 안 되고. 저번엔 연락도 하지 말라하고. 너 혹시 나 싫어하냐?”
“하. 그걸 말이라고 해요?”
민석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루한 앞에서는 제 속마음을 하나도 숨기지 않은 채 그대로 모두 말하고 있었다. 그래? 난 니가 날 싫어하는지까진 몰랐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마음을 숨기고 돌려 말하고 할 것도 없이 민석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루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한은 뒤이어 말했다.
“다들 나 좋다고 난린데.”
“전 싫은데요?”
흥. 루한이 콧방귀를 꼈다. 민석은 여전히 안면근육을 굳히고 있었다. 루한은 잠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짧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일부러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려 보였다.
“진짜로 싫어?”
“네.”
정말?
눈을 길게 한번 끔벅였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반질한 눈동자. 검고 물기어린 동공이 눈 앞의 민석을 한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붉게 물들어버린 눈가와 코끝.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을 보며 민석은 말했다.
“이젠 안 속아요.”
“쳇.”
다시 한 번 눈을 깜박이자 어느새 루한은 원래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손깍지를 껴 뒤통수에 가져다대는 루한을 보며 민석은 애써 부글거리는 속을 잠재웠다.
그나저나 이게 다 뭐야. 천장을 바라보던 루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제야 민석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온통 검은 장막이 내려앉은 듯한 내부와 작고 낮은 테이블. 몇 개의 간이의자는 그곳이 포장마차 내부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다만 좀 다른 게 있다면 벽면에 붙여진 몇 개의 그림들이었다.
눈코입이 그려진 노란 태양.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채 물구나무를 서구 있는 남자. 그리고 누런 황금빛 의자에 앉아있는 왕인 듯 한 한 남자.
“타롯가겐가.”
민석이 짥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가요. 언제까지 거기 앉아 있을 거예요. 퉁명스러운 말투에 루한이 민석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어 가야지 근데.. 잠시 뜸을 들이는 그에 천막 밖을 살피던 민석이 그를 뒤돌아봤다.
“잡아줘.”
“네에?”
“아 오랜만에 달렸더니 허리가 아파. 못 일어나겠으니까 잡아달라고.”
손까지 앞으로 뻗는 루한을 보며 민석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루한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일자로 다물며 천막을 위로 걷어냈다.
“야야! 너 나 놔두고 가냐! 야 김민석!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누구긴 누구야! 연기도 못하면서 주연자리 꿰찬 잘나신 방송인 때문이지. 속으로 생각한 민석이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천막 밖으로 발을 뻗으려는 순간 그는 다시 몸을 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여기 허리 아파 못 일어나는 루.한.이 있네! 여기가 어디냐며언!!!”
“아 알겠다구요! 자 여기 손.”
민석은 인상을 찌푸린 채 루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루한은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런 민석의 손을 잡았다. 엉덩이를 살짝 바닥 위에서 떼 낸 순간 장난스런 표정이 그의 얼굴 위를 스쳐갔다. 으앗! 민석이 큰 소리를 내며 앞으로 넘어졌다. 시원한 공기가 그의 코 속을 침범했다.
“뭐야.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이래놓고 날 잡아준다고? 웃음 섞인 목소리에 민석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품에 완전히 안겨버린 자세였다. 민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두 손이 그의 허리를 꽉 부여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거 안 되겠네.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어야.”
그러다 루한은 민석을 향해 짖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 너 먹어달라고.. 아야! 쓰읍!”
민석이 루한의 이마에 세게 제 머리를 박았다. 루한은 순간 별이 보이는 기분에 민석을 잡은 손을 탁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 안 그래도 주위도 깜깜한테 별 완전 잘 보이네. 그래도 장난스럽게 말하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민석이 루한의 정강이를 발로 뻥 차버렸다.
“악! ...야 너..!”
민석은 다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떠는 루한을 한번 흘겨보곤 이내 먼저 천막을 빠져 나왔다. 안에 혼자 남은 루한이 장난이었다고 아 이제 진짜 못 일어나겠다고 징징대는 소리가 들렸다. 흥. 민석은 그저 짧게 콧방귀를 뀌며 그곳을 벗어났다. 어느새 조용해진 거리는 쿵쿵거리는 민석의 발걸음 소리만 가득 들려왔다.
*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 진다는 말. 세월이 흐르면 추억이 된다는 말. 나한텐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더라. 어쩌면 내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시간이니 세월이니 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다 무의미한 것들이니까. 그래서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 영원을 이렇게 보내. 해일같이 몰려드는 그것들을 매일 감당해 가면서 말이야. 너는 이런 나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키스.”
“지문은 읽지 말라구요.”
아 키스도 안 돼요. 민석이 루한의 얼굴을 죽 밀어내며 말했다.
“왜. 너 나 도와주기로 했잖아.”
그리고 키스는 너가 해줘야 하는 거. 루한의 손가락이 앞을 가리켰다. 상대 여배우 역할을 맡아주고 있는 민석을 향한 것이었다. 저기 루한 씨. 우리 지금 대본연습 중이거든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연기는 나중에 현장에서 하세요.”
“실전은 연습처럼. 연습은 실천처럼 해야 한다던데.”
“…….”
민석은 또 한 번 저를 향해 움직이는 얼굴을 보며 이번엔 두 팔로 그를 힘껏 밀어냈다. 루한은 할 수 없이 몸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 진짜 빡빡하네.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눈언저리를 몇 번 문질렀다. 이젠 표정도 안 먹히고. 입술이 뚱 하니 튀어나왔다. 울먹거리던 얼굴이 더 이상 민석에겐 통하지 않았다.
물론 키스 따위야 억지로 할 수도 있었다.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뱀파이어와 인간이라는 어떤 약육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상대를 향해 나는 너의 포식자라는 인식을 상기시켜 준다면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쉽고 간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루한의 입장에서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잠시 관자놀이를 누르는 동안 문득 앞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손을 내리자 이미 민석의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눈을 조금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민석이 서 있었다.
“뭐 해?”
목말라서요. 민석은 짧게 대꾸하며 다시 제 할 일을 했다. 그는 선반 위에서 컵 두 개를 꺼내고 있었다. 루한은 잠시 턱을 괴고 그 뒷모습을 보다가 손끝으로 식탁을 몇번 두드렸다. 한참을 돌아오지 않는 민석에 심심해진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깔끔하네.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아이보리색 벽지로 도배된 집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온통 원목으로 몰딩된 구석이며 적갈색의 마루바닥이 깔려있는 저의 집에 비해 너무 단조롭다 싶을 정도로 심심한 컨셉이었다. 가구들 또한 각이 딱딱 떨어지는 모양새라 루한은 그게 참 민석의 성격과 너무도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날 시내에서의 한바탕 소동 이후 더 이상 밖에서 만난다거나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게 우리 집에서 하자니까 라던 루한의 말은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럼 저의 회사라던가 아니면 영화 제작사 측 건물 안에서 방을 하나 빌리자고 했던 민석의 제안엔 루한이 극구 사양을 했었다. 왜냐하면.
‘이런 저런 짓을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결국 고집 센 두 남자의 마지막 타협점은 부모님께서 다 일을 나가시고 없는 한낮의 민석의 집이었다. 외동이라 낮 중에는 아무도 집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한은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혼자 남아 매일 오디션 정보를 찾고 있었을 민석을 떠올렸다. 그것은 지금 저가 앉아있는 식탁 맞은 편 쪽에 있는 방안에서 이루어졌다. 잔상처럼 보이는 것에 루한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시무룩한 표정의 민석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부엌 안에서 민석이 부시럭거리며 무엇을 만지는 소리만 들렸다.
그때 루한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루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민석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언저리에 곱게 접혀있던 그것을 루한이 한손으로 끝을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길다란 것이 주르륵 풀리며 바닥끝에 닿일 듯 길게 늘어졌다. 다섯 개의 눈꽃. 루한은 끄트머리에 그려진 눈꽃그림을 보며 그것이 제가 처음 민석을 접했던 그 목도리였다는 걸 확신했다.
루한은 늘어진 목도리를 한 손으로 마저 들어올렸다. 얼굴 앞에 가로로 들어차는 것은 여전히도 강한 시트러스 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그를 자극하는 건 당연히도 매일 민석이 이용하는 그의 침대 시트였다. 루한은 온통 민석의 향으로 가득찬 방을 둘러보며 숨을 크게 들여 마셨다. 루한의 표정이 마치 마약을 한 듯 완전히 풀어지고 있었다. 숨과 함께 섞여 들어간 향기에 루한은 답지 않게 가슴이 설레는 느낌을 받았다.
“야 이거 나 주면 안 돼?”
루한은 방안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손 안에는 여전히 베이지색 실 목도리를 손에 쥔 채였다. 민석이 루한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컵에 물을 따르고 있던 커피포트가 컵 언저리를 잡고 있던 손 위로 자리를 옮겼다.
“아!”
손등 위에 닿는 뜨거운 기운에 민석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어느새 다가온 루한이 그런 민석의 손을 맞잡았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민석이 순간 그 손을 떨쳐내려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너무 놀라 숨을 크게 들이마셔졌다.
분명 방금 전만해도 제 방 앞에 서있던 얼굴이 지금은 바로 저의 눈앞에 서있었다. 민석이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그런 루한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인상을 찡그린 표정의 그는 민석의 손등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민석의 앞머리가 아직도 바람을 맞은 듯 크게 휘날렸다. 루한은 잠시 민석의 얼굴을 확인하려다 그제야 그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약간의 능력을 사용했다는 걸 깨달았다. 뱀파이어 특유의 능력 말이다. 루한이 자신도 모르는 새 손에 힘을 주자 민석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낮게 신음했다.
“아. 여기 손.”
루한이 깜짝 놀라며 급히 민석의 손을 개수대 안으로 잡아당겼다. 수도꼭지를 열자 차가운 물이 콸콸 흘러나왔다. 투명한 물이 루한과 민석의 손을 함께 감쌌다. 민석의 작은 손등이 벌써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피부 위를 문지르던 루한이 나머지 한손도 뻗어 민석의 손을 쥐었다. 루한이 민석을 한품에 쏙 안은 듯한 포즈였다. 그러나 루한은 알지 못한 듯 싶었다. 다만 민석만 자꾸 괜찮냐고 물어오는 귓가의 목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아픈 건 손등인데 자꾸만 신경이 딴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그는 지금 개수대 안에서 콸콸 쏟아져 내리는 이 차가운 물보다 자신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루한의 두 손이 더 차갑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석은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한참을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었다.
엎질러진 커피 포트 옆에 얼마 전 루한이 광고를 찍었던 커피의 일회용 인스턴트 스틱이 두 개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것이 그 브랜드였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두 사람은 다시 식탁 앞에 앉아 대사연습을 이어갔다.
“진짜 키스 안 돼?”
“…….”
“된다고?”
“안 된다구요.”
이럴 거면 집에 가세요. 민석이 대본을 탁 닫으며 말했다. 약간 분홍색으로 물든 손등이 다행히 크게 데이진 않은 것 않은 것 같았다. 알았어. 루한이 입을 부루퉁하니 내밀며 말했다.
“진짜 빡빡하게 구네.”
그에 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한을 억지로 일으켰다. 아 알았어. 방금 말 취소할게! 우리 대본 연습만 하자.
“이번 리딩 때는 쪽 팔리기 싫단 말이야.”
루한이 큰 소리로 말하자 민석은 그제야 그의 팔을 놓았다. 그럼 내일 오세요. 벌써 늦었어요. 민석이 시계를 가리켰다. 벌써 일곱 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별로 늦은 것도 아닌데. 루한은 입을 조금 비죽였지만 그래도 민석의 말을 듣기로 했다. 외투를 입던 루한이 갑자기 민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나 내일 촬영 있어.”
“그럼 모레 오시던가요.”
“생각해보니 내일 촬영 빨리 마치는 날이야.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오면 되겠네.”
민석은 이제 포기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루한은 정말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민석의 집을 찾아왔다.
세 번째 날에 민석은 결국 루한에게 제 목도리를 내주고 말았다. 올 때마다 달라고 떼를 쓰는 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재수 없어서 안 하기도 했고.
민석이 이런 생각을 하는 진 꿈에도 모른 채 루한은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자신의 침대 협탁 한켠에 그 목도리를 놓아두며 루한은 매일 밤, 잠에 들기 전 민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틱틱대지만 마음이 여려 결국은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는 아이. 다만 너무 단호하단 말이지. 루한이 작게 중얼거리며 몸을 똑바로 뉘였다. 짙은 고동색의 침대헤드 위로 갈색 머리카락 조금씩 닿이고 있었다. 그리고 루한은 웃었다.
“내가 몇 년을 살았는데 연기 하나 못 할까.”
물론 생전 처음 보는 대본은 생소한 것이었지만 연기 자체는 그닥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몇 백 년 동안 제 존재를 숨기며 살기 위해서는 연기따위야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저절로 익혀지는 것이었다. 그래도 연기 못하는 척하는 연기도 꽤나 재밌다며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중간중간 다 같이 하는 대본리딩 때의 조금씩 나아지는 연기도 꽤 재미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루한은 민석과의 리딩연습을 계속 이어갔다. 물론 민석은 그런 루한의 속을 하나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들의 인연이 어느새 삼 주째를 지나가고 있었다.
[루민] rainbow sherbet #4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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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이입니다
이런걸 겹경사라고 하나요ㅠㅠ
경사까진 아니지만 이사를 하게 돼
바빠진 조이입니다ㅠㅠ
오늘은 루민이들 불맠도 없고
그냥 꽁냥꽁냥해대고 끝나버렸네요
꽁냥이래봤자 루한이가 일방적으로
계속 들이대는 거 밖에 없지만 말이에요
죄송한 마음으로 찾아뵙습니다
>> 풀님! 쿨바나나우유님!
얼룩말님! 아이크림님! 체리밤님! 시우밍님! 빌라빔님! 자물쇠님!
몽블랑님! 리큐르님! 시나몬님! 꿀단지님! 첸첸님! 오모오모님! 실삔님!
온토끼님!
암호닉 독자님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러다 다 떠나가시겠어요ㅠㅠ
그럼 보다 더 빠른 후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다음편에서 봬요~